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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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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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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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DUMMY

심문 결과 여긴 이세계가 확실했다.


무슨 국가 이름이나 지명들도 죄다 처음 듣거나 생소한 것들이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김치, 심지어는 검성 김검수도 모르더라.


혹시나 하늘을 나는 고래에 대해서도 물어 봤는데 고래가 뭔지도 모르고.


언어도 무슨 대륙 공용어를 사용한다는데 대체 어떻게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구사할 수 있는진 모르겠다.


한국어를 쓸 순 있지만 집중해서 의식해야 가능하고 무의식적으론 전부 대륙 공용어가 튀어 나가는 느낌.


한국어가 제2 외국어가 된 느낌이랄까. 원래의 몸 주인인 델리시아의 영향인가?


아, 약탈자 놈은 얼마 안 가 죽어 버렸다.


살려달라느니 자긴 약탈자가 아니라느니 거동이 불편한 노모가 자기만 기다리고 있다느니 횡설수설 헛소리 할 때마다 찔러줬더니 심문이 끝날 즈음엔 움직이지 않더라고.


어차피 죽일 놈이었기에 차라리 잘됐다.


약탈자는 사람이라기 보단 몬스터나 마물에 가까운 존재니까.


그래도 죽기전에 꽤 쓸 만한 정보들을 뽑을 수 있었다. 주로 이곳 1층 던전에 대한 정보와 약탈자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비슷한 개잡놈들이 몇 파티 더 있다라...'


어쩌면 또 다른 약탈자들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젠 탐나는 장비와 물자까지 있으니 놈들 눈엔 한 마리의 황금 고블린 처럼 보일 터.


공포에 질린 소녀 연기를 통한 기습도 더 이상은 무리다.


무기를 들고 있으니까.


성인 남성도 칼에 찔리면 죽는 건 똑같다. 재수 없으면 스치기만 해도 감염따위로 허무하게 죽곤 하는 게 인간이다.


그러니 무기를 들고 있다면 오히려 더욱 경계하며 확실히 죽이거나 제압하려 들 것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무기를 얻어서 마음은 훨씬 편해졌다.


날길이 60cm쯤 되는 아밍소드 하나, 날길이 40cm쯤 되는 글라디우스를 닮은 검 하나. 그냥 글라디우스라고 하자.


다만 이놈들이 숫돌을 안 가지고 다니는 만큼 관리가 잘되거나 질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무슨 조막만 한 식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뼈는 무리여도 힘과 속도만 충분하면 인간과 고블린의 근육 정도야 어렵지 않게 베어낼 수 있으니까.


몽둥이는 버리기로 했다. 칼이야 스쳐도 피부를 가르고 살을 찢어놓을 수 있지만 몽둥이는 힘이 실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델리시아의 힘으로는 몽둥이를 제대로 쓰기 어려운 것도 있고...


사실 검을 들고 정확한 자세에 힘을 실어 휘두르는 것도 조금 무리가 있는 체격이다.


검도장에 가면 괜히 손목 단련 위주로 죽어라 시키는 게 아니다.


이 가녀린 손목과 오밀조밀한 손의 악력으론 검을 잡아도 불안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밖에 건량, 육포, 물주머니, 가죽 배낭, 모포, 후드케이프, 소드벨트, 총 7개의 은화 등이 나왔고 가장 상태가 좋은 것들로만 챙겨넣었다.


어이가 없는 건 무슨 인간의 귀나 손가락 같은 게 놈들의 배낭 속에 한두 개씩은 있었다는 거다.


이 미친 새끼들. 사람 신체는 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냐?


역시 약탈자 새끼들은 이해가 불가능한 족속이다.


아, 굴러다니던 감자들은 월슨을 제외하곤 잘 모아서 바구니에 넣어 놨다.


정말 혹시나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으니까.


월슨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줬다.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다른 감자들처럼 평범하게 대할 순 없지.


밖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심어 주마.


"아아, 델리시아. 일어났니?"


마지막으로 델리시아를 한번 불러봤으나 다시 잠들었는지 묵묵부답이다.


심문이 끝나고 한 번씩 불러봤는데 여전히 대답은 없다.


지금껏 델리시아가 대답했던 타이밍을 보면 뭔가 중요한순간에만 깨어나는 것 같기도하고? 잘 모르겠다.


"그래 언제든 일어나면 말 좀 해주고. 서로 궁금한 게 아주 많을 거아냐."


델리시아도 델리시아지만 사실 나도 문제다.


나는 영혼? 정신만 이쪽으로 건너와 빙의 한건가?


그럼 내 원래 몸은 어찌 된 걸까.


당장은... 백날 천날 고민해도 알 수 없겠지. 결국 어떻게든 나아가야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제대로 싸웠으니 휴식과 영양 보충도 잊지 않았다.


챙기고 남은 건량과 육포를 좀 먹어 봤는데 정말 쓰레기 같은 맛이라 물로 입을 씻어 버렸다.


"뭔 육포를 고블린으로 만들었나 진짜."


근데 물맛마저 아주 텁텁하고 무슨 치과냄새 같은 게 너무 강하게 나서 그냥 감자나 씹어먹었다. 살균제 같은 걸 왕창 넣기라도 한 건지.


지금 입고 있는 누더기 같은 옷도 버리고 약탈자들의 옷으로 갈아입을까 하다 관뒀다.


사이즈도 안 맞을 뿐 더러 냄새도 장난 아니다. 피에 절은 건 덤이고.


이 새끼들에게 과연 빨래와 세탁이라는 개념이 있긴 할까? 중세랜드에 대한 마음속 평가가 한 단계 떨어졌다.


그래서 그냥 구멍 숭숭 뚫리고 여기저기 찢긴 힙한 옷을 그대로 입기로 했다.


그나마 후드케이프는 최근에 구매한 건지 상태가 괜찮아서 그걸 둘렀다.


좀 헐렁하지만 오히려 상반신을 다 덮어 줘서 마음에 든다. 빅빅사이즈 후드티를 입은 기분.


딸랑 식칼 하나만 있었을 때랑 비교하니 개과천선 수준이다.


검과 배낭, 후드케이프까지 있으니 제대로 된 모험가 태가 확 난달까.


약탈자의 턱에 박혀 있던 식칼도 잊지 않고 챙겼다.


이쪽 세계에서 사용한 최초의 무기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결국 식칼 덕에 여기까지 나름 수월하게 왔으니 개국공신겸 행운부적 삼도록 하자.


"근데 확실히 몸 상태가 평범하진 않은 거 같은데."


처음 깨어났을 때의 몸 상태는 분명 당장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중상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고 고통이 어찌나 심하던지 반사적으로 신음성을 내고 말았을 정도.


그런데 갑자기 고통이 줄어들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뭔진 몰라도 이를 악물고 고블린들을 전부 죽일 수 있었고 어느새 모든 상처와 고통이 사라져 있었지.


그때 느껴진 감각은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몸속에서 부드럽게 차오르며 날 감싸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그때보단 덜하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다.


이게 대체 뭘까?


정말 무슨 게임 속 레벨업의 효과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델리시아의 능력?


"아! 그래 그거. '그거' 확인해 봐야지."


이세계에서 이걸 잊고 있었다니... 오타쿠 실격이다.


나는 '그거'를 확인해 보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좋아. 아무도 없군. 흠흠.


그럼... 진짜 한다.


"상태창."


한동안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적막이 나를 감쌌다.


“상태창..! 스탯..! 스태이터스..! 능력치..! 인벤토리! 장비창! 시스템! 특전!”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몹시 부끄러워졌을 뿐이다.


“시발...”


분명 그 누구도 내 추태를 목격하지 못했지만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달아올랐다.


나도 하고 싶진 않았다..!


정말 혹시나 해 확인해 본것뿐이라고..!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후우..."


고개를 흔들어 날 매도하던 심마를 털어 버렸다.


그래도 여기가 어떤 게임 속 세계는 아닌 것 같다는 정보를 얻지 않았나. 그 정도면 됐다.


지식이 늘었다...


다시는, 살아 생전 상태창을 입에 담지 않으리.


나는 부끄러움을 털어내기 위해 일부러 힘차게 움직였다.


운이 좋다면 금방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던전 1층, 고블린 구역에서 나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으니까.


'정예 몬스터를 처치하면 꽤 높은 확률로 귀환석을 준다 했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보스는 어지간한 베테랑 파티가 아니고서야 도전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정예 몬스터를 노릴 거다.


1층 던전은 굉장히 넓은 여러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 구역을 대표하는 고블린, 슬라임, 스켈레톤 같은 하급 몬스터들로 나뉜다고 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고블린 구역이고 정예몬스터로는 홉 고블린이 나온다.


고블린 구역의 정예는 보통 정예방이란 곳에서 나오고 정예를 처치하면 꽤 높은 확률로 잠시간 출구 포탈을 열어 주는 소모성 아이템인 귀환석을 준다고.


대체 이런 석재 구조물로 이루어진 던전에 왜 고블린들이 튀어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정예방이란 곳을 찾아보기로 하자.


나는 횃불을 하나 챙겨 들고 통로를 걸었다.


정예방은 꽤 빈번하게 나오고 문에 조금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어쩐지 약탈자 놈들이 물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진 않더라니.'


탈출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무거운 물을 많이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무슨 축복 받은 분수대 같은 곳에서 물을 얻기라도 하는 줄.


1층은 그런 식으로 탈출이 용이한만큼 난이도도 낮기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리고 그 초짜들을 털어먹는 게 되려 더 쏠쏠하다 보니 약탈이 성행하는 것이다.


어쨌든 통로를 돌아다니던 고블린들을 족치기도하고 방 몇 개를 털다 보니 확실히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이한 문양이라더니 그냥 여러 곡선이 어지럽게 엉켜있었을 뿐이지만.


'이 문 너머에 홉 고블린이 있다 이거지?'


간혹 다른 몬스터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나만한 체격의 홉 고블린에 일반 고블린 두세 마리 정도라고 하니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과연 꽤 넓은 방 중앙엔 홉 고블린이 무슨 최종 보스같은 기세로 눈을 감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고블린 주제에 진중한 분위기를 잡고 있다니?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놈의 근처에 횃불을 던졌다.


이 방에도 벽마다 횃불들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방 중앙까지 훤히 닿을 정도는 아니다.


과연 정예란 걸까.


놈은 제대로 된 가죽 갑옷까지 입고 있다.


심지어 칼을 박아넣어도 꿰뚫리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탄탄해 보인다. 뛰어난 장인의 작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


뭐지?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오른 기분인데.


그래도 싸우는 것 외에 선택지는 없다.


어차피 놈을 잡고 귀환석을 얻지 못하면 이곳을 나갈 수 없으니까.


"일어나라. 한따까리 해야지."


스르릉.


나는 아밍소드를 뽑아들고 놈에게 겨눴다.


스윽.


놈은 맹수같은 푸른 눈을 뜨며 나를 응시한채 말없이 천천히 일어났다.


과연 홉 고블린.


정예는 기세부터 다르다 이건가?


근데 체격이...


'존나 큰데?'


뭐지? 분명 나만하다 했는데?


이놈은 키가 무슨 2m는 되는 것 같다.


머리통 하나만 차이나도 체격차이가 여실히 느껴지는 법인데 델리시아의 머리가 작다는 걸 생각하면 거의 머리 세 개는 더 차이 난다고 느껴진다.


게다가 놈은 길고 묵직해 보이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재질마저 무슨 흑색 광택이 도는 게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막상 마주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절로 침이 삼켜지고 어깨와 가슴께가 굳어 호흡이 어려워지는 느낌.


그래도 싸워야 한다.


도망? 보폭 차이부터 너무 크다. 금방 따라 잡히겠지.


지구력 차이도 심각할거다. 델리시아의 육체는 딱 열두 살 여자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속전속결이다. 죽음을 각오해라.


쫄아 있어봐야 될것도 안 된다.


체격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놈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깡 마른 것도 아니다.


또 몬스터니만큼 근력이 상당히 강할 수도 있다.


일단 맞으면 그쪽은 무조건 부러진다고 봐야 한다. 아니, 저 체격이면 한대만 맞아도 바로 죽을 것이다.


그만큼 불합리한 체급차이다.


그러니 단 한대도 맞지 않는다.


당장 몽둥이를 쳐 내거나 잘라 내기엔 힘이 부족하니...


'공격을 피하고 놈의 손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손을 공격하면 무기를 놓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판단으로 나는 놈의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다른 고블린들을 경계하며 동시에 최대한 어깨와 손목의 긴장을 풀고 호흡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잔뜩 굳어 있어봐야 오히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뿐이니까.


의외인건 놈이 몬스터 답지 않게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


과연 정예는 정예인가.


어둠 속에 숨어 있을 고블린들조차 쉽사리 소모품으로 던지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이대로 백날 기다려도 먼저 들어오진 않을 생각인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


"이유가 뭐지? 약탈인가?"


"..?"


"왜 갑자기 시비를 거는 거냐, 인간."


뭣.


아니, 몬스터가 아니었나? 말을 한다고? 심지어 유창해...?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 음... 너는 정체가 뭐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인간. 대체 왜 칼을 뽑아 든거지?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약탈자 처럼 보이진 않는데."


"흠...... 다른 놈들이 네가 그 정예 몬스터라고 하던데. 잡으면 귀환석을 주는."


"정예 몬스터라니. 하아... 너는 하이 고블린과 저열한 고블린을 구분하지 못 하는건가? 그건 실로 모욕적이군. 대충 어떤 오해를 하는지 알겠다."


나는 예상 밖의 전개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심 누가 봐도 몬스터 같은 비주얼 아니냐?


이거 이러다가 등 뒤에서 고블린들이 기습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날 방심 시키려고? 온갖 가정이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어색하게 굳어있다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일단 칼을 집어넣고 사과부터 했다.


몬스터였다면 진작 덤벼들었겠지. 누가 봐도 내가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


"그으... 미안하다. 내가 던전은 처음인지라 아는 게 없어서 실수했다. 잘못된 정보로 오해했나 보군. 사과를 받아주겠나?"


나의 진실된 사과에 홉, 아니 하이 고블린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너는 귀환석을 찾으러 온 건가? 안타깝지만 이곳의 정예 몬스터는 내가 쫓아냈다."


"쫓아냈다고? 그럴 수도 있나? 그럼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정예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길래 몬스터인 줄 알았는데."


"기세는 노련한 전사같은데 던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아무것도 없나보군. 외관도 어려 보이고 참 이질적이야. 어쨌든 난 수련중이었다. 정예방은 마나밀도가 좀 더 높거든."


아.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것 같다.


지구에서도 게이트 내부의 마나밀도가 다른 곳보다 높은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마나와 관련된 수련 효율이 상승하곤 했고.


거참. 그러면 저 길쭉한 녀석은 하이 고블린이라 하는 인간형 종족이고 몬스터로 분류되는 홉 고블린이 따로 있다는 거구만.


이거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버렸다.


그런데 마나라니? 나는 혹시나 마나를 느껴보려 했으나 딱히 특별한 건 느낄 수 없었다.


어쨌든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폐를 끼쳤으니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


남의 수련 시간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몬스터 취급이라니. 욕을 바가지로 처먹어도 할 말이 없다.


"말로만 사과하긴 좀 그런데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나? 돈, 식량, 물, 셋 다 어느 정도는 있다."


"괜찮다. 그런 건 나도 충분하니. 어쨌든 정예가 목표라면 놈은 문밖으로 나가 오른쪽 통로로 향했다. 이만 다시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겠나? 나도 시간이 많진 않아서 말이지."


"알겠다. 넌 정말 호인이로군. 이름을 물어도 되나? 내 이름은 델리시아다."


장신의 하이 고블린은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휘틀러다. 강철나무 숲 부족의 전사 휘틀러. 네게 강철 같은 의지가 깃들길 바라지."


휘틀러라... 기억에 남는 이름이 될 것 같다.


민폐를 끼친 건 난데 정보도 주고 마지막엔 덕담까지 해주는 인성이라니. 실로 보기 드문 대인배라고 할 수 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이세계라는 느낌이 확 오는구만."


지성이 있는 장신의 고블린 종족이라니.


와꾸는 솔직히 그냥 키 큰 고블린 같았는데 설마 이 세계엔 엘프 대신 하이 고블린이 있는 건가? 성품을 보니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지구에 열렸던 게이트에서 나온 엘프들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해도 한국 땅에 무슨 정체불명의 이계 식물들을 몰래 심고 그랬었지.


뭔 놈의 나무가 하루에 수십 미터씩 자라고 그 굵기는 어찌나 굵던지 그때마다 식겁한 대통령이 호다닥 달려가서 망치로 개작살을 냈었다.


나름 대화가 통하고 여러 정보도 제공해주는 등 꽤 유익한 종족이라 나무만 부수고 골통은 안부쉈다는데 자꾸 딱 한그루만 심게 해 달라고 난리도 아니었지.


몰래 심는다 해도 절대 들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딱 봐도 무슨 세계수의 씨앗 같은 걸 심으려 했나 본데 그런 수상한걸 한국에 심게 둘 순 없다.


아무튼, 그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오른쪽 통로를 걷다 보니 꽤 넓은 공동 같은 곳에서 이번엔 '진짜' 홉 고블린을 만날 수 있었다.


평범한 고블린보다 대가리 한두 개 정도 더 큰 키와 체격, 허접한 나무 몽둥이까지. 아, 이게 홉 고블린이구나.


확실히 휘틀러와 비교하기 미안한 수준으로 허접해 보인다. 체격도 나랑 비슷한 것 같고.


"죽여주마 이세계 홉 고블린."


나는 배낭과 물주머니를 내려놓고 자신 있게 아밍소드를 뽑아쥔 채 놈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공동과 연결된 사방의 통로에서 쏟아지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아니었다면.


***


"아, 내가 놈을 쫓아낸 이유를 말해 줬던가?"


휘틀러는 맨들맨들한 뒤통수를 긁적였다.


홉 고블린을 정예방에서 쫓아내면 던전 내부의 고블린들을 모아 무리를 이뤄 정예방으로 다시 돌아온다.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이때 모아오는 고블린의 수는 침입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휘틀러는 3층 탐험가였다.


못해도 수십 마리는 모아올 것이다.


"뭐,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휘틀러는 수련을 위해 다시 눈을 감았으나 괜히 찝찝한 느낌에 중얼거렸다.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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