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새글

역천맨
작품등록일 :
2024.07.29 13:26
최근연재일 :
2024.09.18 23:54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1,293
추천수 :
19
글자수 :
296,010

작성
24.08.09 23:51
조회
41
추천
1
글자
20쪽

듀얼

DUMMY

"가, 갑자기 결투라니 무슨 소리야...!"


"델리시아,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라스, 너 정말 유치하게 이럴 거니?"


나의 난데없는 결투선언에 세실과 르와가 경악했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보통의 결투란 목숨을 결고 싸우는 생사결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나는 애새끼가 아니다.


고작 칼 안 보여 줬다는 걸로 삐져서 칼부림을 벌일 정도로 몰상식 하지도 않고 막 결성된 팀의 분위기를 씹창낼 정도로 개념없지도 않다.


나는 우선 세실과 르와를 진정시켰다.


"세실, 르와 걱정 말아요. 승부는 고블린을 잡는 걸로 대신 할 생각이예요. 보스 방까진 얼마나 남았죠?"


그제야 르와는 조금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휴우. 듀얼이라길래 어찌나 놀랐는지... 지금 속도로는 몇 시간 정도 남았을거예요. 그래요, 상대가 고블린이라면 그렇게 위험하진 않겠죠. 라스, 너도 동의하니?"


"흥. 뭐든 상관없어. 나는 목검을 들어도 이길 자신 있으니까."


그래.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좋다.


라스 녀석, 딱 봐도 우리랑 나이 차이가 그렇게 나진 않을 것 같다. 대충 중학교 2학년 정도나 되지 않을까.


그 나잇대엔 각자 마음속에 흑염룡을 한 마리씩 품고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 이 정도 앙탈이야 흔한 재롱잔치 수준일 뿐.


"어때 라스, 너도 검사라면 상대의 실력 정도는 알아볼 수 있겠지? 그러니 마주치는 고블린을 상대로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 지 겨루는 거야."


"하, 두고 볼 것도 없이 내 승리군. 네가 이긴다면 아예 내 검을 주겠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니까 말이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승리선언이 나와 버렸다.


이 녀석, 자기가 무슨 역대급 천재 검사인 줄 아는 건가. 척 봐도 그 정돈 아닌거 같은데.


어쨌든 잘 됐다. 승부에 적절한 내기는 흥을 돋우는 법이니까.


"잘됐네. 검집만 봐도 꽤 좋아 보이는데 오늘 새 주인을 찾겠어. 내가 지면 네가 나보다 약하다는 말도 취소하고 널 형... 아니, 오빠라고 불러줄게."


"웃기지도 않는군. 진정한 전사도 아닌 주제에 나와 겨루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알아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라스는 보무도 당당하게 홀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이 나타나면 먼저 실력을 뽐내 기선제압이라도 할 생각인가.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졌다.


이 녀석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에서 기인하는 걸까?


역시 내 겉모습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


모르면 역시 물어봐야지. 나는 르와를 돌아봤다.


"르와, 라스는 나이가 어떻게 되죠?"


"라스는 열 네 살 이예요. 그나저나 델리시아, 저래뵈도 라스는 성인들도 통과하기 어려운 전사의 시험을 통과하고 당당히 검과 활을 하사받은 천재예요. 보통은 검이나 활 둘 중에 하나만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라스의 재능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죠."


"시험이 아주 어렵고 까다롭나 보네요."


"네, 게다가 라스의 나이에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답니다."


오호라. 그런 건가.


하긴 뭐 대충 중2때 실력으로 서울대 입학했다 하면 어깨가 천장까지 닿을 만 하지. 이해했다.


혹시나 무슨 판타지 엘프는 장생족이라 라스는 사실 140살 먹은 소드 마스터 랍니다 이런 말이 나올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니군.


만약 그랬다면 허리를 폴더폰처럼 접고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을 거다.


'중2병 소드 마스터가 실력을 숨김' 정도는 컨셉으로 이해 가능한 영역이니까.


그런데 지구에서 봤던 엘프들도 딱히 장생족 같은 건 아니었고 이곳의 엘프들도 장생족은 아니라면...


르와는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걸까? 20대처럼 보이는데 전직 제사장이었다는 말이 자꾸 신경 쓰인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가 그런 건 보통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하는 거 아닌가? 엘프들은 나이보단 능력을 중시하나?


몹시 궁금했지만 괜히 르와의 나이에 관한걸 물었다가 역린을 건드린 꼴 날까 봐 질문하기 무섭다.


이런건 눈치껏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라스는 엘프들 중에서도 역대급 천재 괴물 포지션이고 그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른다고 볼 수 있다.


사회성 떨어지는 품행으로 누나한테 자주 핵 꿀밤을 맞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천재의 눈으로 바라본 범인은 답답하기만 할 테니 제대로 된 교우관계 같은 걸 형성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그런데 르와, 만약 제가 이긴다 해도 라스의 검을 받을 순 없겠죠? 저런 명품이 엘프가 아닌 외인의 손에 넘어가도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르와는 팔짱을 끼고 턱을 괴며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흉부가 거대한만큼 세실이 그랬던 것처럼 꽤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와의 입이 열렸다.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만약 델리시아가 이긴다면 제가 표식을 새겨줄게요. 게다가 라스도 숲의 전사로서 자신이 내뱉은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아야 하기도 하니까요. 이래저래 아직은 어린 동생이랍니다."


오케이. 르와의 허락도 받았겠다, 저 검을 손에 쥘 미래가 아주 기대된다.


흑색 바탕에 황금색 무늬가 아름다운 대비를 이루는 검집만 봐도 공들여 만든 검이라는 티가 난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검은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솔직히 약탈자들 한테 얻은 아밍소드는 평범한 축에도 끼지 못 하는 하품이다.


몇 번 휘두르면 바로 날을 갈아줘야 하는 그런 수준이지.


라스에겐 미안 하지만 장비 업그레이드는 못 참는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자 르와가 걱정스러운 말로 물었다.


"델리시아, 정말 괜찮겠나요? 라스가 제 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라스의 재능 하나만큼은 진짜예요. 제가 알기로 축복교단은 성녀에게 고된 전투 훈련을 시키지도 않구요."


뜻밖에 동생보다 날 걱정해주는 르와에게 난 괜찮다고 답했다. 이정도면 르와 마망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괜찮아요 르와. 저는 각성을 통해 힘도 강해졌고 나름 자신이 있거든요.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엔 암살명가의 천재 막내 딸이었을지도 몰라요. 축복교단의 비밀스운 전투성녀 라던가요."


내 농담에 세실과 르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앞으로 보여 줄, 지금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강함을 납득시키긴 어렵지 않을까.


라스가 어떤 계열의 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게이트에서 미친 듯 쏟아져 나오던 초대형 거대 괴수들을 검 하나로 도륙내던 인간이다.


그때 쌓아 올린 경험과 자신감은 어린 소녀의 육체에 들어와서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불타오르고 있다.


압도적인 육체적 재능이 사라지니 비로서 진정한 검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달까.


게다가 각성으로 힘과 체력이 적당히 올라온 이상 비슷한 나잇대에겐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어쨌든 델리시아도 자신이 있다는 거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호롱불을 따라 일행들과 통로를 걸었다.


그러다 호롱불이 멈춰 서서 껐다 켜졌다 점멸하기 시작하자 르와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앞쪽에 고블린들이 있네요. 홉 고블린은 없고 네마리뿐이예요. 둘 중 누가 먼저 실력을 보여 줄 건가요?"


난 싱긋 웃으며 라스에게 턱짓했다.


어디 재롱을 떨어 보려무나.


이세계 천재의 검술 수준, 이 검성이 직접 평가해 주마.


라스가 검을 뽑아 들고 앞장서길 얼마 안 가 고블린들이 나타났고 라스는 거침없이 고블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어처구니가 없군.'


고블린들 사이로 쇄도한 라스는 검에 자신의 분노를 담아 놈들을 도륙냈다.


야수처럼 폭발적인 힘과 속도가 더해진 잔혹한 검격은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고블린 이었던 고기 조각들로 바꿔놓았다.


허리가 통째로 끊어져 피와 내장을 모조리 쏟아 내고 죽은놈.


척추와 갈비뼈채로 상체가 대각선으로 절단난놈.


도망치려다 정수리부터 좌우로 쪼개진 놈.


반응 조차 못하고 팔다리와 머리가 죄 분리되어 여러 조각으로 흩어진 놈까지.


이런 허접한 놈들을 상대로는 과할 정도의 폭력이었지만 라스는 일부러 더 잔혹한 모습을 연출했다.


자신을 도발한 인간 여자의 기를 죽여놓고, 공포와 잔혹함에 얼어붙은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작고 말랑한, 굳은살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손으로 검사니 뭐니 지껄이고 남의 실력을 폄하하기 까지 하는 정신 나간 여자.


이 정도 무력을 보여줬으면 가출한 정신머리가 돌아왔겠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을 마주하기 전까진.


'실망...?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연민...? 뭐지?'


두려움이나 경악이 아닌 실망과 연민이라고? 감히 이 나를, 안쓰럽게 바라본다고?


심지어 그녀가 한 말은 더 가관이었다.


"네 수준, 잘 알았다."


"지금 뭐라고..."


"말이 아닌 진짜 검으로 보여 주지. 솔직히,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이쯤 되니 라스는 분노보단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더 커졌다.


누나가 오냐오냐해주니까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건가?


라스는 타인, 그것도 인간들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었기에 탁자에 앉아 저들끼리 만담을 나눌 때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누나의 강제력에 어머니 숲의 라스라고 자기소개만 간단히 했을 뿐.


얼핏 듣기로 성녀네 뭐네 했던 것만 기억한다.


라스의 입장에서 델리시아는 그저 누나가 예뻐하는 어린 인간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나가 예뻐하는 이유? 별거 아니겠지. 그저 라스와 나이대가 비슷하기 때문일 거다.


누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나잇대 비슷한 수준낮은 짐 덩이들을 붙여서 친구랍시고 시시껄렁한 대화나 나누게 만들려 했지.


이번엔 그 대상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 뿐이다.


그래서 주제도 모르고 약하니 뭐니, 웃기지도 않은 결투니 뭐니 하는 정신머리를 고쳐주려고 일부러 잔혹한 손속을 보였는데 오히려 더 정신 나간 언행을 보여주고 있다.


아, 그래. 그렇군.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어.


상대는 머리가 아픈 여자였군. 던전에서 정신이 나간 광인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자신과 누나처럼 강인한 엘프도 아니고 말랑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성녀니 뭐니 해도 그저 정신 나간 어린애일 뿐인데 내가 너무 흥분했군. 조금 어른스러울 필요가 있겠어.


라는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저 인간 여자, 델리시아의 검은 분명 자신의 검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있었기에.


***


솔직히 좀 쫄리는 면도 있었다.


라스 저놈, 진짜 존나 쎄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놈이 고블린들을 도륙낼 때 난 확신했다. 생각보다 더 별거 없네 라고.


의도된 잔혹한 도살.


어쩌면 일종의 무력 시위처럼 보이기도한다. 제대로 된 실력의 반도 안 보여 준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계되는 동작 전반에 지나치게 낭비가 많고 기술이 아닌 그저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마치...


'지구에서의 나처럼.'


그랬다. 라스 저 녀석의 검은 그때의 날 연상시켰다.


힘과 본능, 야성 만큼은 최강이지만 기술의 영역에는 제대로 발뻗지 못한 반쪽짜리 검.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배워온 검술들을 전부 망각하고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내려찍고 부수고 베어내고 찌르는 단순 무식한 모습만 보여주게 됐지.


물론 그것이 효율적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압도적인 힘은 그 자체로 효율적이니까.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검술은, 기술의 영역은 그런 것이 아니다.


절제와 효율을 통해 최선을, 실용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검술이다.


아니라고? 반박은 받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검의 극의에 닿았으니까.


이것이 진정 옳은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그 차이를 정확히 보여 줘야겠지.


라스, 행운인 줄 알아라. 날 만나지 않고 그대로 성장했으면 너는 미래의 나처럼 됐을 거다.


자신이 검을 제대로 휘두르는줄 아는 멍청한 고릴라가 됐을거란 소리다.


다음 고블린 무리를 마주쳤을 때 난 고블린들 사이에서 춤을 췄다.


정확한 힘과 속도로 양 눈을 스치듯 베어내기만 해도 내 체력은 온존한 상태로 상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시야를 잃은 놈이 되려 더듬거리며 동료들을 방해한다.


옆에서 튀어나오려다 눈 잃은 동료의 손에 방해받은 고블린의 무릎 위, 손목 안쪽을 살짝 힘을 주어 베어낸 것으로 놈은 볼품 없이 쓰러져 살기 위해 버러지 처럼 땅을 기었다.


뒤에서 달려들던 녀석은 슬쩍 갖다 댄 칼끝에 스스로 목을 꿰뚫렸고, 그 틈을 노려 이판사판으로 점프한 놈은 옆으로 살짝 피하며 겨드랑이를 부드럽게 베어내는 것으로 끝.


단번에 즉사시킨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체력을 온존한 채 전부 쓰러트렀다.


눈을 베인 놈은 더듬거리며 기어 도망가려던 상태 그대로 목을 가볍게 베어냈다.


이놈도 얼마 안 가 죽겠지. 나머지 고블린들처럼.


해치운데 걸리는 시각은 라스나 나나 또이또이 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누가 더 멋있었어? 라고 물어본다면 100명중 99명은 내 손을 들어줄 거다.


이는 충격받은 라스의 표정이 증명해준다.


세실과 르와 역시 라스의 검술을 봤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라스, 네 검은 전혀 멋지지 않았다.


너도 그것을 느꼈겠지?


이처럼 검의 극의를 추구하는자는 그 자체로 멋이 폭발해 만인의 찬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강한 힘에 의존해 상대를 찢고 다져놓고 싶다면 구태여 검이 아니라 몽둥이든 망치든 훨씬 효율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러니 전혀 멋지지 않은 네 패배다, 라스.


나는 라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놔.


하지만 라스는 부정했다.


"아, 아직 보스 방까진 좀 더 남았다...! 처음이라 내 실력을 다 보이지 않았어...!"


역시, 한 번으로 납득할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자기 세계가 완전히 부서지는 대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한 법이니까.


수용의 5단계라 하던가?


"그래그래. 어디 한번 보여 달라고. 네 진정한 실력을 말이야."


"크읏, 그런 계집에 같은 검술 따위...!"


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은 대동소이 했다.


라스는 고블린들을 토막 냈고, 피를 뒤집어썼으며, 생각이 많아진 검은 점점 더 확신을 잃고 난잡해졌다.


반면 내 검은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고블린들을 유린했으며 피는 얼마 묻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주 선명한 대비. 그렇게 보스 방 앞까지 와서야 라스는 자기 패배를 인정했다.


"...내 실언을 인정한다. 넌 전사라 불릴 만 한 녀석이다. 그러니 가져가라. 하지만 이것이 내가 너보다 약하다는 걸 증명하진 않아...! 젠장...!"


솔직히 일대일로 붙어서 승패를 가린 게 아니니 무효다! 라며 억지를 부리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녀셕도 남들과 비교해 자기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한 손으로 고블린들의 몸통을 어렵지 않게 토막 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


그리고 지금껏 그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대나 난관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도 내 검과 자기 검을 비교하고서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저 힘과 체력만 믿고 막무가내로 휘둘러 왔다는 사실을.


그러니 자존심과 같은 검을 넘길 수 있는 거겠지. 그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분해하는 녀석의 검을 받고 라스에게 내 아밍소드를 건냈다. 녀석은 아밍소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이 쓰레기는. 난 쓰레기통이 아니다."


"뭐래. 쓰레기라니, 널 이긴 검사의 검이거든? 가져가."


"이딴 걸 대체 왜... 설마."


녀석은 뭔가 깨달음을 얻은 눈빛으로 아밍소드와 나를 번갈아 봤다.


"...알겠다. 검의 성능과 내 힘만 믿는 검술이 아닌 검의 본질을 생각하라는 건가... 젠장, 네놈은..."


라스는 그렇게 좋을 대로 생각하며 검을 받아 갔다.


'짬 처리 맞는데.'


뭐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나. 어쨌든 라스에게 받은 검을 살펴봤다.


검집만 해도 묵빛 바탕에 황금색 꽃과 같은 문양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기품이 있고 날 길이는 100cm쯤 되는듯 하다.


날의 형태는 뭔가 서양의 롱소드와 동양의 사인검의 중간형태쯤 되는 곡선적인 미가 가미된 디자인과 느낌인데 그냥 편하게 직검이라 부르기로 했다.


무게감은 의외로 있는 편이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 힘과 체력이야 더 늘리면 되니까.


휘둘렀을때의 균형감과 내구성도 아주 훌륭한것 같으니 꽤 오래 쓸 수 있을것 같다. 아주 만족스럽다.


그렇게 검을 살펴보고 있는데 라스와 르와의 대화가 언뜻 언뜻 들려왔다.


얼핏 들어 보니 자신의 패배, 전사의 약속, 경험, 깨달음 뭐 이런 것들인 것 같다.


룰루와 세실리아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줬다.


룰루는 그냥 기분이 좋고 세실리아는 내가 다칠까 걱정했는데 무슨 이야기 속 노련한 기사처럼 검을 다루는 모습에 정말 놀랐다고.


"델리시아, 검술은 언제 배운 거야? 기억을 잃어도 몸은 기억한다는 그런거야? 정말 너무 멋져...!"


음 그래그래. 더 찬양 하거라. 역시 검의 본질중 하나는 멋이다.


어쨌거나 라스도 아주 싹수가 없는 녀석은 아니다.


나름 깔끔하게 인정하기도 했고... 만약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면 실제 대련으로 이어졌을 테고 분위기는 심해까지 곤두박질 쳤을 거다.


뭐 진검대련을 해도 질 것 같지는 않다.


라스의 재능은 김검수 시절의 나와 비슷한 느낌이긴 해도 느낌만 비슷할 뿐 나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니까.


그때의 나를 이기려면 막 각성한 상태의 나조차 기관총으로도 못이긴다. 맨몸으로 맞아도 다 튕겨나갈듯.


이후 르와가 다가와 라스에게 건네받은 검에 어떤 마법을 걸어줬다.


간단한 표식 마법이고 '이 검의 주인은 델리시아이며 정당하게 인계되었음을 전 제사장 르와가 보증함'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르와는 난데없는 걱정과 사과를 건넸다.


"델리시아, 저는 솔직히 델리시아를 걱정했어요. 미안 해요."


으응? 갑자기 웬 사과를.


"던전의 광기에 휩쓸려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는 적지 않거든요. 더군다나 델리시아는 전이 후유증으로 인한 기억 상실도 심각한 수준이었죠. 그러니 어쩌면 정신적 불안에 의한 충동으로 돌발행동을 한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라스를 도발하고 결투를 신청한걸 말하는 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르와 눈엔 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성녀가 뭣모르고 천재 전사에게 맞다이를 신청한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다 이해한다.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고.


애초에 그냥 검의 길을 걷는 후학에게 한 수 지도 해준 일종의 여흥에 가까운 해프닝일 뿐이다.


나는 라스가 나에게 자격없다 한 말에 절대 빈정따위 상하지 않았다.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저도 욱해서 분위기에 휩쓸린 감이 있구요. 그저 사소한 해프닝이었을 뿐이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멋대로 오해해서 미안 해요 델리시아. 덕분에 누구도 다치지 않고 라스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네요.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끄덕끄덕. 나는 기분 좋게 르와의 사과를 받아줬다.


패배를 모르던 오만한 동생이 패배로 자신을 돌아보고 한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뭐 이런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이런 걸 보니 르와는 진심으로 자기 동생을 아끼는 대인배인 것 같다. 나중에 마망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어쨌든 듀얼 소동도 잘 일단락 됐고, 우린 보스 방을 눈앞에 뒀다.


확실히 척 보기에도 '여긴 위험하니 어중이떠중이는 꺼져라' 라는 포스를 보여주는 육중하고 거대한 문과 복잡 기괴한 문양.


아주 제대로 찾아왔군.


"그럼 들어가 볼까요? 저와 라스가 먼저 들어갈 테니 여러분은 천천히 뒤따라 오세요."


그렇게 보스방의 문이 열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삼위일체 24.08.15 31 0 18쪽
15 폭풍전야 24.08.14 38 0 17쪽
14 델리시아 24.08.13 39 1 16쪽
13 증명 24.08.12 37 1 17쪽
12 변수 24.08.10 42 1 17쪽
» 듀얼 24.08.09 42 1 20쪽
10 성녀 24.08.08 42 1 23쪽
9 룰루 24.08.07 43 1 22쪽
8 친구 24.08.06 44 1 19쪽
7 정산 24.08.05 42 1 18쪽
6 죽음의 경계 24.08.02 45 2 18쪽
5 '그거' 24.08.01 50 1 18쪽
4 괴물 24.07.31 56 1 15쪽
3 빙의 24.07.30 67 2 13쪽
2 24.07.29 115 2 12쪽
1 프롤로그 - 검극 24.07.29 102 2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