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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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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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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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DUMMY

축복교단의 성녀라고?


누구?


나?


"반가워요. 저는 아버지의 딸 르와. 이쪽은 제 동생, 어머니의 아들 라스예요."


혼란스러운 가운데 엘프 여성의 말이 이어졌다.


뭔가 특이한 인사법인데 이거 대체 뭐라 대답해야 하는거냐?


그때 타이밍 좋게 세실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색마탑의 견습 마법사 세실리아 프릴린이예요. 이쪽은 제 친구 델리시아구요. 그런데 르와님, 성녀라니요? 혹시 델리시아에게 한 말인가요?"


르와라는 엘프 여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델리시아는 축복교단의 성녀가 아닌가요? 아, 말이 길어질 거 같으니 자리를 마련할게요."


콩.


촤르르륵.


그녀가 자신의 키만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자 지팡이와 닿은 벽돌 틈에서 수많은 새싹과 나무줄기들이 쭉쭉 뻗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저들끼리 꼬이고 얽매여 어떤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것들은 순식간에 영락없는 의자와 원형의 탁자가 되었다.


또 르와는 허공에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는데 빛의 구체가 생겨나 주변을 부드럽게 밝혔다.


"그럼, 편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흙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목둔이라니. 나는 솔직히 조금 긴장했다. 이 나무 의자... 무턱대고 앉아도 되는 걸까?


앉는 순간 줄기들이 뻗어 나와 우릴 의자에 앉은 상태 그대로 박제해 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내 흩어 버렸다.


저 정도 실력이면 의자를 만들게 아니라 진작 우릴 덩굴로 묶어 버렸겠지.


다만 무슨 주문도 없이 놀라운 이적들을 보여주니 자연스레 경각심이 생긴다.


게다가 세실의 가슴께에 숨어 있는 룰루가 자꾸 이상한 정신파를 보내오면서 내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다.


반가움. 기쁨. 옅은 행복. 그리움. 흥미로움, 좋은 향기 등의 정신파를.


'좋은 향기는 뭐니? 그새 어휘가 늘었네?'


어쨌든 르와 라스, 나, 세실 모두가 둥근 탁자를 중심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아니 근데 르와나 세실이나 둘 모두 탁자 위에 육중한 흉부가 얹어지는 광경 이거 실화냐? 정말 놀랍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도 엘프가 있구나. 둘의 생김새는... 전형적인 예쁘고 잘생긴 서양미인이다.


그런데 왜 머리가 검은색인지. 르와와 라스 모두 검은 머리였다.


그렇게 그들의 행색을 살피는 데 가장 먼저 입을 연건 르와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음료는 따로 챙겨 오지 못했는데... 성녀님?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의 정령이 만든 물을 마셔본지도 정말 오랜만인지라..."


아니. 대체 이 여자는...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겠군.


룰루는 세실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품(?)안에 스며들듯 숨어 있는 상태였는데 르와는 정확히 그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쩝.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룰루를 불러 물을 만들어 달라 요청했다.


세실의 가슴께에서 나타난 룰루가 허공에 물을 만드는 사이 어느새 식물줄기로 만들어진 컵이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놓였다.


귀신 같네 증말.


룰루는 각자의 잔에 물을 한가득 담아줬고 그 물을 마신 르와는 감탄을 흘렸다.


"하아아. 이 청량감. 대체 얼마 만인지... 역시 보통의 정화 마법으론 따라올 수 없네요. 라스, 너도 마셔보렴."


"아니, 누나. 제발 좀. 인간들 앞에서 부끄럽게 왜 그래? 엘프의 긍지는 대체 어디에 팔아먹은 거야? 진짜 푼수같-앜!!!"


딱!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스라는 남자애는 투덜거리다가 르와의 꿀밤 한 방에 침몰해 버렸다.


"에휴, 죄송해요. 얘가 친구가 없어서...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아이예요. 언제나 매를 번답니다. 어쨌든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볼까요?"


르와의 주도하에 우린 대화를 이어갔다.


처음엔 저 놀라운 마법 실력으로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금 긴장 됐었지만 세실도 딱히 긴장하진 않은 것 같고 라스라는 남자애도 그냥 철없는 애인 것 같아서 분위기는 금세 풀렸다.


룰루가 텐션 업 돼서 세실과 르와 사이를 통통 뛰어다니며 노는 것도 한몫했고.


들어 보니 르와와 라스는 '아버지의 숲' 출신 엘프이며 르와는 전직 제사장 이라고 한다.


추측건데 저 제사장이라는 직위는 대통령에 버금가는 거 같은데 뭔가 자세히 물어볼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라스는 척 보기에도 어린 엘프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인지라 교육 겸 수련을 겸해 이곳 던전까지 오게 됐다고.


라스가 말할 땐 '어머니의 숲' 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버지니 어머니니 하는 건 그냥 그들 특유의 문화인가 보다.


그러다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네 맞아요. 저는 남들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가령 세실리아의 옷 속에 숨어 있던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물의 정령이라거나 델리시아가 지닌 영혼의 격 까지도요."


뭐라고...? 난 그녀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이 정도의 영격(靈格)에 별다른 성유물도 없이 '축복과 기원'의 힘까지 느껴진다면 필시 축복교단의 성녀일 것이라 생각했답니다."


영혼의 격? 영격? 성유물? 축복과 기원의 힘?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세실이 나서서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르와님 말씀은 델리시아의 영혼이 남다르다는 거죠? 게다가 '축복과 기원'의 힘까지 지니고 있구요?"


"네, 맞아요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느끼지 못했나요? 축복은 조금 희미하지만 강력한 '기원'의 힘이 느껴지는데..."


도대체가. 기원이 대체 뭐지? 축복은 뭔지 짐작은 간다.


델리시아가 이끌어낸 기적적인 힘. 그게 축복인 거겠지.


그렇다면 기원은?


그 해답은 얼마 가지 않아 얻을 수 있었다.


"앗, 설마... 델리시아를 보면 느껴지는 이 기분 좋은 감정? 느낌? 같은 것들이..."


"네 맞아요. 그게 '기원' 이랍니다.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작용하고 있죠. 추측건데 델리시아에게 호감을 지닌 존재는 정신적 평안을 비롯한 여러 긍정적 효과를 얻는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기원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광역 버프 토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가? 그 버프를 '기원'이라고 하는 거고?


"확실히... 델리시아 근처에 있으면 뭔가 따뜻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아요. 두근거리기도 하고 괜히 힘이 나는것 같고... 그게 기원의 힘이었다니... 델리시아 너 어쩌면 정말 축복교단의 성녀가 맞을지도 몰라...!"


세실은 자기가 더 감동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르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델리시아는 저처럼 이곳에 전이포탈에 의해 들어오게 됐고 전이 후유증으로 기억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예요. 만약 델리시아가 성녀가 맞다고 해도 본인은 전혀 자각을 못 하고 있을 거예요."


끄덕끄덕.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은 기억 상실이 아니라 진짜 아무런 상식이 없는 것 뿐이지만 뭐...


"저런, 전이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다니 이 무슨 안타까운 일이... 그렇다면 델리시아는 성녀로서의 힘과 능력에 대한 것도 대부분 모르고 있겠군요?"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가 왜 성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특정 종교의 성녀라든지 그런 걸 쉽게 말해도 되는 건가?


만약 밖에서 '저 성년데요.' 했다가 '음 그래그래 사탄이 들렸구나.' 하면서 목을 매달려 하면 어쩌고?


정말 성녀였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됐다고 하기에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성녀라면 꽤 중요하고 높은 존재일 텐데 감자바구니와 식칼을 들려 준 다던가 평범한 옷을 입히는 게 맞는 건가?


괜히 밖에서 성녀니 뭐니 떠들면 크게 경을 치는 것 아닐까?


내 상황과 걱정에 대해 설명하니 르와는 아예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어째서 델리시아가 그런 상태로 던전에 오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전혀 걱정할것 없음' 이었고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세계에는 각각의 실존하는 신을 모시는 종교들이 여럿 존재하고 그중 축복과 기원의 여신인 프레시아를 모시는 축복교단은 그 위세가 적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필멸자들은 신을 섬기며 신들이 내려 준 힘이자 권능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때 반드시 '성유물' 이 필요하다고.


성유물 없이 신의 권능을 행사할 경우 영혼의 격이 낮은 존재는 영혼에 큰 충격을 받아 백치나 폐인이 되는 등 사달이 나기 때문에 신의 권능을 빌리기 위해선 반드시 영혼의 부하를 감당해줄 성유물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성녀와 성자라 불리는, 영혼의 격이 높은 이들 중 신의 선택받은 이들은 성유물이 없어도 무리없이 해당 신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고 성유물이 지닌 힘을 몇 배로 증폭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 또는 성자가 있는 교단과 그렇지 못한 교단의 위세 차이는 상당한 편이며 성녀와 성자는 해당 교단 내에서 거의 교황에 버금가는 서열을 지니게 된다는 것.


르와가 나를 보고 축복교단의 성녀라 판단한 이유도 영혼의 격이 범인의 것을 초월한 데다가 성유물도 없이 프레시아의 권능인 '축복과 기원'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


'근데 프레시아의 권능은 내가 아니라 델리시아가 쓴건데?'


축복의 힘도 그때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남아 있다고?


심지어 저 기원이라는 건 대체 언제 쓴 건지도 모르겠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나는 축복과 기원에 대해 질문했고 르와는 친절히 설명해줬다.


"축복과 기원은 프레시아 여신의 대표적인 권능이예요. 쉽게 설명하자면... 축복은 잠시간 아주 강력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죠.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을것처럼요."


"빈대로 기원은 축복처럼 폭발적이고 눈에 띄는 힘은 아니예요. 그건 조금 더, 뭐랄까... 은은하게 지속되는 축복이라 해야 할까요? 일종의 가호처럼 아주 오랫동안 긍정적인 영향을 주곤 한답니다."


"그리고 축복과 기원은 그 종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죠. 이 부분은 추후 축복교단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거랍니다. 그들은 델리시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 건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델리시아는 그때 아주 쇠약한 상태임에도 나를 살리기 위해 무리해서 축복의 권능을 펼친거고 그 축복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아직도 영향을 조금 끼치고 있는 거겠지.


기원도 델리시아가 펼친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성녀의 특징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버프토템이 됐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나저나 영혼의 격이라... 르와는 내 영격이 범상치 않다고 했지.


내 영혼의 격이 드높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검성 김검수 시절의 육체적 재능은 신이 내린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난 딱히 프레시아를 섬기진 않는다. 물론 숭배하라면 숭배할 순 있다. 개쩌는 기적을 내려줬으니까.


하지만 내 빙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신을 무턱대고 믿기도 어렵다.


게다가 르와가 보고 있다는 영혼의 격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김검수일까 델리시아일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참.


여전히 빙의자의 처우에 대한 것을 쉬이 물어보기엔 조금 걱정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래서 빙의가 싫다니까.


어쨌든 딱히 성녀 시켜달라 한 적은 없지만 지금의 내가 알게 모르게 축복교단의 성녀 비스무리한 존재가 되었다 이거군.


축복교단에선 그런 중요한 존재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 모셨지 절대 해칠리 없고.


아주 중요하고 유용한 정보다.


그런데 이유가 뭘까.


르와는 왜 이런 정보들을 대가 없이 친절하게 알려주는 걸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일 텐데.


심지어 추측컨데 르와는 전직 엘프 대통령 같은 존재다.


그런데 대체 왜? 그것도 종과 종교가 다른 존재에게 어찌 이리도 우호적이란 말인가.


엘프들은 저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하는 존재를 믿는 거 아닌가?


프레시아의 축복교단과는 대체 어떤 사이길래 이런 호의를 베풀지?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바로 물어 봤다. 상남자 특, 고민 길게 안 함.


"그런데 르와 르와는 어째서 그런 정보들을 저희에게 쉽게 알려주는 건가요? 혹시 저에게 성녀로서 무언가 바라는 거라도 있나요?"


르와는 그런 날 보며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거의 엄마 미소랄까.


"굳이 지금 알려하지 않아도 나중엔 저절로 알게 될거예요.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저희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숲 께서 프레시아 여신을 상당히 좋아하신다는 거죠."


르와는 컵에 담긴 물을 홀짝이곤 다시 말을 이었다.


"프레시아는 인간과 엘프를 구분하지 않아요. 저희도 프레시아 신앙 만큼은 배척하지 않는답니다. 그처럼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존재 모두를 축복하고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여신을 싫어할 존재들은... 정녕 구제할 길 없는 사악한 존재들 뿐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엔 일순 '그 사악한 존재'들을 향한 경멸이 깃든 것 같았다. 사악한 존재라, 누굴 말하는 걸까.


어쨌든 르와 덕에 많은 정보를 얻고 가슴 한 켠이 조금 가벼워졌다. 던전 밖에 대한 불안 요소는 거의 없어졌으니까.


조금 의외인건 정령에 대해서는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이름이 룰루인가요?' 하며 좋은 이름이라 칭찬한번 한 게 전부였다.


정령에게 관심이 아주 많을 것 같았는데 조금 김빠지는 태도랄까.


아, 격렬한 전투 이후 내 힘이 강해진 것에 대해서도 물어 봤는데 르와는 그것을 '각성' 이라고 했다.


"죽음의 경계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이들 중 일부는 특별한 힘을 얻곤 하죠. 다만......"


던전에서 죽음 내지 그에 따르는 강렬한 경험을 겪고나면 특별한 힘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각성이라고.


심지어 각성을 여러 번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상황 혹은 경험에 관련된 능력을 얻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하니 힘이 강해진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 당시의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각성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것을 노리고 위험에 몸을 던진 자들 대부분은 그 끝이 좋지 못했답니다. 델리시아도 그런 위험한 도박은 가능한 멀리하길 바라요."


그녀의 말대로 이번엔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고 각성을 노리고 위험에 뛰어드는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어야 한다.


각성하겠답시고 대가리 박다가 정말로 죽어 버리면 그건 그냥 개죽음이니까.


나는 내친김에 정예방 에서의 수련과 마나에 대한것도 물어봤는데 그녀는 마나를 제대로 느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약식으로라도 도움을 주겠다며 내 양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이 손을 잡고 마나를 흘릴때와 손을 놓았을때의 차이를 느껴보라고 하는데... 뭔가 알듯 말듯 미묘한 차이만 느껴졌다.


하루종일 그러고 있을 수도 없으니 그쯤 하고 차차 스스로 터득해 보기로 했다.


르와는 그런 나를 보고 아마 혼자서 해도 금방 해낼것 같다며 싱긋 웃었다.


그러다 대화의 주제는 세실로 옮겨졌다. 르와가 세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나저나 세실리아는 던전도시의 백색마탑 출신이라고 했죠. 혹시 스승님이 '날벼락의 가웨인' 인가요?"


"네, 네엣!? 그, 그걸 어떻게..."


세실은 어찌나 놀랐는지 한번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르와는 그저 후후 웃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마법사는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죠. 가웨인은 그런 재능론의 신봉자중 한 명이었고요. 게다가 세실리아의 그 '재능 주머니' 아니, 세실리아의 마법적 재능은 저에 비견될 정도로 독보적이예요. "


뭐지. 왜 재능 이야기하는데 세실의 가슴을 흘긋거리는 거지.


설마 가슴이 커야 뛰어난 마법사가 된다 그런 건 아닐 테고.


"가, 감사해요. 그래도 어떻게 그것만으로 제 스승님을..."


"가웨인 그 인간 성격이면, 세실리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마법사라면 결투를 통해서라도 빼앗아 제자 삼을 인간이니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랑은 나름 친분이 있는 사이랍니다."


...? 타인의 제자를 결투로 뺏어올 정도면 무협으로 치면 거의 사파에 가까운 인물 아닌가?


성격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나는 세실이 조금 걱정 되기 시작했다.


"...세실, 네 스승님 조금 많이 독특하신 분인 것 같네?"


"많이 괴팍하긴 해도 나쁜분은 아니야... 남들한테 밝히지는 말라고 하셨지만. 다 들켜 버렸네. 에헷."


아니 이거 남들한테 밝히지 말라 한 것도 업보나 원한같은 게 많아서 그런 게 아니야?


어쨌든 세실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고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만담을 즐겼다.


딱 한 명, 라스만 빼고.


"...누나, 대체 언제까지 수다나 떨려고? 우리 바쁘잖아."


"어머, 라스. 이야기가 재미없었니? 따로 수련이라도 하고 있지 그랬니."


그녀의 말에 라스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이거나 풀어 주고 그런말해 제발!!!"


그런 라스의 몸은 의자에서 돋아난 굵은 줄기들로 인해 의자와 일체화 되다시피 얽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라스가 지루하다고 몸을 뒤틀 때마다 나무줄기들이 늘어나더니 지금은 아예 박제 수준이됐다.


르와는 정말 무서운 여자다...


"후후, 우리 라스. 장난인 거 알지? 자, 풀어 줄게.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저흰 이제 보스방을 찾아갈 건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유익한 만남이 이렇게 끝나는건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인가.


나는 르와에게 원래의 계획을 알려줬다. 식량이 떨어지기 전까지 탐사 후 귀환.


그러자 르와는 우리에게 동행을 권했다.


"아, 그럼 여러분만 괜찮다면 저희와 함께 가시는 건 어떤가요? 보스방의 위치도 파악해 뒀답니다."


동행제안이라. 심지어 1층의 보스 몬스터란다.


그놈은 한 번쯤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긴 했지.


고블린 워리어 한 마리가 보스로 나오고 홉 고블린들과 일반 고블린들이 나온다고 했다.


르와는 라스와 단둘이서도 충분하다고 하는데 혹시 모를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동행을 요청한다고.


알고 보니 던전은 저층일수록 마력이 크게 제한되기 때문에 고위 마법을 사용할 수 없거나 위력 등에 제한을 받는단다.


그렇기에 고강한 기사나 마법사들도 저층에서 다른 모험가들에게 쉬이 함부로 굴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건 무차별적 뉴비 배척을 막기 위한 장치인가?


무슨 게임도 아니고 위화감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지만 당장은 알 길이 없다.


보스 탐방이라... 어쩔까나.


우선 룰루는 같이 가고 싶다에 1표. 룰루는 그냥 르와를 만난 이후로 긍정의 정령됐다.


세실은? 세실은 나에게 위임. 그럼...


"그렇다면 저희야 감사하죠. 그 보스라는 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거든요."


보스는 못 참긴 해. 다만 아이템 분배는 아쉽지만 빠지기로 했다.


보스 방의 위치를 파악한 것도 르와고 대부분의 전투도 르와와 라스가 한다고 했으니까.


우린 그저 구경하면서 경험만 쌓아도 충분하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고 보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두면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혹시나 변수가 발생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땐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르와가 지금껏 제공한 정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 값어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세실도 모르는 고급 정보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린 방을 나와 이동하기 시작했다.


르와의 마법으로 빚어낸 호롱불이 앞서 날아가며 보스 방을 향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걷는동안 르와는 세실에게 마법적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뒤편에서 나란히 걸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라스라는 남자애랑 같이 걷게 됐다.


키는 세실보다 조금 큰가. 나이는 우리랑 비슷해 보이는데 키는 르와만큼이나 크다. 나는 언제 클런지...


슬쩍 살펴보니 얘 무장이 상당히 근본있다.


왼허리엔 칼, 등엔 활, 오른허리엔 화살통이라... 역시 궁수는 근딜을 겸해야지.


활시위를 당기고 움직이는 상대를 맞추기 위해선 힘과 민첩함, 손재주가 필수다.


그리고 그 셋 모두 검의 재능이라 볼 수도 있다.


근데 짐을 르와가 다 들고 있는데 이거 맞는 거냐. 장유유서는 어디 갔단 말인가.


그나저나 라스 이놈, 검집이 꽤 좋아 보인다. 형태는 직검 같은데...


"뭘 봐."


내 시선을 느낀 라스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나도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칼."


"? 칼 뭐."


"한 번 봐도 돼?"


엘프 칼이라니. 궁금하지 않나.


하지만 라스는 그런 기대를 무참히 부숴 버렸다.


심지어 도발까지 곁들여서.


"안 돼. 넌 자격이 없어."


"자격... 이라고?"


"그래, 자격. 이 칼은 진정한 숲의 전사만이 쥘 수 있는 거야. 너처럼 비리비리한 계집애는 안 돼."


이 새끼가...?


날 계집애라 욕하는 건 좋다. 지금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게 칼을 쥘 자격이 없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내가 쥐지 못할 칼은 세상 그 누구도 쥐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칼을 쥘 자격이 없다고?


나는 라스를 쏘아붙였다. 어린에 상대로는 조금 비겁하지만 팩트로 공격했다는 거다.


"너 나보다 약하잖아, 라스. 그런데 무슨 자격?"


멈칫.


"뭐라고?"


"라스, 너, 나보다 약하다고. 그러니까 보여 줘. 칼."


"그 말, 취소해라. 당장...!"


라스가 멈춰 서 으르렁 거리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세실과 르와가 뒤늦게 중재에 나섰다.


"델리시아, 무슨 일이야. 라스랑 싸워?"


"라스, 너 왜 그래? 고작 칼 하나 보여주는 거 가지고."


라스는 이번만큼은 르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외쳤다.


"누나는 몰라! 고작 칼이 아니야! 이건 내 긍지라고! 내가 이걸 얻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데...! 검술도 모를 허약한 계집애 따위가...!"


그래, 검사에게 자신의 애병은 '고작 칼' 이 아니지.


남이 자신의 실력을 얕보는걸 참아주는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상대를 알아볼 눈과 경험이 없는것인가...


아무래도 본인이 나보다 약하다는 걸 납득을 못 하는 것 같다. 척 보면 척인데 말이다.


아직은 실력도 눈치도 부족하구나 라스.


그렇다면 어쩌겠나.


검의 길을 걷는 후학에겐 검을 통해 한 수 가르침을 내려줘야겠지.


"라스, 네게 검사의 명예를 건 듀얼(duel)을 신청한다."


누가 옳은지는 듀얼로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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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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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삼위일체 24.08.15 31 0 18쪽
15 폭풍전야 24.08.14 38 0 17쪽
14 델리시아 24.08.13 39 1 16쪽
13 증명 24.08.12 38 1 17쪽
12 변수 24.08.10 42 1 17쪽
11 듀얼 24.08.09 42 1 20쪽
» 성녀 24.08.08 43 1 23쪽
9 룰루 24.08.07 44 1 22쪽
8 친구 24.08.06 45 1 19쪽
7 정산 24.08.05 42 1 18쪽
6 죽음의 경계 24.08.02 46 2 18쪽
5 '그거' 24.08.01 51 1 18쪽
4 괴물 24.07.31 57 1 15쪽
3 빙의 24.07.30 67 2 13쪽
2 24.07.29 115 2 12쪽
1 프롤로그 - 검극 24.07.29 103 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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