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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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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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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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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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길(2)

DUMMY

하유성이 독행자의 길을 고른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겐 분명한 이유가 몇 개나 있었다.


가장 큰 건 파천이검을 익힌 그에겐 다른 스킬이 필요 없다는 것.

비록 쉽게 얻는 이능에 비해선 노력이 많이 들어갔지만, 하유성에겐 그것 외에 다른 목표는 없었다.

괜히 미궁에서 본 것처럼 이능에 따라 몸을 움직이면, 오히려 검술에 정진하는 데 방해만 될 터.


둘째로 그는 전위라는 역할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검사라면 홀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법. 무예는 개인의 수양이거늘, 어찌 일개 병졸(兵卒)처럼 단순한 역할에 머무른단 말인가?’


이는 비단 하유성뿐 아니라, 중원 무림의 가치관이었다.

각자 개성이 넘치는 검술을 휘두르는 데 바쁜 무인들은 잘 뭉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대규모 전쟁에 무인이 잘 동원되지도 않았다.


‘괜히 무림맹에서 청룡대(隊)니, 뭐니 하면서 소수 집단으로 무인을 묶어 합격진이라도 펼치는 게 아니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솔직히 말해서 학센이 우려하는 바와 같았다.

바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이전 세계에서 내공을 다루는 재능이 없어 일류 언저리 무인으로 남았던 하유성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

그가 신공절학이라 믿었던 파천이검이, 정말로 세상을 오시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러기 위해선 독행자의 길처럼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노예 신분에 불과한 하유성의 뜻을, 학센과 그의 고용주인 알랭이 받아들일 것인지였다.


“‘길’에 관한 것은 철저하게 본인의 뜻을 지키도록 하는 게 미궁도시의 전통이자 규칙이다···. 처음 미궁 위에 요새를 세운 바르톨 대제께서 정한 법이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길을 정하는 덴 간섭하지 않아도, 쓸모가 없어진 노예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알랭 님의 마음대로니까.”


학센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반 정도는 협박이었고, 반 정도는 걱정 섞인 말투였다.


“말씀은 고맙소. 내 꼭 성과를 낼 터이니 부탁드리오.”


“그래···. 성과를 내겠다는 그 태도만큼은 좋다. 뭐···독행자의 길을 걸은 강자가 없는 것도 아니지. 원하는 접수처로 가도록.”


학센은 순순히 하유성을 독행자의 길로 보냈다.


레벨업을 하러 오거나 신규 등록하러 복작복작한 다른 길과는 달리, 독행자의 길 접수처에는 개척자는 아무도 없고 나이 든 직원 한 명만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노인장. 접수를 할 수 있겠소?”


“물론이네. 이곳은 독행자의 길. 스스로 날카롭게 벼리고,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을 믿는 유아독존의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걷는 길이네.”


노인이 또렷하고 성실한 자세로 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이 없으면 해이해질 법도 한데, 자기 맡은 바를 성실하게 해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 길을 오르다 보면 자기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정말이오?”


“세간에는 그리 알려졌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시련과 그에 따른 보상을 주는 것에 가깝다네.”


“그 보상이 도움이 안 되는 것이면 어떡합니까.”


“세상 사는 데 도움 되지 않는 능력이란 없네. 어디에 쓸지 나름이지. 치고박고 죽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노인장께선 이 길을 걸으신 적이 있군요.”


“눈치가 빠른 청년이로군···. 내 재능은 미궁을 개척하기엔 보잘것없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지금의 삶에 꽤 만족하고 있네. 자, 마음을 굳게 먹었으면 따라 들어오게나.”


노인은 접수처 옆에 있는 나무판자로 된 문을 열고, 하유성과 함께 접수대 뒤쪽. 거대한 나무와 비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이 비석에 손을 대고, 이름을 말하며 마음속으로 이 길을 걷겠다, 다짐하면 되네.”


“그것으로 끝입니까?”


“길을 걷기로 하는데 뭐 얼마나 큰 절차가 필요하겠나. 헤매거나 틀린 길이었으면 돌아오면 될 뿐인 것을.”


노인이 부슬부슬하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달관한 듯한 낙관적인 태도에 하유성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는 노인의 말대로 사람 세 명을 세워놓은 것 같이 거대한 비석에 손을 대고 말했다.


“나, 하유성. 독행자의 길을 걷고자 한다.”


그러자 아주 미세하게, 하유성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은 빛이 나무 위쪽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비석으로 이어지고, 비석과 연결된 하유성의 손을 따라 그의 몸에 깃들었다.

나무가 떨린 것 같기도 했다.


빛은 그의 등에 자리 잡았다.

하유성은 마치 남만의 야수궁 사람들처럼 등에 문신 같은 게 새겨지는 걸 느꼈다.


‘아직은 뿌리와···정도인가.’


“이제 자네에게 뿌리가 자리 잡았을 것이네. 독행자의 길을 이끄는 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침엽 상록수. 다른 나무와 잘 섞이지 않고 홀로 고아하게 자라는 나무지. 자네의 레벨이 오를수록 나무가 자랄 게야.”


“그럼 이제 저는 1레벨이군요.”


“그렇지. 경험과 업적을 충족하면, 등에 있는 흉이 따끔거릴게야. 그러면 이곳에 와서 레벨업을 신청하면 되지. 아, 참고로 물론 꼭 이곳에서 할 필요는 없어. 레벨업에는 직접적인 방식과 강제적인 방식이 있거든.”


“강제적인 방식···?”


“자연 레벨업이라고도 하고. 최대치 성장이라고도 하지. 드물지만 경험과 업적을 한계치까지 쌓았을 때, 개척자가 어디에 있든 레벨이 오르는 현상을 말해. 내로라하는 강자들은 다 그 자연 레벨업을 겪었다는군.”


“강자들이라면··· 그 방식에 더 좋은 점이 있는 겁니까?”


“바로 알았네. 통계적으로 경험과 업적을 많이 쌓고 레벨업을 시도할수록 좋은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니, 가능하면 한 번 시도해 보게. 물론 그렇게 레벨업을 미루고 아끼다가 미궁에서 콱 죽어버리는 놈들도 한둘이 아니니까 조심하고···. 자연 레벨업을 할 때가 되면 초록빛에 휩싸이면서 상처가 치료되는데···그래 지금 자네 몸에서 나오는 빛처럼······어어?”


노인은 원래의 노련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하유성에게서 나오는 빛을 바라보며 허둥거렸다.


“1레벨에 오를 때는 빛이 나지 않는데···.”


하유성은 방금 나무에서 들어온 빛이 몸 안에 가득 차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등으로 모여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에 있는 나무는 이제 작은 밑동까지 새겨져 있다는 걸.


“혹시 밑동까지 생기면 2레벨입니까?”


“자네··· 설마?”


“생긴 것 같군요. 뭐가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체 신고식 때 미궁에서 뭘 하다 나온 건가? 아무 힘도 없는 신참이 ‘길’을 정하자마자 2레벨에 오른다니, 전대미문이네!”

노인은 급기야 언성을 높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시키는 대로 마석을 하나 가져왔을 뿐인데.”


“허 참, 더 높은 레벨의 개척자를 상대로 학살이라도 벌였나?”


“사람을 상대로도 레벨이 오릅니까?”


“상대가 마력을 이미 몸에 쌓은 개척자라면 그렇지. 자네 설마 정말로···?”


“······아닙니다.”

하유성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하유성이 2레벨만큼의 경험을 쌓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1레벨 파티 사냥이 전제되는 필드 보스를 거의 단신으로 둘이나 잡아냈고, 구성원 대부분이 2레벨인 파티의 공격을 혼자 받아냈으니까.

비록 두 번째 무리는 직접 죽이지 못했지만, 그런게 가능했다면 2레벨이 아니라 3레벨의 개척자였을 터.

그럼에도 그들이 죽으며 남긴 마력의 일부가 하유성에게 들어왔고, 그 또한 업적으로 인정됐기에, 그는 2레벨의 조건 차고 넘치는 경험을 쌓은 것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노인은 하유성을 숫제 괴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개척자들이 잠든 사이에 독과 암기를 사용해 몇이나 슥삭해버린 희대의 살인마를 보는 눈빛이랄까···.

그도 아니면 마물을 유인해 양패구상을 노린 다음 지친 놈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냉혹한 히트맨이라던가···.


노인은 자신의 상상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유성이 복잡한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전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기야 말을 떨며, 하유성에게 존대를 시작했다.


“이제··· 설명은 다 끝났으니 돌아가면 되네···됩니다. 레벨이 오르며 받은 축복은 차차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하유성은 어색한 시선을 외면하며 포권으로 인사하고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하유성은 그를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접수처를 나오니 학센이 웬 다른 남성과 시비조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형적인 전사처럼 두툼한 체구의 학센과는 달리, 상대방은 날렵해 보이는 몸에 날카로운 안광을 가진 중년이었다.


“이번에 주워 온 우리 애는 장난이 아니라니까? 무려 마나가 충만한 세상에서 내려온 태생 마법사라고!”


“우리 애는 마석을 네 개나 가지고 왔어!”


“흥 어디서 운 좋게 단체로 죽은 시체라도 뒤졌나 보지.”


“뭐가 어째?”


남자의 말은 묘하게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하유성은 이번에도 적당히 못 들은 체하며 돌아왔다.


“흥 이 녀석이냐? 몸이 학센 네 녀석처럼 우락부락하지 않은데 전사가 맞아?”


“나는 쾌검이 주력이오. 그리고 전사가 아니라 무인이요.”


하유성이 대답했지만, 남자는 들은 둥 만 둥 하고 계속 학센에게 말했다.


“말투를 보니 은근 나이가 있나보네. 낙오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젊으니까, 영 이상하단 말이지. 무인은 뭐야 또. 전사의 길을 걸으면 전사지.”


“···저 녀석은 ‘독행자의 길’을 택했다.”

학센이 마지못해 말하자 남자가 폭소했다.


“뭐? 크하핫! 어디서 또 겉멋만 든 녀석을 주워 왔구나. 알랭 상단은 이번에도 꽝이군 그래. 클락슨 님이 알면 기뻐하시겠어.”


상황을 보니 각 세력이 낙오자들을 데리고 와서 경쟁 비슷한 걸 시키는 것 같았다.

하유성은 일말의 불쾌감을 느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아무리 편하게 대해주고 편의를 제공해 줬어도 저들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장난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충분히 힘을 기를 때까지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라우드, 네 쪽은 어떤 녀석이지?”


학센이 그렇게 물었을 때 마침 한 여자가 와서 라우드라고 불린 남성에게 다가왔다.


하유성은 그녀의 목에도 자신과 같은 목걸이가 채워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연한 초록빛 머리에 아름다운 외모, 길쭉한 귀를 가진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뭐야. 아인종 여자인가? 저런 타입은 금방 독립해서 떠나버리는데.”


“그러면 어때. 빚만 다 갚으면 클락슨 상단 출신이라고 이름값만 받아먹는 거지.”


“뭐, 낙오자들은 살아남기만 하면 중박은 치는 거니까 말이지···.”


학센은 그렇게 말하며 탐탁지 않은 눈으로 하유성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마법사라는 상대편 낙오자를 보니, 독행자의 길을 선택한 게 영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낙오자가 본인 말고도 또 있었소?”


“그래. 원래 한 기수에 대여섯 명씩 떨어진다. 정확히 어디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어서, 몇몇 세력이 경쟁하듯 주워가지. 뭐, 그래봐야 살아남는 건 늘 한둘이 고작이지만. 이번에도 너희 두 사람이 신고식을 통과한 전부라더군.”


“숫자가 꽤 되나 보오.”


“몇 년에 한 번씩, ‘미궁 역류’가 일어난 다음에는 꼭 낙오자들이 떨어지지. 뭐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그래서 무슨 축복을 받았지?”


“아직 잘 모르겠소만···.”


“큭큭 독행자의 길이니, 뭐 이상한 눈썰미 같은 거라도 받았겠지.”

옆에서 라우드가 낄낄거렸다.

그리곤 자기네 소속 낙오자에게도 같은 걸 물었다.


“어이! 엘프라고 했었나? 너는 무슨 축복을 받았지?”


“제 이름은 로엘리아입니다. 엘프는 저희 종족의 이름입니다.”

로엘리아라고 소개한 엘프가 여전히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그래. 뭐 우리 미궁 도시에 특이한 아인종이 한둘인 줄 알아? 너밖에 없으면 종족이나 이름이나 그게 그거지. 아무튼 묻는 말에나 대답해.”


“······저는 정화의 적성이란 능력을 받았습니다. 오염된 식수나 나무를 정화할 수 있고, 관련 속성으로 공격 마법을 구사한다면 언데드에게도 잘 통한다고 하더군요.”


“호오, 엄청 유용한 능력을 받았군. 역시 너는 복덩이다.”

라우드가 감탄하며 말했다.

학센은 마찬가지로 감탄했지만, 상대 쪽 낙오자였기에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러면 앞으로 조금 불편해질 수도 있겠군. 어차피 알려질 것, 지금 말하도록 할까.’


유치한 경쟁에 어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대우가 좋지 않아질 걸 걱정해 지금 말을 꺼내기로 했다.


“무슨 능력을 얻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소만···. 레벨은 하나 더 올랐소. 2레벨이라더군.”


그러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학센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라우드의 얼굴은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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