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소 리 소 설 단 편 집- 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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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소리
작품등록일 :
2024.08.23 01:30
최근연재일 :
2024.09.0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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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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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사유

DUMMY

1. 관찰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뜨자마자 칠흑 같은 어둠이 보였다.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는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된 듯하다. 발목은 가지런히 줄에 묶였다. 의자 뒤로 묶인 손목에서는 금속의 촉감이 느껴진다. 수갑인가? 차갑다.


온몸에 힘이 없고 전반에 알 수 없는 무거움이 느껴진다. 마치 약에 취해 있는 듯한 기분이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에 이미 내 귀는 눈앞에 누군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후, 후. 차분한 숨소리. 나는 두려움을 가지는 동시에 이성적으로 현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두려움은 조금씩 나를 잠식해갔다. 누군가 내 앞에 있다.


“킥킥킥”


내 앞 의자에 앉은 사람은 묘한 웃음을 내뱉으면서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은 커다란 바위처럼 무거웠다.


“마취가 생각보다 기네? 하지만 내가 인내심이 높다는 걸 기억하나 모르겠네?”


젊은 여성의 목소리다. 기억? 나와 아는 사이인가? 하지만 약이 덜 깼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렷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지? 아니, 그보다 본인이 누군지는 기억이 나? 자신이 몇 살인지, 뭐 하던 사람인지, 기억나?”


그녀는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저기 말이야. 기억상실이라는 소재 진부하지 않아? 기억을 잃은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기는 비련의 주인공이 아니야. 반면, 나는 아주 지독한 악당이지!”

“자기는 말이야. 곧 이 악당에게 고문을 당할 거야.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그녀는 아주 흐뭇하게 말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여자가 날 고문할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


“음, 왜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가르쳐 줄 수가 없어. 그런 설정이랄까? 자기가 고통을 제대로 느끼고, 그래서 나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수 있을 때 시작을 할게. 그동안 자기는 마음의 준비를 해두면 좋겠어.”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날 멍하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히 비추어졌다. 검은색 후드로 가져진 그림자 밑으로 하얀 하관이 보였다.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그녀의 새빨간 입술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억지로 부정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2. 프로페셔널


덜컹. 갑자기 난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서서히 다가왔다.


“오지 마! 저···저리 가!”


건조하게 말라붙은 내 성대에서 갈라지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아, 이제 말이 나오는구나? 그럼 슬슬 마취가 풀렸겠네?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히익”


그 서늘한 음성에 온몸의 소름이 올라왔다.


“어머, 리액션도 좋네? 자기의 두려움에 찬 표정, 아주 자극적이야.”


그녀는 천장에 달린 백열등을 켰다. 갑자기 펼쳐진 노르스름한 불빛에 눈이 찡긋 감긴다.


“난 이 오래된 노란색 빛깔의 전구가 참 좋아. LED 시대에 이런 오래된 것 하나쯤 있어도 좋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지하 창고 같았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나는 양말에 팬티 차림이었고 살짝 풀린 넥타이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주변에 잡동사니가 여럿 보이지만 전부 비닐봉지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다. 바닥은 하얀 종이나 신문지 등이 잔뜩 깔렸다. 순간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프로다.


“자기 같이 오래 산 남자도 싫진 않아. 어떻게 내 얼굴은 기억이 나?”


노란 조명을 뒤로한 채 그녀가 말했다. 쌍꺼풀이 없는 찢어진 눈이 낯이 익지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화장기가 없는 앳된 얼굴이지만 무언가 으스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른 체형에 여자치고 상당히 큰 키인 것 같다. 대략 170cm는 넘어 보였다.


“다···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전혀 안 납니다. 아니, 그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요.”


“흐응, 그래서?”


“대···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내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 풀어줘요, 풀어달라고!”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녀에게 호소했다.


퍽.


“으아아아아악!”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종아리에서 감당 못 할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송곳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송곳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래, 당신 비명을 들어보니 충분히 고통이 느껴지나 보네. 이제 시작해도 되겠어.”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3. 배변패드


“아빠, 일어났어요? 마침 막 커피 내렸는데, 한 잔 줘요?”


햇볕이 따뜻한 부엌, 출근 준비를 끝낸 딸이 커피를 따른다.


“그래, 역시 아빠 생각해주는 건 우리 딸밖에 없구나.”


나는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 이러실까?”


뒤돌아본 딸의 얼굴이 마치 연필로 쓱쓱 그어둔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진다.


헉. 나는 꿈에서 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멍하다. 내가 묶인 의자가 바뀌었다. 치과에서 시술 시에 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나는 젖혀진 의자에 눕혀져 있고 옆에는 링거액이 걸려 있다. 진통제 성분이 들어 있는지 지금은 고통이 많이 줄었다. 대신 정신이 마치 취한 듯이 멍하다. 정상적인 판단이 어렵다.


“자기, 일어났어?”


아래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검은 지퍼형 후드를 입은 그녀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선혈이 낭자한 종이와 신문지를 치우는 것 같다.


“혹시 자기 강아지 키워 봤어?”


“뭐···요?”


“이거 말이야, 강아지 배변 패드야. 오줌을 기가 막히게 흡수하지. 근데 피도 마찬가지거든. 맨바닥에 혈흔이 남으면 곤란하잖아? 루미···뭐더라? 아, 루미놀! 루미놀 반응이라도 나오면 큰일이라고!”


“그래서 맨 밑에 신문지를 깔고 위에 배변 패드를 올려놓은 거야. 예전에는 미드 보고 따라서 비닐을 깔았어. 근데 그건 치우다 보면 피가 흘러서 바닥에 떨어지더라? 게다가 나 좀 칠칠찮아서 말이야. 신문지 까는 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운 거지만 배변 패드는 내 아이디어야. 강아지 키워 본 적이 있거든. 죽였지만···.”


그녀는 휘파람을 날리며 바닥에 깔린 패드와 신문지를 치운다.


많은 패드와 신문지가 붉게 물들어 있다. 전부 나의 피일 것이다. 며칠간 느낀 고통을 생각하니 다시금 고통이 드리운다.


“내가 게으른 성격인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걸? 다시 세팅하기 귀찮으니까 오늘은 고문 안 하기로 했거든.”


황당한 이야기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범의 범위를 벗어난 그녀의 발언에 반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호호호, 농담이야. 귀찮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는 나이가 있잖아? 몰아치면 금방 죽을 거 아냐? 건강을 유지해야지. 난 게으른 만큼 참을성도 있어. 자기 컨디션이 좀 돌아오면 다시금 고통을 즐기게 해줄게.”


나는 계속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의 광기는 조금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만, 고통이 덜한 지금 상황에서 나는 최대한 두뇌를 활용해야 한다. 이 지옥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내 눈에 비치는 나의 두 손은 꽤 쭈글쭈글하다. 내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스스로가 젊지 않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다. 또한, 내가 입고 있는 피 묻은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적어도 내가 화이트칼라 관련 직종에서 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 맞아. 내가 왜 자기 셔츠랑 넥타이를 입게 놔둔 줄 알아? 난 하얀 천에 붉은 선혈이 번지는 느낌이 너무 좋아. 황홀해. 그리고 넥타이를 당겨 목을 조르는 것도 흥분되거든.”


그녀가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지금 확실한 사실은 저 여자가 확실히 미쳤다는 것이다. 날 고문할 때 그녀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보인다. 그 광기는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여자와 나는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나에 대한 것 이상으로 그녀에 대한 것이 궁금해졌다. 그녀가 나에게 원한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 쾌락을 위한 고문 행위일까? 자신을 모르고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


그렇게 두려움은 점점 배가 된다.


4. 화상

“으아아아아악”


“흐흐흐, 많이 아파? 작열 통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중 하나라고 했던가?”


내 발목 아래에 타들어 가는 고통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녀는 대야에 놓여진 내 발 위로 강산을 몇차례나 부었다. 타들어가는 극렬한 고통 속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 졌다.


“어이? 엥 벌써 기절해? 늙은이는 생각보다 더 약하구나. 좋은 공부가 되겠어.”


희미해진 시야 밖으로 딸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전히 연필 선으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나에겐 딸이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최악이야. 아빠?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야? 당신은 소름 끼쳐!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나보다 어린 여자랑!”


딸은 두 손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물이 끓던 커피포트가 쓰러졌고 뜨거운 물이 딸의 손에 뿌려졌다.


“꺄아아악!”


딸은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어느새 나의 눈이 감겼다.


“허···허억.”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 덕분에 다시금 꿈에서 깼다. 이 꿈은 단순한 악몽은 아닐 것이다. 나의 기억의 파편인가? 나를 고문하던 여자는 지루한 듯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팔짱을 낀 두 손에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깼어? 발에 응급 처치는 해뒀어. 항생제 투여도 했으니까, 아마 감염은 안 될 거야. 진통제도 일단 넣긴 했는데 꽤 아프지? 히히.”


그녀는 졸린 눈으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암, 내일도 기대해.”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하품을 했다.


“이···이런 의료기기는 어디서 났지? 치료법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혹시 당신 의사나 간호사인가?”


나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어 다소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건 왜 물어? 다 클럽에서 배운 거잖아?”


그녀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클럽? 무슨 클럽을 말하는 거지? 나와 관련 있는 건가? 그리고 당신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에 궁금증을 표했다.


“그게 왜 궁금하지?”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개를 나에게 가까이 댔다.


“그렇게 며칠째 고문당하고 있으면서 고작 그런 게 궁금해?”


“그 장갑을 잠시 벗어 주겠나?”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궁금했던 속마음을 드러냈다.


“왜 장갑 안을 궁금해하지?”


그녀는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화상 자국은 없었다. 그녀는 적어도 내 딸은 아니었다.


“아···. 아아! 자기, 설마? 그런 거야? 자기, 딸에 대해서 기억해낸 거야? 하하하.”


그녀는 갑자기 크게 웃으며 나를 조롱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으하하, 설마 나를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거야? 자기네 딸이 간호사니까? 그래서 손에 화상이 있는지 확인한 거고?”


그녀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나에게 딸이 있었구나? 직업은 간호사고!”


“그래. 당신은 딸이 있었지.”


그녀는 실눈을 뜨며 대답을 이어갔다.


“잠깐, 있었구나? 있었지? 과거형이라고?”


“정말 제멋대로의 기억 시스템이네. 대체 뭘 기억하는 거야?”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 딸! 내 딸은 어디 있나?”


“바보 같으니! 네 딸은 이미 죽었잖아!”


“뭐? 내 딸이 죽었다고?”



5. 혼돈


“내가 자기 딸을 죽였다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커다란 혼돈에 이르렀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자인가? 그것도 가족을?


“내가 말이야. 작년인가 아주 인상적인 미국 드라마를 봤어.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 드라마야.”


그녀는 갑자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배경이 정신병원이었어. 미친 사람들을 막 전기로 고문하더라고. 그럼 제정신이 돌아올 줄 아나 봐.”


그녀는 흥분하며 말했다. 잊고 있었다. 저 여자는 날 또 고문할 것이다.


“내가 네 기억 장애를 한번 치료해 볼게. 드라마랑 비슷한 장비 구하느라 돈 많이 들었어. 뭐, 클럽 카드로 산 거지만.”


그녀는 SF에서나 봤을 법한 괴상한 장비를 내 머리에 씌우고 자동차 배터리에 집게를 이었다. 난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다시 나는 꿈을 꾼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과 비슷한 음습한 공간에 서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철장이 보인다. 나는 마치 교도소에 갇힌 죄수 같다.


“꺅!”


쇠창살 밖으로 한 여성의 비명이 들린다. 나는 창살을 잡고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밖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젊은 여성에게 전기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고문하는 남자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제···발 그만 해요. 너무, 너···무 아파요.”


젊은 여성이 그만두라고 외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철장 안에 갇혀 있어 그녀를 구할 수가 없다.


“이봐! 그만둬! 대체 저 여자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던 찰나 갑자기 전기 고문을 멈추었다. 내 말을 들은 줄 알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어느새 그녀 앞에는 거대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의 얼굴을 부여잡고 물속에 집어넣는다.


“이건 말이야. 내가 직접 당해보고 체화한 기술이야. 교과서적인 방식이지만 꽤 효과적이야. 내가 잘 알지. 난 결국 동료의 이름을 팔고 이 고통에서 벗어났거든!”


남자가 물고문을 이어가며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낯이 익었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그 와중에 여자는 힘을 다해 저항해본다. 그러나 작은 체격을 가진 그녀의 저항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피해자의 손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제길! 그만두라고!”


누군가 아버지는 강하다고 했던가? 나는 철장 문을 여러 번 격렬하게 발로 차 문을 튕겨냈다. 마치 슈퍼히어로 녹색 괴물 같았다. 나는 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고문하는 남자를 쓰러트렸다.


남자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고 난 그의 마스크를 벗겼다. 그건 나였다. 고문을 하던 남자는 바로 나였다.


“킥킥. 눈치챘구나? 너 자신을!”


쓰러져 있던 나는 날 밀치고 일어났다.


당황해 아무것도 못 하는 나에게 수차례나 주먹을 가격했다. 꿈속이라서일까? 고통이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가격을 당한 내 두 눈두덩이는 크게 부어올라 눈이 반쯤 감겼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사이에 서 있는 나를 보았다. 고문을 이어가려는 도플갱어는 수저를 딸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마저 감고 말았다.


지옥 같은 악몽에서 눈을 뜨자 내 앞에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체념한 채 물고문을 받아들였다.



6. 당신이 나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이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의 숨 막히는 고통은 어제였을까? 아니면 오늘인가? 고통 속에 시간 과념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이 바뀌었다. 단정하고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정장 차림이었다. 평소와 달리 화장도 신경 써서 한 듯 보인다. 몸매도 날씬한 그녀는 사회에서 많은 남자를 울렸을 법하다. 유난히 붉던 그녀의 입술이 오늘은 좀 더 빛이 난다.


“결혼식이라도 가나?”


고통이 만성이 된 나는 콜록거리면서도 쓸데없는 유머로 여유를 보였다.


“항상 마지막에는 예를 갖추라고 했지. 뭐, 나도 가끔은 이런 옷을 입어보고 싶기도 해.”


그녀는 내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리고 옆 수레에는 여러 고문 도구가 보인다. 거기에서 익숙한 숟가락이 반짝였다.


“이제 나의 눈을 뽑을 차례인가?”


“아니, 아직 순서가 남아 있.... 어, 어라? 눈 뽑는 절차를 기억했나 봐?”


“내가 내 딸의 눈을 그랬던 것 같아.”


“그래? 뭐, 당신도 그랬겠지.”


그녀는 나를 조롱하는 듯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꿈에서 나는 웃고 있었어. 마치 지금의 당신처럼 말이야. 아마 난 당신과 같은 것 같아. 처음에는 당신이 단순히 나에게 하는 복수 같은 것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아닌 것 같군, 우린 동류야.”


나는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말했다


“전에 클럽이라는 것을 말했지. 혹시 나도 그 클럽의 멤버인가?”


“자기는 우리 클럽의 창립 멤버야. 아직 완벽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닌가 봐?”


“나···나도 당신처럼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던 사이코패스란 말인가!?”


“인제 와서 놀란 척하기는···. 슬슬 짜증 난다. 그냥 얼른 기억해내시지?”


그녀는 다리를 꼬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체 그 클럽이란 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도 스카우트 당할 때 그렇게 자기에게 물었어. 자기가 뭐라 했더라? 프···리···, 일루메···. 그 비밀결사 비스름한···. 아, 몰라. 내가 당신처럼 공붓벌레 타입은 아니잖아? 대충 똑똑한 사이코패스들의 동호회 같은 거였나 그럴걸?”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들의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아, 그거. 아마 그거일 거야. 하여튼 뭐라고 어려운 말로 설명해서 난 지금도 모르겠어. 맞겠지?”


“내가 그런 단체의 소속된 괴물이란 말이군.”


이런 충격적인 발언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당신이 맘에 안 들거나 찝쩍대는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도 짭새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많이 가르쳐줬지.”


그녀는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밑에 애견용 배변 패드를 봐, 이젠 내가 응용도 하잖아? 내가 공부는 안 해도 머리는 좋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 클럽을 배신이라도 하려 했던 건가? 그래서 날 나의 방식으로 처벌하는 거고?”


“무···뭐라더라? 자기가 앞과 뒤의 내용이 같은 문학 기법이라고 했는데 수···뭐지?”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수미상관법 말인가?”


“응, 그거! 그거 맞아. 자기가 그런 소리를 했어.”


“처음과 끝이 같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난다. 고문으로 시작해서 고문으로 끝난다. 나란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끝나는가?”


나는 끝난다. 즉,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 순간 머릿속 많은 정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 속에서 과거의 편린들이 펼쳐진다. 스마트폰에서 사진을 슬라이드 하듯이 몽타주를 이룬다.


“나는 곧 죽는 건가?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응, 자기는 어차피 곧 죽을 몸이야.”


“그래서 고문이 필요했던 거야? 날 완성하려고!”


“당신은 말이야. 당신이 지금까지 남에게 해왔던 짓 그대로 당해보면서 죽고 싶었던 거야. 고통을 주던 역할에서 고통을 받는 역할로 말이야. 당신은 그야말로 완벽한 대칭을 중시하잖아?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완성이라고 했어.”


“우리는 서로가 괴물이 된 기원 같은 것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어. 어차피 뻔한 거 아냐?”


그녀가 양손으로 내 머리를 움켜쥐며 말을 이어갔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거나, 무슨 학대나 충격적인 일을 당했거나, 가정환경이 어쩌구하는 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겠지. 우리 클럽 가입 조건 중 하나가 가족의 살해잖아?”


“직계 가족의 살해! 맞아, 그래서 난 내 딸을···.”


“그래, 바로 자기가 그랬어! 우린 그냥 그런 무자비한 괴물인 거야.”


“그래. 그 년은 살 가치가 없었어.”


나는 모든 것을 깨달은 동시에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우리의 탄생보다는 끝이 어떨지가 항상 큰 관심이었어. 난 나를 수미상관법으로 완성하고 싶었어.”


어느새 나의 표정은 차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게 당신과 나의 진면목이야.”


그녀가 이어 말했다.


“참나, 이제야 알겠어? 난 당신 부탁대로 한 것뿐이야. 당신이 기억을 잃기 전에 나에게 부탁했잖아! 자신을 자신의 규범대로 잔인하게 고문해 달라고 말이야.”


“그래, 넌 내가 찾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지. 신고식 때 내가 너에게 비올라라는 활동명을 주었어. 클럽 가입과 탈퇴는 고문으로 시작해 고문으로 끝나야 해. 나는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탈퇴하는 거야. 그래, 수미상관법은 클럽의 규칙이기도 하지.”


“나는 말이야, 고민 없이 승낙했어. 나도 자기 스타일대로 해보고 싶었거든.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 나는 그냥 내 키는 대로 막 째고 찌르고 해왔는데 자기의 그 고문 기술들이나 그 고통을 탐구하는 자세는 정말 배울 만했어.”


“그래, 넌 그냥 슬래셔였지. 원초적으로 사람을 난자하는 그런 아마추어였어. 하지만 잡히게 놔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원석이었어. 그 다양한 도구와 창의적인 방법이란!”


나는 비올라의 내면의 광기를 추억하며 말했다.


“난 사실 클럽 가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가 말한 완전범죄를 위한 세팅, 그게 정말 좋았어. 잡히지 않으면 끝도 없이 괴롭히고 죽일 수 있는 거잖아.”


“내가 널 가해자로 택한 이유야. 죽음을 앞두고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고통을 체험해보고 싶었어. 피해자의 시점에서 말이야. 그래서 클럽에서 개발한 일시적 해리성 기억장애를 일으키는 약물을 스스로 투여한 거지.”


“나는 모르는 사람 고문하는 것 같아서 재미는 좀 덜했어. 아는 사람 괴롭히는 게 더 재밌잖아.”


“그래, 지금은 더 잘 즐길 수 있겠네. 죽기 직전에 기억을 찾아 버린 것은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끝을 내자. 자, 저 숟가락으로 내 눈을 파내!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날 고통스럽게 죽여줘.”


나는 환희에 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응, 싫어.”


그리고 그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엉뚱한 답을 말했다.


“무···뭐? 싫다니 무슨 소리야.”


“그냥 싫어.”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의 계약이었잖아!”


“내가 말이야? 고통이란 게 뭔지 생각해봤어. 내가 생각이라는 걸 다 했다고! 끔찍하고 괴롭고 그래야 고통인 거잖아. 근데 당신은 고문을 원했고 나에게 살해당하는 죽음을 원해. 그게 당신을 완벽하게 만들어. 완벽한 삶과 죽음을 가지는 것이 정말 끔찍하게 괴로운 고통이야?”


“음, 아닌 것 같아. 이제 당신을 고문하지 않겠어. 수액 꽂아가며 그냥 계속 살려 놔야겠어. 난 당신처럼 의사가 아니니까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당신이 원하는 고통과 죽음을 얻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문일 것 같아.”


비올라는 그렇게 말하며 수액 줄에 프로포폴 주사기를 꽂았다. 나의 입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그녀를 설득할 단어를 뱉지 못했다.


“당신은 말을 너무 잘해. 그러니까 이제 당신과 말도 나누지 않겠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해답을 찾으려 두뇌를 최대한 돌려보았다. 그러나 포근하게 다가오는 잠에 침식되어간다. 그렇게 잠이 든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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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림 소 리 소 설 단 편 집- 몽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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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이 닳다 24.09.07 2 0 33쪽
2 썩은 사과와 파리 떼의 왕 24.08.31 4 0 12쪽
» 고문의 사유 24.08.23 11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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