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너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
서른 즈음에 기형도의 복수가 시작된다.
응축된 건 언젠가 터진다.
내 안에 기형도가 서른 즈음에로 터졌다.
피가 분출하듯, 막 나오는 거다.
나는 기형도를 다스리기로 했다.
힘들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걷다보니 기형도의 시가 보이는 거다.
별을 따듯 시를 따면서도
나는 따뜻한 복수를 꿈꿨지만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애초 따스한 복수같은 건 없다.
모든 건 운명이다.
운명 인거다.
받아들이되 다가오는 내일 또 나는 진격하리라.
김명수는 내 우측 뺨을 태권도로 배운 발차기의 발로 때렸다.
최나연은 내가 촌놈이라고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했다.
나는 이 두 연놈을 언젠간 조져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맨날천날 그 생각만 하고 사는 것도 말도 안 되지.
직장일로 바쁠때는 잊어버릴 때도 있는 법이고.
하지만 대개 잊을만 하면 두 연놈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어느 날은 명수가 떠올랐고, 다른 날은 나연이가. 다른 날은 순서가 좀 바뀌거나 뒤죽박죽.
어떤 흐린 날은 둘이 타는 차가 정면충돌로 죽어버리면 어떨까? 하고 로또 확률같은 상상을 하기도. 손에 꼽지만.
그러다 내 일이 엉망진창이 되거나, 내 앞 날이 막막해서 참 거지같다고 여겨질 때면....
꼭 두 연놈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이다.
이건 억지춘향격이긴 한데...
그렇다고 내 마음이 그런 걸 어떡하나.
죽이고 싶은 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일 뿐일진대.
하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명수는 고등학생때, 나연이는 대학교 1학년때 스친 인연이었을 뿐인데, 고작 이것 가지고 죽이는 것은 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 내가 비록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민에 불과하지만, 내 인생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인다고 하면 죽이기야 하겠지만, 나는 겁이 많아서 자진하지도 못할 판이고, 그렇다고 걸음이 빠른 것도 아니어서 바로 검거될 판인데...그러면 판결 받고 감방을 가야한다는데...그건 정말 죽기보다 싫은 게 되니, 나는 그냥 원상복귀로....속편하게 이대로 가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왜 두 연놈은 그처럼 안 좋은 기억을 남겼던 것일까.
내 나이 불혹이다. 이제 그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운명인 거다. 빼도 박도 못하는.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명수의 올라차는 발을 두 손으로 잡아다 냅다 밀어 넘어 뜨릴 수 있을까?
그리고 최나연, 고것은 나를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는데... 어디든 찾아가서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네가 그렇게 잘 났냐, 이런 개같은 년아! 나도 싫어 이 년아, 줘도 안 먹어 이 씨발x아!’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하지도 못할 거면서...
근데 상상만 해도 오줌이 지릴 만큼 짜릿하다.
와 이 맛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거지.
사실 최나연보다 김명수가 조금 더 밉다.
이유야 뭐 내 영혼이 말랑말랑 할 때 나를 때린 놈이니까.
말랑말랑한 게 수축성이 좋은 점이 있지만, 다들 알다시피 수축성이 좋은 공도 너무 세게 때리면 안으로 움푹 패이듯 들어와서 다시는 탄력성을 찾지 못하는 거와 비슷하다고 할까.
내 영혼이 그랬다.
탄력성 회복불가다.
찌그러진 채, 움푹 찌그러져 있어 이걸 다시 끄집어 팽팽하게 하려면, 공도 칼같은 걸로 째어 안에다 무얼 넣은 후 밀어야 원상회복의 형태가 나오듯이,
나또한 뭔가 내 속을 갈라서 그 찌그러진 걸 펼치도록 밀거나 유도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어 최나연을 만난 대학교때를 지나서면서도 그 찌그러진 곳을 회복 못하다가 이렇게 서른 즈음에를 넘어 불혹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온게 줄기차게 나온 복수적 상상인거다.
가령 예화 하나가 코란도 차량이다.
이십대 중반 쯤 중고로 구입한 쌍용의 코란도 검정색을 몰고 다닐 때 되게 묘한 상상을 한 기억이 난다.
알다시피 코란도 차가 참 묵직하다. 배기량 2900cc에 마력은 비록 150마력이 안되지만 벤츠 엔진이 얹어 있는데, 무게가 상당하다. 아마 2톤 언저리.
이 코란도로 웬만한 차 밀어붙이면 아작이 나는 거다.
그때 나는 최나연 뒷조사는 감히 엄두도 못 내었다. 지금처럼 구글링 되는 시대도 아니었고.
하지만 집요하게 파지 않더라도 김명수의 근황은 동창 몇 몇을 통하면 알아낼 수 있었다.
집 주소부터 전화번호까지. 다니는 교회도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직장이야 당연지사 알았지. 그러니까 녀석을 쫓다가 이 코란도로 들이 받아 날려버리는 상상을 꽤 했었다.
녀석의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흐르고 눈깔도 빠져나와버리거나, 거기다 내장도 터져 피냄새에 똥냄새까지 가득 풍기면서 죽어가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가학적인 상상이었고, 상상만으로도 나는 후련했지만 곧장 후회하곤 했었다.
이 놈의 정이라기보단, 태생적으로 마음이 너무 순하다.
아 이건 때려 죽여도 못 고친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는 말.
나는 나 자신을 보면 그게 맞다고 본다.
무튼 그런 수많은 상상과 미움과 증오와 회한과 미련이 반복된 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금까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이라고 하면....
와 이거 내 인생이 너무 쫌스럽게 불쌍한 거 아닌가.
그런데 어쩌나. 이건 사실인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문학인이다.
문학인이라고 속으로 뻐기고 다니지만, 나는 안다. 내가 등단될 실력이 아님을. 그래서 진작에 포기했다. 아니 포기란 게 없이 공모전에 작품을 내긴 했지만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이며 시를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서평을 쓰지 않으니 사실 머리에 남는 게 없더라.
뼈저리게 남기는 게 없으면 그건 그냥 무위인 거다.
그래도 뭐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
그러다 최근에 시에 무척 빠지게 되었는데 도통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런 맥락도 이유도 없이 이렇게 시에 빠질 수가 있나.
집에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하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시집이 무려 100권이 넘게 있는데, 사실 그걸 다 읽은 것도 아니다. 문학 석사 수업을 할 적에 참고문헌으로 지정된 시집은 집중적으로 읽기는 했었다. 대표적인 시인은 박준이라거나 진은영, 이장욱, 안도현, 김소연 까지 였나.
근데 며칠 전 기형도의 시집을 읽다가 나는 시와는 별개랄 수 있는 ‘서른 즈음에’란 어구가 머리통을 그것도 세게 갈겨버리는데, 이 충격이 정말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거와 진배 없을 정도 였다.
당시 이유를 정말 몰랐는데, 난 며칠이 지나서 그 단순한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불혹이었다. 마흔이 넘어 나는 뭐 한 가지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기형도 시인과 ‘서른 즈음에’는 연관된 맥락도 없는 바.
알다시피 그런데 기형도 시인이 일찍 죽었다. 그걸 아는 내 무의식이 그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무턱대고 ‘서른 즈음에’ 이은미라거나 김광석을 끄집어 낸 것이고...물론 이은미는 생존 가수이지만....
그러다 내 나이 마흔인데, 서른 즈음에부터 지금까지 난 제대로 한 게 없네?
핵폭탄의 핵이 폭발하는 것처럼 그 인자가 그 순간 폭발한 거 였다.
나는 정말 무슨 영화를 찍는 배우처럼 숨을 컥컥거렸고, 콧김을 벌렁대며 쉬다가 주저앉다시피 했다.
집에서 혼자 있다가 그랬는데..
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강력한 욕구가 튀어나오는 걸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단 한번도,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수행하지 못한 복수의 칼을 꺼내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나는 김명수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녀석의 핸드폰 번호는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핸드폰에는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다.
혹시 실수라도 전화를 할까봐. 그래서 문구점에서 내 돈 주고 산 양지수첩 3천원짜리 맨 뒷장에 녀석의 핸드폰을 적어놓았다.
신호음이 간다.
두 번, 세 번, 네 번, 안 받는다.
그러다 내가 끊으려고 할 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녀석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하자면 무려 21년 만에 녀석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거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고등학교 때랑 똑같았다.
- 여보세요?
- 명수냐?
- 너, 너 누구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녀석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게 그냥 장난전화는 아니구나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아무리 사이가 안좋아도 텔레파시란 게 쥐똥만큼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녀석은 전화를 건 사람이 자신을 아는 사람이란 걸 직감했던 거다.
이대로 계속 침묵을 유지하면 전화가 바로 끊어질 수도 있기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그러니까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그 말을 녀석에게 던졌다.
- 너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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