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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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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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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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린

DUMMY

데본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교관 역을 하던 기사가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첨언하지도 않은 채 큰 키로 데본을 내려다보았다.

위압적인 자세와 마치 추궁하는 듯한 눈빛.

훈련 교관 정도의 기사가 귀족, 그것도 가문의 장자를 상대로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만하며 불손한 태도였다.

기사단이 완전히 계모 편으로 넘어갔다더니 그 말이 진실인 듯했다.

다행히 데본은 전에도 이런 추태를 보아넘기던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기사를 깔아보듯이 하며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이곳은 기사들의 훈련장입니다. 몸도 아프신데 그만 별채로 돌아가시지요."

"내가 방금 네게 질문을 한 것 같으냐."

그 한마디에 훈련장의 공기가 싸해졌다.

아무리 허수아비 도련님이라도 일단은 가문의 장자.

심지어 그 유명한 레니가 성에 버티고 있기까지 하니, 기사로서도 자신이 실수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짧은 정적이 지나간 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소인이 도련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에 그만···."

사과하면서도 변명을 덧붙이는 기사에 데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칼을 찬 레니가 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기사가 파랗게 질려 눈치를 살폈다.

일반 생도들도 무슨 사단이 날 거라 두려워하는 낌새였다.

데본은 아직은 공공연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니를 돌아보며 태연한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채로 돌아가시지요, 누님."

"네가 여길 갔다고 로지가 그러더구나. 그래서 나도 한 번 와 봤는데···."

레니의 눈동자가 흘낏 기사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바른 대로 고하라."

"···저, 저는 그저 도련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또 같은 소리.

데본은 짜증을 참고 레니를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기어이 한 생도에게서 대화의 전문을 듣고, 차가운 눈으로 기사를 쳐다보며 웃지 않으니만 못한 미소로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래? 일개 교관이 내 동생의 건강을 내놓고 걱정해주다니 참 고맙구나. 답례로 나도 우리 가문의 기사가 안녕한지 이번 기회에 살펴야겠다."

"아, 아가씨."

"남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자가 과연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내가 봐주지. 목검을 들어라."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사양 말고. 세 번은 말하지 않겠다."

끝내 기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검으로 혹독하게 두들겨 맞았다.

도중에 그의 눈에서 분기와 더불어 반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치솟았으나, 레니가 결코 봐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기사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기를 전부 꺾어놓은 뒤 데본에게는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내심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던 데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도들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아까 그의 눈에 띄었던 여자 생도가 공교롭게도 맨 앞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찰나 데본은 천지가 울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아는 얼굴이 맞았다.

하지만···.

ㅡ 아슬린!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그리고 최후의 여기사.

수많은 강자의 목숨을 거둔 그 악한을 상대로도 지지 않고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뒀던.

"······."

그녀가, 지금 스타인 가문 기사단의 생도로서, 꿈 속에서보다 한참 앳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


"도련님."

"······."

"도련님."

"······."

"도련님!"

날카로운 로지의 목소리에 데본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며칠 전 훈련장에서 본 여자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만약 꿈 속 기사 아슬린이라면.'

나이대가 맞지 않았다.

검으로 산 세월이 최소 30년, 그가 해방되었던 때 아슬린은 서른 살 즈음인 듯했다.

반면 훈련장의 여자는 어려도 1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낳은 아이가 혹시?'

그리 생각해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자신이 미래에 관여하는 일이 적잖을 터인데, 그 간섭으로 운명이 틀어져 버린다면.

세계는 대륙을 구할 용사 하나를 영영 잃게 되는 셈이었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일.

골머리를 앓던 데본은 로지 몰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마석을 삼켰다.

그 동안 취한 상급 마석이 1개, 중급 마석이 5개, 하급 마석은 셀 수 없었다.

이제 하급 마석은 그에게 충실한 안정제 역할을 했다.

아직 몸이 부실한 데다 남 눈에 보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활동을 자제하고는 있으나 마음만은 이미 성 밖으로 뛰쳐나간 지 오래였다.

그런데 대문 밖은커녕 별채 주변을 나가는 것도 제법 눈치가 보이니 좀이 쑤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한 번 훈련장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마음이 답답한 와중에 그의 의문을 약간이나마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정규 훈련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교관은 그와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내 훈련장에는 자유 훈련을 위해 머무는 생도들만 남았다.

그마저도 슬금슬금 데본의 눈치를 보다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거나 아예 짐을 싸 숙소로 들어가버렸다.

데본은 민망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아슬린을 닮은 여자가 있는지 찬찬히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곧 훈련장 한쪽에서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데본이 온 것도 모르는지,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오직 검과 맞은편의 허수아비에만 집중하며 열심히 날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

데본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지만, 지난 며칠 고민했던 것 이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이래서야···.'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괜히 다가갔다가 좋은 흐름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일.

끙끙대던 그의 시야에 돌연 무언가가 들어왔다.

"······?"

기시감도 잠시,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가 펼치는 검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타인에서 가르치는 가문 특유의 검술과는 사뭇 달랐다.

날렵하면서 절제된 움직임.

힘보다는 유연성을 강조했으며, 다소 투박한 대신 합리와 경제성을 추구한 동작.

검이 허수아비를 찌르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일련의 흐름에서 우아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본은 그 검술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

다만···.

곳곳에 헛점이 엿보였다.

얼마 안 가 그는 마음 속으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연결부에 눈에 띄는 끊김이 있다.'

핵심만을 노린다기에는 잔가지가 종종 튀어나오는 데다, 자세 역시 매우 안정적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또···생각을 거듭하던 데본은 그녀의 검술이 꿈 속 기사의 것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저 여자가 기사 아슬린인지 아니면 혈육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저 독특한 검술의 전신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꿈 속 기사에게 서툴렀던 시절이 있었다면 저랬을까 싶게 몹시 흡사했다.

다시 고민하던 데본은 지나가는 생도를 하나 불러세웠다.

"뭐 좀 묻지."

"예, 예? 말씀하십시오."

"저기."

그의 손가락이 아직도 검 연습에 매진 중인 여자를 가리켰다.

"저 생도. 이름은 뭐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나?"

"아, 아슬린이요?"

기사의 눈에 순간 빤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이름은 아슬린이고, 열여섯에, 중앙 사람은 아닙니다. 듣기로는 북방의 한 소수민족 출신이라더군요. 훈련과 연습에만 매진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않아 저도 더 이상은 잘 모릅니다.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아마 도련님께서 직접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래?"

데본은 그 뒤로도 몇 가지를 더 물었으나 딱히 실익은 없었다.

그는 기사를 보내고 자신도 별채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다.

훈련장의 아슬린은 꿈 속 기사와 이름이 같고 쓰는 기술도 비슷했지만, 그것만으로 그 둘이 동일 인물이거나 혹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마음은 좀 더 두고 보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정할 시간은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


늦은 밤, 데본은 환자가 약을 달여먹듯 평소처럼 마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근래 들어 그의 상태는 점점 더 호전될 뿐더러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예민한 감각은 그대로였으나 전과 같은 진절머리나 짜증은 거의 없었다.

고통도 없다시피 했으며 마나를 쓸 때 코피가 나기까지의 시간도 길었다.

마지막 마석을 꺼내 삼킨 데본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몸이 점차 안정되고 있다고는 하나 마석에 담긴 힘이 피를 타고 내려가 심장을 건드리는 순간만큼은 그로서도 주의가 필요했다.

그때, 마력에 한껏 날카로워진 귓가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최소한 둘 이상의 남녀가 실랑이하는 소리였다.

곧 데본은 웃음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장 검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레니의 부관이 곧장 그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어딜 가십니까?"

"날 따라와라."

밝은 귀와 마나 덕분에 현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사내 둘과 여자 하나가 풀숲에서 엉켜 있는 것을 목격했다.

사내들은 여자의 옷을 벗기는 데 어찌나 열중했던지,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도 듣지 못한 채 희희낙락하고 있다가 뒤늦게 데본의 기척을 알아채고 미간을 구겼다.

"뭐야? 누구냐?"

"무엄한 놈! 데본 도련님이시다. 너희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부관이 데본 대신 그들에게 일갈했다.

성 안에서 일하는 자라면 성질 나쁜 첫째 도련님의 이름 정도는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데본의 이름을 듣자 그들은 주춤하며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들이 틈을 보인 사이 아래에 깔려 있던 여자가 발로 윗놈의 사타구니를 뻥 찼다.

억센 발길질에 올라타 있던 남자가 억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그 옆에 서 있던 남자는 움찔하여 동료를 내려다보더니, 데본을 힐끔 보곤 허겁지겁 도망갔다.

데본은 홀로 남아 끙끙 앓는 남자를 마나로 기절시킨 뒤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냐?"

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내심 한숨을 쉰 데본은 그녀를 바삐 숙소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소속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사나운 여자였다.

"다쳤느냐?"

"아닙니다."

"그럼 밤이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라. 가는 길 잘 살피고. 이 사내는 내가 처리할 것이다."

그 말에 그녀는 망설이다가 꾸벅 인사한 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풀숲에서 나오자 얼굴에 달빛이 비쳤는데, 얼핏 스친 눈가에 분함과 수치가 묻어 있었다.

부관이 기절한 사내를 끌어내는 동안 그 뒷모습을 보던 데본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

아슬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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