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탁
“뭐 묵을 곳이 없다고? 어제는 어디서 잤어?”
“마구간이요...”
“대체 왜? 말이나 건초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잖아.”
“돈이 없어서요. 마구간은 30록에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거든요. 오늘은 의뢰도 성공하지 못해서 갈 곳이 없어요.”
“너 집에서 가출했지?”
“아, 아니에요. 제대로 부모님한테 모험가가 되겠다고 얘기하고 나왔어요. 초기금으로 2만록도 주셨고요. 하지만 모드릭에 들어오고 나서 소매치기를 당해서 그만...”
“하아,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자. 이 시간이면 근처 여관에 빈방이 없을 거야.”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그래 인마, 오늘은 마구간에서 잘 돈도 없을 거 아냐.”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답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유실의 머리에 딱밤을 날리며 말했다.
“뭐든지 하겠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이 녀석 계속 마구간에서 지내면서 목욕도 안 했던 모양이다. 홍차를 끓였을 때는 몰랐으나 방안이 유실의 몸에서 나는 말의 각종 분변 냄새로 가득했다. 코를 부여잡고 유실한테 물었다.
“너 마지막으로 씻은 건 언제야?”
“음 2주는 넘은 것 같아요?”
“어쩔 수 없군. 너 일단 목욕부터 해야겠다.”
이 여관은 각 방마다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지구의 호텔 같은 느낌이다. 5성급 호텔은 비교할 바가 못되도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모텔 정도는 될 것이다.
“저... 꼭 씻어야 하나요?”
“그 상태로 침대에 올라가게 놔두겠냐? 빨리 욕실로 들어가!”
유실한테 알아서 씻고 나오라고 하기에는 불안했다. 마치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고양이한테 자유롭게 목욕하라고 하는 느낌이다.
‘잠깐, 고양이 라면 스스로 물로 씻으려고 할까?’
불안한 마음에 유실이 들어간 욕실로 같이 들어갔다.
“에, 패트릭님?”
아니나 다를까 유실은 옷도 벗지 않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야 옷부터 벗어.”
유실은 부끄러워하면서 옷을 벗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 하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애는 왜 남자인데 미소녀의 외모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저 녀석은 남자다, 저 녀석은 남자다.’
유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최대한 의식하려고 하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녀석 역시 물을 싫어한다. 도망치려는 유실을 붙잡고 의자에 욕실용 앉힌 뒤에 온수를 뿌렸다.
“흐갸아악”
“어이, 똑바로 안 씻으면 길바닥으로 쫓아낼 거야.”
유실에게 협박을 하고 비누를 꺼내들었다. 지난번에 핀한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아내가 만들었다고 그랬었나? 아껴 쓰려고 했지만 이놈 몸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려면 이거 밖에 방법이 없다.
유실에게서 눈을 돌린 채 머리와 꼬리와 온몸을 비누거품으로 에워싼 후 다시 온수를 뿌렸다.
‘녀석 귀엽게도 생겼네. 외모가 미소녀라 그런가? 어이쿠 내가 미쳤구나, 유실은 남자다, 유실은 남자다.’
유실의 몸에서 거품을 씻겨낸 후 그를 온수가 담긴 큰 대야에 집어넣고 같이 들어갔다.
‘으아아, 피로가 날아가는 이 느낌 최고구만.’
무심코 유실 쪽을 보았는데,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 버렸다. 그것은 마치 흉기, 결코 미소녀 외모의 소년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지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리는 유실은 상남자였다.
문득 지구에서 보았던 성인의 비디오가 생각났다. 거구의 흑인 남자가 배우로 나왔던 그 영상의 색상만 다른 것이 눈앞의 현실에 있었다.
‘큭 이게 패배감인가?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다.’
그것에서 눈을 돌리니 유실의 가슴에 붉은색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분명 백랑족의 특징 중 하나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유실, 이 보석같이 생긴 건 뭐야?”
“아, 이건 애석이에요.”
유실의 말에 따르면 백랑족은 가슴 중앙에 애석이라는 보석같이 생긴 것이 박혀 있는데 어떤 것에 성공하면 몸에 흡수되어 신체가 진정한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백랑족은 수인족 중에서도 희귀한 편으로 이처럼 가까이서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보석이 박혀 있는 수인이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목욕을 마치고 유실과 방으로 돌아왔다. 유실에게 맞는 옷이 없어 많이 크지만 내가 입던 잠옷을 입혔다. 그러자 그는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띤 채 자신이 입은 옷의 냄새를 맡았다.
‘수인족의 특징인가? 세탁한 것이라 이상한 냄새가 나진 않을 텐데...’
“패트릭님의 냄새가 나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입던 옷인데.”
그 말을 듣고 유실은 부끄러운지 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그렇군요.”
‘아니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수인족은 심리가 특이한가?’
방안의 마력 전등을 끄기 전 유실한테 말했다.
“유실 침대에서 자.”
“네? 침대가 하나인데 그러면 패트릭님은 어디서 주무시나요?”
“이 침대 넓어, 같이 자면 되지.”
이 방은 원래 2인용이라 부부나 연인도 묵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방안의 침대 역시도 특대형으로 그동안 혼자서 쓰기에 너무 컸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일까, 유실과 함께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유실이 말했다.
“저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같이 자본적은 처음이에요.”
“어려울 땐 돕고 사는 거지. 난 애를 바닥에서 재울 정도로 차가운 인간이 아니야.”
유실의 모습이 귀여워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계에서 막내로 태어나 처음으로 남동생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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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몸이 무엇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유실이 내 몸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네.’
“유실 일어나 아침이다.”
“으음 조금만 더요.”
녀석 아침에 약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대로 자게 놔둘 수는 없지.’
유실을 한 팔로 들어 올린 채 찬물이 담긴 양동이 앞으로 가서 자고 있는 그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정확히 표현하면 세수시켰다.
“푸우읍, 끄악”
“유실 일어나서 스스로 세수해.”
“으으윽, 패트릭님 너무해요.”
옷을 갈아입으니 배가 고팠다. 늘 그렇듯 여관에서 주는 20록짜리 식사를 하기엔 오늘은 유실이 있다. 아직 어린 친구한테 전투식량 같은 값싼 음식을 먹이기엔 양심이 좀 찔렸다.
“유실, 여관 앞에 식당으로 가자. 아침 사줄게.”
“네? 아침을 먹어도 돼요?”
“너 말이야, 여태까지 아침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모드릭에 와서 하루에 한 끼 이상 먹어본 적이 없어요.”
“참고로 그 한 끼에 먹은 것은?”
“아, 저 빵이에요.”
유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길드에서 비상식량으로 판매하는 빵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비상식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격은 2록으로 모험가라면 저것을 식사를 위해 섭취하지 않는다. 그저 길거리에 돌멩이와 같다.
“하아, 빨리 따라와. 진짜 식사가 뭔지 알려줄게.”
여관 앞의 식당은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다. 그저 동네에 있는 평범한 식당. 여기도 40록이면 평범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유실한테는 꼭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유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 메뉴를 주문했다.
“내가 알아서 주문할게. 사장님 여기 6번 정식 2개요.”
6번 정식 그건 이 식당에서 가장 비싼 메뉴다. 그래봐야 200록이지만 제법 훌륭한 구성으로 식사가 나온다. 비프스튜에 매쉬드 포테이토, 겉바속촉한 바게트, 수제 샐러드에 알맞게 구워진 스테이크, 후식으로 셔벗까지 제공한다.
‘평소에는 거의 먹을 일이 없지만, 애한테는 맛있는 걸 먹여야지.’
“패트릭님 이거 진짜 다 먹어도 돼요?”
“흐르는 침이나 닦고 먹어라.”
유실은 정신없이 먹었다, 손으로. 테이블 매너나 맛을 논하기 전에 그가 정말 허기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잔뜩 굶주렸던 모양이다.
‘아침이라 식당에 손님이 없는 게 다행이군’
음식을 폭풍과 같이 먹고 난 후 유실이 말했다.
“패트릭님 음식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요? 저 앞으로 그 빵 못 먹을 거 같아요. 어떡하죠?”
“애초에 그건 평상시에 먹으라고 만든 음식이 아니야. 앞으로 안 먹어도 돼.”
식당에서 나온 뒤 유실과 함께 길드로 향했다. 유실한테 길드의 의탁 제도를 소개할 생각이다.
의탁이란 길드가 신인 모험가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숙련된 모험가를 통해 훈련도 시켜주되, 그 훈련관과 함께 길드에서 지정한 의뢰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의탁한 모험가에게는 월급 형식으로 소정의 금전도 지급된다. 즉, 신인 모험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이다.
유실과 함께 길드 건물로 들어가니 헤린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패트릭씨와 유실씨.”
“어 안녕.”
“안녕하세요, 헤린씨 좋은 아침이에요.”
“헤린, 이 친구한테 의탁을 제안해 줘.”
“네 알겠습니다.”
“음? 의탁이 뭔가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헤린은 나와 유실을 1층 방으로 안내한 뒤 유실한테 의탁 제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어요.”
“유실 앞으로 모험가로서 성장하고자 한다면 길드에 의탁하는 게 좋아.”
“음... 결정했습니다! 저 의탁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유실은 길드와 2년간의 의탁을 계약했다. 이걸로 경력 높은 모험가가 유실을 훈련하면 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패트릭씨, 유실씨를 훈련 부탁드립니다.”
“에? 지금 뭐라고?”
“패트릭씨, 유실씨를 훈련 부탁드립니다.”
“이봐 농담이지? 난 금등급이라고, 신인을 훈련하는 단계가 아니잖아. 그런 일은 동등급이나 철등급 모험가가 하는 거지.”
“네 원래는 그렇습니다만, 지금 길드에 인력 부족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금등급이 할 일이 아니잖아.”
“패트릭님 저로는 안 되나요?”
유실이 많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윽 귀여워, 이러면 거절하기 어렵잖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금등급인 패트릭씨한테 거부권은 없습니다. 길드 권한을 사용할 거라서요.”
길드 권한 그것은 금등급 이상의 모험가에게 길드에서 지정한 의뢰를 수행하도록 의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거부할 경우 은등급으로 강등된다. 그렇기에 금등급과 백금등급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이건 너무하잖아.”
“그럼 은등급으로 강등하시겠어요?”
“끄읍, 의뢰 수행하도록 하지.”
“네 그럼 이 서류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서류에 서명하고 나자 헤린이 이어서 말했다.
“그럼 패트릭씨 유실씨의 의식주를 부탁드립니다. 금액은 길드에서 매월 지급하겠습니다.”
“에? 그 소리는 내가 이 친구를 키우라는 얘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길드 건물에 사람이 묵을 만한 빈방이 없어서요. 그리고 인력 부족으로 유실씨를 훈련 외에도 능동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서류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입니다만 안 읽어보셨나요? 그래도 이미 서명하셨네요.”
“서명 안 하면 강등이라며! 제길, 난 혼자가 편하다고.”
“그럼 패트릭씨, 유실씨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강등하기는 싫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유실의 훈련관이 되어버렸다. 훈련을 위해 유실을 나와 같은 여관의 옆방에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유실이 완고하게 같이 있고 싶다고 하여 동거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룸메이트이자 친구가 생긴 줄 알았었다. 처음에는...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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