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뤼필
작품등록일 :
2024.09.16 19:51
최근연재일 :
2024.09.23 20:20
연재수 :
7 회
조회수 :
80
추천수 :
12
글자수 :
51,795

작성
24.09.17 20:40
조회
14
추천
2
글자
14쪽

악연 재판 (1)

DUMMY

선도위원회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운을 뗐다.

먼저 위원회가 열리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한 교수가 차례를 넘기자 세닐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발언권은 피해 학생 측에 있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녀는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피해 학생 대변인 역을 맡은 조교수 세닐다입니다. 제 얼굴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작년까지 시간강사였다가 올해 처음 전임교원이 됐습니다.”


세닐다는 시선을 움직여 자신을 향한 면면을 살폈다.

다양한 나이대, 서로 다른 표정들.

그것을 차례차례 마주 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슬론 아카데미에서 반년 동안 보낸 시간은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지금껏 경험했던 어떤 시간과 비교해도 이보다 행복할 순 없었어요. 비록 조교수일 뿐이지만, 시간강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율성을 갖게 됐거든요.”


고요히 실내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평소에 관심 있던 주제로 논문 작성을 시작했는데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어요. 자료 찾으랴 수업 준비하랴. 교수직의 고충이 확확 와닿더라고요. 내색 없이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세닐다의 말을 듣던 교수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갓 들어온 신입의 소감은 언제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법이다.

구성원이 된 신입이 어려움을 토로하며 오랜 경험을 다진 선임들을 추켜세운다면 과연 누가 듣기 싫어할까?


말은 즉, 세닐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응이 미적지근한 이유는 하나였다.


어떤 의미든 얼마나 좋은 의도를 담고 있든 모든 말은 꺼내야 할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환영회나 회포를 푸는 자리라면 모를까.

이곳은 선도위가 진행 중인 아슬란 아카데미 본관 4층 공의실.

신임 교수의 소감을 듣고 앉아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쏟아지는 의문의 파도 한가운데서 세닐다는 꿋꿋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갔다.


“바빴던 1학기의 끝이 다가왔을 때, 저는 기뻤습니다. 드디어 논문 작성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니까요. 도서관으로 가 어떤 참고문헌을 빌려올지, 뼈대만 갖춰놓은 논문에 어떻게 살을 붙여갈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들떴어요.”


교수들의 의문이 점차 좁혀지는 미간으로 표출되는 가운데, 세닐다가 말을 멈췄다. 일순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방학 동안 논문 작성이 아닌 다른 활동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게 될 줄은요.”


달라진 어투.

그에 따라 교수들의 표정에도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그 활동이 학술지를 읽는 것도, 신간 마도서를 탐색하는 것도, 마력 증진을 위해 훈련하는 것도 아닌 학생들 간의 시비에 대해 조사하는 것일 줄은 더더욱이 말입니다.”


교수들의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풀린다.

동시에 집중도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됐다.

이 흐름을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 세닐다는 파죽지세로 몰아붙였다.


"처음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저는 외면했습니다. 손님을 응대하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꼈거든요. 하지만 다시 한번 울리는 노크에 문을 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학생이 교수실 밖으로 나간 후, 자리로 돌아온 저는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문서를 전부 구석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죠. 처음 맞이한 방학, 이 시간을 오로지 두 학생만을 위해 사용하기로요.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렇게 행동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충분히 납득시켜 줬습니다."


그즈음에 이르렀을 땐 이전의 뒤숭숭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교수들의 눈동자에 깃든 흥미가 증거였다.

위원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교수들의 얼굴에는 권태로움과 희미한 짜증이 엿보였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곳에 모여있는 교수 대다수가 마법 교육계에서 이름을 알아주는 저명한 이들이라는 것. 따라서 자부심을 가지다 못해 자만심까지 품은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이는 자연스럽게 콧대 높은 교권으로 이어졌다.

일개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교수가 시간을 소모해야 하느냐는 인식은 당연하거니와 들이는 정신력마저 아깝다 여기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제국 제1 아카데미인 아슬론. 선도위가 개최된 것만으로 아카데미의 명성에 먹이 칠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구태여 애들 일을 공론화시켜 공동체에 누를 끼칠 필요가 있는가?


개최 의도 자체를 납득하지 못한 이들.

그들은 일을 이토록 키운 세닐다에게 대놓고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분명 그러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세닐다는 고개를 움직여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변화는 뚜렷했다.

처음에는 눈이 마주치는 이들이 손에 꼽았다.

하지만 지금은 좌중에 있는 전원과 시선이 맞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관심으로 일관됐던 다수의 눈빛에 호기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궁금증과 탐구욕이 깃든, 마정석을 바라볼 때 마법사들이 으레 지어 보이는 그것으로.


'좋아.'


세닐다는 생각했다.

계획한 대로 완벽히 진행되고 있다고.

청문회를 시작할 때 가장 염두에 뒀던 과제.

그것은 귀를 열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연설가도 귀를 닫은 청중 앞에 서면 벙어리와 다름없게 된다.

그녀는 이어질 본론 못지않게 공을 들여 도입부를 구성했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대성공이었다.

닫힌 귀를 열었으니 이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내용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입을 뗀 세닐다가 지그시 힘을 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해드릴 이야기는,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이자─”


말을 하며 시선을 움직였다.

인근 좌석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일순 흔들리는 눈동자에 세닐다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모두를 납득시킬 거라고.

반드시 억울함을 풀어주겠노라고.


무언의 의지를 전하며 시선을 옮겼다.

바로 옆에 있는 남학생은 처음 찾아와 사정을 설명할 때의 흔들림 없는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저 올곧음이 변함없길 바란다.

그렇기에 세닐다는 입 모양으로 굳은 일자를 새긴 후 선포했다.


“─어떤 한 학생이 무고한 두 사람의 인생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심지어 파멸시키려고까지 든 간악한 악행에 대한 고발입니다.”


들끓는 마음을 내뱉듯 선언하고 고개를 옮겼다.

정면을 향하는 세닐다의 눈은 방금 전 두 학생을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냉혈하고, 싸늘하다.

뜻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의지를 내비치는 벼린 칼날과도 같은 눈빛.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그녀의 눈초리는 대상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소년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

자신의 처벌에 관한 이야기가 오감에도 남 일이라는 듯 무심히 턱을 괴고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

세닐다의 입이 벌어졌다가 천천히 닫혔다.


"······."


부들대는 입술이 맞닿고, 어금니가 깨물렸다.

수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보조하고 진행하면서 학생에게 악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 학생들은 어떤 실수든 웃어넘길 수 있는 병아리 같은 존재들이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 아이가 한 말과 행동,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 뒤에 어떤 모습이 감춰져 있는지 안다.

그녀의 눈에 그는 학생이 아니었다.

주위 학생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하루빨리 내쫓아야 할 불순 종자일 뿐.


그때 돌연 소년의 고개가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친다.

세닐다의 눈빛이 결코 호의를 띄고 있지 않음에도 소년은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도리어 세닐다가 동요했다.

휘말리지 않기 위해 시선을 회피하는데.


“······!”


찰나의 스침.

하지만 분명히 보았다.

다시 그에게로 초점을 가져간 세닐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위원회가 시작되고 줄곧 무표정하던 소년의 얼굴에 변화가 있었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모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절대로 나와선 안 되는 표정이었으니까.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입술 끝이 올라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소년의 인격을 생각했을 때 다른 의도란 있을 리 만무하니까.

의심의 여지 없는 비웃음이었다······.




* * *




······터진다.

터진다, 진짜 터진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와닿는 건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우우웅-

무언가 가열차게 돌아가는 소리.

내 뇌는 전례 없던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위원회가 시작된 이래, 주변에서 뭐라 떠들어 대든 오로지 상황을 정리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일단, 가장 먼저 처리한 건 '수용'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임 속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 현시점이 첫 에피소드의 마지막 무대라는 것. 공략하기 최적의 여건이 갖춰진 상태라는 것까지.

이해와 납득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고 현상 자체를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이해 안 되는 거야 당연히 많았지만,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다 집어치우고 그렇다 치자고.


진짜 문제는 받아들인 이후부터였다.

떠오르는 게 하나둘이 아니지만, 일단 가장 큰 문제를 꼽자면 현재 내 몸이 주인공이 아닌 악역의 몸뚱아리라는 거.

단순히 인지, 수긍으로 끝낼 일이 아닌 빠른 판단과 결단력으로 속결시켜야 할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 이 ‘안프리드 윈 데헬란트’라는 놈을 조지는 방법밖에 생각 안 해봤고······ 공략법이 완벽히 적용된 현 상황이 나한테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연유로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인근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쟤 뭔 소리 하는 거야?


뒤에서 속삭이는 음성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세닐다가 보였다.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전임교원이 되고 교수 생활을 하며 느낀 소감에 관한 것이었다.


홀로 선 세닐다와 주위를 둘러싼 교수진.

처음 보는데도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도 멈춘 채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닐다가 말을 멈춘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시 숨을 가다듬는 듯.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좌중을 훑는 모습.

심장이 뛰었다.

일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렇기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세닐다의 입이 떨어지고 나온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수백 번이 넘도록 본 대사.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듣는 목소리가 주는 전율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방학 동안 논문 작성이 아닌 다른 활동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게 될 줄은요.”


그때를 기점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

전말을 꿰고 있는 나로선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었으나.

그럼에도 눈을 떼지 못한 건 내용이 아닌 수단 때문이었다.


무관심했던 좌중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말의 전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쉴 새 없이 밀고 당기는 호흡,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후 꺼내 드는 본론······.

내가 아는 세닐다의 모습 그대로였다.


차후 전개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그녀였기에 수많은 장면과 대사를 보았다.

세닐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화법을 구사할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다 아는데도, 압도돼 버렸다.

이 순간이 게임의 한 장면이었다면 얼이 빠진 채 감상했을 터.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렸다.

현실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맹렬한 충격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게 뭐냐고?

뭐긴 내가 실시간으로 좆돼가고 있다는 거지.


‘정신 가다듬어. 집중해라, 집중······!’


여러 감정의 격랑으로 혼돈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 시선을 옮겼다.

창문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구름.


평화로운 모습을 눈에 담으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찬물에 몸을 담근 듯 빠르게 식는 온기.

격동하던 감정을 마저 흘려보내자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큼 머리가 말끔해졌다.


'간단히 생각하자.'


심히 잣된 상황에 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내겐 누구보다 강한 이점이 있었다.

조금 전 그러했듯 나는 세닐다가 어떤 말을 할지 전부 알고 있다.

이 회의가 어떻게 흘러가고, 심지어 어떤 결론이 날지조차 꿰고 있다.


문제는 시점이 바뀌었다는 것 하나.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었던 내 입장에서 가장 성가신 전개로 갈 수 있을까.

수백, 수천 번 보완하고 수정해도 노출되는, 이곳만큼은 찌르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허점들.


'······아.'


그리 생각하니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꽁꽁 묶인 실타래의 매듭이 드디어 한 가닥 풀린 것이다.


정신이 고양되고 사고가 본격적으로 회전하는 가운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옮기자 세닐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을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 맹렬한 기세를 쏘아 보내는 눈빛.


그것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생각 따위 추호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극도의 희열이었으니까.


‘그래, 이게 세닐다였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합당하지 않는 이에겐 일말의 동정도 내비치지 않는 냉담함.

올가미를 씌운 적이라고 방심할 인물이 아니었다.

책무를 맡은 이상, 그녀는 사력을 다해 내 숨통을 조여올 터였다.

원하는 결과를 손에 쥘 때까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늘게 들이켠 숨 한 올에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이후 몸속 어디서도 이전의 막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맥박만이 고요히 박동할 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 안내 24.09.19 8 0 -
7 등위재배정 심사 (1) NEW 5시간 전 1 0 22쪽
6 일단락 (2) 24.09.21 5 2 13쪽
5 일단락 (1) 24.09.20 10 2 14쪽
4 악연 재판 (3) +2 24.09.19 16 3 18쪽
3 악연 재판 (2) +1 24.09.18 13 2 20쪽
» 악연 재판 (1) 24.09.17 15 2 14쪽
1 프롤로그 24.09.16 21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