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뤼필
작품등록일 :
2024.09.16 19:51
최근연재일 :
2024.09.23 20:20
연재수 :
7 회
조회수 :
81
추천수 :
12
글자수 :
51,795

작성
24.09.19 20:40
조회
16
추천
3
글자
18쪽

악연 재판 (3)

DUMMY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마음먹었지만 한 번 더 되뇔 수밖에 없었다.


“정말 게임 속 세계에 왔구나······.”


모니터 화면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로 목도하는 경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간지러움을 줬다.

이곳이 수천수만 번 들락거리며 내 집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아슬론 아카데미라는 점에서 더더욱.


흘러가는 정경을 눈에 담길 십여 분.

문득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면 좋을지 고민이 들었다.

원래 살던 투룸이 아닌, 이곳에서의 집 말이다.


출근을 했다면 무조건, 당연히 퇴근을 하게 되듯 등교를 했다면 하교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로비 바닥에서 노숙하다 입 돌려먹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일반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이런 류의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 기억상실 온 사람이었다.

안프리드 윈 데헬란트로의 빙의가 진행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기억은 과거 강우진의 기억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대로 아카데미에서 미아 되는 거 아니야? 돈은 좀 있긴 한데.”


괜스레 품에 있는 지갑을 어루만졌다.

아까 살펴본 바로 꽂혀 있는 지폐가 제법 됐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

일단 주변이라도 둘러보자는 심산으로 정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또각또각-


검은 정복을 차려입은, 누가 봐도 자신이 집사임을 숨기지 않는 복장의 노인이 내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따라간 결과, 나는 유유히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에 자연스럽게 몸을 의탁하는 중이다.


뇌는 홀라당 까먹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소파의 푹신한 질감.

마음이 차분해진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우선 위원회 건은 계획대로 판결이 보류됐다.

원래의 안프리드라면 선도위 내내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대들다 자멸했겠지만, 나는 침착하게 시간을 버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음 선도위까지 남은 시간은 3일.

그때까지 상황을 역전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한다.


‘확실히 처리해야겠지.’


공개 재판이라고 나한테 유리한 건 아니었다.

원래라면 아카데미 학생들의 과반수가 귀족이니 같은 신분으로서 득을 봐야 맞겠지만, 안프리드가 쌓아놓은 업보가 업보다 보니······.


타고난 권위와 몸에 밴 품위, 격조 높은 언사를 귀족의 소양으로 배우고 자란 명문가 자제들에게 나는 같은 귀족으로 취급하기도 꺼려지는 양아치일 게 자명하다.


쉽게 말해 강의실 내에 거렁뱅이 두 명 사라지는 것보다 허구한 날 분위기 흐려대는 미꾸라지 한 마리 방류하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할 수 있다는 거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운전석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창 너머 풍경에 주목했다.

현재 차량이 정차해 있는 곳은 어느 저택의 앞.

21세기 건폐율과 용적률에 짜맞춰 극한까지 뽕을 뽑아 사람 살 공간을 창조해 내는 시대를 향유한 김유한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미친 공간 낭비 건물로 보였으나······.


이곳 세계 귀족들에겐 평균임을 떠올리곤 내색 없이 차에서 내렸다.

장엄한 소리와 함께 쓸데없이 큰 대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맞아, 나 가주였지?

경비원의 인사를 받으며 정원으로 들어갔다.

풀 내음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정문에 도착했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가일이 안내한 곳은 다이닝룸이었다.


“시장하실 것 같아 미리 저녁을 준비해 뒀습니다.”


귀족의 밥상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플레이팅, 임금님 수라상 뺨치는 가짓수······!

는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소탈하네.'


몇 없는 반찬과 메인 요리 하나.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는 귀족의 이미지에 빗댔을 때 그렇다는 것뿐.

백날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내겐 이 정도로도 과분했다.


'게다가 맛있어.'


가짓수만 부족할 뿐 요리 하나하나에 들어간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빨리 삼키기 미안할 정도.

마음같아선 눈 감고 음미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으나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머리 위에 단두대 날이 덜렁거리는데 밥맛이 느껴지겠나?

···좀 느껴지긴 하더라.


어쨌든 신속하게 접시를 비우고 나니 집사는 직무를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결 편하게 내부를 기웃거릴 수 있었다.


'여긴가?'


적당히 저택을 훑다 내 방을 찾아냈다.

2층에 있는 방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끌렸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아늑함에 첫 번째 확신이 들었고 옷장에 여분의 교복이 걸려 있는 걸 확인함으로써 검증을 끝냈다.


책상에 앉은 나는 즉각 팔을 움직였다. 펜과 노트를 찾고 써 내려가는 글자.


문자는 한글이었다.

기억이 안 나서 그런 건 아니고, 이곳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뚜렷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한글을 사용하는 건 순전히 보안을 위함.

이곳에 담길 정보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내용이었으므로······.

슥슥-

번호를 붙이고 그 옆에 문장을 적는다.


<1. 선도위원회 파훼>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사안.

파훼법은 완벽해야만 했다.

어중간한 점이나 운에 기대는 요소가 있어선 안 된다.


이곳 아카데미에서 발생하는 일은 수도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제국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범세계적으로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사건들.

그것을 지켜보며 필요할 때 개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아카데미 재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필승 전략."


현재 내게 필요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나는 선도위가 진행되는 동안 그 방법을 떠올렸었다.

원래의 안프리드라면 알지 못했을 정보를 활용하여.


"문제는 어디까지 손실을 감수하느냐인데······."


현 계획은 귀족가이기에 구상할 수 있는 계략이었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생각보다 가문 상태가 여유 있어 보이지 않다는 것.


"출혈이 커선 안 돼."


1장 최종 스테이지라곤 하나, 전체 시나리오로 따지면 이제 걸음마 뗀 수준이었다.

손실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펜촉으로 지면을 몇 번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을 둘러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2시간여가 흐른 후.

자리에 복귀한 나는 다시 펜을 쥐었다.

첫 번째 안건인 <1. 선도위원회 파훼>의 아래에 숫자 '2'를 적었다.

그렇게 숫자는 3, 4, 6, 9···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굵직한 챕터와 사이사이를 채우는 자잘한 사건들을 총망라해 정리한다.

그다음에 한 것은 세계관의 인물, 능력과 관련된 세부 설정들을 기입하는 일.


기억나는 대로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적어넣었다.

수십 페이지를 완성했을 때, 바깥엔 어둠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아직 부족해.”


지금까지 작성한 건 주인공으로서 플레이한 세계의 모습을 담은 것─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을 안프리드에게 어떻게 적용시키고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 새로운 시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어차피 공개 선도위 날로 지정된 개학식까지 끼어 있는 3일간은 공백이었다.


그날 밤, 내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전등은 저택의 등불이 되어 주야장천 빛을 발했고······.

3일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 * *




사락-


평소보다 일찍 아카데미에 출근한 세닐다는 아침부터 여러 장의 서류들을 훑고 있었다.

수업 준비는 최소 전날까지 전부 끝내놓는 습관을 지닌 세닐다였기에 원래라면 그녀의 취미인 마법학 논문을 읽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책상에 놓인 서류는 그와는 전혀 딴판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원인은 4일 전 있었던 선도위.

진즉 끝나야 했을 판결이 미뤄지면서 흐름이 꼬여버렸다.


“하아, 일이 쓸데없이 복잡해졌어.”


사건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알렌이 이곳을 찾아왔을 때, 부탁을 수락한 건 순전히 감정적인 연유에서였다.

알렌과 마리는 전부터 그녀가 눈여겨보던 1학년생들이었다.


성적이 뛰어나진 않지만 분명 엿보이는 잠재성.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 집중력이 뛰어나고 말도 잘 들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평민 학생들을 보며 대견해 하는 한편 은근히 동기부여도 받던 그녀였다.


저런 학생들이 훌륭한 어른이 되어─만인의 평등을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신분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이 나라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싹을 짓밟으려 드는 손길을 도저히 방임할 수 없었다.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감안했을 때 괜한 일을 벌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후─”


세닐다는 고개를 털어내듯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비록 선도위가 공개위원회로 전환되는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흘러가긴 했다지만 오늘 잘 마무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 이후엔 평소처럼 입에 오르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내자······. 때가 올 때까진.”


그렇게 다짐하며 시간을 확인한 세닐다는 서류를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관으로 이동하며 내심 불안한 심정이 울렁였다.

오늘 결과에 따라 두 아이의 미래가 뒤바뀔 수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세닐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순간만큼은 넌 투기장에 오르는 투사야.”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각오로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자.

결연한 마음을 다지며 공의실이 있는 4층 마지막 계단을 오르다가, 모퉁이에서 한 교수와 맞닥뜨렸다.

고개를 든 세닐다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낯익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


평소 인사성이 바른 세닐다였지만, 이번엔 인사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번 선도위 때 한번 불편한 대화를 주고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놈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알았군.”


그렇기에 뒤따라 걷던 시놈이 그 말을 꺼냈을 때, 세닐다는 사레에 걸릴 뻔했다.

알았, 뭐?

저걸 저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


세닐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휙 뒤돌아 시놈을 쳐다봤다.

시놈의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세닐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알았냐고요······? 네, 아주 잘 알죠. 흑석비류에 희미하게 두 학생의 것이 아닌 다른 결의 마나가 묻어 있었다는 걸요. 그리고 그게 단순한 자취가 아닌 제가 한 행위와 같은 분석을 하다 남은 흔적이라는 것도요.”

“인멸한 증거만으로 목적을 파악하고 발현자까지 특정해 낸 건가? 그 정도 수준은 현 교수들 중에서도 드물 텐데.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겠군.”

“뭐? 자랑, 뭐요?!”


세닐다는 당황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심정을 느꼈다.


“교수가 돼서 그런 흔적을 봤으면 당장 공론화시키거나 징계를 내려야지. 다른 사람 수업도 아니고 그쪽 수업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안프리드라는 학생이 한 행동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몰라서 그래요? 자그마치 마력 자재 개입이에요. 그쪽마저 개무시한 행위라고요!"


세닐다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남의 얘기처럼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만약 그쪽의 묵인을 폭로했다면─”

“하지 그랬나.”

“그쪽도 끝, 느에?”


돌발적인 대꾸에 세닐다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어버렸다.


“그렇게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했다면 그냥 말하지 그랬나.”

“아, 아니······.”


말문이 막혔다.

사람이란 게 원래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건가?

어안이 벙벙하다가 울컥 억울함이 솟구쳤다.


'누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줄 알아?'


마음 같아선 고발하고 싶었다.

안 늦었으니 지금이라도 얘기할까 고민했던 것이 바로 어젯밤 일.

하지만, 시놈은 현재 아슬론 아카데미에서 압도적인 실력과 직무 수행 능력으로 저명이 난 교수였다.

임명된 지 4년이 채 안 됐음에도 벌써부터 차기 수석교수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지를 굳혀가는 인물.


따라서 알고 있었다.

진실을 폭로하는 순간, 이번 일은 단순 악질 학생 한 명의 퇴출 건을 아득히 벗어나게 될 것임을.


‘평소에 행실이 안 좋았던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진 시놈에 대한 인상이 나름 좋았던 그녀였다.

자기 할 일 잘하고 과묵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을지언정 수상한 꿍꿍이를 벌일 만한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문득 세닐다는 궁금증이 솟았다.


“솔직히 시놈 교수님이 대체 왜 그런 녀석을 눈감아주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 애 평소 수업 태도가 별로였던 건 둘째치더라도 그냥 평판 자체가 안 좋아요. 학생들 사이에서도 배척하는 분위기고요. 아무리 알아봐도 미담이라곤 털끝만큼도 안 나오는데······ 뭐 설마, 돈 받고 부정 입학이라도 시켜주신 건 아니죠?”


감정에 휩쓸려 말한 세닐다는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실없는 얘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시놈의 가문을 생각하면 그에게 돈 따윈 아무 유혹 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조가 생각보다 건방지게 나간 것 같기도 해서 슬쩍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 마지막 말은 조금······.”


사과해야 하나?

잃을 것 많은 처지로서 본능적으로 을의 태도가 꾸물꾸물 올라오는데 시놈이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렸다.


덜컹!


선도위가 열리는 공의실로 혼자 쏙 들어가 버렸다.


“뭐야, 삐졌나?”


근데 어쨌든 자기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건 맞잖아. 찔리는 거 없음 속 시원하게 얘길 해주던가.

궁시렁거리며 따라 들어가려던 세닐다가 문득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몸을 멈췄다.

대화에 몰두하느라 놓치고 있던 기척이 그녀의 측면을 스쳐 지나간다.


“응···?”


무미건조한 옆얼굴.

정체를 확인한 순간, 세닐다는 자연스럽게 입을 앙다물었다.

공의실에 들어가기 전 남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세닐다 교수님?”

“어, 으응?”


남학생, 안프리드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일렀다.


“저 욕하시는 건 상관없지만, 시놈 교수님과는 싸우지 마세요. 저랑 아무 관계 없으니까요.”


그럼 이만, 하고 목례로 인사한 안프리드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이할 만큼 차분한 행동이었다.

나흘 전 회의에서처럼.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조사하며 들은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인데.


‘아니, 그보다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흉본 꼴이라니······.’


낯부끄러움에 몸이 굳어버린 세닐다는 교수 몇몇이 흘긋거리며 지나간 후에야 정신을 되찾고 공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아직은 고요한 실내.

방청석엔 시놈 교수를 포함해 몇몇 인원이 앉아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나는 따로 떨어져 있는 지정석에 앉았다.

아침부터 웬 험담이 비수처럼 날아 명치에 살포시 꽂혀 들어왔지만 개의친 않는다.


뭐, 내가 한 짓은 아니어도 결국 이 몸뚱이가 과거에 한 행적들인 건 맞잖아?

앞으로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두 교수가 얼토당토않게 사이가 꼬이지 않도록 오해만 풀어줬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교복을 입은 무리가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공개선도위원회에 참여할 이른바 학생 증인들이었다.


개학식 행사 시작 전 여유 시간을 이용한 만큼 내가 속한 1학년 첼 등위 전부가 소집됐다.

곧이어 라일리히 수석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이 입장하고 다시 한번 선도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추가 자료를 보여드리자면─”


세닐다는 시작부터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주장은 추가 증거와 보조자료로 한층 더 탄탄해졌고 절제된 호소력은 자리에 모인 이들의 감성과 이성 모두를 사로잡았다.

회의는 3일 전보다 더 거침없는 속도로 진행됐다.


교수들의 질문이 나오고.

학생들의 증언이 오간다.


배심원 주장은 반반으로 갈렸다.

내 행실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

찬반 투표였으면 몰라도 증언의 역할이었기에 절반가량 동조가 나왔다는 것부터 내겐 심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쐐기.


세닐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마나를 소량 추출한 후 그것을 모래알 크기로 해체 시켜 허공에 흩뿌렸다.

불이 꺼진 실내를 유유히 떠다니는 마나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저게 내 멱살을 쥐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팝콘이나 씹으며 감상 때리는 건데.


세닐다는 논란의 마정석에서 일부 뽑아낸 마나도 같은 과정으로 분해시켜 어떠한 곳에도 조작이 없음을 기어코 증명해 냈다.


“다음은 행정실에서 받아온 명세서입니다. 해당 마정석의 구매 내역과 인증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세닐다가 숨을 가다듬었다.

교수라 할지라도 소량의 마나 잔재를 분석, 낱낱이 해체시키는 작업은 고도의 마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든.

학생을 위해 마력까지 쏟아내는 저 열정과 책임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할 말 있나?”


선도위원장인 라일리히가 나를 보며 물었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옮겼다.

회의를 지켜보는 인파, 각기 다른 면면임에도 나를 향하는 시선엔 똑 닮은 싸늘함이 묻어 있었다.

저마다 마음속으론 이미 오늘의 결과를 판정했겠지.

판결 결과가 다른 사람은 없으리라.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할 말 있습니다.”


말을 꺼낸 건 내가 아니었다.

소리가 정반대 편에서 들렸기에 모두의 시선이 이동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됐다.

잠시 후, 발언자를 확인한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의문이 떠올랐다.


─쟤 피해 학생 아니야?


그러다 금세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가기 전에 한마디 하려나 보구나.

그렇게 이해한 좌중은 곧 펼쳐질 장면에 내심 기대를 품었다.


과연 어떤 말을 꺼낼까.

증오의 고성? 아니면 통쾌함을 담은 시원한 탄성?


모르긴 몰라도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모두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다음 순간 알렌의 입이 열리고 나온 말을 예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안프리드는 죄가 없습니다. 그는 무고합니다.”


장내에 정적이 떨어졌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안프리드를 제외하고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 안내 24.09.19 8 0 -
7 등위재배정 심사 (1) NEW 5시간 전 1 0 22쪽
6 일단락 (2) 24.09.21 5 2 13쪽
5 일단락 (1) 24.09.20 10 2 14쪽
» 악연 재판 (3) +2 24.09.19 17 3 18쪽
3 악연 재판 (2) +1 24.09.18 13 2 20쪽
2 악연 재판 (1) 24.09.17 15 2 14쪽
1 프롤로그 24.09.16 21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