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뤼필
작품등록일 :
2024.09.16 19:51
최근연재일 :
2024.09.23 20:20
연재수 :
7 회
조회수 :
83
추천수 :
12
글자수 :
51,795

작성
24.09.21 20:15
조회
5
추천
2
글자
13쪽

일단락 (2)

DUMMY

하늘을 가리는 잎사귀.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끝에서 공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거진 나무에 둘러싸인 공간은 서재 하나 크기로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 한 발짝 발을 내딛는 순간, 기류가 달라진다.


바람이 멎고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기라도 한 듯한 고요.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들어가면 잡생각이 멀어지고 심장의 두근거리는 박동이 가까워진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사라진 가운데 오직 감각만이 예리하게 숨을 들이쉰다.


중심부에 다다를 즈음엔 주위를 감싸고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마을 하나가 들어설 정도의 크기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형태를 띠었다.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허···."


마나를 응축시켜 공간의 변형을 일으키고, 범람하는 변수의 패턴들을 하나하나 배제시키며 마침내 원하는 공간을 조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알기에 나는 두 번째 경험임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자자손손 장교를 배출한 집안답다고 해야 하나.”


안프리드의 가문이 군인 집안이었다는 건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서면서부터 복도에 온통 훈장을 차고 있는 초상화들이 전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안프리드의 아버지는 정복 전쟁 당시 제국군 1개 사단을 이끄는 소장이었고, 할아버지와 그 위 선대 모두 최소 여단급 이상을 지휘한 장교 출신이었다.

그런 명문가가 수백 년간 대대로 살아온 저택에 무예를 연마할 수 있는 곳이 없을 리가 없다─ 라는 생각으로 어제 집안 이곳저곳을 들쑤시다 발견한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못난 후손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도록 제가 단단히 교정시키겠습니다.”


어디서 붙어먹은 귀신이냐고 훈장 주렁주렁 단 기병대가 곰방대 들고 꿈에 출두할지도 모르겠으나, 거 좀만 기다려 보시죠.

지켜보다 보면 분명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지금부터 내가 이 망나니 개자식 안프리드에게 선사할 시술명은 다음과 같았다.


‘마개조.’


미래 없는 가문 목숨줄 붙여주면 휘두르려던 곰방대로 머쓱한 곳 긁어대겠지.

그때 되면 이용료 값은 무료로 퉁 쳐도 천불은 안 떨어질 거다.


“그럼 이제부터 눈치 안 보고 싹싹 바닥까지 긁어 먹어볼까나.”


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장 우선으로 할 것은 측정이었다.


이 세상을 이루는 근원적인 힘은 신이 내린 능력이라는 의미로 ‘권능’이라 불렸다.

어느 신에게 받았느냐에 따라 권능의 계열이 나뉘는 게 통설.

자연계, 혈계, 수계, 마계 중 인간이 받은 권능은 자연계였다.


신의 축복이자 세상을 이루는 원천, 악의 대항물로써 정의되는 자연계 권능은 흙, 물, 불, 바람, 나무, 빛, 어둠으로 그 속성이 나뉜다.

그중 안프리드의 속성은 바람.


마법 구현에 앞서 우선 마나를 불러오기로 했다.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 부분이 사실 가장 크게 염려한 부분이었다.

기억이 유실된 관계로 순수 감각에만 의존해야 했기 때문.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몸은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전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온몸으로 경쾌한 흐름이 뻗어 나간다.

몸은 자연스레 이 흐름을 한데 모았다.

파도처럼 자유분방하게 퍼지던 것들이 뱀의 형태로 뭉치고 상박과 하박을 관통한다.


꿈틀-


그렇게 도달한 곳은 손끝.

강한 의지를 동원해 끄집어 올리자 회색빛 마나가 바깥으로 표출됐다.

선도위 때 마정석에서 추출됐던 것과 동일한 색, 같은 결이었다.


여기까지는 쉽다.

기초 연성 단계였으니까.

이제부터 할 것은 진정 마나의 실용적 형태라 할 수 있는 마법 구현으로의 진입.

온 감각을 손끝에 집중시킨 후, 조금 전 느꼈던 마나의 생동감을 되살렸다.


울컥, 손끝이 간질인다.

몸속에서 끄집어낸 마나는 허공에 떠 있음에도 마치 살을 맞대고 있는 느낌을 줬다. 머릿속으로 내가 원하는 형상을 떠올리며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러고 있길 잠시.

이리저리 돌려보던 열쇠가 찰칵 맞아떨어지듯 이음새가 물리는 감각과 함께 마나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것 같던 흐름이 점차 빨라지고, 펑퍼짐하게 퍼져있던 모양은 둥그런 형태가 되었다.


이내 손안에서 완성된 바람의 형상은 작은 공과 같았다.

어엿한 마법이 된 마나를 손과 손 사이로 왕복시켰다.


“기초는 그럭저럭 다져 있는 느낌인데?”


게임에서도 단순히 키 누르면 마법이 발사되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


“게임이랑 상당히 비슷하네. 재밌어.”


다른 유저들은 뭔 마법 공부하러 왔냐며 토악질을 쏟고 탈주했던 대목이지만, 나는 이런 면이 마음에 들어 더 파고들었다.

후진 그래픽으로 봐도 끝내줬었는데··· 그걸 현실로 보고 있자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 없다.


우웅-


자신감을 얻은 나는 본격적으로 마법 발현을 시도했다.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람을 한 방향으로 강력하게 쏘아 보내는 돌풍.

바람을 날카롭게 변형시켜 운용할 수 있는 칼바람.

이 두 개가 사용 가능한 기술의 전부였으니까.


“이건 좀······.”


애초에 기대치가 없어서 실망은 안 했지만, 수준이 생각보다 처참하다.

1학년이라 해도 재능 좀 있다 하는 녀석들은 하위기술 3개에서 4개는 기본이다.

그나마 두 개면 평균에 든다고 칠 수는 있겠다만.

문제는 숙련도 상태에 있었다.


내가 구현한 거지만 돌풍과 칼바람은 허접 그 자체였다.

극초반부라는 걸 감안해도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지경.

손의 감각이나 몸에 작용하는 반응에서부터 연습 부족이 체감됐다.


이 정도면 볼 것도 없이 전교생 중 최하위권이다. 차후 등장할 네임드들에 비하면 새끼발가락에 발톱 밑 때에도 못 미치는 수준.


“바닥부터 다시 한다고 생각해야겠네, 이거.”


마음은 심히 언짢으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주인공으로 플레이하면서도 초반 한정 저질스러운 능력을 갖춘 덕에 수백 번이나 게임을 꼬라박았었다.

도우미나 편의성 기능 자체가 없던 탓에 하나하나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나가야 했고, 그로 인해 중후반 플레이를 하면서도 지속적인 실패에 노출됐다.


겨우 이런 상황으로 낙망하기엔 5년간 맛본 절망이 너무 딥하다는 것이다.

주인공 급의 저력을 갖추려면 그냥 다시 태어나는 게 맞겠지만, 이번 세계에서 내 목표는 그게 아니다.


최선의 동기부여와 왕도로의 견인.


그것이 머리를 쥐어짜는 고심 끝에 내린 1순위 목표.

그 과정에서 뭔 짓을 해야 할지라도, 설령 지랄발광하는 금쪽이 역할을 자처해야 하더라도 감수하겠노라 다짐했다.

성장은 역할 수행에 지장이 안 갈 만큼, 최소한 주요 인물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면 된다.


"물론 그만해도 뼈를 깎는 노력과 정보적 우위를 신들리게 써먹어야 한다는 계산이 도출되긴 한다만······."


중요한 건 가능은 하다는 거다.

바늘구멍에 낙타 통과시키기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되게 만들 거다.

그딴 게 뭔 가능성이냐고?

그냥 불가능한 거 아니냐고?


그리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입에 낙타를 통째로 쑤셔 넣어야지.

세계가 멸망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고?

2안 같은 게 있으면 누구라도 좋으니 보여주라, 제발.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 초석을 다지기 위해 나는 마법 수련에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당분간 연습할 것은 감각적인 부분.

아무리 게임에서 구현이 잘 됐다지만, 키보드를 누르던 것과 감각을 끌어올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별반 다를 게 없는 건 원리와 이론적 측면. 그러니 머리로 이해하고 몸에 주입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손바닥 위에 모인 마나를 바람 형상으로 변형시킨다.

모양이 완성된 직후, 응어리진 마나를 해체했다.

아주 기초적인 행위.

이 일련의 과정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밤의 공기가 물씬 무르익어 가는 동안.


“······.”


앞마당에선, 주인을 기다리는 집사가 몇 시간이고 목석처럼 서 있었다.

저택 휴식실에선, 근래 어린 가주님의 침실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하녀 둘이 토론을 했고.

다락방의 창가에선, 다른 한 명의 하녀가 창문 너머로 잎사귀에 뒤덮인 뒷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대문에선, 저택을 단속하는 유일한 경비원이 문 앞에서 쇳덩이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

·

·

·

·

·


귀족들이 모여 사는 구역과 한참이나 떨어진 평민가.

어느 허름한 집 앞에 상자 하나가 놓였다.

10초는 지났을까.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나왔다.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핀 그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그것을 품에 넣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아주 작은 상자.

외관도 평범하기 그지없어서 길에 던져놓으면 이리저리 치이다 하수구에 버려질 터였지만,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을 안다면 누구든 눈이 뒤집힐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상자를 품에서 꺼냈다.

이곳 안에 정말 약속한 물건이 들어 있을까?

그래야만 했다.

약속을 안 지키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겠노라 면전에 대고 말했으니까.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붙일 발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찌이익-


남자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상자의 동봉을 풀었다.

차츰 들여다보이는 내부, 열리는 틈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물건은─ 짙은 보라색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투박한 손이 번뜩 유리병을 채 들었다.

뒤편에 상표가 붙어 있는 걸 확인한 두 눈이 맹렬한 기세로 내용을 훑어 내려간다.


이것은 지난 몇 달간 남자, 알렌이 간절히 찾아다니던 물건이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사진을 통해 외관을 익히고 정보통을 이용해 모든 특징을 외고 있었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정품이 맞다는 걸.


알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코르크 마개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리지 않은 온전한 상태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막혔던 숨이 트였다.


“됐어······. 이걸로 된 거야.”


알렌의 등이 벽에 닿았다.

드디어 구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오는 감정은 지난 사흘간 그를 괴롭혔던 사념.


수치심과 모멸감.

신념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치욕.


결단코 악인에게 타협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지며, 수백 명 치의 신념을 어깨에 지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그였다.

하지만··· 또다시 굴복하고 말았다.


변명의 목소리는 속삭였다.

해볼 만큼 다 해봤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산에서 온갖 약초를 캐와도, 어떤 약을 구해와도 마리의 어머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발병한 지 어언 백일째, 지금껏 어찌저찌 늦춰왔다지만 기어이 혼수상태에 접어든 그녀를 보며 알렌도 마리도 깨닫고 있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을.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자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효력으로 신의 영약이라 불리는 엘릭서를 복용시키는 것.

하지만 끔찍하리만치 복잡하다는 제조 공정 때문에 엘릭서는 극소량만 시장에 풀리는 귀품이었다.


공급처라곤 경매뿐인 데다가 가격은 저택 한 채 값을 넘어가기 일쑤다.

귀족들도 명문가가 아니면 쉬이 엄두내지 못하는 물건을 평민이 구할 도리가 있을까······?


반쯤 포기했다.

마리도, 알렌도.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기에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의 손에 남은 수는 없다는 걸.

한데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1학기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지독한 악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엘릭서의 단편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선도위의 철회, 셋 사이에 있던 지난 모든 일을 없던 걸로 치부하는 대가로 엘릭서를 주겠다고 했다.


제안하는 동안 놈의 얼굴에는 수심이나 분노 같은,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무심하리만치 담담한 표정에서 알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는 걸.

자신이 제안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파악하고 있단 걸 말이다.


반년을 참고 견뎌왔다.

녀석이 기어이 선을 넘어 마리를 입에 올렸을 때.

이성의 끈을 놓고 휘두른 팔을 막아 세운 건 마리였다.

그녀의 설득에 선도위를 열었고.

마침내 이 매스꺼운 악연의 심판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나는 마리를 위해서.

그녀를 모욕한 녀석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내가 능력이 부족했기에.

내가 너무 나약했기에 녀석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꽉 말아쥔 손에 미약한 떨림이 맺힌다.

그렇게 누군가는 자신의 나약함을 증오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갈라지는 박동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 안내 24.09.19 8 0 -
7 등위재배정 심사 (1) NEW 6시간 전 1 0 22쪽
» 일단락 (2) 24.09.21 6 2 13쪽
5 일단락 (1) 24.09.20 11 2 14쪽
4 악연 재판 (3) +2 24.09.19 17 3 18쪽
3 악연 재판 (2) +1 24.09.18 13 2 20쪽
2 악연 재판 (1) 24.09.17 15 2 14쪽
1 프롤로그 24.09.16 21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