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불완전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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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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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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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

DUMMY

그렇다면 수상한 점이 없는지 살펴보라, 그런 의미일 텐데. 황제의 안중에 없던 황녀의 무엇이 관심을 끌었을까.


“여기입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안으로 드시지요.”


무슨 상관이겠는가. 수상한 점이 있으면 있다고, 없으면 없다고 고하면 그만이다. 그녀는 그렇게 결론지으며, 처소 밖에서 대기하던 여종의 안내에 따라 내실로 들었다.


거칠 것 없는 걸음으로 곧장 착석한 정무량은 휘장 너머 앉아 있는 인영에게 예를 표했다.


“인사 올립니다.”


휘장에 가려진 인영은 하나인가 싶었다가, 곧 그 뒤로 겹친 작은 그림자가 빼꼼히 움직이기에 둘임을 알았다.


“선대 황제께 받은 이름은 정가의 유.”


그녀의 자기소개는 시간순으로 열거되었으니, 귀비는 자신의 부군이 죽인 자에게 받은 이름을 첫째로 소개하는 인사말을 먼저 들은 셈이었다. 정무량은 귀비가 그런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어떠한 변명이나 너스레를 떨지 않고 다음 이름을 읊었다.


“현 황제께 올린 이름은 화거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그 이름에 진정으로 담은 뜻이 무엇이건 간에 ‘다른 것으로 변하여 간다’는 뜻이 담긴 두 글자가 그들에게 닿았으니, 판단은 상대의 몫이었다.


“그래, 온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며칠 이르군. 교역에 관한 일로 왔다고?”

“그렇습니다. 겸사겸사 황녀 마마의 보필도 명 받았습니다.”

“······보필, 이라 하였는가?”


짧은 침묵 뒤, 음절은 끊기고 반문이 붙는다. 그건 미리 전해 들은 소식에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처음 듣는 소식에 놀란 것이라 쳐도, 귀비의 음성에 섞인 떨림은 묘한 감이 있었다. 거기다 귀비의 뒤에 붙어있는 작은 그림자의 움츠림까지.


“예.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지내시니 염려하신 모양입니다.”


황제의 명령은 겉보기에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을 내린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는 의미심장했고,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의 반응은 긴장이라.


틀림없이, 저들에게는 숨기는 점이 있다. 정무량의 추측은 대개 잘 맞아떨어졌고, 이번이라고 다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필이라고는 하나, 뭔가 거창한 것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황제가 살피라 한 것은 귀비가 아니라 황녀였다. 저렇게 어미 뒤에 숨어 있는 이에게서 무슨 비밀을 캐낼 수 있을까. 정무량은 황녀와 단둘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강학(講學)을 도와드림이 어떨까 싶습니다. 소인이 가진 재주가 머리 굴리는 것뿐임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폐하시니, 명하신 보필은 아무래도 이런 방향인 듯합니다.”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며 사양하려 하면, 폐하의 명을 받고 수행하는 것이 어찌 사사로운 일이냐 할 것이다.


이미 황녀의 수업을 봐주는 이가 있다고 해도, 그간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함이라 하면 무어라 거절할까.


자네도 고작 열일곱 살인데 열두 살의 황녀를 수업할 깜냥이 되느냐 막기엔, 상대가 정무량이었다. 세상 모든 지략이 들어있다는 머리로 이미 두 명의 황제를 모신, 희대의 천재라는 명성을 가진.


“···여독이 쌓였을 텐데. 하면 수업은 명일부터 진행키로 하지. 이만 물러가도 좋네.”


귀비가 너그러움을 입에 담으며 대화를 마무리했기에, 정무량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수긍했다. 정작 처소의 주인인 황녀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첫인사를 마친 정무량은 자신에게 배정된 처소로 향했다. 나온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녀는 오래 걷지 않고도 처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행장을 풀 수 있었다.


행장은 간소했다. 그녀는 먼 길을 갈 때 많은 것을 챙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상 무엇도 그녀의 마음을 매어 둔 적 없는데 물건이라고 다르겠는가.


대부분의 정보는 그녀의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니 두꺼운 책자 같은 것들은 불필요했다. 또한 물건이라는 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떤 것이든 구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라, 반드시 지니고 다닐 물건이란 한정되어 있었다.


신분을 증명할 신분패. 역참에서 말을 갈아탈 때 쓰는 마패. 여정 중에 갈아입을 수 있는 몇 벌의 옷가지. 치안이 확실한 길로만 다니는 그녀이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호신 무기. 목적지에 도착하는 동안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노잣돈과 간단한 필기구.


세밀하게 구술해야 용도를 알 수 있을 복잡한 물건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고심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을 물건도 없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선정도에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수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 오랜 기간도 아니니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이곳의 하인들에게 요청하여 쓰다가 두고 가면 그만이었다.


어떤 것은 요청하지 않아도 이미 갖춰져 있기도 하고.


방 한쪽에 위치한 서안에는 충분한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다. 정무량은 그 앞에 앉아, 빈 종이 하나를 집어 서안 가운데에 놓았다. 종이에 문진을 올린 다음,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황성으로 전해야 할 말이 시선 아래로 나열되듯 어른거렸다. ‘예상했던 일정보다 이르게 당도하였고, 황녀 마마와 귀비 마마께 인사를 올렸으며······.’ 그러나 단 하나의 글자도 종이 위로 옮기지 않고, 정무량은 붓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닐 테지.’


수상한 낌새에 대해서는 확신 없이 옮기고 싶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화제. 하다못해 항구나 교역에 관한 내용이라도 있어야, ‘보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정무량은 휴식 대신 외출을 택했다.








다음날, 황녀의 처소에 든 정무량의 얼굴은 귀비가 앞세운 배려대로 푹 쉬고 온 멀끔한 얼굴일 수 없었다.


업무를 강행한 것은 본인이 자처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느냐마는,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그리 무심한 것은 일상적이었지마는, 바로 전날에 그것도 휘장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났던 천상화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딱딱한 얼굴로 인사를 올리는 정무량의 태도에 천상화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 화려한 장식을 즐기는 건지, 주렁주렁 꽂혀 있는 번쩍이는 금은 머리 장식들이 황녀의 고갯짓을 따라 파르르 흔들렸다.


“황통이신데다 하백 명림씨의 태중에서 출생하신 마마께서 여즉 천자문을 못 떼셨을 리는 없고, 소학이니 대학이니 전부 떼셨다고 해도 못 믿을 것 없습니다만······.”


상화의 소극적인 자세에 아랑곳하지 않은 무량은 책상에 꺼내져 있는 서책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무량이 하는 말들은 예법 안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예의를 벗어나는 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소인, 직접 본 것이 아니면 완벽히 신뢰하지 못하는 괴팍한 성미를 지녔나이다. 하니 함께 읽으시는 것은 소학부터 시작하심이 어떠십니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일부러 얹었다. 고작 어린 애들이나 배우기 시작할 소학이라니 그 정도 수준으로 보았느냐며 경을 치거나, 오냐 어디 한번 보거라 하며 승부욕을 보였다면, 거만하다거나 호승심 있는 성격이란 식의 분류를 할 참이었다. 한두 마디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몇 마디를 더 떠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화가 너무 순순했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서책을 펴는 상화를 보며, 무량은 지금까지 판단한 황녀의 성격을 분류했다.


‘말을 극도로 아낀다.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군. 내향적이고 소심하다.’


이어진 무량의 수업은 특별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읽어보십시오. 그 문장은 ··· 여기 이 글자들은 전부 외고 계신 것 맞습니까.”


일방적으로 평이하게 설명만 해나가는 선생과 그녀의 질문에 몇 번 끄덕이는 것으로만 답하는 제자.


특별하지 않다 뿐인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녀는 한번 읽는 것만으로 제 머릿속에 전부를 각인시켜 줄줄 욀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흥미를 잃지 않고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다는, 그것도 부황의 책사라는 자가 학업을 봐준다는 상황. 최선을 다하고자 의지를 굳건히 했던 상화의 곧은 자세는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평범한 열두 살 아이의 집중력이란 낯선 사람과 재미없고 따분한 행위를 이어가며 장시간 유지될 수 없었다.


또래에 비해 아직 키가 덜 자란 상화의 발은 의자에 앉은 자세에선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양다리가 번갈아 대롱거리기도 하고, 발끝을 허공으로 쭉 뻗거나 위아래로 까딱거리기도 했다.


수업을 시작한 지 대략 이각(二刻; 30분)쯤이 되었을 때. 꼼지락거리기 시작한 상화의 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던 무량이 잠시 두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더 수업을 이어간다고 해서 황녀에게 도움이 될 것도, 자신이 더 알아낼 것도 없을 터였다. 억지로 답답하게 마주 앉아 있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시 눈을 떠 상화를 보며 무량이 물었다.


“바람 쐬러 가시겠습니까?”


아차, 하고 다른데 팔았던 정신을 돌려놓은 상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량을 보았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어디로?’


표정으로 말하기 대회가 있다면 천상화가 일 등 하지 않을까. 무량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타는 법은, 배우셨습니까?”


상화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화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어떤 의도로든 상화가 자신에게 거짓으로 답했을 확률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량은 다시금 조용히 마지기에게 물었다.


“평소 마마께서 각별히 여기시거나, 혹은 마마를 태운 채 달린 적이 잦았던 말이 있는가?”


“아뇨, 마마께선 승마하신 적이 없습니다요.”


무량은 열두 살 아이를 의심하고 숨긴 것을 캐내려는 자신의 태도를 꺼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과 어울려본 적이 별로 없었고, 그녀의 가까이엔 언제나 어른들뿐이었다. 그녀에겐 아이들이 어디까지 순진하고 어디까지 영악한지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황궁에 있었다면···아니, 사가에서 자랐다고 해도 승마 정도는 진작에 시작할 수 있었다. 모빈을 닮아 몸이 약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저렇게 혈색이 좋은데 아픈 데가 있기는 한가?’


슬쩍 돌아보니 마구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상화가 보였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아까 본 얼굴이 기억에 선명했다.


갸름한 볼과 턱. 작은 얼굴에 과하지 않은 길이로 쭉 뻗어있는 콧대. 또렷한 눈썹과 눈매. 사선으로 끝이 올라가는 눈꼬리. 눈가에 살짝 잡혀 있는 애굣살. 각이 진 입술 산과 웃고 있지 않아도 은은하게 곡선으로 끝맺히는 입꼬리······.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아도 타고난 미색으로 단숨에 모두의 이목을 끌 법한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오히려 저 장신구들과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는 위화감마저 들 정도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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