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마법사의 소꿉친구로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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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필레
작품등록일 :
2024.09.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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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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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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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Prologue. 내 소꿉친구 아린느

DUMMY

“천백이십육··· 천백이십칠··· 천백이십팔··· 천백···삼십··· 아니 잠깐만.”


천백이십구였나?


거의 매일 오르는 계단이지만 항상 여기 정도 오면 헷갈려진다.


발을 한번 잘못 내디디면 무엇이든 삼켜버릴 듯 일렁이는 파도.


금방이라도 떨어지고 말 것 같은 험난한 절벽. 내 머리 위로 내리쬐는 청명한 햇살.


그리고 도대체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나선형 계단.


매일 같은 계단을 올라가면 이골이 날 만도 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계단의 끝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무엇이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보이는 평생 이 자리에 서서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모습.


계단을 오르는 내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있다.


아,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냥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천삼백삼십사··· 천삼백삼십오···!”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르자 익숙한 장면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푸르른 바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스라한 수평선. 수면에 무수히 일렁이는 윤슬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바다와 누가 먼저 그 끝에 다다르나 경쟁하듯 끝없이 뻗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절벽의 끝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한 소녀.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바람은 거세지도, 그렇다고 해서 약하지도 않은, 그런 바람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렇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기나긴 속눈썹을 타고 오뚝한 콧날을 따라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 내려앉는다.


이 풍경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언제 봐도 새롭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이름은 아린느.

어디어디의 아린느도 아니고 누구누구의 딸도 아닌 그냥 아린느다.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성(姓))은 없다.

성 같은 걸 가질 정도로 우리는 대단한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나도 그냥 마르셀, 그녀도 그냥 아린느.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아린느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그 어떤 왕족보다도 더 고귀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왕족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살면서 지켜봤는데도 말이지.


그 순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면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면서 제법 귀여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진다.


“···”


그녀가 뭐라고 말하지만 아직 제대로 들릴 만큼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깝지는 않다.

그녀가 속삭이듯이 작게 입을 벌려서 내게 무언가를 열심히 말한다.


“뭐라고?”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들리는 아린느의 말들.


“야 마르셀 후딱후딱 안 올라오냐? 아주 요즘 누나가 풀어줬더니 빠져가지고.”


고고함, 우아함, 아름다움··· 입을 여는 순간 방금 전까지 내가 말했던 수식어들은 모두 다 무효가 된다.


방금 전 살며시 보였던 청아한 미소는 온데간데 없고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인다.


“야 마르셀. 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러면 네가 밑으로 내려오지?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 아니야?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그 말을 내뱉지 않기까지는 꽤나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어이없어 정말.


물론 처음부터 그 인내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껏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 덕분에 생긴 연륜이랄까?


오늘도 잘 참았어. 잘했다 마르셀. 많이 컸어.


그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으니 아린느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왜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어. 올라오다 어디에 머리라도 박았니.”


“아니야. 그런 게 있어.”


“뭐지 얘. 안 본 몇 시간 사이에 더 이상해졌어.”


“아 예 예. 어련하겠어요.”


아린느가 잔디가 무성한 양지바른 자리에 주저앉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됐고 빨리 도시락이나 내놔.”


“내가 도시락 챙겨 가라고 아침에 몇 번이나 말했냐.”

“눼가 도쉬락 췡겨 과라고 와췸에 몇 붠이나 뫌휐냐.”


얄밉게 나를 흉내내며 혀를 내미는 그녀를 보니 정말 한숨만 나온다.


아오 이걸 정말.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


“오늘 내가 시간이 마침 있길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너는 오늘 굶는 거였어.”


“굶긴 왜 굶어. 설마 이 불쌍하고 어여쁜 소녀한테 빵 한쪽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겠니.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수도원인데. 내가 너니 마르셀.”


아린느가 순진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와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렇네. 우리 마르셀이라면 점심 못 얻어먹고 굶고 있었겠다 그렇지?”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아 너무 상상이 가.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도시락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네 모습이.”


“소설을 쓰네 소설을 써. 내가 말했지. 너야말로 책을 너무 많이 읽···”


“빵 한쪽 달라는 붙임성도 없어서 배를 쫄쫄 굶다가 허기진 채로 집에 터벅터벅 돌아오겠지?”


“정말 소설을 쓰시네요. 왜 이렇게 신났어 오늘.”


“기분 좋으면 안 되냐? 내 기분인데.”


“아 예 예.”


“그런데···”


갑자기 아린느의 말을 듣고 있으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에 그러면 왜 여기에 있었어?”

“응?”


내 말을 아린느가 이해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만약에 수도원에서 밥을 주면 왜 이 시간에 여기서 마침 나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그 말이지.”


내 핀잔에 아린느는 싱긋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나지막한 흥얼거림과 함께 멀리서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점심을 먹어 볼까나?”


내가 도시락을 잔디밭에 풀어놓는 사이 아린느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온전히 감싸고 있는 푸른빛 두건을 풀었다.


“아 이제 좀 개운하네.”


그녀가 두건을 풀어헤치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아래까지 맑은 물줄기처럼 흘러 떨어졌다.


아니, 은빛이 아닌 달빛. 마법을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저게 마법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이야.


그녀의 저 머리카락 또한 어릴 때부터 봤지만 인간의 머리카락이 어떻게 저런 색을 낼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본 적 없는, 그녀만의 고유한 특징.


초승달의 빛을 머금은 듯한 색. 거기다 어두운 곳에서 보면 정말 초승달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기까지 하니 정말 봐도 봐도 신기하다.


“별거 아닌 거 같다 싶어도 이렇게 머리 위에 뭐가 계속 있으면 답답하단 말이야. 조금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아린느가 정수리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야 그만해. 나도 여자에 대해 환상이라는 게 있어.

사실 없다. 그런 건 아린느와 같이 살면서 깨진지 오래거든.


역시 방금 전 사뭇 성스러웠던 분위기는 찰나의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얘는 가만히 있을 때가 제일 나은 거 같아.

딱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


“도대체 수녀님들은 어떻게 이런걸 하루 종일 쓰고 계신 건지 참. 아오 가려워..!”


그녀의 푸념에 나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채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간지러운 건 네가 어제도 오늘도 머리를 안 감아서 그런 거 아닐까?”


“야.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아니야 아무것도. 밥 먹자고 빨리.”


“방금 뭐라고 했냐고.”


“배고프다. 밥 먹자.”


“그렇지?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그럼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했겠니.”


아린느가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코에 가져다 대며 킁킁거렸다.


“혹시 냄새나? 냄새 나는지 한번 맡아볼래?”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그냥 밥이나 먹어라.”


“아 한번만 확인해봐!”


아린느가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머리를 내 코에 가져다 댔다.


“진짜 냄새나?”


“응 나긴 나.”


“정말?”


“정말 난다니까?”


물론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머리 냄새가 아니라고는 얘한테 차마 말 할 수 없지만.


은은한 꽃 향기. 이상하다. 분명 어제부터 머리 안 감는걸 내가 봤는데.


“아 몰라 몰라. 이따 저녁에 머리 감으면 되지 뭐.”


아린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신 앞에 놓여진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훈제된 돼지고기를 가볍게 구운 다음에 양상추를 잔뜩 넣은 샌드위치.

이렇다 할 만큼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도 만든 사람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 건 당연한 이치다.


“세상에 너무 맛있어. 왜 내가 만들면 이 맛이 안 나오는 거지?”


그녀의 샌드위치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아삭아삭한 양상추와 짭조름한 훈제 돼지고기를 고소한 빵이 듬직하게 잡아준다.


그리고 살짝 느껴지는 이 쌉싸래하게 고소한 이건··· 그래 치즈다.


아린느 말대로 어떻게 이렇게 기본 재료들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거지?


이 말도 안 되는 작품은 바로 내 어머니 유리아 여사님의 작품.


지금껏 나랑 아린느를 홀로 키워내신 분이자 우리가 사는 이 아랑 섬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은 여인이시다. 아니 이 대륙에서 제일 좋다고 해도 분명 손색이 없을 거야.


어느새 자신의 샌드위치 두 쪽을 다 먹은 아린느가 입맛을 다시면서 도시락 통 안에 담긴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음 정말 맛있어. 아침도 안 먹고 나와서 배고팠거든.”


“하나 더 먹을래?”


내 샌드위치 한 조각을 건네자 그녀의 입가에 수상함이 가득 서린 보조개가 움푹 들어간다.


“뭐지?”


“뭐가.”


“여기에 혹시 설사를 유발하는 푸른돼지넝쿨 가루라도 들었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상하잖아.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 게. 선인들께서 말하시길 자고로 이 세상에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고 했단 말이야.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그런 말 못 들어보셨는지?”


“싫으면 먹지 말던가.”


“아니야 아니야! 내가 언제.”


아린느가 황급히 내 손에서 샌드위치를 뺐어 가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곤 누가 뺐어 먹기라도 할까 싶은지 우물우물 먹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가끔 보면 착할 때도 있단 말이야 마르셀.”

“그래? 가끔?”


그녀의 반쯤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뺏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완전! 항상!”


“그렇지?”


“당연하지!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마르셀님이신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잘못했지?”


“진심으로 잘못했지.”


“그래. 그 미안한 마음을 잊지 말도록.”


그녀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입에 구겨 넣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바보. 원래 인당 세 조각이었는데. 실은 내가 밑에서 두 조각 먹고 왔거든.


“사과 주스도 마실래?”


들고 온 보냉병에서 시원한 사과 주스를 한 잔 따라주자 아린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남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사과 주스를 한 잔 마시고 나서야 그녀가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오전 내내 너무 집중해서 일했더니 배가 미칠 듯이 고팠거든.”


“요즘 계속 바쁜가 봐?”


“수도원장님이 시키신 일이 있거든. 무려 열 다섯 권을 필사해야 해. 올해가 끝날 때까지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린느가 우리 뒤로 세워진 수도원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천공을 향해 뻗은 장엄한 첨탑이 돋보이는 새하얀 수도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우리 섬을 지탱하는 역사이자 자랑.


이 수도원에서 작년 겨울부터 그녀는 틈틈이 도서관에서 책을 필사하는 일을 돕고 있다.


잘은 몰라도 책을 필사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만 들었다.


오타가 없어야 하는 건 물론이지만 글씨체의 끊김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문장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외우고 펜을 들어야지만 가능하다고.


물론 기억력을 놓고 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린느를 따라갈 사람이 없지만 말이야.


그야말로 한번 본 건 잊어버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기억력을 가진 게 그녀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아마 그녀는 자신이 필사한 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외우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작은 섬이 아니라 대륙 어딘가에서 태어났다면 무언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


그런 점에서 나랑은 확연하게 다른, 신묘한 아이.


“그런데 마르셀. 이게 정말 다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아린느는 내가 메고 온 도시락 가방 안을 강아지처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다지. 그러면 또 뭘 들고 오냐.”


아린느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와봐.”


“왜 또.”


“가까이 와보라니깐.”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자 아린느가 내 귓속에 입을 대면서 속삭였다.


“술”


“뭐?”


“맥주는 안 가져왔냐고.”


저 표정. 너무나 익숙한 저 표정.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예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저건 아린느가 대형 사고를 치기 전에 짓는 표정이거든.


“뭐? 수도원에서 맥주를 먹고 가라고?”


정말 하는 말마다 기가 막히네.

그래 얘가 오늘은 왜 가만히 있나 했지.


“아니 마르셀. 들어봐.”


이 세상에서 나를 세상에서 제일 불안하게 만드는 네 개의 단어가 있다.


그래, 네 개 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 무려 네 개나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중 세 단어가 저 한 문장에 들어가 있다.


1. 아니 2. 마르셀 3. 들어봐.


저 세 단어는 어떻게 조합을 해도 나를 두렵게 한다.


‘마르셀. 아니··· 들어봐.’


들어봐 마르셀··· 아니···!’


'아니! 들어봐 마르셀!’


‘들어봐! 아니! 마르셀!!!’


‘마르셀!! 들어봐!!! 아니 아니 아니!!!!’ 등등


그야말로 수도 없는 조합과 변형이 나오는 무시무시한 문장이다.


마법 주문도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위력적이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저 문장은 이미 수년 간의 연마와 최적화를 거친,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주문인 것이다.


특히 아린느가 저렇게 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반짝이면서 나한테 저 말을 할 때가 제일 무섭다.


아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뭐냐고?


그건 나중에 차차 기회가 생기면.


여튼 우리 아린느는 어릴 때부터 항상 계획이 있었다.

정말 정말 그녀가 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문제는 대부분의 계획이 그렇듯 들었을 때는 제법 그럴듯한 계획인데··· 항상 생각했던 것 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같이 숲에 들어갔다가 어미를 잃은 새끼 곰을 집에 몰래 데리고 온 적이 있질 않나.


봄맞이 달이 뜨는 날 북쪽 바다에서 내려오는 참치를 잡으러 같이 밤에 바다로 나갔다가 배가 참치에 부딪혀서 뒤집어지질 않나.


그걸 제외하고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계획에 나를 끌어드렸다는 것이다.

단 한번도. 빠짐없이.


“이번에 갓 추수한 보리로 만든 맥준데 너도 알잖니."

"..."

"우리 이번에 추수가 엄청 잘 됐잖아. 그래서 맥주가 완전히 투명한 황금색이야.”


그래. 나는 결심했다.

오늘만큼은 얘한테 휘둘리지 않겠다고.

슬슬 이 아이한테 냉혹한 현실을 알려줄 때가 됐어.


에 세상 일들이 다 본인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야. 수도원이 무슨 동네 술집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갑자기 쳐들어가서 맥주 달라고 하면 수녀님들이 참 좋아라 하시겠···”


“햇맥주.”


“뭐?”


“아직 첫 통을 안 깠어.”


“그래···?”


그녀의 말에 내 혀가 무의식적으로 마른 입술을 한번 훑으며 지나간다.


아직 첫 통을 까지 않은 햇맥주라.

그거 좀 기가 막히긴 하겠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섬에는 미신이 하나 있다.


사실 살면서 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으니 이게 우리 섬에서만 있는 미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바로 추수가 끝나자마자 만든 맥주의 첫 잔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다음 해 내내 행운이 깃든다는 것이다.


사실 별로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귀가 솔깃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년이면 이제 나도 열 여덟, 즉 성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는데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행운이 따르면 좋은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방금 결심한 거 잊었어?

오늘만큼은 아린느한테 휘둘리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야. 이거 아니야.”


나는 정색을 하면서 아린느를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천천히 젓기 시작하자 그녀가 생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어이없어 정말.


평소에 내가 얼마나 이 아이에게 휘둘리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아린느. 점심 다 먹었으면 나는 다시 집으로 갈 거야. 너도 매우 잘 알고 있다시피 할 일이 많거든 오늘. 사실 너 때문이기도 하고."

"..."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어제 네가 하지 않은 다락방 청소도 해야 하고 우리 유리아 여사님께서 나한테 가을이 끝나기 전에 마당 울타리를 손보라는 지시를 아침에 내리셨어."

"......"

"그러니까 나는 집에 갈 거야.”


그래 이 정도면 단호했어. 내 의사를 아주 잘 전달한 듯 싶다.


그 말과 함께 도시락 통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야 해.


여기서 주춤하는 순간 이 아이한테 또 어떻게 말릴지 몰라.


하지만 내심 불안함은 남아 있다.

아직까지 그녀가 한 마디도 나한테 하지 않았거든.


“그럼 이만 아린느. 이따 저녁시간 늦지 않게 집으로 오고.”


내가 봐도 참 잘했다.

그래 이게 맞긴 하지.

아무리 아린느라고 해도 모든지 다 들어주면 안 돼.

가끔씩은 확실하게 거절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그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방금... '그래?'라고 한 거지?


다른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냥 '그래?'


나를 세상에서 제일 불안하게 만드는 네 단어 중 마지막 하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거기다 물음표를 하나 첨가한.


아린느의 저 ‘그래?’에는 묘한 위압감이 있다.


저 단어의 진정한 위력은 그 뒤에 생략된 문장이 도대체 뭐일지 가늠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하지.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일지.

‘그래? 너 정말 후회 안 하지?’의 맥락인지.

아니면 ‘그래? 정말 제대로 생각한 거야? 그냥 기회를 줄 때 이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인지.


도대체 뭐지? 오늘은 또 무슨 꿍꿍이지?


찰나의 순간 동안 수천 가지 생각이 스쳐가는 사이 다행스럽게도 아린느가 문장을 이어주었다.


“어휴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마르셀이 그렇게 말하는데.”


자존심 상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린느한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아니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우리 마르셀이 하기 싫어하는데 나도 굳이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고.”


오늘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이렇게 순순히 포기할 애가 아닌데.


그래도 출구가 보일 때 도망치자.

뒤도 보지 않고 도망가는 거야. 얘한테 말리면 오늘 오후가 통째로 날라간다.


“그··· 그래.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아 아린느. 방금 말했다시피 할 일도 많고.”


“할 일도 많고.”


“네가 어제 안 한 다락방 청소도 해야 하고.”


“해야 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가까이 들려왔다.


“사실 그거 네가 안 해서 여사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내가 끝내라고 했거든.”


“어머. 미안해 마르셀. 내가 어제 너무 피곤해서 깜빡했지 뭐야.”


뭐지? 이 평소와 다른 유순한 태도는 뭐지?

혹시 샌드위치가 상했었나?


저 말도 안 되게 고분고분한 느낌. 너무나도 낯설지만 싫지는 않다.

드디어 아린느도 철이라는 게 들어버린 걸까?


하지만 사람은 기회에 강해야 한다.

아린느가 무슨 심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자.


“사... 사실 그거 말고도 네가 겨울용 커튼을 빨아 놓지 않아서 내가 그것도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그거까지는 오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주말에 네가 좀 그걸 해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아... 그렇구나. 내가 그걸 깜빡했네 마르셀.”


어느새 다가온 아린느가 한숨을 푹 쉬는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내 등에다 가져다 대면서 속삭였다.


“미안해. 요즘 수도원에서 시킨 일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 내가. 할 일은 많은데 또 마르셀이랑 유리아 아줌마 걱정시켜 드리지 않으려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와야 하잖아.”


“그··· 그렇지.”


“요즘 해는 점점 더 빨리 지니깐 퇴근 시간을 빨라지고 할 일은 계속 쌓이고··· 마르셀이 이해해 줄 거지?”


“이··· 이해해야지.”


“지금도 책상 위에 책이 쌓여 있어. 엄청 무겁고 두꺼운 책들. 아니 책을 만들 거면 한 권 한 권 좀 얇게 만들지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크고 두껍게 만드는지.”


그녀가 강아지처럼 내 등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면서 한숨을 다시 한번 푹 쉬었다.


“아니야 마르셀도 요즘 겨울 준비하느라 바쁜데 내가 이렇게 신세 한탄하면 안 되지."

"...?"

"암 그렇고말고. 마르셀은 집에 가서 다락방 청소도 하고 울타리도 손보고 커튼도 빨아야 하는데.”


아린느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잠깐, 근데 방금 한 말이 뭔가 이상한데?


“나는 수도원 일이 그렇게 바쁜지 몰랐지. 미리 말을 했으면···”


“아니야. 마르셀이 나보다 더 바쁘지. 커튼도 빨아야 하고 다락방 청소도 하고 울타리도 손봐야 하는데. 진짜 고생이 많다 마르셀.”


“그··· 그렇긴 하지···”


“내가 못 도와줘서 미안해? 응?”


“괘··· 괜찮···”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


대화가 어디선가 묘하게 이질적인데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야 마르셀. 정말 바쁜 건 알겠는데 혹시 내가 간단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


“들어줄 거지?”


“간단한 부탁이라면야 뭐···”


“정말 간단한 부탁이야. 들어줄 거지?”


이렇게까지 또 부탁을 하는데, 한 평생 같이 산 정이 있지.

그래 들어주자.


“알겠어. 뭔데?”


“다른건 아니고 내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이 너무 무겁다고 했잖아. 혹시 그거 좀 옮겨줄 수 있을까?”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긴장감에 빳빳해져 있던 목 뒤가 저절로 가볍게 풀어진다.


“그 정도라면 뭐···”


그렇게 나는 그녀를 따라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알고 있어. 오랜만이긴 해도 나도 여기 처음 아니거든?”


“그래애?”


“당연하지. 아앗!”


쿵! 갑자기 낮아진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자 아린느가 쿡쿡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푸흡··· 어머 미안.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거기 천장이 조금 낮은 거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혹시 그 사이에 키가 큰 건가?

여기 천장이 이렇게 낮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 여사님도 얼마전에 나를 볼 때마다 키가 크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긴 했었는데.


수도원 뒷문을 따라 그녀의 사무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자 창 밖으로 푸른 바다와 맞닿은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진 곳은 여전히 아스라히 멀고 아름답다.


이쯤에서 나와 아린느가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아랑 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음···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대륙의 북쪽 바다에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 섬을 대륙에서는 ‘외딴 수도원의 도시’라는 이명으로 부른다는 말을 우리 유리아 여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서 등대마냥 섬을 내려다보는 이 백색 수도원을 보러 가끔씩 이 곳을 방문하는 특이한 여행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일 년에 서너 명 뿐.


아무리 고대부터 유명한 수도원이라 해도 이거 하나 보기 위해서 대륙에서부터 며칠을 배를 타고 들어오는 수고를 감내할 사람은 많지 않다.


외지인의 눈에 이 곳은 수도원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 깡촌 중의 깡촌이니까.


가장 가까운 문명이라고 해도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나흘 정도 가면 나오는 항구 도시 칼라일.

아니면 서쪽으로 열흘 이상을 가야지 나오는 섬 왕국 에가라스 뿐이다.


물론 나는 그 둘 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아랑 섬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아름다운 고향이다.


봄에는 하얗게 핀 아카시아 꽃에서 달콤한 꿀이 떨어지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초평을 가로지르며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은 보리밭이 일렁이고 겨울에는···


갑자기 겨울 하니까 집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맞다 커튼을 빨아야 하지.


하지만 겨울맞이를 준비하는 것도 일 년 동안 있는 일 중 아주 중요한 일이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비축해둔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며 창 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는 것 만큼 즐거운 일도 없으니까.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무연한 나의 고향 아랑 섬.


웬만한 것들도 다 이 작은 섬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때문에 저마다 다들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다.


이미 느껴지겠지만 나는 이 삶에 무척이나 만족한다.

이렇게 계절이 오고 가는 시간이 반복되다 보면 결혼도 하고 아이들을 낳아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겠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결혼은 누구랑 해야 하지?


모르겠다. 알맞은 사람이 인연이 되면 나타나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아린느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앞으로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상상도 못한 채.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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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마법사의 소꿉친구로 살아가는 방법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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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저 평범한 나날들 (3) 24.09.17 6 0 27쪽
3 그저 평범한 나날들 (2) 24.09.17 6 0 14쪽
2 그저 평범한 나날들 (1) 24.09.17 7 0 14쪽
» Prologue. 내 소꿉친구 아린느 24.09.17 13 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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