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마법사의 소꿉친구로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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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필레
작품등록일 :
2024.09.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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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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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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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나날들 (3)

DUMMY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오래 전에 죽은 한 많은 망령을 깨우기라도 한건...


“무슨 소리긴. 누구 들어오는 소리지.”


아린느가 나를 옆으로 잡아 끌었다. 우리는 거대한 참나무 통 뒤로 몸을 숨기며 그림자 속으로 깊숙하게 물러났다.


지하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차츰 우리가 숨어있는 곳을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와 아린느는 숨을 죽인 채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이, 그냥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아직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지하실에 구경 왔다고 말하면 되는 거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긴밀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형제님.”


하지만 들어온 사람이 첫 마디를 꺼낸 순간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모르면 이상하지. 다름아닌 수도원장 나르안 사제님이신데.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인상의 수도원장님은 우리 섬 안에서도 가장 웃어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네 수도원장님. 다름이 아니라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나머지 한 명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수도원에서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아무스 사제님일 것이다.


몇 년 전에 대륙의 중앙 수도회에서 우리 섬으로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알려져 있는 분. 섬 사람들하고 교류가 없어 나도 일 년에 얼굴을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분이다.


허여멀건 한 인상과 풍만한 체격이 왠지 친해지면 맛있는 것 많이 줄 것 같은 아저씨의 느낌이다.


“신경 쓰이는 일이요?”


“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 주셔야···”


“원장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정확히 아시지 않습니까!”


수도원장님의 차분한 어조에 비해 아무스 사제는 이미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덩치에 비해 높은 그의 어조에서 극심한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래, 자수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


그들은 어느새 우리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옆까지 다다라버렸다. 아린느가 그렇게 말하던 맥주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참나무 통들 틈 사이로 사제님들의 검은 구두 밑창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내 옆에서 아린느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댔다. 뭐 어쩌라고. 얘 바본가 정말?


그러면 뭐 내가 이 순간에 너한테 소리 내서 오늘 저녁 뭐 먹을지라도 물어보겠냐? 가만. 저 반짝이는 눈빛. 쟤 지금 이 순간을 나름 즐기고 있는 거 같은데?


에휴.


저 철없는 중생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저 녀석을 정말 어떻게 사람을 만들지?


“테리안 아칸딜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저는 그 곳에 대한 연구로 제 평생을 바쳤습니다 수도원장님. 세상의 중심이자 하늘 위의 섬 말입니다.”


아무스 사제님의 말에 수도원장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잊고 있었던 기억을 꺼내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마치 주문이라도 읊는 듯.


“이 대륙에 마법이라는 축복과 동시에 저주를 내린 존재. 모든 마법사들의 다다르지 못하는 꿈의 존재이자 내세의 이상향. 테리안 아칸딜.”


“테리안 아칸딜에서 나오는 마력은 지금까지 대륙 전체로 흐르며 마법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치죠. 그러니 이건 비단 어느 한 종족의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장님의 서늘한 목소리가 아무스 사제의 말을 무자비하게 가로막았다.


“제게 역사 수업을 해주시려고 굳이 이곳으로 부른 건 아닐텐데요 아무스 총무원장님. 제게도 총무원장님에게도 할 일은 많습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무스 사제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저는 대륙의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기록들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냈습니다. 바로 테리안 아칸딜의 마력이 해가 갈수록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낭설일 뿐입니다. 그런."


"낭설이 아닙니다 이건! 실제로 지난 십 년 동안 대륙에 흐르는 마력은 차츰 사그라지고 있으며 이제는 그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잠시 두 사제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옆에서 아린느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마력이 희소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도원장님께서는.”


그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에 대해 이해도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반대로 아린느는 옆에서 조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누리고 살았던 자원이 한정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인간들 뿐만 아니라 엘프와 드워프들 그리고 다른 모든 종족들 또한 남은 마력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마나가 일종의 자원이라고? 우리가 사용하는 나무나 돌 처럼?


“대전쟁. 그런 소문은 세간에서도 종종 들려왔었죠.”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무조건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미 삼 왕국은 자신들의 군대를 국경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왕국의 대장간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기들을 재련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합니다.”


“엘프들도 움직이겠군요.”


“당연합니다. 남쪽 깊은 숲에서 이미 엘프들의 족장들이 성무(成務)의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세기 처음으로 엘프들의 대족장이 선출되어 그들을 이끌 것입니다.

"..."

"드워프들은 오랜 내전으로 각 일족들의 힘이 약해져 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엘프들에게 붙어 협력할 거고요.”


“대륙 전체에 피바람이 불겠군요.”


대화의 내용에 비해 수도원장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그저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네 바로 제가 걱정하는 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요?”


“네?”


“걱정할 건 전혀 없습니다 형제님. 대륙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우리 섬까지 덮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


아무스 사제의 웃음소리가 천장에 부딪히며 깊은 골짜기 속 으스스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수도원장님께서는 이 섬의 안위만 보장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얘기입니다. 내가 돌봐야 할 건 우리 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지 그 너머는 내가 어떻게 할 수도 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크게 착각하셨습니다. 전쟁의 파도는 분명 이 섬까지 닥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에가라스 왕국의 셀레나르 공주의 서신이 이 섬에 도착했다지요. 무려 삼 왕국 중 하나인 에가라스의 공주께서 도대체 왜 이 외진 섬을 굳이 방문하겠다고 하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셀레나르 공주는 외려 사제님께서 구면이신 분 아닙니까?”


수도원장님이 이렇게 냉철하게 누군가를 대하는 걸 처음 본지라 낯설고 무서웠다. 엄하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나 같은 수도원 밖 사람들에게야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섬이 전쟁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하지만...!”


“자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에가라스 왕국에서 직접 방문을 하겠다는데 손님 맞을 준비는 해야겠지요. 저는 이만.”


수도원장의 발자국 소리가 차츰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이내 지하실 문이 다시 닫혔다.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아무스 사제가 이윽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중립을 지키시겠다니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그가 지하실을 떠날 때까지 아린느와 나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하실 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도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는 여전히 만연했다.



#



“와 나 또 우리 수도원장님 그렇게 싸늘하게 말씀하시는 건 처음 들어보잖아.”


지하실에 들어갔던 후로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는 수도원을 빠져 나와 내리막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랑 섬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성벽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나머지 하나는 성벽 밖에서 사는 사람들.


도시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다소 초라하지만 그래도 수도원이 세워진 언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여러 가게들과 식당들도 있고 일주일에 한번씩 시장도 열려서 웬만한 물건들은 모두 구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굽이지고 좁은 내리막길들은 꽤나 운치가 있고 고즈넉하며 사람들 사는 생기로 가득하다.


언덕 아래로는 드높은 성벽이 섬을 지키며 혹시나 있을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물론 내가 태어난 이후로 함대는커녕 작은 해적선 한번 수평선에서 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성벽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달리 성벽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농사를 짓거나 가축들을 돌보는 집들이어서 섬 곳곳에서 가족 단위로 홀로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문명과는 조금 단절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드넓은 공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솔직히 성벽 안으로 들어오면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하루하루 살라고 하면··· 글쎄 나는 아니올시다.


나와 아린느 그리고 나의 어머니 유리아 여사가 사는 곳은 그래도 수도원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밖에 안 걸린다.


도심과 전원 생활의 이점을 두루 갖춘 곳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살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 밤에 인적이 아예 없다는 점과 가끔 아주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점만 빼면.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들개 한 마리를 발견한 아린느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건빵 몇 개를 꺼내 던져주었다.


굶주렸는지 들개는 허겁지겁 건빵을 삼킨 다음에 꼬리를 흔들며 다시 우리를 쳐다본다.


“아이구 미안해. 오늘은 이거밖에 없네. 내일 더 챙겨줄게.”


저런 모습을 보면 또 외모와 어울리게 행동한단 말이지.


“마르셀. 무슨 생각 해?”


아린느의 손가락이 내 갈비뼈 사이를 무자비하게 파고들면서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다시 속세로 회귀시킨다.


“야! 아프잖아!”


“사람이 꼭 두 번 말을 하게 만들어. 무슨 생각 하냐고. 그래서 무슨 생각 하시는데?”


솔직히 별 생각은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오늘 저녁 뭐 먹을지랑 하루 공쳤으니 집에 돌아가면 우리 유리아 여사님께서 나를 조지시겠구나 그 정도?


“딱히 아무 생각 안 하는데?”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왜 나랑 같이 집에 가냐? 아까는 이따 퇴근한다며.”


“그냥.”


“그냥?”


아린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가리켰다.


“날도 좋은데 굳이 뭐 하러 수도원 안에 있어야 하나 싶어서 그런다. 내가 땡땡이 치겠다는데 불만있어?”


아린느 말대로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그에 상응하는 색으로 화답하는 바다가 포개지는 모습이 제법 아름다웠다. 가을이 끝나가는 시기라 그런지 해도 슬슬 일찍 떨어지네. 이제 곧 겨울이 오고 한 해도 마무리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겨울이 지나면 언제 추웠냐는 듯 봄이 또 오고 금새 여름이 오겠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웬일이야? 내 말에 동의를 다 하고.”


아린느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나를 장난스럽게 흘겨봤다.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고 일찍 자러 가자.”


“완전 공감. 일도 안 손에 안 잡힐 거 같은데 퇴청해야지.”


나 또한 오늘 못한 일이 산더미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뭐.


골목 끝에 자리잡은 브랜트 아저씨네 빵집에서 고소한 빵 냄새가 집으로 가고픈 열망을 한층 높이고 있었다.


“저기··· 마르셀.”


“응?”


“그런데 말이야. 아까···”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아까 수도원 나올 때부터 반나절 굶주린 토끼마냥 초조해하더라. 같이 한 세월이 얼만데 이 정도도 모르면 안 되지.


“알아 무슨 말 하려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고?”


“출출하지 너? 빵 사줘?”


“응?”


내 말에 아린느가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럼 그렇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러면 그냥 집 가?”


“아니··· 그건 또 아니고. 그래 빵집 들리자!”


그래. 내가 아는 아린느라면 그래야지. 집에 가서 빵이랑 함께 저녁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무슨 빵을 사가면 좋을까? 조금 거칠지만 영양가에 좋은 호밀빵? 아니면 부드럽지만 영양가는 덜한 흰빵?


“아! 또 왜 찔러.”


“그냥 찔러봤다 왜.”


두 번 같은 곳을 찔리니 욱신욱신 쑤시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골목 끝에서 아이들이 저들끼리 노는 소리가 재잘거리면서 들려왔다. 평화로운 하루의 끝이다. 물론 아까 지하실에서 들은 얘기는 안온함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주제였지만.


하지만 수도원장님 말대로 대륙의 일이 우리 섬까지 도대체 무슨 영향을 미치겠어?


“마르셀. 달리기 해서 지는 사람이 빵 사기 어때.”


“어? 야! 반칙이야!”


이미 뛰기 시작한 아린느를 따라 나는 전속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집에 가까워질 무렵 이미 해는 거의 다 지고 검푸른 하늘 아래에 저녁 별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만 보고 있어도 집 안의 따뜻함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거실 벽난로에는 장작이 적당히 들어간 채로 불이 이글거리고 부엌에서는 우리 여사님의 훌륭한 음식 솜씨가 담긴 향기가 가득하겠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그 전에 넘어야 할 난관이 하나 있지만.


"준비됐어 마르셀?"


아린느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혼자 내빼기 없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얘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무슨.


똑똑


대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두들기자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이익


긴장감을 일부러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보면 나와 아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슬슬 오늘 하루 동안 방만하게 쌓아온 업보들이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어머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더 놀고 오랬더니 왜 이렇게까지 이른 귀가를 하셨대?”


내 어머니 유리아 여사님의 말은 항상 반만 진심으로 들어야 한다.


겉으로 보면 온후하고 너그러운 인상의 중년 여인이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 사이에 예리한 칼끝이 숨어 있는 분이시거든.


“아 엄마 그게 아니라.”


“나는 우리 마르셀을 보면 참 뿌듯해. 어쩜 이렇게 성실하게 자라준 걸까? 그래서 오늘은 어디 가서 힘차게 뛰놀다가 이제 왔어?”


“논게 아니라 수도원에···”


“수도원? 세상에 수도원까지 기어갔다 왔나 보다 그렇지? 거북이랑 달리기 시합하다가 왔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린느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아린느는 얄밉게도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와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크흠.”


내가 계속해서 아린느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그제서야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줌마. 그게 있잖아요.”


“아린느도 진짜 한 소리 들어야 해. 너라도 마르셀 옆에서 중심을 잡아줘야지. 너까지 휘둘리면 어떡하니?”


“맞아요 아줌마. 죄송해요.”


아린느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문제는, 여사님은 항상 나보다 아린느한테는 너그럽다는 거. 도대체 누구 엄마인지를 모르겠어 가끔 보면.


“제가 옆에서 몇 번을 집에 가서 할일 하라고 얘기했는데 말을 안 듣는 거 있죠. 그러다 보니 저도 마르셀한테 말려서 그만···”


지금 도대체 쟤가 방금 뭐라고 한거···?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제가 조금 더 엄하게 타이를게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에요. 마르셀 말고 저를 꾸짖어 주세요 아줌마.”


“그래 아린느. 잘 알겠지만 마르셀 같은 애들은 옆에서 계속 채찍질을 해줘야 해.”


“맞아요 아줌마. 시키면 잘 하는데 꼭 시키는 것만 하는 애들은 누군가 옆에서 지속적으로 관리 감독을 해야죠.”


“그럼 그럼.”


여사님이 아린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참 나 원.


뭔가 시원치 않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잘 넘어갔다는 점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저녁 시간은 딱 맞춰서 들어오는 거 보면 대단해 둘 다.”


“아 너무 배고프다. 아줌마 저희 그래도 빵도 사왔어요!”


“얼른 손 씻고 옷 갈아입고 밥 먹을 준비 하렴.”


“네!”


아린느가 현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살짝 돌려 내게 혓바닥을 살짝 내밀어 보였다.


나도 그녀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유리아 여사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매서운 화살 마냥 박혀온다.


“아들.”


“으··· 응?”


“오늘 못한 거 내일까지 다 해놔. 그리고 하는 김에 양들 목욕도 다 씻기고.”


“엥? 걔··· 걔네들을 나 혼자? 내일?”


“내일까지.”


우리 집에서 키우는 양들은 정확히 53마리다. 그 많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씻기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정말 긍정적으로 최소한의 시간이 들어도 반나절.


물론 양털 깎이는 것만큼이나 목욕을 싫어하는 녀석들이 고분고분하게 협조해줄 리는 없고.


그래, 일단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자.


내일의 나에게도 할 일을 남겨줘야 할거잖아?



#



여사님의 전매특허인 고소한 양송이 스튜와 함께 아까 우리가 사온 빵으로 저녁을 먹은 다음에 설거지를 하고 부엌에서 나오자 아린느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사님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씻으러 간 건지 아니면 이미 주무시러 가신 건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린느 또한 졸고 있는 건지 자글자글 타오르는 벽난로를 보면서 그녀의 뒤통수가 서서히 사선으로 기울어진다.


조용히 뒤로 다가가서 손을 목에 가져다 대니 아린느가 움찔하면서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흘긴다.


“아 차가워.”


“졸지 말고 올라가서 자지?”


“글쎄. 나는 더 있고 싶은데. 그리고 조는 게 아니라 잠시 사색 중이었거든?”


“조는 거 봤거든.”


“안 졸았거든?”


“무슨 사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이것 저것? 마침 잘 됐다 마르셀.”


아린느가 나보고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왜.”


“할 얘기가 있어.”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꽤 진지하다.


“마르셀 아까 그 얘기 어떻게 생각해?”


“무슨 얘기?”


“너 진짜 답답하게 그럴래?”


아니 진짜 무슨 얘긴를 가지고 무슨 얘기라고 하는지 정확히 얘기를 해야지 알지.


그렇게 주어 목적어 없이 애매모호하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아까 수도원장님이 했던 말 있잖아.”


갑자기 그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수도원장님이 싸늘하게 말하던 게 떠올랐다.


사실, 수도원에서 나온 이후로 완전 까먹고 있었지.


“아 그거. 갑자기 또 뭔 소리를 하나 했네.”


“마르셀은 신경 안 쓰여? 하나도?”


“신경 쓸게 뭐가 있어?”


우리 섬이야 항상 이렇게 평화롭지만 내가 알기로 저 바다 너머 대륙의 삶은 마냥 그렇지 않다.


허구한 날 일어나는 전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살육 그리고 약탈.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조금 지루할 수는 있어도 이 섬에서 태어나 사고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험난한 곳이 저 바다 너머의 세상이다.


그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고작 전쟁 한번 더 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안타깝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나서서 그걸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 불안한데.”


아린느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자기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을 한 손가락으로 꼬면서 한숨을 쉬었다.


“불안하다고?”


불안하다는 단어랑 아린느랑은 굉장히 안 어울리는데?


단 한번도 그 단어랑 아린느랑 연결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냥 얘가 불안함을 느끼는 걸 본 적이 한번도 없는 거 같은데?


“아까 총무원장님 하시는 말씀 들었잖아. 만약 그게 사실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심각한 문제지. 단순하게 인간들끼리 벌이는 전쟁이 아닌 거잖아.”


“그런데 마나가 줄어들면 뭐가 문제가 되지?”


“글쎄. 어려운 질문이네. 마나가 일종의 자원이니까 줄어들면 문제가 생기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 가장 대표적으로 마법사들이겠지.”


마나가 일종의 자원이라.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인지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마나는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힘 같은 거 아니야?


밖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창틀을 가볍게 흔들면서 지나갔다.


아린느의 서늘한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면서 내 허벅지와 소파 사이로 파고들었다.


“엘프들이나 난쟁이들은 마법의 영향을 인간들보다 더 크게 받는 존재들이니 인간인 우리가 모를 애로사항들이 있을 거고.”


“그런데 마법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면 우리랑은 더 상관없지 않나? 마법이든 뭐든 자기들끼리 싸우던 지지고 볶던 알아서 하라 해. 마법사들이 신경 쓸 문제지.”


“그런가?”


지금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오늘 하루를 날린 덕분에 내일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거기다가 여사님이 지시한 양들 목욕시키기까지 하면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다 할 수 있을까 말까다.


오늘은 어찌저찌 넘어갔다고 해도 내일까지 주어진 일들을 다 못하면 다음 장날에 팔려가는 건 양들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이렇게 오늘내일 생계에 대해 걱정하는 운명인데 무슨 한가롭게 바다 너머 벌어질 전쟁을 신경 쓰고 있어.


하지만 내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아린느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하다.


“마르셀은 혹시 바다 너머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뭐 어릴 때는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있지. 막연하게 궁금하다 그 정도?”


“그러면 지금은?”


“딱히. 집 떠나면 고생인데 어딜 가겠어.”


“그렇구나.”


그제서야 아린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너는 이 섬 밖이 궁금해?”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대답을 하지 않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나도 지금이 좋아. 그리고 나한테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랑 있느냐니까.”


그녀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는게 아니라 누구랑 있는 거다...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긴 한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한 마음으론 아린느의 저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기도 한데 여기서 다시 물어보면 바보 취급 당할 거 같으니 그냥 이해한 척 하기로 했다.


그래, 굳이 물어봐서 뭐 하겠어.


“그렇지. 누구랑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지.”


“정말? 마르셀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당연하지.”


“흐음. 그렇구나. 몰랐네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는 아린느의 표정이 묘하다.


“정말로 마르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 그렇다니까?”


“그럼 다행이고.”


뭐지 도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옆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콧노래 소리를 보니 대답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 맞다 그래. 마르셀 있잖아. 내일 할 일 많아?”


“내일?”


아 내일을 생각하니 바로 한숨만 나온다. 절망적이다 못해 너무 절망적일 정도이니까.


“야 말도 마. 내일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러니깐 내일은 오늘처럼 도시락 빼먹지 말고 아침에 잘 챙겨서 출근을···”


“내일 그러면 나 출근하지 말고 마르셀 도와줄까?”


“응?”


물론 아린느가 도와준다고 해서 일이 갑자기 막 줄진 않아도 혼자서 하는 거 보다는 둘이 하는 게 더 낫겠지.


“왜?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잠깐만. 침착하게 행동해. 경거망동하지 말란 말이야.


오늘도 당한 주제에 왜 또 같은 실수를 하려고 하는 거냐고.


그래, 잘 생각해보자. 갑자기 얘가 왜 이러는 거지? 무슨 꿍꿍이로? 한두 번 속아봤어야지.


“뭐야. 왜 그렇게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쳐다봐. 선량하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상당히 기분이 안 좋게.”


“아니 뭐... 그런데 갑자기 왜?”


“허 참. 지금 정말로 내 순수한 선의를 의심하는 거야?”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일단 아쉬운 건 나니까 받고 봐야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본인이 안 해서 내가 일이 더 생긴 건데? 왜 내가 아쉬운 입장인 거지?


“마르셀. 곤란했는데 이렇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니까 고맙지?”


“그··· 그럼. 고맙긴 하지.”


“역시 내가 최고지?”


“그렇지. 최고지.”


“알면 됐어.”


아린느가 자리에서 기지개를 펴더니 이제는 콧노래를 제대로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얘 진짜 오늘 왜 이러지?


“아 이제 슬슬 진짜 자러 갈 준비 해야겠다.”


“그래 자러 가자. 긴 하루여서 그런지 피곤하다.”


“그런데 말이야 마르셀.”


일어날 듯 싶다가 다시 주저앉은 그녀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다가 시선을 회피한다.


“아니 그게.”


“뭐. 왜.”


“아까 수도원에서 말이야.”


“수도원?”


“지하실 내려갈 때···”


“지하실 내려갈 때?”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그때처럼··· 나 지금 다리가 좀 아픈데.”


“다리가 아파?”


“응 아파.”


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일렁이는 불빛 때문인지 아린느의 새하얀 볼 위에 미묘한 홍조가 올라온 것처럼 보인다.


다리가 아프다고 갑자기? 방금 전까지 발가락 열 개 잘만 꼼지락거리던데?


뭐 아프다는데 어쩌겠어.


“알겠어. 좀만 기다려.”


“응··· 응? 뭘?”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응? 마르셀 지금 뭘 하는···?”


어디다 뒀더라. 며칠 전에 검술 연습을 할 때 썼던 붕대를 선반 여기 어디쯤 뒀는데.


“찾았다. 붕대 감아줄게.”


“뭐라고?”


“그거 오늘 너무 많이 걸어서 근육에 무리가 간 거야. 붕대 감고 있으면 돼.”


“마르셀...”


“응?”


“붕대는 됐고, 이리 와봐.”


가까이 다가가자 아린느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손을 내밀었다.


“붕대 이리 줘.”


“왜? 네가 감게? 직접? 내가 해줄게.”


“괜찮으니깐 이리 주세요. 어서”


“알았어···”


퍽!


붕대를 받아 내 머리에다 냅다 던져버린 아린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야! 너 다리 아프다며!”


“됐거든!”


어느새 거실에 남겨진 건 나와 도르르 굴러가며 끝없이 펴지는 붕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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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저 평범한 나날들 (2) 24.09.17 6 0 14쪽
2 그저 평범한 나날들 (1) 24.09.17 7 0 14쪽
1 Prologue. 내 소꿉친구 아린느 24.09.17 11 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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