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끄래기산 이야기-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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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거사
작품등록일 :
2024.09.1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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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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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3. 완)

DUMMY

3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여우봉 꼭대기에 노인은 서 있었다.

눈 덮인 숲과 계곡과 단애는 흡사 하나의 거대한 무덤 같았다.

지금은 고요와 침묵으로 잠들어 있으나 일단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그곳은 삽시간에 광란의, 공포의, 죽음의 장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울산이······”


노인은 점차 회상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이며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때 그는 까끄래기산 일대에서 가장 널리 명성을 떨친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인내하는 의지가 강했으며, 대자연 앞에서는 겸허한 마음으로 순종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일단 상대와 마주치면 교묘한 기술과 대담한 행동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어 삽시간에 상대를 압도해버리는 것이었다.


노인은 특히 추적사냥의 명수였다.

아무리 날래고 민첩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의 추적을 받게 되면 결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한 달 전에 찍힌 발자국만 보고도 노루의 뒤를 쫓아가 덮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추적 솜씨는 시각과 후각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일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본능적인 직감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이제까지 그의 추적을 벗어난 짐승은 단 하나, 오직 울산이뿐이었다.

그는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까끄래기산 제일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그는 그렇지가 못했다.


“박 노인도 이제는 늙었어. 울산이는커녕 토끼 한 마리 잡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노인은 이제 예순이 넘었다.

마르고 까칠했으며,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동작도 예전만큼 민첩하질 못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인은, 그해,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언제나 빈손으로, 해질녘이면 쓸쓸히 산을 내려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눈빛에만큼은 아직도 굳은 의지와 집념이 서려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노인은 일절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텅 빈 오두막 앞마당에 서서 그윽한 눈길로 까끄래기산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날마다 기다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결코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노인답지 않게 맑고 깊었다.

벌겋게 곤두섰던 핏발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거기엔 그의 일생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그가 기다리는 것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삼 일 동안 계속해서 내렸다.

까끄래기산은, 숲은, 계곡은, 바위는 삽시간에 눈으로 뒤덮였다.


노인은 비로소 총을 들고 오두막을 나섰다.

그리고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여우봉 꼭대기에 선 것이었다.

그런 그의 두 눈동자는 아무런 증오도, 원한도, 분노도 담지 않은 채 깊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첫날, 노인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둘째 날, 여러 야생동물의 움직임과 발자국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의 움직임만을 좇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요, 생애였다.


닷새째 되는 날 아침. 노인은 흰 눈발 속에서 백색의 투명한 빛 덩어리를 보았다.

그것의 움직임은 예전과 다름없이 늠름했고, 유유했으며, 패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눈에는 지난 세월과 달리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울산이. 너는 훌륭하고 멋진 놈이야!”


그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운명의 일보를 떼어놓았다.

서두름 없이 천천히, 울산이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당도했을 땐 이미 울산이는 종적을 감춘 뒤였다.


노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만만히 자신의 모습을 사냥꾼에게 드러낼 울산이가 아니었다.


노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가 머물러 있었다.

눈 위에 찍혀 있는 선명한 발자국.

그것은 노인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이정표였다.


노인은 애정과 집념이 담긴 표정으로 그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간혹 울산이는 다른 멧돼지들의 발자국, 혹은 다른 야생동물들의 발자국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궤적을 감추려 했으나, 결코 이번 대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노인의 추적을 따돌리지는 못하였다.


계곡의 겨울 해는 짧았다.

주위는 삽시간에 어둠으로 가득 찼고, 바람과 함께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왔다.

기온도 급격히 떨어졌다.


그것은 노인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그날 밤, 노인은 커다란 바위 밑에 우둥불을 피우고 침낭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다음 날, 다시 까끄래기산의 위대한 지배자 은빛 멧돼지를 뒤쫓기 시작했다.

밤새 휘몰아친 광란의 눈보라로 발자국이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노인은 역시 추적의 명수답게 곧 울산이의 뒤를 바싹 쫓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그때까지 노인은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했다.

그는 울산이의 움직임에 대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여느 때와 달리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고 계속 도망만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혀 울산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마도 눈 덮인 계곡에서의 대결에 승산이 없음을 감지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작정 몸을 피해 달아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노인을 유혹하듯, 갓 사격권에서 벗어난 거리를 유지한 채 어딘가를 향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승부처를 정해두고 있는 것이겠으나, 노인은 그곳이 어딘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러한 것은 그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오냐, 가거라. 어디로 가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승리와 패배를 초월한 노인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 사이 노인의 몰골은 처참하게 변해갔다.

그는 이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입술은 시커멓게 타들어갔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마구 헝클어졌다.

옷 역시 누더기로 변했으며, 손과 발은 추위에 얼어 마음대로 놀릴 수 없게 되었다.

오직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과 의지의 눈빛만이 그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나타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추격전을 벌인 지 이십여 일이 지나서야 노인은 울산이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아챘다.

그것은, 이제껏 어느 누구도 오른 적이 없는, 온통 바위투성이인, 계곡의 끝에 위치한, ‘하얀 섬’이었던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산, 일 년 내내 빙산처럼 하얗게 빛나는 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보이는 산.

그 하얀 섬을 향해 울산이는 천천히,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전율했다.

이번 대결에 임한 울산이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울산이. 너는 역시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멋진 놈이로구나.”


노인은 각오를 새로이 했다.

그리곤 총을 고쳐 쥐고 울산이의 뒤를 쫓아 하얀 섬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황은 노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미끄러운 바위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끊임없이 몰아쳐오는 눈보라와 돌개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된 것이다.

울산이는 처음부터 이러한 것을 노리고 노인을 하얀 섬으로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바뀌어 울산이가 추적자가 되고 노인이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노인은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둘의 간격은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마침내 두 승부사는 정면으로 부닥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오랜 추격전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달리 돌개바람도, 눈보라도 일지 않았다.

찬란한 아침해가 눈부시게 솟아올랐다.

하늘은 투명한 호수처럼 맑고 파랬다.


노인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척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종곡을 암시하는 예언자의 숨결처럼 여겨졌다.

노인은 재빨리 총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머리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집채만 한 바위 꼭대기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노인은 숨을 멈췄다.

끝없이 투명한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은색의 빛 덩어리 하나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잔잔한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노인의 입에서는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은 세찬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그것은 격정이요, 황홀경이요, 감동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왔던가.


노인의 뇌리엔 이상스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지난 세월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그것은 증오도, 원한도, 슬픔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의 지극히 순수한 애정이었다.


노인은 울산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승부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소리 없는 울림이 일었다.

노인의 전신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상대가 상대를 인정해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요, 보람이었다.


이윽고 바위 위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하고 움직였다.

그 빛은 곧장 노인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노인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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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부(3. 완) 24.09.19 1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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