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끄래기산 이야기-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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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거사
작품등록일 :
2024.09.1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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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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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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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승부(1)

DUMMY

그것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빛 덩어리,

빠르다기보다는 차라리 유유하다고 해야 옳을

한 줄기 바람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

증오하기엔 너무나 늠름한,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훌륭한 승부사였다.

이렇게 해서 울산이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시작되었다.




1



그해,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많은 신나는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까끄래기산 계곡에 사는 야생동물들의 이야기와 그것들을 잡기 위해 계곡을 오르내리는 사냥꾼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이 있었고, 모험과 인내가 있었으며, 원한과 복수가 뒤따랐다.


승리와 패배는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지혜와 용기는 불멸의 야생정신을 낳았고, 날래고 민첩한 행동은 전설과도 같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죽고, 죽이고, 찢고, 피를 쏟고 하는 것은 태곳적부터 있어온 이곳 까끄래기산의 역사였으며, 그것과 함께 숨을 쉬는 산사나이들의 운명이었다.


그 중 특히 울산이에 얽힌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그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울산이는 오래전부터 까끄래기산에 살고 있는 멧돼지로, 전신이 온통 은빛 털이었고, 두려움이라곤 모르는,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신비의 존재였다.

따라서 울산이는 그가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떠한 엽총의 탄알도, 함정도, 덫도 울산이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소년다운 상상력으로 울산이의 거대한 모습을, 그리고 신출귀몰한 몸놀림과 패배를 거부하는 삶의 투쟁을 그려보곤 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가장 인상 깊게 기억될 만한 일을 하나 체험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말로만 듣고 환상 속에서나 그려보던 울산이의 실체를 그의 맑고 깊은 두 눈으로 순간적으로나마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숙명의 계시이기도 하였다.


그날, 그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혼자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은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과 덤불과 이끼 낀 바위로 덮여 있었다.

음울한 숲은 귀가 멍할 정도로 고요했고, 대낮인데도 어둠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지혜와 용기와 기술을 갖춘 어엿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큼직한 놈을 잡아보리라 마음먹었다.


그 과신과 자만이 어느 때보다 더 깊은 곳까지 끌어들였다.

그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숲이 장막처럼 열렸다가 열 걸음도 채 나가기 전에 굳게 닫히곤 하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는 장벽을 보았다.

비로소 겁이 더럭 났다.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왼편 바위 뒤에서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엽총을 겨누었다.

그때 그는 보았다.

한 마리의 거대한 은빛 괴물이―그렇다.

그것은 괴물이었다!―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며 가늘고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쏘아!


자신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림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지혜와 용기와 기술을 갖춘 어엿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겨우 사격술을 뗀 풋내기 사냥꾼이었을 뿐이었다.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괴물이 덤벼들면 여지없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번쩍하고 눈앞을 스쳐간 은빛 섬광만을 기억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차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유년의 세계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바야흐로 사냥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동료 사냥꾼 세 명과 함께 첫 멧돼지 사냥에 나섰다.


―사냥은 유희가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건 야생동물과의 처절한 승부다. 인내와 용기와 집념이 없으면 오직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이 가르침을 그는 신념처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이 얼마만큼 터득하고,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그 자신 장담하지 못했다.


계곡은 죽음과 같은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한차례 비가 뿌리더니 하늘은 이내 다시 맑게 개었다.

가을햇살이 숲의 나뭇잎에 반사되어 그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숲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그들의 존재만을 확인시켜주는 미세한 숨소리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아버지는 드디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얀 빛 덩어리였다.


“울산이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희열에 가득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울산이는 계곡 아래의 풀밭을 유유하게 거닐고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해에 그의 전신은 은빛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행은 놈의 늠름한 자태에 넋을 빼앗겼다.

청년은 유년시절에 본 괴물의 차가운 눈을 떠올렸다.


‘어째서 놈은 나에게 덤벼들지 않았을까.’


수년간 이 의문은 그의 가슴속에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바람은 그들의 등 뒤에서부터 불어왔다.

그것은 상황을 그들에게 불리하게 몰고 갔다.

예민한 후각을 지닌 노련한 은빛 멧돼지는 번번이 한발 앞서 그들의 사격권을 벗어나곤 하였다.

빠르다기보다는 차라리 유유하다고 해야 옳을 울산이의 움직임은 차츰 아버지의 냉정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종말이 왔다.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사냥꾼들은 각자 흩어져 울산이를 포위하기로 했다.

먼 길을 돌아 울산이의 앞길을 가로막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간을 더 계곡에서 맴돌았다.

그들은 마침내 울산이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는 상목에 몸을 숨겼고, 청년은 하목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세 명의 사냥꾼들은 건너편 기슭에서부터 울산이를 몰기 시작했다.


잿빛 구름이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는 가을 오후였다.

그는 바위 뒤에 숨어 계곡 아래를 굽어보았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자신이 긴장해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면 어릴 적부터 그려온 절대불멸의 존재와 승부를 가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감동이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울산이가 은빛 찬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뒤에 추적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이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개울을 건너 그들이 매복해 있는 기슭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상목과 하목 중간 지점에서 울산이는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자신이 갈 방향을 선택했다. 아버지가 숨어 있는 상목 쪽이었다.


“아-!”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안도와 실망이 뒤엉킨 신음이었다.


울산이의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초조하게 총성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울산이를 상상하며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하나의 신화가 사라져감을 슬퍼하고 있었다.


탕!


잿빛 음울한 숲속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그 총성은 긴 울림이 되어 영원히 그의 귓전에서 맴돌 것 같았다.

청년은 몸을 일으켜 상목을 향해 달려갔다.

나무들이, 덤불이, 바위들이 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

어느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얀 빛줄기 하나가 섬광보다도 빠르게 아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총 따위는 의식 속에서 지워진 듯, 완전 무방비 자세로 그 빛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소리 없는 가운데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후 흐름은 멈추었다.

울산이는, 아니 하얀 빛 덩어리는 고개를 돌려 청년을 쏘아보았다.

총을 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쏘아!


자신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상대하기에 너무나 벅찼다.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거암처럼.


“꾸웩-!”


계곡을 울리는 승리자의 포효를 들었다.

이어 한줄기 빛이 그의 곁을 스쳐 깊은 숲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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