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끄래기산 이야기-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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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거사
작품등록일 :
2024.09.17 23:25
최근연재일 :
2024.09.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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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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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2)

DUMMY

2



황혼이 비껴드는 초여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그와 어린 아들은 오두막 앞마당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청년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많은 신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듯이 그도 아들에게 까끄래기산 계곡에 사는 여러 야생동물들과 그것들을 잡기 위해 계곡을 오르내리는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어린 아들을 언제나 꿈과 환상과 동경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특히 울산이에 관한 이야기는 열세 살의 어린 소년을 완전히 매료시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서 그는 어느덧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지난 십수년 동안 울산이와의 대결을 위해 수도 헤아릴 수 없이 까끄래기산 계곡을 오르내렸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분노했고, 원한과 복수심을 끓어 올렸다.

목숨을 건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의 눈엔 핏발이 곤두섰다.

하지만 번번이 그의 패배였다.

아직 그는 냉철하고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들을 하나하나 잃어갔고, 사냥개들을 하나하나 빼앗겼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린 아들뿐이었다.


―울산이는 영원히 패배하지 않는 불사신인가.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도,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복수심에 불탔고, 집념과 인내를 길러갔다.

울산이를 빼놓으면 그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의 눈에 선 핏발은 점점 더 붉어져 갔다.


그는 아들에게서도 그것을 원했다.

지혜롭고 강인하고 야생정신이 투철한 어엿한 사냥꾼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사냥은 유희가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건 야생동물과의 처절한 승부다. 인내와 용기와 집념이 없으면 오직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도 아들을 데리고 까끄래기산 계곡으로 들어가곤 했다.

숲은 변함없이 울창했고, 칙칙했고, 잿빛이었다.

햇빛은 숲의 그늘 사이에서 얼룩무늬를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해 아들은 열다섯 살로 성장해 있었다.


그들은 계곡을 걷고 있었다.


“아버지, 울산이는 정말 있는 건가요?”


소년이 물었다.

그는 울산이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는 아들을 뜻밖이라는 듯 돌아다보았다.


“저는 알 수 없어요. 할아버지도, 또 증조할아버지도 울산이에게 죽음을 당하셨다면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인데, 어째서 울산이는 늙어 죽지도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죠?”


아들의 의심은 이미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슬펐다.

어릴 적의 그는 결코 그러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울산이에게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의 물음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에 노한 빛을 담았다.

아들은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아들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와 오후의 해를 가렸다.

숲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들 부자는 이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각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동굴과도 같은 숲길을 걸었다.


구름에 가렸던 해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는 축축하게 젖은 풀밭에서 일직선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발견했다.

무릎을 꿇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 발자국은 그가 일생을 통해 수도 없이 보아온, 크고 당당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노련한 승부사의 족적이었다.


“울산이다!”


그의 눈에 긴장감이 서렸다.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지난 십수년 간의 애증의 세월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의심에 잠긴 채 야생의 숲속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그는 노리쇠를 당긴 후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봉우리를 하나 넘자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꽃발이었다.

그는 놈이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음을 직감했다.


“저기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어요.”


아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구릉 아래였다.

두 개의 빛 덩어리가 가을 햇살을 쪼이며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하나는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에게 수많은 패배를 안겨주었던 노련한 승부사 울산이였고, 다른 하나는 아직 갓난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은빛 멧돼지였다.

그것은 참으로 뜻밖의 광경이었다.

그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놈을 거꾸러뜨릴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는 아들을 돌아다보며 속삭였다.


“이곳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총을 쏘아 신호를 보내도록 해라.”


“예.”


소년은 대답했으나 떨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숲에 혼자 남겨놓고 덤불 사이로 해서 울산이에게로 가까이 접근해갔다.

하지만 울산이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자신과 자신의 새끼에게 닥쳐오고 있는 위험을 직감했음인지 별안간 발놀림을 빨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울산이 혼자라면 쉽게 몸을 은닉하거나 멀리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겠으나, 지금 놈에게는 어린 새끼가 따라붙고 있었다.


새끼멧돼지는 아직까지 숲의 냉혹한 세계에 익숙해 있지 못했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이겨낼 능력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까끄래기산의 오랜 투쟁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울산이의 존재를 의심하는 그의 어린 아들처럼.


그는 곧 울산이와 새끼멧돼지를 사격권 내로 몰아갔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커다란 빛 덩어리를 겨냥했다.


숨을 죽였다.

마침내 십수년 간을 기다려왔던 승부의 갈림길에 선 것이었다.


―울산이······!


까끄래기산의 신화가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돌연 눈앞에 있던 빛줄기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그의 시야에 남아 있는 것은 어린 새끼멧돼지뿐이었다.


그는 당혹했다.

동정을 살피다가 주변의 숲을 경계하면서 새끼멧돼지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수상한 움직임은 엿보이지 않았다.

새끼멧돼지만이 어미의 돌연한 사라짐에 놀라 낮은 울음을 토해내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새끼를 버리고 도망쳤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유를 가지고 새끼멧돼지 앞에 섰다.

거리는 불과 열 보.


새끼멧돼지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랐는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천천히 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방아쇠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끝내 총을 쏘지 못했다.

어렸을 적, 울산이와의 최초의 상면이 또렷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놈은 어째서 나를 덮치지 않았을까.

결국 그는 총을 내렸다.


그때 멀지 않은 숲에서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그에게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 예감이 있었다.


-울산이······!


그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아들의 주검은 처참했다.

일말의 동정과 자비도 깃들어 있지 않은 짓밟음이었다.


어디선가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적막.

그는 계곡이 너무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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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3. 완) 24.09.18 9 0 6쪽
2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2) 24.09.17 8 0 15쪽
1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위하여(1) 24.09.17 1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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