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구밀복검(口蜜腹劍) <14>
“위험하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난 천승비는 여섯 갈래의 장력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비롯한 사형들에게 각각 접근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크!”
여섯 명의 일대제자들은 여러 갈래로 쪼개진 장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위력적인데 혼비백산했다.
이론적으로, 장력을 분산시킨다면 그 힘도 분산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염청석의 이번 공격은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짜낸 진기를 이 공격에 모두 응축시켜 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반격은커녕 맞받아치기도 어려울 정도였기에, 그들은 서로의 살길을 찾아 몸을 날려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천승비는 그들 중 가장 늦게 알아챘으므로 제대로 자세를 갖춰 회피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귓가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장공의 서늘함을 섬뜩하게 느끼면서 임기응변 삼아 바닥으로 구르던 신형을 황급히 세우고는 후속공격에 대비를 했다.
간신히 염청석의 공격을 피해낸 여섯 제자들의 숨소리는 매우 거칠어져갔다.
그들은 현재 무슨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막강하다 하더라도 쳐들어오는 장력을 막지 못해 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고수의 반열에 들어서 있는 상태였고, 대사형 염청석과는 오랜 시일동안 대련수련을 했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염청석의 무공수위를 잘 알고 있는데, 지금 염청석의 무위는 평소보다 두 배는 증가되어 있는 듯했다.
“대사형!! 정신 차리십시오!!”
일대제자 중 한명이 호소조로 고함을 쳤지만 염청석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다만 염청석은 전력을 다한 공격이 무산되자 더욱 악에 받힌 얼굴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무리한 공력을 끌어올리려 하므로 포위하던 여섯 명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위험을 감지한 천승비가 노파심에 주의를 주고 있는데 예상대로 염청석의 몸이 공중으로 일장정도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쌍장에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장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력이란 무형무색(無形無色)이 일반적인데 연한 색상이 육안으로 식별되자 일대제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눅이 잔뜩 들어버렸다.
맞받아치는 미련한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들은 방어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며 장력을 피해내려는 행동을 취했다.
순간 천승비가 방어하던 자세에서 공격자세로 급전환시키더니 쏜살같이 염청석의 겨드랑이쪽으로 권각공격을 시도했다.
혈도를 제압하려는 행위였으며, 그 시기는 매우 적절했다.
그런데 막 혈도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염청석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가슴을 움켜쥐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천승비가 혈도를 찔러서 그런 것일까 하는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는데 그가 힘없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면서 입에서 선혈 한가득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바닥위로 염청석이 고목나무처럼 쓰러지면서 이내 정신을 잃었다.
“대사형!!!!”
뜻밖의 상황에 닥치자 청성파 제자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여느때 같았으면 얼른 다가가서 부축을 할 그들이 방금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 모두 접근하기를 꺼리며 눈치만 주고받고 있었다.
저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끔찍한 살수를 퍼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천승비가 먼저 다가가서 염청석의 상태를 살피게 되자, 그 뒤를 슬금슬금 청성파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천사제! 어떠한가?”
일대제자 중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어왔다.
“실신하셨습니다. 몸이 차갑고 맥도 불규칙하니 어서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승비가 나름대로 소견을 피력하자 일대제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을 내렸다.
“어서 대사형을 안으로 모시고 의원을 불러오너라!!”
몇 명이 염청석을 들쳐 업고 있는데 일대제자들이 대경실색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위현룡과 속가제자들은 어디로 도망친 것이냐!!!”
염청석을 상대하는데만 신경을 집중했던 그들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위현룡의 행방을 잡으려 애썼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 근처에서 경공을 운행하여 휘젓고 있었습니다만......”
위현룡을 잡기 위해 움직였던 이들은 비명소리와 함께 염청석이 피를 토하는 참변을 목도하는 순간 멈칫거렸다. 그러나 이 찰나의 틈은 울창한 청성산 속으로 위현룡이 모습을 감추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도 남았다.
천승비가 일대제자들에게 급히 말했다.
“어차피 도주로는 청성산을 내려가는 하산길 밖에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추격을 해야 합니다.“
“음...하산길은 이미 청성파 제자들이 물샐틈없는 포위와 매복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쪽으로 퇴로를 정했다면 분명히 지금쯤 사로잡혀있거나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위현룡을 놓친 것 때문에 당황하던 일대제자들이 갑자기 여유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철두철미한 염청석의 명에 따라서 천명이 넘는 청성파제자들의 약 육할정도를 청성파가 위치하고 있는 산허리부터 산기슭까지 촘촘히 포진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천승비의 말은 그들을 다시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아까 위현룡의 무공은 대사형과 맞먹었습니다. 아무리 수많은 청성파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이곳의 포위망을 뚫고 나간 것을 보면 그쪽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잘못하여 놓치게 된다면 청성파는 장문인을 시해한 범인을 눈앞에서 놓쳤다는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네 말이 맞구나! 모두 나를 따르거라!!”
불찰을 깨달은 일대제자들은 몇 명의 제자들을 남겨 놓은 채 급히 하산로로 방향을 잡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가는 그들을 지긋하게 보고 있던 천승비는 슬쩍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오는데도 하늘이 매우 어둡군. 비라도 오려나...”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일대제자들이 몰려갔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천사형...어째서 그리로 가십니까?”
삼대제자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위현룡이 도망친 쪽은 저쪽인데 왜 엉뚱하게 산 정상으로 향하는가 하는 뜻이었다.
천승비는 슬쩍 웃음을 짓더니 대꾸했다.
“사형들과 사제들이 모두 몰려갔으니 범인은 십중팔구 잡힐 것이다. 난 그저 하늘과 가장 맞닿은 곳에서 찬 공기를 듬뿍 마시고 싶을 뿐이구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일단의 제자들을 뒤로하고 천승비의 신형은 묵묵히 사라져갔다.
** **
[장하다 이놈아!! 그래 겨우 적들을 유인하고서 도망친 곳이 여기란 말이냐!!]
홍후인은 부아가 치민 듯이 계속해서 빈정과 분노를 번갈아 표출해고 있었다.
억세게 차가운 바람은 산봉우리 아래 있는 능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철탑같이 솟아오른 수많은 소봉(小峰)들을 타고 돌고 있었다.
온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강풍은 자세를 흐트러지게 하고, 귓가에는 가냘픈 탄성소리까지 종종 남겨 주곤 했다.
어둡고 짙은 눈동자에 베어있는 슬픔과 우울한 심정은 하늘에 답답하게 몰려있는 먹구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네 녀석이 속가제자들을 방패삼아 몸을 빼냈다면 벌써 청성산을 벗어났을 것이다! 보거라! 정(情)에 휘둘려 판단을 잘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란 말이다! 죽는 것은 네 마음이지만, 대장부는 어떻게 죽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일개 개백정만도 못한 죽음이란 말이다!!]
홍후인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있는데 위현룡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무슨 일이냐!! 탈출로라도 발견했느냐!]
한가닥 희망이 담긴 어조로 홍후인이 급히 물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원사저는 이곳을 참 좋아했습니다. 하루 수련이 끝나면 둘이 이곳에 올라와서 간식도 먹고 담소도 즐겼었지요.“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위현룡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자 홍후인은 혈압이 쫙 올라왔다.
[멍청한 놈!! 산정상으로 도망쳐왔으니 이제 어쩔 것이냐! 하늘로 솟아 올라갈 것이냐? 아니면 이 봉우리 아래로 기어 내려갈 것이냐?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인데 그렇게 여유있게 감상에 빠져서 계집생각이나 하다니...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지! 네 놈이 그 빌어먹을 계집과 희희낙락거리던 이곳이 네 무덤자리가 될 터이니...참 감격스럽기도 하겠다!! 참으로 잘 되었구나!! 바보같은 놈!! 어이고...미치고 환장하겠구만...]
“전에 원사저가 풍광이 아름답다고 감탄했을 때는 그저 건성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원사저 말대로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위현룡은 이렇게 말하면서 아련하게 느껴지는 원연홍의 정겨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을 속으로 몇 번씩이나 떠올렸다.
마치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듯이 세세하게 뇌리 속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었다.
위현룡의 눈가는 촉촉이 적셔졌으나 자제력을 잃지는 않고 있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죽음이 다가오니까 헛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홍후인은 위현룡의 그런 행위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진정한 무인이란 죽음의 선상(線上)에 서 있어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끝까지 검을 잡고 싸우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면서 계집이나 생각하고 있는 이런 위인을 그 동안 가르쳤다고 생각하자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어오기까지 했다.
“선배님...”
[뭐냐!]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선배님덕분에 검법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둔해서 선배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점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위현룡의 입에서 마지막 유언같은 말들이 튀어나오자 홍후인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무리 미련하고 바보천지 같은 행동을 일삼는 녀석이라지만 그렇게 밉지는 않았던 녀석이었다고 홍후인은 생각했다.
홍후인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제가 죽어서 선배님처럼 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원연홍곁에 남아서 지켜주고 싶다는 바람을 위현룡은 소원하고 있었다.
[아마 힘들 거다...나같은 경우는 잘은 모르지만...그 물약이...무슨 작용을 한 것 같은데...]
지하밀성에서 원기종의 검에 심장이 꿰뚫렸을 당시를 홍후인은 회상하였다.
물약이 깨어지고 안에 있는 액체와 자신의 피가 섞여 심장 속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마치 생명을 얻은 듯한 생동감을 느꼈던 것이 생각나고 있었다.
[참 기분이 묘했지...그때는...]
멍한 상태로 중얼거리던 홍후인은 순간 들려오는 인기척에 정신이 번쩍 났다.
[현룡아! 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채 웅장하게 세워져있는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던 위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려 다가오는 이를 주시했다.
-천승비.
위현룡의 입가에 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이 곳에 있는 것이 끝내 발각되어 버렸구나!! 그런데...저 놈 혼자 오고 있는 것인가?]
홍후인은 불안한 음성으로 말하면서도 주위를 더욱 자세히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천승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씩 다가오더니 약 이장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염청석을 상대하면서도 한시도 위현룡에게 눈을 뗀 적이 없는 그였다.
그는 위현룡이 산정상 쪽으로 몸을 빼내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었으며, 산 정상으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기에 느긋한 걸음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천승비는 씁쓸한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이면서 위현룡을 나직이 불렀다.
“위형...”
“천형...”
이런 호칭으로 서로를 불러보는 것도 오래간 만이었다.
청성파 정식제자가 되고 나서는 그와 늘 사형과 사제의 호칭만을 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호칭들은 정(情)과 다정함이 배제된, 그저 남이라는 차가운 외면의 조각일 뿐이었다.
두 사람 주위로 검은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동이 터오고 있었으나 짙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아무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억압시키고, 차갑게 텅빈 가슴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 서로 다른 색깔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______^^_______
[퀴즈]
마지막장면(위현룡과 천승비가 마주보는 장면)은 전에 잠깐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였는지 기억하시고 계시는 분 있으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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