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귀혼검법(鬼魂劍法) <20>
주위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인상을 푹 쓰고 있던 예강이 못마땅한 듯 고함을 꽥질렀다.
“모두 조용하지 못할까!! 지금 비무(比武)를 할 참이지 않느냐!!”
그의 카랑카랑한 호통소리에 주위는 단번에 진정되었다.
채겸은 흑사린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흑대협이 처음 금성문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충격이었다. 그렇게 정체를 감추고 있었는데도 채겸이라는 자(者)는 보자마자 간파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두 눈은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고, 태도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흑사린은 상대의 실력이 일천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그 동안 무수하게 싸워왔던 고수들과는 판이한 느낌,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 용기는 가상하다만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똑똑히 알게 해주마. 이 흑사린이 어떤 인물인가를 말이다!“
경고를 끝낸 흑사린이 자세를 공세로 바꾸면서 장력을 발출할 준비를 하였다.
순간 채겸은 날쌔게 앞으로 몸을 날리더니 그의 앞가슴으로 일권(一拳)을 날렸다.
자신이 흑사린이고 독장을 장기로 하는 것을 잘 알텐데 초반부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곧 죽을 녀석이 성질도 급하구나!”
뒤로 두발자국 빠르게 움직여 피하던 흑사린의 좌장에서 강력한 출수가 터져 나왔다.
안면으로 휘몰아치는 기(氣)를 느끼던 채겸은 몸을 일장정도 위로 띄우면서 같이 일장을 날렸다.
-펑!
천지(天地)가 진동하는 폭발음과 함께 두 사람은 각자 뒤로 몇 발자국씩 물러나갔다.
백중지세(伯仲之勢).
군중들은 두 사람의 공격력이 막상막하인 것을 보자 그만 경악을 내보였다.
천하의 흑사린을 상대로 개방 하급무사인 채겸이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흑사린은 이번 장력에 8할이 넘는 내력을 담았는데도 상대가 끄덕도 않자 은근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으로 장법의 고수들은 검법의 고수들보다 내력이 더욱 중후하고 깊다.
그렇기에 독장의 고수인 흑사린은 내력 면에서는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부딪쳐보니 채겸의 내력 또한 자신에 비해서 결코 하수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상대를 너무 얕보았던 것 같군.)
흑사린은 정신이 번쩍 나면서 10할의 전력을 모조리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호적수를 만나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 말이다.
홍후인은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얼마전 일이 떠올랐다.
[음...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있었지. 예전에 사검귀천과 대적할 때 개방무사들 거의 모두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는데 무공이 약하던 저놈만큼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 또한 마교 소교주와 대적할 때도 운좋게 뒤로 쓰러지면서 일검을 피해냈지. 운으로 보기에는 그 시기가 매우 적절했단 말이지...역시...무공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었어.]
상대의 무위에 놀라는 사이 뒤로 물러났던 채겸이 다시 돌진해 왔다.
개방에서 채겸은 검(劒)을 들고 다녔고 검(劒)만 썼기에, 모든 이들은 그의 장기(長技)가 검법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채겸은 장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그의 장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초식들과는 달리 뭔가 독특한 면도 보였다.
장법이란 공격력이 검법보다 탁월한 대신에 몸놀림은 둔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검법에 내력을 주입하여 휘두르는 것과는 달리 장법은 내력을 응집하여 밖으로
발출시키는 공격법이므로 내력을 끌어올리고 순환할 때까지 찰나(刹那)가 필요한 셈이다.
반면 검법은 장법보다 변화가 무쌍하고 움직임이 빨랐다. 근접전에서의 검법이 한수 위라면 장법은 원거리공격에 능하고 검공보다 광범위한 범위를 공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장법의 고수들은 장법과 금나수법을 혼용(混用)하곤 했다. 즉 근접전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흑사린과 채겸은 모두 장법을 구사했다.
그렇기에 가급적 서로가 꺼리는 접근전은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채겸은 장법을 사용하면서도 집요하게 접근전을 노리고 있었다.
흑사린은 금나수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접근전에 대비해서 독무를 뿌려놓는 방식을 고수했는데도 틈만 보이면 겁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생명을 반쯤 포기한 사람처럼 말이다.
또한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느 고수들 보다 채겸의 신법은 빠르고 특이했다.
신법을 빨리한다는 것은 장법의 특성상 발출의 시기를 맞추기가 어렵다.
그러나 채겸의 장법은 빠른 신법에 잘 길들여진 듯, 짧게 끊어지면서도 그 출수가 매우 신출귀몰했다.
흑사린은 대적하면서도 그가 사용하는 무학(武學)의 근원이 어디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공격을 피해낸 흑사린은 몸을 좌측으로 틀면서 독장을 이끌어냈다.
주위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한줄기 강맹한 장력이 날아 들어오자 채겸은 감히 맞받아 칠 생각을 못 하고 피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채겸은 호흡을 막고 날아오는 독장의 방향만 가늠했다.
특이한 보법으로 독장을 피해냈지만 결과적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독무(毒霧)는 채겸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모든 고수들은 초반엔 만만하게 버텨내다가 독공이 시작되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이다. 그러니 흑사린의 진정한 공격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독장과 장풍절기를 혼용하면서 채겸의 혼을 빼놓았다.
(호흡을 오래 멈추니 내력이 흐트러지고 신속한 공방(攻防)이 어렵구나...)
채겸은 이런 생각과 함께 검은 독무(毒霧)가 없는 방향에서 조금씩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백여 초 동안 흑사린의 일방적인 공격만 계속되었다.
“채겸이 지는 것인가...”
군중들의 중얼거림은 싸움의 결말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열세(劣勢)로 들어선 채겸은 쉽게 당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채겸에게 이런 활발한 임기응변은 매우 의외였다.
[젠장...틀렸어. 저렇게 몰리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승산은 기대할 수 없다.]
홍후인은 채겸의 무공이 매우 뛰어남을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려야했다.
상대는 공포스러운 흑사린이었기에...
(형님....)
안타까운 심정으로 관망하던 위현룡은 허혜린에게 눈길을 돌렸다.
마침 그녀도 싸움의 전개가 불리함을 깨닫고는 위현룡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위현룡은 불같은 눈으로 허혜린을 노려보았다.
어서 혈도를 풀어달라는 무언(無言)의 호통이었다.
그러나 허혜린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사검귀천에게 명했다.
“내가 참모님을 보호할 동안 사검귀천은 내력을 모으고 계시오!”
그들도 결말이 어떻게 될지 대략 예상하고 있었다.
채겸이 비록 밀리고는 있지만 흑사린은 고수 2명과 연달아 대적을 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공격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사검귀천은 위현룡을 바닥에 뉘인 후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젠장...조금이라도 모아보겠다는 뜻은 좋다만...어차피 탈출은 글렀단 말이다...]
홍후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번 위현룡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에 난 상처는 놀랍게도 지혈을 넘어서 빠른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의학에 지식이 깊은 홍후인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상처면 치료를 하고도 꼬박 5일은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더 놀랄만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흑사린의 9할에 가까운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는데도 다리가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음...역시...]
그는 귀혼심법이 내공과 더불어 외공까지 같이 연마시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전에 청성산에서 굴러 떨어진 위현룡의 몸이 박살나지 않았던 것도 귀혼심법에서 연성된 귀혼외공이 방탄지기(防彈之氣)를 형성했기 때문이지 않은가.
[만약에....만약에...훗날 현룡이가 귀혼환령검법을 극성까지 익히게 된다면 무림에서는 적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흑사린과 채겸의 격전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이백여 초가 지나가는군....”
마침내 금성문 참모 백도빈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흑사린의 독장을 시작으로 채겸은 삼십 초도 못 버틸 것으로 점쳤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채겸은 마치 위험한 줄타기를 하듯 끝까지 버텨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흑사린은 내심 조바심이 났다.
(빌어먹을...저 자식의 보법이 특이해서 독장을 제대로 맞추기가 어렵군...
이백 초가 넘어가는데 내 체면에 이렇게까지 끌어버리다니...더군다나 소매에 감춰진 독(毒)도 조금밖에 남지 않았는데..)
흑사린은 양 소매에 부착한 두 개의 특수한 도구를 이용하여 장력에 독(毒)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그가 독장을 위한 독을 제조하고 해약까지 만들어냈으나, 실제로 장력에 독을 완벽히 실어 보낼 수 있도록 도구는 필요한 것이었다.
홍후인은 무턱대고 장력에 독을 혼합시켰지만 그는 도구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독(毒)을 자유자재로 뿜어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 년간을 고심하며 설계도를 그린 후, 각 지역의 대장간을 전전했으나 이 정밀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이년의 세월을 허비하던 중 우연하게 한 대장장이를 알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는 흑사린이 원하는 도구를 열흘 만에 만들어 냈다. 이에 흑사린은 혹시 또 제작하게 될 다른 도구들을 염두에 두고서, 아예 그에게 대장간을 하나 차려 주는 후한 인심을 쓰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에 쏙 들도록 완벽하게 만든 도구였지만 문제점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구 안에 다량의 독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흑사린은 위현룡과 채겸을 연달아 상대하면서 독을 너무 많이 사용해 버렸다.
특히 덩치가 큰 채겸이 가벼운 나비처럼 옮겨 다니는 보법은 너무나 특이했고, 교묘하게 흑사린이 독장을 소모하도록 도발시키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혹시 채겸이 이런 약점을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어올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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