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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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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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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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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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아독존(唯我獨尊) (1)

DUMMY

다음날, 한상염은 무사히 배수 무리로부터 비도를 되찾아왔고, 우리는 그것을 성주에게 돌려주어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도둑을 놓쳤다는 말에 성주는 꽤 못 미더워했었지만 심가장의 이름으로 반드시 도둑을 잡겠다는 말에 결국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심하령의 저 말은 진심인 것 같아서 문영이 조금은 걱정된다.


“소문주님! 저 성주님이 준 거 구경해봐도 돼요?”


객잔으로 돌아와 식탁 앞에 모여 앉자마자, 설초아가 성주로부터 받은 전표를 구경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이에 선선히 품속에서 전표를 꺼내주니 설초아가 큼직한 눈을 휘둥그레 뜨곤 전표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와아, 역시 성주님은 돈이 많군요.”


“한중성의 성주이니 특히 더 그럴 게다. 그럼 소문주님, 언제 다시 출발할 생각이십니까?”


한상염이 맞장구를 치고는 앞으로의 일정을 물었다. 사실 일정에 대해서는 심하령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심하령도 한상염도 굳이 내 의견을 물었다. 이른바 소문주로서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꽤 부담스러운 나머지,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두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권위를 조금 유용할 생각이다. 지난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어, 다 해결된 거 아니었나요?”


설초아가 전표를 만지작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한편 심하령에게서 불편한 기색이 느껴진다. 어제 그녀가 신신당부한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이니 당연하다. 미안하게 됐군. 어쩌면 완전히 밉보여서 앞으로는 절대 나를 돕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다. 지금까지 행로가 너무 순탄해서 도무지 수련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내가 무림출도를 감행한 건 다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던가. 동평왕의 청을 들어줄 때는 혼자 힘으론 어렵겠지만, 이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닙니다. 한중무관을 습격한 이들이 누구이며,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 그런 도적들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그럼 어디부터 갈까요? 아, 그럼...”


설초아가 신이 나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순간, 심하령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냉정하게 일축했다.


“그 건은 제가 성내를 순찰하는 이들에게 서신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한중성을 떠나는 게 어떨까요?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말이에요.”


역시나 저리 나오는군. 그렇지만 이번에는 굽힐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한중성은 물론이고, 심가장도 영 못 미덥습니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쓱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문영이 먼저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자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신투라는 자가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그렇지만 한중무관을 습격한 이들은 금방 퇴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만약 문영이 저를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일정이 지체된다면, 소저께서는 어찌하셨을 겁니까? 설마 문제를 버려두고 떠났을까요?”


나는 명목상으로나마 이 일행의 중심에 있다. 심하령이 정말로 시간이 촉박했다면 내게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포기하려 했다 해도 역시 내게 말을 전해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심하령은 일정이 지체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생각엔, 소저께서는 이미 부족한 일정을 단축할 방도가 있었다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네.”


심하령이 꽤나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에 제발이 저려 몸이 움찔대려 한다. 다행히도 나는 간신히 평정을 지켜갈 수 있었다.


“더 말이 필요하진 않겠군요. 문영이 찾아온 덕분에 시간이 절약되었으니, 그 시간은 제가 사용토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 전에 묻고 싶군요. 그 방도가 무엇이고 얼마나 일정을 단축할 수 있는 겁니까?”


심하령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논리정연하게 꺼내는 말에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가 이걸 밤새 준비해왔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순발력만으로 이 정도 논리를 갖출 자신은 없는데 말이지.


“좋아요.”


심하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공자께 져 드리겠어요. 그리고 굳이 그 방도를 취하지 않아도 아직 일정이 촉박하지는 않아요. 당분간은 공자께서 마음대로 움직이셔도 무방해요.”


됐다. 딱히 기뻐할 일은 아니건만, 심하령의 생각을 돌린 것이 유난히도 마음을 들뜨게 했다. 소렌에게 승리를 거둔 그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에는 공자를 돕지 않겠어요. 그동안 너무 피곤했거든요. 그럼 건투를 빌겠어요.”


여러모로 밉보였군. 심하령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매몰차게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치 한바탕 말다툼을 한 것 같아서 씁쓸한 웃음만 나온다. 이건 엄연히 심하령이 내 고집에 져 준 건데 말이지. 내가 명목상으로나마 이 일행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면, 심하령은 어떻게든 내 말을 논파했을 것 같다.


“전 공자님 도와드릴게요. 그럼 더 빨리 끝나겠죠?”


설초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한상염은 조금 힘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달갑지 않은 걸까?


“한 대주는 어떻습니까?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조금 휴식을 취한 다음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니 한상염은 검문을 떠난 뒤로는 대부분 번을 섰고, 한중성에서도 설초아에게 휘둘리거나 비도를 찾는 등 이런저런 일에 시달렸다. 안 되겠군. 별로 위험할 것도 아니니 한상염도 쉬게 하는 게 좋겠어.


“그럼 한 대주도 쉬도록 하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대주님! 배수들은 이제 제 얼굴만 봐도 도망칠 테니 전표를 잃어버릴 염려도 없답니다.”


대체 배수를 찾으며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지.


“쉬도록 하세요. 이 일은 그다지 위험한 것도 아니니까요.소문주가 내리는 명령입니다.”


한상염의 태연한 신색 한편에서 미미한 안도가 느껴진다. 안 쉬게 했다면 큰일이 날 뻔했군. 그냥 두었다가는 한상염은 우직하게 나를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나 했을 것이다.


“아, 그럼 소문주님. 저도 쉬어도 돼요?”


설초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태도를 바꾸어 물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를 행동에 알게 모르게 얄밉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 생각을 지워가며, 나는 그녀에게도 휴식을 명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객잔을 나섰다.


무작정 객잔을 나선 다음, 나는 간밤에 생각해 두었던 대로 움직였다. 우선 도적 떼의 행적에 대해 수소문하는 것이 첫째였다. 그러나 역시나 아무도 도둑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기껏 얻은 거라고는, 신투에 대한 헛소문뿐이었다.


“글세 정말이라니까! 집채만 한 덩치로 담을 훌쩍 넘어서는...”


내게 신투 이야기를 하다가 옆 사람과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사내. 그 사내를 뒤로하고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문영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다. 또 헛소문이었군. 과연 신투답다. 아무로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잠깐만.”


그렇다. 문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이토록 무성한 소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실체가 없는 도둑 치고는 꽤 많은 이야기가 돌고 있지 않은가.


“그렇군. 신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지만, 신투라고 오해한 이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거야.”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혼자서 중얼거린 다음, 나는 계속해서 도둑의 행적에 대해 수소문해갔다.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발품을 판 결과, 그 소문들로부터 한 가지 공통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한 번도 물건을 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는 도둑이 왔다 간 흔적은 분명 있었지만, 돈이든 무엇이든 없어진 것은 없다고 했다. 즉, 신투에 대한 소문은 성주의 물건을 훔친 문영의 소문과 또 다른 도둑이 만들어낸 커다란 소문이 합쳐진 결과였다.


“뭔가 있군.”


값진 물건을 훔쳐가지 않으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한중성을 누비는 자들이라. 아마 그런 도둑이 있다면 천하에서 가장 수상한 도둑이라 할 수 있겠지. 아니, 이미 도둑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문영처럼 더욱 커다란 것을 노리는 자들일지도 모르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한참이나 성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번화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의식하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한쪽을 응시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치 무뢰한의 행패를 지켜보는 이들처럼 말이다. 싸움이라도 난 걸까? 그렇지만 괜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저만치 길을 돌아가려 했다. 군중 사이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앳된 주제에 터무니없이 건방지고 차가운 저 말투는 익히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설마 하며 두서너 명의 틈을 파고들어 앞사람의 어깨와 귀 사이의 틈을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둥근 자리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중 한 사람은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용봉회란 곳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던 소연화라는 소녀다.


“이,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땀을 뻘뻘 흘리는 육중한 청년이 격정을 못 이기고 큼직한 도를 빼 들었다. 투박한 도신에서 흘러나오는 예기에 군중들이 겁에 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나는 좀 더 훤한 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도련님. 제가 맡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빼빼마른 사내가 허리께에서 엄지를 움직여 가느다란 검을 한치 정도 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주위를 에워싼 이들처럼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고수다. 육중한 청년은 그리 대단한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이자는 절정에 다다른 고수였다. 위험하다. 저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


“체, 체엣! 안돼! 저년은 내가 포를 떠버릴 거야. 네가 나서면 화가 풀리지 않는단 말야.”


육중한 청년의 투정에, 뜻밖에 냉막한 인상의 사내는 선선히 검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을 앞에 둔 소연화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폭언을 이어갔다.


“웃기고들 있네. 사파 떨거지들이. 정말 한중성은 형편없는 곳이야. 돈에 눈이 멀어서 이런 냄새나는 자들을 성에 들이다니.”


“뭐, 뭐라.....”


육중한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소연화가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와 함께 소매로부터 뱀처럼 날쌔게 무언가가 튀어나와 청년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때, 냉막한 사내가 얼굴에 난 큼직한 흉터를 씰룩이며 소연화와 청년 사이에 일검을 내뻗었다.


챙!


금속음과 함께 청년의 미간으로 쏘아져 나가던 것이 쏘아져 나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바닥에 꽂혔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모양의 비도다. 비도를 보는 순간 나는 순간 헛웃음이 새나오는 것 같았다. 또 비도인가? 대체 비도와 나는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리도 얽히는 걸까?


“아, 아하핫! 봐라, 건방진 계집. 검노(劍奴)! 저년을 죽여!”


“분부대로.”


육중한 사내가 두 겹이나 되는 턱을 실룩이며 소연화를 가리킨다. 이에 사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들었다. 미치겠군. 아직 소연화의 실력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두면 소연화는 죽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연화를 끝까지 두 사람의 속을 긁어대고 있었다.


“왜? 둘이 같이 덤비지그래? 얼치기 사파놈들이야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는데.”


소연화는 무언가 숨겨진 수라도 있는지 냉막한 사내 앞에서도 끝까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젠장, 이대로 두어도 될까? 아니, 그 전에 내가 나선다고 뭔가 달라지긴 할까? 머릿속으로 한상염과 심하령이 있는 객잔까지 달려가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지만, 객잔에 가기도 전에 소연화는 죽는다.


“그 비도술. 낯이 익군. 일수백비(一手百飛)의 독문공. 너는 역시 평왕의 딸.”


냉막한 사내가 천천히 그리고 띄엄띄엄 꺼내는 말에, 시종일관 오만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독설 대신 싸늘한 물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를 알아?”


“그, 그래! 네년이 동평왕의 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하하핫!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지?”


뚱뚱한 청년은 아마 이제야 소연화의 정체를 파악한 듯 싶었다. 설령 정말 진작부터 소연화의 정체를 알았다 해도, 저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듬거리면 별로 믿음이 가질 않는다.


“날 알고도 이렇게 나온다면.... 한 수 재간은 있는 모양이네.”


이런, 또 시작이군. 소연화는 끝까지 독설을 퍼부을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소연화가 슬쩍 어딘가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서 있는 쪽이다. 설마 날 알아본 건가? 아니군. 그냥 주위를 확인한 것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냉막한 사내 역시 소연화가 바라본 쪽을 바라본다. 그렇군. 저건 속임수였어. 사내가 다시 시선을 돌리기 전에, 소연화가 재빨리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족히 스물은 되는 그림자가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럼 이것도 받아보시지?”


소연화가 기세등등하게 쏘아낸 비도가 온갖 방향 날아간다. 보통이 아니다. 하나를 피하려 하면 둘을 맞고, 둘을 쳐내려 하면 열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절묘한 투척이다. 동등한 실력이라면 손을 쓸 수가 없는 공격이다. 그러나 사내의 실력은 역시나 소연화의 실력을 월등히 넘어있었다.


“감히.”


사내의 온몸에서 투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그 의지가 기로 형상화되어 사방을 뒤덮는다. 호신강기다. 수많은 비도가 호신강기에 형편없이 튕겨져나간다. 그리고 사내가 역공을 취한다. 가느다란 검에서 검기가 피어오르고 섬전처럼 소연화의 숨통을 노렸다.


“누가 감히래?”


소연화가 허리에 손을 댔다가 한 바퀴 빙글 돌면서 팔을 뻗었다. 소연화의 허리를 감고 있던 요대가 뻣뻣하게 일자로 펴지며 사내의 검을 쳐냈다. 허리에 감고 있던 건 요대가 아니라 연검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역시 소연화의 검에서도 검기가 맺혀 있었다.


“나한테 감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야!”


낭창낭창한 연검이 뱀처럼 구불대며 사내의 검을 휘감았다. 이에 사내가 재빨리 검을 회수하고는 한쪽 발로 바닥을 찬다. 발 끝이 땅을 한껏 긁어가자, 자욱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실로 사파인다운 부지불식간의 한 수였다.


“겨우 이 정도로...”


소연화는 내공을 싣은 옷소매로 단숨에 흙먼지를 갈랐다. 소연화의 시선이 가려진 건 그녀의 말마따나 겨우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 겨우는 절정고수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다. 흙먼지를 가르며 연검을 휘두른 소연화의 뒤편에, 냉막한 사내가 싸늘하게 웃으며 소연화의 뒤를 점했다. 제기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그만!”


머릿속에 자연히 승천보의 구결이 떠올라 그에 따라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동시에 검을 뽑는다. 꿈 속에서 오랫동안 체득했던 무의식의 일검이 펼쳐졌다. 비룡출조. 비룡검파의 검의가 담긴 쾌검이다.

그 검을 펼쳐내면서,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일검이 성공치 못하면 나 역시 죽는다. 아직 무의식적으로 펼치는 검에 몸이 익숙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숨을 두 번 내쉴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검을 휘두를 수 없다.


“큭!”


사내가 마치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능숙하게 내 검을 피했다. 그 동작만큼은 정사를 떠나서 충분히 감탄할만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내 검을 빗나갔고, 나는 낭패를 보기 직전이었다.


“너나 죽어!”


소연화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비도가 사내의 손목을 때렸다. 뒤늦게 호신강기가 비도를 쳐냈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소연화의 진짜 공격은 육중한 청년을 항하고 있었다.


“계집!”


사내가 극에 달한 경공을 펼쳐 눈 깜빡할 새에 청년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호신강기만을 믿고 수없이 쏟아지는 비도를 맨몸으로 받아냈다.


“칫.”


소연화가 혀를 차며 바닥에 깔린 흙먼지를 제치며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나를 한차례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사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 검노!”


청년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역시 검노라는 사내는 건재했다. 내공을 극도로 소모했는지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아직 몇 시진은 계속 싸울 수 있어 보인다.


“흥, 더 해보려고?”


소연화가 느닷없이 으름장을 놓는다. 이건 대체 무슨 베짱이야? 내가 놀란 티를 내기도 전에, 사내가 청년을 한팔로 막아선 채 조용히 읊조렸다.


“소천검. 위험하다.”


사내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소천검? 그건 내 별호잖아. 가만, 이제 알겠다. 저자는 나를 경계하고 있던 거야. 그렇군. 그때 소연화가 내 쪽을 본 건 속임수이면서 나라는 존재를 사내에게 각인시키는 거였어. 그래서 내 공격을 그렇게 쉽게 막은 거였군.


“바, 방해하지 마라, 소천검!”


뚱뚱한 청년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이에 소연화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입 있으면 한마디 해줘. 꺼지라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되도록 안전하게 말을 할 생각이다. 공연히 사내를 도발했다가는 정말로 다 죽는 수가 있으니까. 나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포권을 쥐며 말했다.


“천의검문의 도군입니다. 소 소저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검객께서는 이만 검을 물려 주십시오.”


“.....다음은 소천검 너도 죽인다.”


사내로부터 짙은 살기가 쏘아져 온다. 소름이 돋는다. 다음에는 보자마자 암습을 가해오리라는 불안이 치솟는다. 그렇지만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나는 이런 위협에도 끝까지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옷 안쪽은 이미 솜털이 뻣뻣하게 일어나 있었지만 말이다.


“천의검문은 오는 검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천의검문의 제자다운 말을 듣고서, 두 사람은 군중들이 내 주는 길을 따라 사라졌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바짝 타들어간 속을 모르는 소연화를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연신 폭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흥, 십초지적도 안되는 것들이.....”


말도 안 나오는군. 그렇게 죽고 싶다면 좀 더 조용한 방법이 있는데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다니. 이런 내 시선을 의식하고는 소연화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왜? 내가 너무 무모해 보였나? 맞아. 나도 네가 있다는 걸 보기 전에는 적당히 물러날 생각이었어.”


용봉회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그나마 예의 비슷한 것이라고 뒤집어쓰고 있었다면, 지금은 아예 경칭도 생략하고 뻔뻔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방금까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해서 경황이 없는 걸까?


“저를 너무 믿는군요.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대며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괜한 소문만 안 났으면 좋겠는데. 아니, 이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는 없다. 그리고 이게 심하령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겠지. 젠장, 꽤 한소리 듣겠어.


“.....그땐 내가 알아서 했겠지. 그런데 넌 왜 혼자서 돌아다니는 거야? 그 건방진 여자는?”


설마 심하령을 일컫는 걸까? 기도 안 차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누굴 보고 건방지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내가, 그 장사치 계집한테 건방지다고 하는 거잖아.”


이젠 알겠군. 경황이 없어서 반말을 내뱉는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더이상 상대할 생각이 들지 않아, 다른 말 없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지만 얼마 걷지 않아, 나는 소연화에게 소매를 붙들리고 말았다.


“어디 가?”


“갈 길 갑니다.”


“같이 가. 나 심심해.”


이런 천방지축인 사람은 또 처음이군. 아마 설초아가 귀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군. 거기에 귀족처럼 건방진 성격까지 더해야 이렇게 되겠어.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올립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개성이 겹치면 참 읽기 힘들죠. 그놈이 그놈 같고...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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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4. 유아독존(唯我獨尊) (9) +2 14.10.13 1,339 20 21쪽
157 4. 유아독존(唯我獨尊) (8) +5 14.10.03 1,108 28 18쪽
156 4. 유아독존(唯我獨尊) (7) +5 14.10.01 1,589 27 11쪽
155 4. 유아독존(唯我獨尊) (6) +4 14.09.27 1,015 24 16쪽
154 4. 유아독존(唯我獨尊) (5) +5 14.09.27 1,222 25 17쪽
153 4. 유아독존(唯我獨尊) (4) +8 14.09.27 1,327 26 21쪽
152 4. 유아독존(唯我獨尊) (3) +7 14.09.26 1,149 21 22쪽
151 4. 유아독존(唯我獨尊) (2) +6 14.09.20 1,269 27 10쪽
» 4. 유아독존(唯我獨尊) (1) +4 14.09.12 1,368 34 21쪽
149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2) +7 14.09.05 1,472 37 13쪽
148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1) +7 14.08.31 1,477 33 11쪽
147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0) +6 14.08.24 1,225 33 10쪽
146 3. 천의검문의 소문주 (9) +9 14.08.10 1,558 35 20쪽
145 3. 천의검문의 소문주 (8) +4 14.08.04 1,318 33 18쪽
144 3. 천의검문의 소문주 (7) +9 14.08.01 1,414 37 12쪽
143 3. 천의검문의 소문주 (6) +4 14.07.30 1,160 33 12쪽
142 3. 천의검문의 소문주 (5) +5 14.07.29 1,224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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