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무림대회(武林大會) (5)
동평왕은 무심한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세 사람을 슥 둘러보았다. 잔잔한 눈빛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시선으로부터 봄바람보다는 차디찬 북풍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대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말았다네.”
이런, 이야기를 다 들었다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한 말은 결코 동평왕이 좋아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동평왕은 태연자약할 뿐, 얼굴이 붉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표정을 감춘 거라면 즉시 사죄를 구하는 것이 좋으려나?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는....”
“그럴 필요 없다네. 흠, 우선들 앉도록 하게.”
일언지하에 사죄를 되돌려 보내고 동평왕이 소연화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소연화는 시녀가 가져온 작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우리 역시 보낼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동평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 과인의 불찰이야. 정말로 그대들을 적이 아니라 여겼다면 진작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야 했겠지. 그리고 연화가 경거망동한 것은 아비가 부덕한 탓이니 용서하게.”
“아바마마!”
명망 높은 제후가 자신을 낮추는 것에는 나로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국의 군주가 아니라 첫인상처럼 일개 문사에 가까워만 보인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풍기는 미미한 위엄은, 그가 역시 중원의 일각에 군림하는 제후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동평왕이 일으킨 짧은 소요가 가라앉은 다음, 심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고심하는 차에 심하령이 시기적절하게 딱딱한 이야기를 듣고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동평왕은 자연스레 그 흐름에 편승해 말했다.
“그렇다네. 허나 그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연화의 말로는 그대의 실력이 무림일절이라 해도 좋다고 들었다네.”
“과찬일 뿐입니다.”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하니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그것은 소연화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녀도 고개를 푹 숙이고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허나, 연화도 천방지축인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나는 그대들에게 직접 묻고자 하네. 아니, 가장 가까이서 소문주를 지켜본 그대가 말해보게. 도군이라는 자는 소천검이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자인가?”
“그렇습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지만 심하령은 야속할 정도로 쉽게 대답을 냈다. 거짓말임을 뻔히 아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실망마저 든다. 조금이라도 심사숙고한 다음 저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이나마 기뻤을 테지만, 이래서야 엎드려 절 받기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를 알 리 없는 동평왕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하나 더 묻겠네. 일기당천(一騎當千)과 비교하면 어떠하다 보는가?”
이번에는 심하령의 말문이 막힌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제후의 파상공세를 단신으로 버텨낸 이선엽의 일화는 너무나도 허황된 것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평왕으로서는 가장 가까이서 실력을 체감한 고수이니만큼 그와 비교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심하령이 아니라 내가 나설 차례다. 절정을 넘어 궁극에 다다랐던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선엽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 평가를 깎아 먹을 수도 있거니와, 동평왕의 군세를 도륙한 자를 평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동평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기탄없이 말해 보게.”
“북천왕을 지키며 보인 실력인지라 확실치는 않으니 최악의 경우를 가장하겠습니다. 만약 아무 제약도 없이 싸운다면 지금 평도에서 그를 단신으로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이들뿐이었지만 단지 한 사람의 무림인일 뿐이다. 기천의 군대를 단신으로 막아내는 활약을 보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루베르크를 쓰러트린 직후의 소렌이나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나마 소렌도 누군가를 지키며 싸운다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으니, 결국 일기당천의 실력이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한가.....”
동평왕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늘 어린 새처럼 재잘대기를 좋아하던 소연화 역시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고 이야기를 경청하고만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그렇다면 정천검께서 움직이신다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심하령이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에 소연화가 도끼눈을 뜨고 심하령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소연화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언사는 무례했지만 심하령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나선다는 건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다. 일문의 문주가 나선다는 것은 문파 전체의 힘을 동원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문파와 연결된 모든 이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다. 단순히 소문주가 나서서 청을 들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에 동평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지 궁금한 것일 뿐일세. 천의검문이라는 곳이 일기당천을 당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도 들려줄 수는 없겠는가?”
억지에 가까운 청에 당황한 심하령 대신 내가 대신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천의검문은 결코 일기당천 한 사람에게 지지 않습니다.”
“알겠네.”
동평왕은 그 대답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는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건 정녕 개인적인 호기심에 그치는 일일까? 대체 어떤 일이기에 이런 극단적인 것까지 물어오는 것일까?
“그대들에게 청이 하나 있다네. 이것만 들어준다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허나 과인의 목만은 내줄 수가 없을 것 같네. 과인이 죽는다면 연화를 맡아 달라는 청이니 말일세.”
“아바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화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반쯤 일어선다. 동평왕은 그런 소연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아련한 눈으로 그녀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놀란 나머지 눈시울마저 붉어진 소연화가 동평왕의 손길에 점차 진정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에야 동평왕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소문주께서 확답을 준다면 나도 모든 것을 말해주겠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야. 부디 그리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니요.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전에는 아무 확답도 드릴 수 없어요.”
심하령이 더없이 차갑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물론이고 동평왕 역시 흠칫 놀라서는 분위기가 더욱 묘하게 변했다. 소연화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심하령에게 다가간다. 좋지 않다. 불길한 예감에 나 역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소연화의 손이 움직인다. 다급히 나는 팔을 뻗어 심하령의 뺨을 치려는 손을 잡아챘다. 소연화가 기어이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까지 말다툼을 하며 감정이 격해져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 폭발한 것이다.
“감히..... 어떻게 그 따위로 말할 수가 있어? 네가 뭔데?”
소연화가 감정에 복받쳐 더듬거리는 것과는 달리 심하령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 조금은 다르다. 그녀 역시 평소와는 달리 꽤 화가 났는지 꽤 언성이 높아져 있었다.
“왜 제가 전하의 말씀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죠?”
“너 따위가 감히!”
소연화가 나를 밀쳐내고 다시 심하령의 뺨을 휘갈겼다. 이런, 방심하다가 놓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심하령의 얼굴이 한쪽으로 휙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때린 쪽이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연화야! 이게 무슨 짓이냐?”
동평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연화를 꾸짖었다. 이에 소연화는 소매로 눈을 슥 훔치고는 경공까지 펼쳐서 방을 박차고 나갔다.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도 못하고 나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하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대체 어떤 일이 숨겨져 있는지를.”
“그리 하겠네.”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서 동평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는 왜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일기당천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일세. 일기당천. 그자가 나를. 아니, 우리 왕실을 노리고 있어.”
사방의 제후가 격돌한 일대의 전쟁에서 이선엽은 일기당천이라는 명성을 떨치며 활약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떨치는 것과는 반대로 북천왕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쇠락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서, 이선엽이 명성을 떨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북천왕의 세력이 그만큼 형편없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천왕이 끝내 몰락할 때, 이선엽의 종적도 사라졌다. 거듭된 격전으로 내상을 입고 옥쇄했다는 이야기가 중론이었다. 그리고 한차례 세대가 바뀌어 현재에 이르러, 그가 죽지 않았다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일세. 감히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구족을 멸한다 했지. 말도 안되는 소리라 생각했다네. 사라진 황실에 무슨 충성을 바친다는 말인가? 하지만 막을 수가 없었어. 태평궁이 폐허가 되고 평도를 지키는 대장군의 목이 떨어져 나갔을 때 나는 대항하기를 포기했네.”
그래서였군. 굳이 무림인을 위해 새 건물을 지은 게 아니라 정말로 새로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야. 이런 일을 잘 숨겼다는 것이 감탄스러울 정도다.
“우리는 본래 무림과 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어. 맺더라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할 생각은 없었지. 하지만 일기당천이 나타나 나를 노린 다음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지.”
동평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이었던 게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목숨을 구걸했어. 폐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릴 시간을 달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야. 그가 물러간 다음 나는 간악하게도 그를 거꾸러트릴 방도를 찾았다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이지.”
동평왕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작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치졸하게 물었던 것일세. 아무리 일기당천이 강력하다 해도 천의검문이 비호한다면 연화까지 해하지는 못하겠지. 내 부탁은 본래 일기당천을 막아 달라는 것이었지만, 그게 안 된다면 이 부탁이라도 들어주게.”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작가의말
전개가 느려지는 기분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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