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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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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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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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4. 유아독존(唯我獨尊) (4)

DUMMY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것이 머릿속을 쾅하고 후려치는 것 같았다. 곧이어 극심한 두통이 시커먼 안개를 몰아내고 나를 현실로 끌어왔다.


“으윽....”


고약한 냄새가 가는 물을 뒤집어쓴 나는 차츰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오랜만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이리도 기분을 더럽게 하는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암울하기 짝이 없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조, 좋아. 일어났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차가운 석벽을 타고 고스란히 등허리를 울렸다. 등허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찬 기운이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한기를 피하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육중한 사슬에 사지를 결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흐흐, 꼴 좋구나, 소천검.”


말을 더듬거리면서 나를 비웃는 자는 전에 소연화를 해하려 한 그 뚱뚱한 청년이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다. 깡말랐지만 무서운 살기를 가지고 있던 사내. 점점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당신들은...”


목소리가 정말로 탁하게 변해 있어 스스로 흠칫 놀라서 말을 멈추었다. 상태가 정말로 좋지 않다. 미약하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긴장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한여름에도 이리도 서늘한 석실에 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이다.

정신이 또렷해지니 석공이 망치질을 하는 듯 지끈지끈한 두통이 육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밖으로 내뱉은 숨은 오한과 발열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내공을 수련한 이후로는 좀처럼 걸리지도 않던 병이다.


“하하! 이거 너무 황송하구만. 천의검문의 소문주가 우리같은 범부를 다 기억하고. 안 그래 검노?”


뚱뚱한 청년이 박장대소하며 그 옆에 시립해 있는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다. 검노라 불린 그 사내는 조용히 서 있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퍽 멋쩍은지 뚱뚱한 청년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다시 기세등등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천검 네놈이 섣불리 움직였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 그래, 그동안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아냈을까?”


우리에 대해. 나는 한중성을 어지럽히는 도둑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들이 바로 그 도둑이었군. 그리고 동시에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절정 고수는 흔치 않은 존내다. 흔치 않은 고수가 왜 한중성에 나타났는지 좀 더 생각해봤어야 했다. 심하령이라면 아마 그리했겠지. 그리고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테고. 울컥 화가 치밀어서 막무가내로 시미치를 뗐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 새끼가!”


간신히 토해낸 말에 뚱뚱한 청년이 잔뜩 화를 내며 내게 발길질을 가한다. 겉은 저리 보여도 내공의 수위는 상당한지, 발길질에 담긴 힘은 만만치 않았다.

무방비하게 얻어맞던 나는 그제야 내공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상을 입지 않으려 내공을 끌어모으려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래서였군. 감기 따위에 걸려서 빌빌대고 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건방지게..... 네가 아직도 소천검인 줄 아냐? 산공독을 잔뜩 먹여놨으니 넌 이제 쭉정이에 불과해. 이 새꺄!”


뚱뚱한 청년이 다시 광분하며 온몸을 두들긴다. 뼈가 부러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타격 하나하나에 실린 힘이 엄청났다.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온몸에 힘을 주어 내상을 입지 않으려 애썼다. 지난날을 떠올려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 차려라.


“허억, 허억, 썩어도 준치라고.... 꽤 단단하잖아. 이 정도 팼으면 어디 하나는 부러져 나갔어야 하는데.”


잠시 후, 뚱뚱한 청년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나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고통에 몸부림칠 수 있었다. 기침이 터져 나온다. 거친 숨이 목구멍을 긁어내며 한기와 열기에 담긴 가래를 몸 밖으로 밀어냈다. 정신없이 기침하니 숨이 막히고 눈이 빠질 것만 같다.


“에이, 재미없어. 가자. 한 며칠 이대로 구면 고분고분해지겠지.”


뚱뚱한 청년은 땀이 식어가며 석실의 한기를 느꼈는지 몸서리를 치더니 이내 석실을 나섰다. 그리고 검노 역시 조용히 청년의 뒤를 따랐다.


“허억, 허억....”


검노의 기척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생소한 기분이다. 이리도 몸이 엉망이 된 적이 있던가? 서역에서도 온갖 고초를 당했지만 지금은 육신이 비루한 탓에 더욱 고통이 크고 매서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통에 익숙해진 나는 열과 고통에 시달려 점차 멎어가는 정신을 일깨웠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저들은 서악왕의 수하다. 그리고 문영의 쫓고 있다 했지. 그렇다면 어쩌면 한중무관에도 문영의 흔적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혼잣말로 의식을 바로잡고 생각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문영 역시 서악왕의 수하로서 화포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왜 서악왕의 수하들이 문영을 쫓는단 말인가? 혹시 문영과 서악왕 간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그리고... 없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더 이상은 궁리할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생각이 끝나니 오히려 의식이 또렷해진다. 억지로 다잡은 의식이 지금의 처지를 절실히 실감하고, 그에 걸맞은 절망과 공포를 불러모았다.


“제기랄......... 제기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서악왕에 대한 분노에 힘입어 한기에 떨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거지 같은 일이다. 화포며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기로 했건만 결국 그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 곧 빙룡이 무림을 멸망시킬 텐데. 나는 그걸 막으려 하는데 고작 화포에 연연하는 놈들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세상을 구하러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절벽으로 구른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공허한 분노에 휩싸여 조용한 석실에서 홀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 한편 냉정해지려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희망은 있다. 이곳이 한중성이라면 심하령은 얼마든지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몸을 보전하는 게 우선이다.


“그 꿈.... 때문인가?”


꿈인지 아닌지 모를 그 경험들. 생각해보면 힘을 잃고 곤경에 처한 게 처음도 아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던 궁극의 경지. 본의 아니게 나는 그 삿된 힘으로 나약한 마음을 바꿔갈 수 있었다. 그 힘은 이젠 사라졌지만, 아직 내 마음은 그 힘에 맞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련.”


애초에 나는 내공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이 육신을 단련했다. 그 성과도 지금 나타나고 있다 내공 한 줄기 없는 상태였지만 뚱뚱한 청년의 구타와 병마의 시달림을 견디고 있었다.


“아....”


나는 바뀌었다. 강해졌다. 기약 없는 고행의 결과가 명약관화하게 보이는 이 순간, 더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몸은 이런 꼴이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가볍기만 했다. 당장에라도 검을 쥐고 수련을 하고 싶다. 희망은 분명 있다. 이대로 조금씩 강해져서 모든 어려움을 타파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양감에 휩싸여, 나는 내가 마치 검을 쥐고 수련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검을 내뻗었다. 비룡의 손톱처럼 매섭게 쏘아져 나간 검이 웅혼한 기운을 뿜어내며 검명을 발한다. 그와 함께 오른팔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이 벽으로부터 죽 뽑혀 나왔다.


“윽!”


너무 오랫동안 팔이 묶여 있었기 때문일까? 팔을 내리트리자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어깨로부터 상반신 전체를 뒤덮었다. 숨이 턱 막힌다. 어깨로부터 경련이 일어 팔이 혼자서 미친 듯이 떨리고, 그에 맞춰 손목에 휘감긴 굵직한 사슬이 덜그럭거린다. 그제야 나는 착각에서 빠져나왔다.

내공 한 줄기 없는데 사슬이 아예 뽑혀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무의식. 그렇다.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도움을 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른 쪽 팔도 가능할까? 혹시나 해서 왼팔을 움직여 보았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안타까웠다. 이곳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사라진 것보다는, 알 수 업는 그것의 정체로부터 멀어진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내공이 돌아오는군.”


예전에 잠깐이나마 무의식의 영역에 빠졌을 때, 내 몸은 스스로 심하령의 점혈을 풀어냈었다. 점혈 뿐만이 아니라 몸에 해가 되는 것은 모조리 배제하는 것인지, 지금 나는 산공독의 영향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내공이 돌아왔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천천히 호흡을 이어가며 탁기를 몰아냈다. 온몸을 뒤덮은 한기며 열기를 몰아내고, 차근차근 내공을 회복한다. 잠시 후,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며 오한은 대부분 사라지고 나는 오른쪽 손목을 감고 있는 수갑으로 다른 쪽 사슬을 부수었다. 그리고 양 다리를 구속한 사슬도 마찬가지로 끊어냈다. 별로 튼튼한 재질은 아니어서 사슬은 생각보다 쉽게 끊어졌다.

그러나 고작 사슬을 풀어낸 다음이라, 아직 양 손이며 다리에는 묵직한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사슬을 끊으며 소진된 내공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서 차분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누가 접근할세라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됐다.”


극심한 피로감은 떨칠 수 없었지만, 당분간은 움직일만하다. 우선 이곳을 나가야 한다. 혹시 내 검이 근처에 있는지 찾아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미약한 불빛 아래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검이 아니었다. 흉험한 고문 도구가 큼직한 탁상 위에 죽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니 절로 소름이 다 돋는다. 조금만 늦었어도 고문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줄기기 오싹해진다.


“그래도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군.”


피를 잔뜩 먹어 자루가 검붉게 물든 물든 소도(小刀)를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불안하다. 이것 하나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혼잣말로 불안을 일소하고 석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철문은 아니다. 잠그는 부분이 철로 되어 있기는 해지만 대부분 나무로 되어 있었다. 꽤 운이 따라 주는군. 사슬도 쉽게 끊은 것처럼 문도 쉽게 부술 수 있겠어.


“하압!”


내공을 싣은 소도를 서너 번 휘두르니 금세 큼직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소도가 만든 파편이 요란한 소리를 자아내, 나는 화들짝 놀라서 구멍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휴우, 없군.”


다행히도 아무도 없다. 혹시나 해서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사람이 달려오는 기척은 없었다.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온 다음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드문드문 있는 횃불에 의존해 걸음을 옮기던 중,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횃불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에 바싹 붙었다.


“젠장, 무슨 밥은 밥이야. 어차피 죽일 생각이면서. 그리고 만약에 소천검이 손가락이라도 꿈쩔하면 죽는 건 나잖아. 빌어먹을....”


유난히 투덜대며 복도를 걷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게 밥을 가져다주는 시종으로 보였다. 나는 잠자코 숨을 죽이고 시종이 내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을 땐 숨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하여튼 그 뚱땡이가 빨리 뒈져버려야 하는데. 귀신은 그런 놈 안 잡아가고 뭐 하나?”


다행히도 시종은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갔다. 지금이다. 나는 승천보로 시종에게 접근해서 순식간에 그의 혈을 짚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음을 내지 않도록 시종이 놓친 식사도 사뿐히 받아들었다.


“조용히 하겠다고 약속하면 풀어드리죠.”


식사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소도를 그의 목에 들이밀며 살의를 가장했다. 겉치레뿐인 위협에 시종은 눈을 반쯤 까뒤집었다가 간신히 눈알을 아래위로 굴렸다. 그리고 혈을 풀어주니 비명을 내지르려는 입을 탁 틀어막고 겁에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소, 소, 소.....”


“맞습니다. 지금 탈출하는 중입니다.”


시종을 진정시키던 중 문득 식사에 눈이 갔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죽과 채소절임이다. 흠, 그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지.

나는 식사가 담긴 식기를 집어들곤 단숨에 미지근한 죽을 들이마시고 채소절임을 삼켰다. 갑자기 음식이 들어오니 속이 조금 거북했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체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사, 사, 살려...”


“안 죽일 테니 진정하고 묻는 말에나 답해 주십시오. 나가는 길이 어딥니까?”


보잘것없는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식사만으로 나는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죽과 야채 절임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든다.


“저,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그, 그리고 가기 전에 저를 제압해 주시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군. 순순히 나를 보내줬다가는 경을 치를 테니 차라리 제압당하길 원하는군.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혈을 짚어 주었다. 그리고 시종이 가리킨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중간중간 위험천만한 순간이 있었다. 특히 순찰하던 무사 하나가 지척까지 와서는 고개를 갸웃하고 돌아간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주방 옆에 나 있는 작은 쪽문으로 나온 나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를 지나 바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 한중성이군.”


저 멀리 드높은 전각이며 성주의 궁이 바늘귀 정도의 크기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곳은 꽤 깊은 산중에 자리한 장원이어서 저기까지 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중성이 아닌 것보다는 낫지. 그런 생각을 위안으로 삼고 밖으로 한걸음 내디딘 순간 뒤편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이 사라졌다!”


“놈은 산공독에 중독되어 있다! 보는 즉시 죽여도 좋다!”


산공독이라. 그런 것쯤은 이미 해결했지. 그렇게 생각하고 내공을 운용하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얼굴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다. 내공이 모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식사에 생각이 미쳤다. 빌어먹을, 그놈들이 얼마나 좋은 놈들이라고 밥을 줬을까?

이젠 자책할 시간도 없다. 더 서둘러야겠군. 철의를 입고 산을 오르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거진 구르듯이 산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몸을 놀리는 가운데 나는 주위를 살펴 나를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확인했다.


“흔적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편에서 내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야단났군. 경공을 펼치지 못하는 터라 도망치기도 여의치 않다. 심지어 좋지 않은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슬슬 내 주위로 인기척이 몰려들었다.


“저쪽이다!”


부산하게 주위를 에워싼 인기척들이 움직인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임을 보니 무공을 제대로 익힌 자들이 분명했다. 내공도 없는 상황에 정면으로 맞붙을 이들이 아니다. 이 상황에 무의식에 잠든 그것이 도와준다면 모를까.....

그렇게 안일한 생각에 잠기려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금 스스로를 책망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것에 의존할 생각이냐? 무엇보다 언제 어떤 연유로 깨어나지는 지도 모르는 것에 의존할 순 없다. 지금은 지금 갖춘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해 가야 한다.


잠자코 산을 타고 내려가며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적였다. 그러던 중 서역에서 받았던 군사훈련이 떠올랐다. 그 내용이 자연스레 추격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놈들은 나를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분명 그곳은 절벽 따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겠지.


“젠장.”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미 포위망은 빼곡하게 나를 둘러싼 지 오래. 별수 없다. 적어도 한 번은 싸워야만 한다. 생각을 굳게 가지고 한껏 크게 도약해서 낙엽과 흙으로 뒤덮인 내리막길을 타고 미끄러져 갔다.

가히 경공에 버금가는 속도로 내리막을 타고 가니 포위망을 형성한 이들 역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지만 포위망에 틈이 생겼다.


“큭!”


그 틈을 포착하자마자 바닥에 소도를 박아 넣고 발에 힘을 주어 온 힘으로 속도를 줄인다. 바닥이 그드득 소리를 내며 갈려 나간다. 그리고 소도가 휘청하고 휘는 순간 간신히 그 자리에 멈추었다.

민활하게 나를 쫓던 이들이 휑하니 지나간다. 갑작스레 멈추니 속도를 늦추지 못한 것이다. 후위를 맡던 이들은 황급히 멈추고 있다. 바로 지금이다. 앞서 가던 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후위가 완전히 태세를 갖추기 전에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


“크아앗!”


비명 같은 기합성을 내며 다리가 터져나갈 듯 힘을 주어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엉거주춤 멈춰 서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내가 채 검을 빼 들기도 전에 그 목덜미에 소도를 박아넣었다. 철의와 투로 수련으로 단련된 팔심으로 소도는 완전히 빈틈을 파고들었다.


“으아악!”


사내가 고통을 못 이기고 검을 놓치며 그대로 쓰러진다. 바닥을 긁으며 완만하게 휘어버린 소도여서 더욱 고통이 큰 것 같았다.


“놈!”


수풀을 헤치고 후위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다. 소도에 당한 사내와는 달리 검까지 빼 든 채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렇지만 나는 정면에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나는 냉큼 바닥으로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주인 잃은 검을 쥐고, 다른 손에는 낙엽과 흙을 한 움큼 쥐어 그것을 눈앞에 뿌렸다.


“크윽! 비겁한....”


제대로 먹혔다. 정도문파의 제자가 이런 식으로 싸울 줄은 몰랐겠지. 그렇지만 나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산공독이라는 치사한 수법 앞에서 정정당당함을 논할 만큼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흙이 들어가서 눈을 질끈 감은 새에 나는 사내의 발목에 검을 휘둘러 단번에 힘줄을 끊었다. 나를 추격하기는커녕 무인으로서 살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상태가 된 것이다. 사내가 이에 정말로 격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인과응보라 생각하길.”


미약하게 솟아오른 죄책감을 이 한마디로 지워버리고 나는 거꾸로 산을 타고 올라갔다. 뒤늦게 나를 놓친 이들이 모여드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그때 이미 나는 가파른 언덕을 다 올라 있었다.


“후욱, 후욱.”


언덕에 오르자마자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섯이나 되는 이들이 나를 쫓아 언덕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산을 타는 속도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들이 느린 것이 아니라 내가 이상할 정도로 빠른 것이다. 철의를 입고 산을 타던 고약한 수련 덕택이다.

그렇게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난 다음, 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최대한 빠르게 산허리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한중성의 중심이다. 얼마나 가야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


정신없이 달리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갔다. 지나치게 지친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정신도 지친 몸을 따라 무뎌지고 있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바위틈에 몸을 들이밀고 작정하고 휴식을 취했다. 과연 저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날 쫓을지는 모르지만 지쳐서 나자빠지는 것보다는 나을 성 싶다. 그리고 날 쫓는 이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지독한 놈들.”


아직 산공독은 내공을 흩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독한 산공독이기에 이 지경일까? 내가 평범하게 무공을 수련한 소문주였다면 장원을 탈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화위복이라 하였던가? 아니지. 만약 제대로 된 무공을 갖고 있었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암습에 당하지 않았을 테니 결국 쓸모없는 위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한 나는, 곧장 계곡으로 향해 갈증을 풀었다. 막상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조금 쉬고 나니 갈증이며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리도록 찬 계곡물로 엉망이 된 몸을 달래고 이어서 나는 손발을 구속하고 있는 수갑이며 족쇄를 바라보았다. 철의를 입던 버릇 때문인지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손발의 균형을 흩트리는 건 꽤 거슬렸다. 체력이 고갈될수록 이런 자잘한 것들이 더욱 움직임을 더디게 했다. 하지만 내 실력으로 이것들을 상처 없이 갈라버릴 수 있을까?


“안 되겠군.”


검을 들고 이리저리 느낌을 재 보다가 결국 포기했다. 억지로 이걸 자르려다 큰 상처가 난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그 대신 나는 넝마가 된 옷을 조금 찢어서 쇠가 닿는 부분을 잘 싸맸다. 천을 밀어 넣으니 덜렁거리는 느낌도 없어서 한결 나았다.

그렇게 어지간한 일은 전부 해결하니 다시 허기가 찾아왔다. 그렇지만 한가하게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울만한 상황은 아니어서, 급한 대로 나는 근처에 열린 열매 몇 개와 물로 배를 채웠다. 그저 열매에 독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그냥 난 글쓰는 기계일 뿐이지! 어째 점점 그냥 무협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다음 내용도 그냥 흔한 무협지 전재가 되버렸고.... 글이 산으로 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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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5. 무림대회(武林大會) (4) +6 14.11.15 846 22 11쪽
162 5. 무림대회(武林大會) (3) +1 14.11.08 873 24 7쪽
161 5. 무림대회(武林大會) (2) +6 14.10.24 1,342 24 13쪽
160 5. 무림대회(武林大會) (1) +4 14.10.15 1,028 24 16쪽
159 4. 유아독존(唯我獨尊) (10) +5 14.10.14 1,178 24 25쪽
158 4. 유아독존(唯我獨尊) (9) +2 14.10.13 1,338 20 21쪽
157 4. 유아독존(唯我獨尊) (8) +5 14.10.03 1,108 28 18쪽
156 4. 유아독존(唯我獨尊) (7) +5 14.10.01 1,589 27 11쪽
155 4. 유아독존(唯我獨尊) (6) +4 14.09.27 1,013 24 16쪽
154 4. 유아독존(唯我獨尊) (5) +5 14.09.27 1,221 25 17쪽
» 4. 유아독존(唯我獨尊) (4) +8 14.09.27 1,327 26 21쪽
152 4. 유아독존(唯我獨尊) (3) +7 14.09.26 1,147 21 22쪽
151 4. 유아독존(唯我獨尊) (2) +6 14.09.20 1,269 27 10쪽
150 4. 유아독존(唯我獨尊) (1) +4 14.09.12 1,367 34 21쪽
149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2) +7 14.09.05 1,472 37 13쪽
148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1) +7 14.08.31 1,476 33 11쪽
147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0) +6 14.08.24 1,225 33 10쪽
146 3. 천의검문의 소문주 (9) +9 14.08.10 1,556 35 20쪽
145 3. 천의검문의 소문주 (8) +4 14.08.04 1,317 33 18쪽
144 3. 천의검문의 소문주 (7) +9 14.08.01 1,413 37 12쪽
143 3. 천의검문의 소문주 (6) +4 14.07.30 1,159 33 12쪽
142 3. 천의검문의 소문주 (5) +5 14.07.29 1,222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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