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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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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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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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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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아독존(唯我獨尊) (9)

DUMMY

벽보를 보고 찾아온 무인들이 성주의 궁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철비도를 비롯한 보물이 잠들어 있는 창고 옆에는 나름대로 정예라 할 수 있는 정도용봉회와 극소수의 고수를 배치했다. 소연화가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에 비도를 훔치러 오는 멍청이가 있을까?”


“별다른 계책이 없는 이상 당장은 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경계가 흐트러질 때쯤엔 오겠지요. 아니, 반드시 옵니다.”


“너 정말로 정혼자 말은 철석같이 믿는구나?”


소연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빈정거렸다. 팔불출처럼 보였을까? 그렇지만 이건 객관적인 확신이라 믿고 싶다. 그만큼 심하령의 재지는 뛰어나니 말이다. 아마 그녀라면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그리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소 소저는 저쪽에 가 계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소연화는 본래 정도용봉회에 속한 몸이다. 굳이 용봉회에 쓴소리를 내뱉은 데다 평판도 추락하고 있는 내 옆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 소연화가 질색하면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싫어. 저긴 너무 불편하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한동안 너무 조용히 창고를 지키고 있어서였을까? 무심코 궁금함이 샘솟아 물으니, 소연화는 눈까지 흘기면서 심통을 부렸다.


“너 진짜 무신경한 거 알지? 만약 정말로 이야기하기 싫은 일이었으면 어쨌을 거야?”


“죄송합니다.”


“됐어.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냐. 비룡의 제자가 냅다 내가 좋다고 해서 거절했거든. 그리고는 아예 용봉회를 나와버렸어. 그런데 쟤들은 아직 내가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이런, 그런 일이 있었군. 이래서야 괜히 소연화에게 용봉회를 끌어들이게 한 것 같다. 다시 얼굴을 대하기도 껄끄러운 상황이었을 텐데 나를 만나달라고 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은 오죽할까?


“그런데 왜 거절하셨습니까? 비룡검파의 제자라면 꽤 훌륭한 혼처가 아닙니까? 진운이라는 자도 딱히 모자란 구석 없는 검객 같습니다만.”


“와아, 소천검이 이렇게 극찬하다니. 저쪽에서 이 소릴 들으면 기뻐서 춤이라도 추겠네.”


소연화가 무미건조하게 감탄사를 내뱉은 다음 빈정거렸다. 그리고는 좀 더 일찍 이걸 물어볼 걸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소연화는 선뜻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말대로 비룡의 제자 정도면 괜찮지. 제후가 무림방파와 연을 맺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저 팔푼이는 아냐. 얼굴만 멀쩡해서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데다가 은근히 거만을 떠는 꼴이 꼴불견이거든. 그런 사람을 후기지수라고 내세우는 비룡검파도 마음에 안 들어. 아무리 내가 인맥을 위해서 정도용봉회를 택했다지만....”


“흠, 그렇습니까? 비룡검파에서 그런 자를 키워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엇보다 비룡검객은 온 무림이 인정하는 대협이 아닙니까?”


비룡검객은 명예와 신의를 아는 대협이었다. 그런 사내가 있었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비룡검파를 꽤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연화의 말을 들어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을지 모른다.


“뭐, 세상사가 다 그렇잖아. 천의검문의 소문주만 봐도 알지. 문파가 그럴듯하더라도 그 구성원이 모두 똑 부러진 건 아니잖아.”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좀 더 정진하겠습니다.”


새삼스레 내 나약함을 한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소연화는 더욱 약이 올랐는지 뱁새눈을 뜨고 쓴소리를 더 해갔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그 태도 진짜로 재수 없어. 일부러 멍청이인 척 소문을 낸 주제에 그러면서 저런 사람들한테 우월감이라도 느낄 생각이야?”


소연화가 저 멀리서 이쪽을 힐끔거리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을 가리키고는 빈정댔다. 참, 할 말을 잃게 하는군. 나는 입맛을 다시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송구하게 됐습니다.”


“칫, 어쩜 그렇게 하는 말마다 밉상일까?”


그렇게 잡담을 하며 하루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닷새째가 되어 철통 같은 경계도 한풀 꺾인 때, 마침내 조짐이 보였다. 느닷없이 바깥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정적을 부수는 소음에 모든 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산하게 움직인다.


“참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네.”


소연화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심하령이 말한 시기와 절묘하게 일치한다. 닷새째 해가 지기 전에 온다더니 정말로 그리되었군. 다시 한 번 심하령의 재지에 감탄하며 바깥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달려나갔다. 소연화는 물론이고, 몇몇 무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움직였다.


“불이야!”


“경계를 늦추지 마라!”


바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곳곳에서 불길이 피어올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연기가 너무 짙어서 십 보 바깥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화재가 아니다. 이건 인위적으로 연기를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다.


“이 동네는 너무 엉망진창이야. 무슨 도적 떼가 성주의 궁에 이렇게 쉽게 들어와?”


소연화가 연기를 헤치면서 비도를 몇 자루 손에 쥐었다.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성주가 너무 무골호인인 탓이려나? 아무튼, 지금은 성주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도둑을 막을 생각은 없다. 왜냐면 이건 일부러 만들어낸 함정이니까.


“소 공주님!”


저 멀리서 유약한 소녀의 외침이 들려온다. 소연화를 찾는 목소리다. 나는 소연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함께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쪽입니다!”


진운이 검을 빼 들고 연기 틈으로 보이는 그림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은 수상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는 없었다. 단지 진운을 비롯한 정도용봉회만이 연기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해? 가자.”


소연화가 진운 쪽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험담을 실컷 들어서인지 나도 조금은 진운을 대하기가 껄끄러워진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진운이 나를 발견하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소문주께서는 개의치 말고 보중하십시오. 아직 내상이 심하시다 들었으니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천의검문의 소문주에게 빚을 지우겠다니. 차암 좋겠네요. 명성이 사해만리로 퍼져나가겠어요.”


소연화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쏘아붙이자 진운이 할 말을 잃고 당황했다. 참 소연화도 너무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좋다는 사람을 이리 대하다니. 어쨌든 조금은 잘 됐다. 어떤 이유에서건 저들은 이제 최선을 다해 도둑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진운이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작정 창고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둑을 잡으러 나선다. 이것이 내가 말해둔 계획의 요체다. 물론 숨겨진 계획은 전혀 다르지만.

도둑들은 아마 이 무모한 계획을 비웃으며 곧장 창고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모함은 기만이다. 진짜 도둑을 막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나를 내버려두고 떠난 세 사람이지.

이를 알 리 없는 이들은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해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공을 세우면 더 큰돈을 준다는 말을 하길 잘했군. 물론 정도용봉회는 공을 세울 생각이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뒤처질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유 소저는 제가 지켜드리지요.”


낙성곡에서 온 청년이 서슴없이 유약한 소녀의 곁에 바싹 붙었고, 이에 그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가느다란 검을 뽑았다.


“저도 늘 놀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만날 어린애 취급만 하지 마세요.”


“하하, 그거 미안하구나. 그럼 우리 유아(兒)의 실력 좀 볼까?”


참 화기애애하군. 이런 분위기를 못 이기고 적당히 시선을 돌리던 중, 나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리고 있던 소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잘들 놀고 있지? 진운이 평생 자기들을 지켜줄 줄 안다니까. 이래서 저기 있기 싫었어.]


소연화의 전음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뒤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도용봉회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앞세워 짙은 연기를 헤치고 들어갈 뿐이었다.


“으아악!”


벌써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 비명이 일개 병사의 것인지, 아니면 돈으로 모인 무인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뭔가 이상하다. 너무 빨리 사상자가 나왔어. 분명 심하령은 병력을 최대한 동원할 것이라 했다. 즉, 도둑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맞서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되면 도둑들은 우리를 피해서 곧장 창고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비도를 지키는 진짜 고수가 도둑을 벌할 것이다. 나를 내버려두고 떠난 세 사람 말이다. 그리고 도둑을 몰아넣던 우리는 역으로 창고로 향해서 도둑을 포위한다. 이것이 계획의 요체였다.


“모두 제 뒤로 물러나십시오. ”


비명이 사방을 울린 다음부터, 진운이 무척 긴장한 기색을 내보이며 중얼거렸다. 긴장한 걸까? 과연 진운 뿐만이 아니라 정도용봉회 전원이 경직된 모습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들은 그야말로 애송이다. 나이와 경험에 걸맞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한편으로 나는 내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적을 속이는 기만임을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많은 악전고투를 겪은 내가 보일 수 있는 여유라면 여유였다.


“아무래도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연막이 너무 강한 데다가 우리 쪽 피해가 상당합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의 숫자를 가늠하던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슬쩍 운을 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껄끄러웠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시간을 끌다 창고로 향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절정 고수의 숫자가 심하령의 상정보다 더 많다면 비도를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포위는커녕 우리 쪽이 각개격파를 당해서 창고를 지키고 있는 세 사람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진운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호기를 보였다. 또한,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곧장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그래요! 우릴 우습게 보지 마시라고요.”


유약한 인상의 소녀가 진운의 말에 맞추어 억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목소리를 높이다니. 도움이 못 된다면 방해나 말았으면 좋을 텐데.

절로 후회가 밀려온다. 정도용봉회를 동원한 건 그럴듯했지만 전부 데려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진운과 낙성곡의 청년 하나만 데려왔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개중에는 두 사람의 상태가 제일 양호했으니까.


“도망치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목적은 비도를 도둑맞지 않는 것입니다. 적은 반드시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지나친 다음 물건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도둑들이 둘로 나뉘었고 연막이 그걸 가리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모든 것은 심하령의 예측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그녀의 예측이 빗나갔다. 심하령이 우려하던 변수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움직일 때다. 그런 생각을 담아 나는 진운에게 나약하게만 보이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흐음..... 가능성은 충분하군요.”


내 말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진운이었다. 그래도 정도용봉회의 주축에 서 있는 사내답군. 진운이 마음을 굳히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버티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요. 소문주께서는 우리를 물건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머릿속에 미리 새겨두었던 성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고 주위 사물을 분간하려 애썼다. 제길, 쉽지 않군. 연막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머뭇거릴 수는 없다. 대충 칠할 정도 확신을 마친 나는 마치 확실하다는 듯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제가 앞장설 테니 진 소협께서는 뒤를 맡아 주십시오.”


저들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나는 검을 뽑아들고 맨 앞에 서서 연기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서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낯선 느낌이다. 한 번도 이렇게 사람들을 주도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느낌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다. 수천의 군세를 돌파한 경험이 있는데 고작 연기와 도둑떼가 대수일까?


“끄윽!”


“하앗!”


비명과 기합성이 점점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다. 짙은 안개 너머로 피비린내가 물씬 피어오른다. 내 생각이 맞았군. 적은 연막을 방패 삼아 우리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연막에 갇힌 우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꺄앗!”


피 냄새가 뒤섞인 흉흉한 분위기를 못 이기고 유약한 소녀가 발을 헛디디고 가느다란 검을 놓친다. 돌바닥 위로 챙 하는 쇳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오랜 사투에서 비롯된 경험이 외쳤다. 지금 적이 올 것이라고.


“온다!”


검을 뽑아듦과 함께, 쇄도하는 살기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수없이 몸에 새겨넣은 투로가 펼쳐진다. 전신의 내공을 끌어내 쾌검을 발하고, 피에 물든 삼첨도를 튕겨냈다. 연기를 뚫고 지척까지 접근한 사내가 삼첨도를 놓친 틈에 다시 내공을 쏟아부어 목덜미에 검을 박아넣었다.


“정신 차려!”


소연화가 유약한 소녀를 일으키며 비도를 사방에 흩뿌린다. 대부분은 빗나갔지만 적이 달려드는 것을 막는 데는 탁월했다. 진운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빛내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없다. 빌어먹을, 당했다. 내 손에 한 명이 당하면서 우리 위치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틀림없다.


“뭉쳐야 합니다.”


틈을 내줘선 안 된다. 틈을 보이는 순간 하나씩 당할 수밖에 없다. 내 말을 들은 이들이 하나같이 전부 진운의 근처에 몰려든다. 아주 잠시 동안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저게 나을지도 모른다. 방금 한 명을 처치하면서 내공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비참하도록 웃기는 일이다. 기나긴 고련(苦練)으로 몸은 얼마든지 초식을 내보일 수 있었고, 내공을 단시간에 발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내공은 여전히 부족하기만 했다. 오히려 내공을 원활히 쏟아내는 만큼 더 빠르게 내공이 소진된 셈이다.

삽시간에 입술이 바싹 말라붙는다. 천의결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여유를 보일 수 있었겠지. 자연스레 마음속에 천의결의 구결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천의결의 구결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천의결은 만능이 아니다. 탁월한 효용이 무인으로서의 역량을 갉아먹고, 궁극의 영역에서 천의결은 아무런 효용도 발휘하지 못한다. 설령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한다 해도 앞으로 다가올 위협을 이겨내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큭!”


낙성곡의 청년이 신음하며 간신히 어딘가에서 날아든 철퇴를 막아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다행히도 내 쪽에는 별다른 공격이 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소천검이라는 명성에 경계심을 품은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내가 진짜 허점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으려니, 근처에서 폭음이 일며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연막을 한 번 더 터트린 것이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아예 시커멓게 변해서 사방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사방에서 다시 공격이 쇄도한다.


“이 비열한.... 내가 바로 비룡검파의 진운이다!”


진운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지럽게 검을 휘둘렀다. 낙성곡의 청년이나 간간이 손을 보탤 뿐, 나머지는 겁에 질린 채 토끼눈을 한 채 진운의 뒤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듯했다. 뒤에 있는 소녀들을 지키는 통에 진운의 움직임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멍청이들아! 뭘 하고 있는 거야? 그쪽에 몰려 있으면 어떻게 해! 소천검 쪽에도 좀 가 있으란 말야!”


소연화가 기어이 욕설을 내뱉으며 진운 옆에 다닥다닥 붙은 이들을 떼어내려 한다. 그녀 눈에는 참으로 한심하게 보였겠지. 내가 아직 내상을 입었다는 걸 헛소문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들은 모른다. 아니, 모르기에 외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내 실력은 변변찮다. 저들을 한번은 구할 수 있어도 두 번은 무리다.


“제길.....”


다시 천의결이 떠오르고 그것을 지워낸다. 편법은 안 된다. 여기서 다 죽더라도 안 된다. 편법으로 살아나 봐야 나중에 파천마제나 빙룡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는다. 뒤이어 품속에 있는 단약에 생각이 미쳤다. 같은 편법이지만 그래도 이 단약이 천의결보다는 낫다. 적어도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편법이 아니던가.


“이 썩을 종자들이!”


진운이 지치고 이제 공세는 소연화에게 집중된다. 이에 소연화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비도를 흩뿌리고 이에 대처하는 반응을 따라 재차 비도를 날린다.

그 서슬에 잠시 공세가 멎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단약이 든 통을 꺼내 들고 나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이걸 취하는 순간 나는 분명 나태해질 것이다. 간신히 끌어올린 감각이며 부지런함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도 있다.

편법의 위험성을 경고한 심유환의 목소리가 어설픈 결심을 흔든다. 통을 부수려 손에 힘을 주었지만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대나무 통이 약간 일그러지며 묘한 소리를 냈지만 더 이상 형태가 뭉개지지 않는다. 멍청한! 이 와중에도 망설이는 거냐?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로 그때였다.


“모두 몸을 낮추십시오!”


우렁찬 사자후가 천지사방을 울린다. 그리고 이어서 미친 듯한 바람이 한순간에 자욱한 연막을 걷어냈다. 이에 우리 주위를 가득 메운 복면인들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사자후의 근원지에 서 있는 한 사내가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드러내며 좌중을 압도했다.


“철검무룡.”


복면인들을 이끄는 것을 보이는 사내가 침음성을 흘리며 수하들과 함께 진운을 비롯한 이들에게서 훌쩍 물러난다. 진운은 긴장이 탁 풀렸는지 검을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고, 소연화도 던지려던 비도를 도로 소매에 집어넣었다.


“복면 따위는 집어치워라, 사중명.”


한상염이 정말로 깊은 분노를 담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에 복면인들의 수장이 서슴없이 복면을 벗어 던지며 혀를 찼다.


“염병할, 속았군. 그 뚱땡이가 호언장담하더니...”


나를 습격한 자가 아니라 또 다른 고수다. 머릿속을 더듬어 사중명이라는 이름을 되새겨 본 나는 오래전 심하령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 죽이기를 밥먹기보다 좋아한다는 사파의 절정고수. 살귀(殺鬼) 사중명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긴말은 필요치 않겠지. 내가 먼저 가겠다.”


한상염이 불문곡직하고 선수를 감행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쇄도한 한상염을 향해 복면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둘렀다. 이에 사중명이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이 병신들이!”


늦었다. 한상염에게 섣불리 손을 댄 이들이 일거에 사지가 분질러지고 나가떨어진다. 돌풍처럼 신출귀몰하게 움직인 한상염은 순식간에 복면인의 반절을 제압해버리고는 그제야 검을 뽑아들었다. 이 모든 것이 적수공권으로 이루어낸 일이었던 것이다.


“더 방해하는 자는 없겠군.”


살기가 깃든 싸늘한 한마디에 정도용봉회의 소녀들이 부르르 떤다. 사중명은 이를 박박 갈며 등 뒤에 멘 소도를 빼들었다. 그러나 역시 승산은 없어 보인다. 살수가 검객이 정면에서 맞붙는 상황이 첫 번째 이유고, 무엇보다 살귀가 철검무룡에게 형편없이 패퇴하며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 이유다.


“도망칠 테면 쳐 봐라.”


절정고수만이 품을 수 있는 거만한 여유를 보이며 한상염이 검을 휘둘렀다. 살귀가 힘겹게 한상염의 검을 받아내려 애썼지만, 양다리가 성할 때도 어쩌지 못한 상대다. 승부는 곧 나겠군.


“이곳은 한 대주께 맡기겠습니다.”


멍하니 압도적인 무위를 구경하던 이들을 일깨우며 단약이 든 통을 잘 갈무리한다. 아직은 이걸 쓸 때가 아닌 모양이다. 한상염이 강력한 일격으로 사중명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는 여유롭게 내 쪽으로 포권을 쥐어 보였다.


“천검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크으, 무시하지 마라!”


사중명이 재차 한상염에게 달려드는 것을 뒤로하며 나는 정도용봉회를 추스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모르긴 해도 한상염이 우리 쪽에 온 것은 심하령의 결정이리라. 비도가 아니라 내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

하지만 그녀는 아직 이것이 양동(陽動)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나를 암습한 냉막한 고수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악왕에게 버림받은 이들이라면 필경 전력을 투입했을 터.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조금 서둘러야겠군요. 싸울 수 없는 분은 여기 남으십시오.”


정도용봉회를 향해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을 해 주고 나는 나대로 먼저 움직였다. 서둘러야 한다. 한상염이 빠진 지금, 저쪽에 새로운 적이 당도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연속으로 두 편을 써보니 현기증이 나네요. 다음 편은 퇴고를 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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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5. 무림대회(武林大會) (3) +1 14.11.08 873 24 7쪽
161 5. 무림대회(武林大會) (2) +6 14.10.24 1,344 24 13쪽
160 5. 무림대회(武林大會) (1) +4 14.10.15 1,028 24 16쪽
159 4. 유아독존(唯我獨尊) (10) +5 14.10.14 1,178 24 25쪽
» 4. 유아독존(唯我獨尊) (9) +2 14.10.13 1,340 20 21쪽
157 4. 유아독존(唯我獨尊) (8) +5 14.10.03 1,108 28 18쪽
156 4. 유아독존(唯我獨尊) (7) +5 14.10.01 1,589 27 11쪽
155 4. 유아독존(唯我獨尊) (6) +4 14.09.27 1,015 24 16쪽
154 4. 유아독존(唯我獨尊) (5) +5 14.09.27 1,222 25 17쪽
153 4. 유아독존(唯我獨尊) (4) +8 14.09.27 1,327 26 21쪽
152 4. 유아독존(唯我獨尊) (3) +7 14.09.26 1,149 21 22쪽
151 4. 유아독존(唯我獨尊) (2) +6 14.09.20 1,269 27 10쪽
150 4. 유아독존(唯我獨尊) (1) +4 14.09.12 1,368 34 21쪽
149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2) +7 14.09.05 1,472 37 13쪽
148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1) +7 14.08.31 1,477 33 11쪽
147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0) +6 14.08.24 1,225 33 10쪽
146 3. 천의검문의 소문주 (9) +9 14.08.10 1,558 35 20쪽
145 3. 천의검문의 소문주 (8) +4 14.08.04 1,318 33 18쪽
144 3. 천의검문의 소문주 (7) +9 14.08.01 1,414 37 12쪽
143 3. 천의검문의 소문주 (6) +4 14.07.30 1,160 33 12쪽
142 3. 천의검문의 소문주 (5) +5 14.07.29 1,224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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