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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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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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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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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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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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칭 (12)

DUMMY

양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그것을 연신 소매에 닦아내며 나는 수정구에 비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중, 작은 쪽은 소렌 폰테일. 자그마한 체구에 인형 같은 무표정함을 지닌 소녀다. 더불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그 아래에 찬 세 자루의 수련용 검은 그야말로 현실이 아닌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소렌의 맞은편에는 큰 체구에 걸맞는 단단한 근육으로 온몸을 도배한 한 마리의 야수가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칼벤 볼마르그. 소렌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아버지로 둔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소렌보다는 칼덴이 더 드래곤 슬레이어의 자식다웠다.

본래 매칭은 한 명이 다른 세 사람과 대결해야 하는 것이지만 에럴드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겨루는 대신 두 사람끼리만 세 번을 겨루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규칙이 바뀌어서 적용되었다.

그건 어쩌면 소렌과 칼덴에게도, 그리고 그들에게 힘없이 꺾였을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조금 아쉽다. 나는 라크를 마지막으로 상대가 결정되었으니 어차피 칼덴이나 소렌과 맞붙을 일이 없었겠지만 아예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장내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약간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던 여타의 대련들과는 달리 두 사람의 대련은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아들과 딸이라는 두 사람의 위치가 그렇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이번 매칭을 주관하는 소위 높은 사람들이 관전하고 있다는 점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체면불구하고 먼저 손을 쓴 쪽은 칼덴이다. 정말로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수련용이라는 말을 덧붙여도 무지막지하기 짝이 없는 묵직한 마상창에 터질 듯한 근육까지. 저보다 라스탄트의 단체복이 안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흐압!”

우렁창 기합과 함께 가뿐히 뻗어 낸 일격에 소렌이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몸을 회전해 공격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광대가 기교를 부리는 것처럼 손도 대지 않은 검이 스르르 뽑혀 나오며 소렌의 손에 착 달라붙는다. 이번에는 소렌의 차례다. 두 자루 검을 곧추세운 그녀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은 정도의 쾌검을 선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엄청난 기세로 공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우아아... 폰테일 양의 실력이 저 정도라니. 우린 맨날 봐주기만 했던 거네. 그렇지 에럴드?”

르네가 호들갑을 떨며 에럴드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에럴드는 소렌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소렌의 진짜 실력을 처음 보겠지.

심지어 대련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높으신 양반들도 꽤 놀란 눈치다. 확실히 가냘픈 소녀가 머리 3개 정도 차이나는 근육질의 거구를 상대로 호각을 이루는 건 꽤 대단한 광경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소렌은 아주 사소한 것을 간과한 나머지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래 어깨 즈음까지 오던 소렌의 머리카락은, 지금은 꽤 자라서 허리까지 오고 있었다. 최근 A반을 상대하는 통에 조금 바빴고 무엇보다 머리카락이 방해가 될 정도로 격렬한 수련이나 대련을 하지도 않은 탓에 그것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렌의 머리카락이 저렇게 휘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나도 소렌의 머리카락이 꽤 길어서 대결에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미리 알았다면 전날 머리카락이라도 정리하라고 귀띔해주었을 것을.

“크읏...”

재차 일격을 퍼부으려는 찰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소렌의 시선을 가린다. 소렌이 인상을 쓰며 머리카락 너머의 창을 간파하고는 재빨리 몸을 날린다. 너무 급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나려타곤처럼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겨우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칼덴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소렌의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나 소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런 사사로운 실수를 입 밖에 낼만큼 소렌의 자존심은 낮지 않았다. 그러나 자존심과는 별개로 소렌은 계속해서 머리카락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먼저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소렌의 어깨를 마상창이 정통으로 파고든다. 실제 대결이었다면 아예 어깨가 떨어져나갔을 기세였지만 다행히도 칼덴이 쥔 창은 곤봉에 가까운 수련용 창이었다. 그러나 결코 가벼운 부상은 아니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소렌의 어깨가 휙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렌의 표정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싸울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적어도 내가 소렌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렌은 냉정했다. 멀쩡한 쪽 팔을 들고 패배를 인정하고 그녀는 일단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뼈가 부러졌어. 치료담당 전부 불러와!!”

소렌의 어깨를 살펴보던 에럴드가 고함을 치며 의사와 마법사들을 불렀고 이내 다섯이나 되는 하얀 옷의 사내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이까지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것을 보니 과연 렌서스 후작가의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의사가 뼈를 맞추고 마법사가 뭔가 조치를 하는 사이 소렌이 그제야 인상을 쓰면서 몸을 움츠린다. 고통을 참았던 거였군. 그러나 소렌은 비명 따위를 지르지 않는다. 거친 숨을 몰아쉴 뿐 별다른 내색 없이 치료 과정을 마친 소렌은 어느새 멀쩡해보이는 어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폰테일 님! 괜찮은 거죠?”

르네가 물었다. 소렌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친 쪽 팔로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있는 힘껏 휘두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인다. 완전히 나았군. 에럴드에게 의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깨끗하게 부러져서 치료가 빨랐습니다. 그리고 마법으로 부상을 미뤄 놔서 오늘은 문제 없이 움직일 겁니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니 꼭 병원에 가 보시라고 전해 주시지요.”

거짓말 같군. 아무리 좋은 약과 좋은 의사가 있어도 무림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여기선 마법이라는 힘을 빌어 한시적으로나마 부상을 미룰 수 있다는 거군. 무인들이 쓰는 마나와 마법사의 마나는 뭔가 다른 걸까? 소렌이 말끔히 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조금은 마법이라는 것에 관심이 간다.

“기다려.”

에럴드가 정색하며 다시 칼덴과 맞붙으러 나가는 소렌을 말린다.

“그 머리상태로 또 싸우려는 겁니까? 정리하고 가세요.”

“머리카락 때문에 진 게 아냐. 내가 부족한 탓이지.”

소렌이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고집이군. 하지만 속으로 인정하긴 했는지 갑자기 머리카락을 모아 손에 둘둘 말고는 에럴드에게 묻는다.

“혹시 칼 있어?”

“어머어머, 그거 자르려고요? 안돼요! 얼마나 예쁜데요. 우리가 머리핀을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르네가 한 무리의 여자들과 함께 소란을 떨며 뛰쳐나갔다. 하지만 소렌은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는지 연신 에럴드를 재촉하고 있다. 에럴드는 르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린다. 칼이 있어도 함부로 못 주는 것이겠지. 냉큼 잘라버렸다가는 르네나 다른 여자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말이다.

급기야 소렌이 머리카락을 손에 말아서는 수련용 검을 대고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 못 봐주겠군. 날도 없는 검으로 뭘 하겠다고.

“소렌 잠깐만 실례할게.”

“응?”

무림에선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의 나 역시 긴 머리카락을 잘 묶어서 돌아다녔다. 그 요령을 살려서 나는 소렌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줄 생각이다.

물론 나는 남자들이 묶는 방식밖에 모르지만 여자들이 머리를 정리한 모양은 안다. 나는 천의결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천의결을 통해 겉으로 본 머리모양을 분석해서 소렌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생에서 심하령이 보여주었던 수많은 머리모양을 떠올리며 그녀가 내게 꽤 신경을 썼다는 것을 통감했다. 전생에는 못할 짓을 했군. 이렇게 지극정성인 그녀가 돌아설 정도로 무관심했으니.

그러다 문득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이런 일에 천의결을 써도 될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천의결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소렌과 칼덴의 대결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데 소렌이 제 실력을 못 내면 아깝잖아. 직접적으로 수련에 관여하는 것도 아니니 이런 건 예외로 치도록 하자.

“도군 너....”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에 에럴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잠시 후 머리를 잘 정리한 모습에 A반의 남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머리카락과 이목구비는 서역의 미인상이었지만 머리모양만큼은 상당히 이국적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조금 놀랄 정도로 이색적이어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끝난 거야?”

소렌이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렌을 다시 대련장으로 내려 보냈다. 뒤늦게 르네가 달려와서 소렌의 머리카락이 정리된 모양을 보고는 탄성을 내지른다.

“어어... 저거 예쁘다. 책에서 본 오리엔트 사람이 한 머리랑 비슷하네. 도군 네가 해준 거야?”

“신변잡기지.”

여자들이 웅성대며 날 희한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시작된 대결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까지와는 뭔가 다른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 믿으면서.

“그렇군.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랬던 거였나.”

두 번째 대결 역시 더없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조용한곳인데 칼덴의 목소리는 우렁차기까지 하다. 별다른 마법 같은 것이 없어도 충분히 잘 들리는 목소리다. 소렌은 대답을 두 자루의 검을 뽑는 것으로 대신했다. 동일한 길이의 검을 양 허리에서 뽑아 낸 소렌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곧바로 칼덴에게 짓쳐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 번째 검을 뽑아든다. 처음부터 진심으로 나설 생각일까? 하지만 이미 스톰브링거의 수법을 파악한 뒤여서 얼마나 통할지는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칼덴은 익숙하게 소렌의 세 폭풍을 제압해갔다. 조금 더 거세진 폭풍이었지만 칼덴의 여력은 그것을 억누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칼덴은 분명 웃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진짜 실력을 선보이겠다는 것처럼.

“흐아압!”

칼덴의 창이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창대를 휘감으며 움직임을 봉하던 소렌의 검이 튕겨져나갈 정도로 창대가 맹렬히 회전한다.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꿈틀대며 소렌의 사방을 점하는 창술은 라크가 보여주었던 수법과도 비슷했지만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라크의 수법은 저것보다는 훨씬 미약했다.

소렌은 뒤로 재주를 넘으며 튕겨져 나간 두 자루 검을 잡아채고는 공중에서 검을 휘둘러 칼덴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소렌의 또 다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소렌의 신형이 검로를 따라 움직이며 칼덴의 주위를 스쳐 지나간다. 지금까지 한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데 그쳤다면 지금은 정말로 폭풍처럼 사방으로 움직이며 좀 더 격렬하고 빠르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개 학생들의 대련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정도의 기세라 장내가 후끈 달아오르며 수많은 이들이 경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비단 하이스쿨 학생들 뿐만 아니라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원이나 지체 높은 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큭, 이건 어떠냐!”

칼덴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창을 뻗어 내 보지만 이미 소렌은 아예 다른 방향에서 짓쳐들고 있었다. 극쾌와 극변을 보여주는 그녀의 움직임에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렌의 움직임을 보며 내가 지금까지 간과한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보법.

전생에선 비루한 능력 때문에 기초도 떼지 못해서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무슨 낭패인가. 안타깝게도 나는 전생에서 배운 바 없는 것은 지금도 무지하기 짝이 없다. 저건 내게 잠재된 검의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철저히 내 힘으로 수련하고 연마해야 하는 영역이다.

빌어먹을, 검의에 치중하느냐고 검의 못지 않게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니. 나는 소렌의 움직임에서 어떻게든 보법을 건져 보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다른 이들처럼 소렌의 움직임에 감탄할 뿐이었다. 승부의 저울은 소렌에게서 기울어져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대련이 끝나버릴 것이다.

반칙 운운할 때가 아니다. 나는 천의결을 운용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렌과의 첫 대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렌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 절실함 덕분이었는지 나는 어느 정도 소렌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소렌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있을 뿐 그것에 담긴 이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요행으로 얻은 능력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진짜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다.

“하아앗!!”

소렌이 연달아 세 자루의 검을 찔러 넣는다. 그러나 검이 날아드는 방향은 전혀 달랐다. 세 방향에서 파고드는 검을 막다가 급기야 칼덴은 가슴팍에 일검을 허용했다.

잠깐 주춤한 사이 소렌이 쉴 새 없이 검을 퍼붓는다. 스톰브링거의 진가는 지금부터였다. 칼덴은 폭풍 한가운데로 던져진 듯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겠지. 더군다나 칼덴의 무기는 마상창이다. 일정 간격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운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스톰브링거라면 말할 것도 없겠고. 소렌이라면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수세에 몰려 있던 칼덴이 갑자기 숨을 몰아쉬더니 갑자기 냉큼 창을 뻗어낸다. 당연히 소렌은 뻔히 보이는 창로를 향해 검을 휘둘러 움직임을 봉하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소렌의 두 자루 검이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천의결로 잔뜩 돋운 감각은 칼덴의 창대가 부르르 떠는 것을 감지해냈다. 단순한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자루의 검을 잃은 이상 스톰브링거의 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렌은 침착하게 등 뒤의 검을 뽑아 칼덴을 겨누었다. 그 모습에서는 한 치의 당황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렌 폰테일.”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용틀임하는 창대를 쥐고 칼덴은 소렌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는 돌연 투기를 거두고는 마상창을 바닥에 꽂아 넣는다. 격전에도 멀쩡했던 돌바닥이 잔금 하나 없이 꿰뚫린다. 과연 저 창이 정말로 위력을 과시한다면 막아낼 수 있을까? 나로서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내가 졌다.”

갑작스런 패배선언에 좌중이 술렁인다. 저 뒤편에서 건들거리던 라크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덴은 바닥에 꽃인 마상창의 진동이 멎자마자 냉큼 그 창을 부러트린다. 육체적 힘으로 부러트렸다기에는 저 두꺼운 마상창이 너무 쉽게 부러졌다. 역시 단순한 근력이 아니라 저건.....

“나도 아직 멀었다. 호승심에 휘말려 나도 모르게 마나를 써버렸다. 우선 이 점을 사과하도록 하지.”

칼덴의 선언에 조용했던 주위가 소란스럽게 돌변한다. 그 소란을 뚫고 칼덴의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그의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결코 비겁한 수단으로 그대를 능멸하거나 승리를 취할 생각은 없다. 소렌 그대가 마나 습득이나 허용된 나이였다면, 혹은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진작 내가 졌을 것이다. 아니, 내가 비겁하게 발악하지만 않았어도 남은 승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 매칭은 우리 볼마르그의 완패다.”

칼덴의 말은 충분히 사내다웠고 또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웅심을 느끼게 하는 당당함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부끄러움이다.

나는 천의결로 소렌에게 이긴 적이 있다. 그때 왜 나는 패배를 선언하지 못했을까? 승리에 취해 있었을 뿐 그것을 번복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게 사실이다. 정당하지 못한 승부였다면 먼저 그걸 인정하고 패배를 선언하는 게 도리였거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는 검 한번 대보기도 전에 칼덴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느꼈다.


칼덴의 말에 길길이 날뛰는 건 라크 혼자뿐이었다. 라스탄트의 다른 이들은 마치 명령을 받드는 군인처럼 칼덴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납득할 뿐이었다. 오히려 다른 하이스쿨에서 더욱 난리법석이었다. 그런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매칭을 관전하던 우아한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그 옆에 앉아 있던 귀족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륙의 차기 동량 여러분.”

또렷한 음성이 울려 퍼지며 마나의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원, 세인트 호비나가 대련장 한가운데에 선 것이다. 그녀의 음성 하나만으로 소란스럽던 주위가 정리된다. 호비나가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매우 기쁩니다. 롤랜드의 어린 여식이 이토록 강하다는 것이, 그리고 볼마르그의 젊은 창이 이토록 정의롭다는 것이 정말로 기쁩니다. 여러분. 매칭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승리와 패배로 이루어진 수련의 장일까요?”

단순한 승리와 패배, 그 이상의 것이 매칭의 진짜 의미겠지. 나는 대륙의 차기 동량이니 평화이니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만은 호비나의 말이 머릿속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더 나은 사람이 있고 더 모자란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매칭은 단순히 그것을 가려내기 위한 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여러분이 매칭에서 무엇을 얻고 느끼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호비나는 숨을 한번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역(聖域)이라고 할 수 있는 므로아에서 매칭이 치러지는 점. 그리고 매칭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드린 것. 이 두 가지만 명심해 주신다면 제 작은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이번 매칭을 이 두가지를 위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호비나가 다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다음 번 매칭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치러졌으면 좋겠군요. 그날이 엠펠로니아와 대륙이 화합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셔서 다음 차례로 오실 분들이 놀라지 않도록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매칭은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에럴드는 이번 매칭이 갖는 정치적 의의에 대해 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단순한 무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찬 탓이다.


나는 과연 강해진 걸까? 라크를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라크의 기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 역시 내공을 가지고 있으나 막상 진심을 다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점점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반문해 보자. 과연 나는 전생보다 강해진 것일까? 어쩌면 나는 천의결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조금 이른 출발이 주는 이점을 누리고 있을 뿐이 아니었을까?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반으로 자르려다 그냥 올립니다.


세 번째 이야기가 꽤 길어졌군요. 하여튼 이걸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아마 다음 이야기로 한 권 분량이 끝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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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천하제일의 둔재 (4) +17 13.02.01 8,633 127 11쪽
3 1. 천하제일의 둔재 (3) +6 13.01.31 9,560 133 17쪽
2 1. 천하제일의 둔재 (2) +4 13.01.31 11,371 14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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