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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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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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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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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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마나(4)

DUMMY

시드에게는 더없이 험난한 장애물이었던 암흑격류가, 유논 앞에서는 주인을 맞이한 강아지처럼 살랑이며 길을 흩어주었다.

시드는 유논의 품속에 안긴 채 그 속 우물쭈물하는 까망이들을 흘겨보았다.


그리 급하게 앞뒤 안 보고 이쪽으로 날아오더니, 유논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더니, 유논을 상대로는 아주 왕 떠받들듯 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까망이들은 유논을 아주,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놓고서는 정작 아저씨가 바로 앞에 있으니까 안 들키려고 이리저리 숨어다니네···.’


우물쭈물하는 까망이들의 모습은 마치 숨바꼭질 도중 안 들키려고 꼭꼭 숨으면서도, 동시에 술래가 언제쯤 자기를 찾아줄지 궁금해 빼꼼 고개 내미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순수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새카만 물질들이 그녀에게 한 짓을 떠올리면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저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화나던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저 까망이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좀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철없이 남들을 밀치고 다닌다고 해서 그 아이를 미워할 수는 없는 법이다. 훈계나 교육을 한다면 모를까.


‘나는 어른이니까, 속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어느새 암흑의 바다를 빠져나와 좀 전의 어둠 둥지 속으로 들어간 유논은 그 한가운데에 시드를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유논이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시드는 바닥의 포근한 감촉에 탄성을 뱉었다. 어둠이 이토록 안락하고 부드러울 수도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저씨···아니 스승님. 여긴 도대체 어떻게 발견한 거예요?”

“발견하다니?”

“이 까만 세상을 제가 엄청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따뜻하고 폭신한 자리는 이제 처음 본다구요. 꺄아아아, 너무 좋아···.”


단언컨대 시드가 일생에서 가장 풍요롭게 지냈던 곳인 시라센 저택의 비밀 방 침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눕거나 앉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졸음이 몰려오는 바닥이라니.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네 말을 들어보니 내가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유논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시드는 그게 단순히 ‘운이 좋다’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논이 운이 좋아서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자리에 떨어지게 된 거라고?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여태까지 이 새카만 세상이 외부인에게 선사한 무관심한 폭력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와 반대로 유논에게만큼은 대단한 친화성을 보여주는 까망이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유논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행운이 적용될 것 같진 않았다.


‘까망이들이 나한테도 이런 포근한 자리를 만들어줄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유논이 운이 좋아 이 자리에 떨어진 게 아니라, 유논이 이곳에 떨어졌기에 이곳이 이리도 포근하고 안락한 자리가 되었을 거라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었다.


‘까망이들은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지.’


그런데 정작 그 대상인 유논은 그런 까망이들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것 같아 보였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까망이들과 그 간의 관계를 차단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까망이들이 유논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면 유논이 고개를 돌리고, 유논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쳐다보면 까망이들이 도망친다.


달의 뒷면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듯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숨어 다니기만 한다.

이 기묘한 숨바꼭질을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 온 것일까.


문득 유논이 시드 쪽으로 다가왔다.

시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길에 헤실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몸은 괜찮으냐?”


무뚝뚝하지만 염려가 묻어나오는 질문.

시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논에게 물어봐야만 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스승님, 여기는 어디에요?”

“······.”

“그리고 아저씨, 아까 왜 그렇게 허공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었던 거예요? 무슨 가슴 아픈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드 나름의 ‘아저씨도 괜찮아요?’ 라는 질문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까 어둠의 장벽 너머로 보았던 유논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기에.

시드는 그때 그의 모습에서부터 시라센 괴물 둥지에 홀로 갇혀 지내며 점차 희망을 잃어가던 과거의 자신이 보였다.


항상 무력적인 면으로나, 감정적인 면으로나 빈틈을 보여준 적 드물었던 유논이기에 더욱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머리로 알고는 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사실.


유논은 초인이되 신은 아니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 또한 결국은 인간이었다.

그 또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사람이었다. 그저 그 곪은 상처를 남들보다 더 오랫동안 홀로 이고 살아갈 능력이 있을 뿐.


문제는 그런다 해서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 곪은 상처는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다.

그 언젠가의 때가 지금이었던 것일까. 마음의 어딘가 한 부분이 고장 난 것 같았던 유논의 공허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시드의 굳은 눈빛에 유논은 입을 열었다.


“이곳은 흑색영역黑色領域이다. 흑색마나와 공간마력이 지배하는 세계지.”


시드의 첫 번째 질문, ‘여기는 어디예요?’ 에 관한 답이었다. 익숙한 모습으로 이미 짐작했던 일이지만, 역시 유논은 이 세상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시드는 조심스레 물었다.


“흑색마나라면, 그 동글동글한 까만색···까망이들을 말하는 거죠?”

“···까망이?”

“네, 까망이요.”


유논은 어처구니없는 작명을 탓하듯 시드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맞을 거다. 그···까망이들이 너에게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구나. 하기야, 너는 금색마법만큼은 아니어도 흑색마법에도 적성이 있는 것 같았지. 흑색마나들도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고···.”


시드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까망이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는 유논이 저렇게 말하다니.

시드가 흑색마나들에게 당했던 그 숱한 죽음의 위기들을 떠올려 보면, 까망이들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혹은 관심이 아주 조금은 있을지언정, 유논의 존재 탓에 그 관심이 아예 묻혀버렸다거나.


‘이 비유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맛없는 변종 오크 고기와 맛있는 돼지고기가 함께 있으면 오크 고기는 내팽개치고 돼지고기를 향해 달려가는, 뭐 그런 거겠지···.’


까망이들에게 있어서 시드는 오크 고기였고, 유논은 돼지고기였다. 치욕스럽지만 현실이 그랬다.

시라센 괴물둥지에서의 시드가 그랬듯이, 다른 대안이 없고 배까지 고프다면 하는 수 없이 오크 고기를 먹겠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돼지고기 대신 오크 고기를 택할 사람은 없다.

까망이들의 세상 또한 그와 비슷한 이치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망이들의 정체가 흑색의 마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드는 다른 궁금증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공간마력? 그리고 영역은 또 뭐예요?”


유논은 저 멀리 암흑의 세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간마력은 흑색마나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마력을 일컫는 말이다. 네가 다루는 금색마나는 시간마력을 내포하고 있겠지? 그 속에는 시간을 다루는 힘이 있을 테고.”

“네.”

“흑색마나도 마찬가지다. 금색마나가 세계의 시간을 관장한다면, 흑색마나는 세계의 공간을 관장한다. 공간을 다루는 힘을 지니고 있지.”


과거 유논을 상징하던 전설상의 흑색마나와 흑색마법의 진정한 힘은 공간을 다루는 마력이었던 것이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다루던 대마법사 시절 유논의 위용도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을 터.


“그럼 영역은요?”

“영역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 죽은 마나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나들의 성지. 특정 색상의 마나들이 기원한 이 세상의 비경祕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아예 다른 세상이라는 말도 있고. 하지만 결국 핵심적인 요지는, 이 세상이 우리가 살던 곳과는 궤를 달리하는 곳이며, 오직 이곳을 지배하는 마나들만을 위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적색마나들의 영역은 적색영역이고, 녹색마나들의 영역은 녹색영역이고, 금색마나들의 영역은 금색영역인 것일까···.

금색영역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생각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시드는, 이어진 유논의 말에 흠칫 놀랐다.


“아마 너도 그들의 영역에 들러 본 적이 있을 거다.”


내가? 언제?

시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여기 이곳 흑색영역을 들러본 적 있다고···요?”


유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네가 주로 익힌 마법은 흑색마법이 아니라, 금색마법이지 않더냐. 내 예상이 맞는다면 너는 이미 서클 파이브의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그 경지에 이른 마법사들은 전부 자신의 상징마나들이 지배하는 영역을 한 번쯤 들르게 되지.”


저 말이 맞는다면 시드는 아마 금색영역金色領域을 들린 적이 있을 터였다.

시드는 그녀가 다섯 번째 서클을 만들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아직 한 개의 서클밖에 없을 때의 일이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 불릴 만한 장소를 다녀온 적이 있긴 했다.


황금빛 시간의 모래들로 가득하던 끝없는 사막.

시간의 힘이 느껴지는 그곳의 자그마한 구슬모래들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곳이 금색마나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었다니.


시드는 그곳에서 만났던 황금 쇠똥구리를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흑색영역에도 쇠똥구리와 비슷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이리저리 빼꼼 고개 내미는 그녀를 향해 유논이 말했다.


“그나저나 어쩌자고 경지를 그렇게 급격하게 뛰어넘은 거냐.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튼튼히 기초를 닦지 않고 넘어간 상위의 단계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 당장 네 몸부터가 급증한 마력과 마나를 버티기 힘들어하겠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유논의 잔소리에 시드는 입술을 삐죽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다. 당장 시드부터가 서클을 만드는 과정 동안 폭주하는 마나와 마력을 다스리기 위해 죽을 고생을 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도플갱어의 시체 군단에 모두 죽고 말았을 테니.


유논의 잔소리가 결국은 걱정에서부터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불퉁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하던 시드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금색영역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왔더라?’


분명 쇠똥구리와 대화를 나누고, ‘이제 가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으니 어느새 현실로 되돌아와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이곳 흑색영역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통했다면 암흑격류에 휩쓸리며 벗어나고 싶다고 속으로 절절히 외쳐댔을 때 진즉에 되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드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저씨, 그러면 여기 흑색영역에서는 어떻게 나가는 거예요?”


유논은 침묵하다 답했다.


“···못 나간다.”


유논이 여태껏 흑색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이 자리에만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이었다.

나가지 못한다니. 그렇다면 이 검은 세상에서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것.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왜요?”


시드의 물음에 유논은 어두운 낯으로 말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영역에 들어온 것이 아니니까.”


만약 마법적 경지의 상승을 통해 정신의 단계에서 영역에 발을 들였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영역을 벗어나 본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만이 영역에 불려온 것이 아니었다. 심신이 통째로 흑색마나의 폭발에 휩쓸려 흑색영역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본래는 흑색마나의 폭발과 함께 모든 것이 찢어지고 소멸되며 공간의 붕괴가 일어나는 게 정상이지만, 어째서인지 모를 이유로 시드와 유논은 흑색영역에까지 넘어오게 된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일단은 살아남게 되었으니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봐도 되겠지만, 문제는 그래봤자 결국은 이곳을 탈출할 수가 없다는 점.


유논이 알기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흑색영역에 들어와 표류하게 된다면 빠져나갈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흑색마법.

흑색영역은 현실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곳을 결코 탈출할 수 없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타차원에 있는 공간마저도 다룰 수 있는 능력, 다른 공간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공간을 관장하는 흑색마법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흑색마법을 잃어버린 유논은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루는 방법은 어설프고 미개하며 또 조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흑색마나를 지니고 있던 도플갱어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유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대한 상실감과 허탈함, 무력감을 느끼며 시드에게 그러한 사정들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도플갱어가 아저씨의 모습을 베껴서 까망이들의 힘을 사용했고, 아저씨가 도플갱어를 죽였지만 그 놈의 몸속에 있던 까망이들이 폭주해서 우리가 흑색영역에 빨려 들어오게 된 거라고요?”

“그렇지.”

“흑색영역에서 나가려면 까망이들을, 그러니까 흑색마나와 흑색마법을 다뤄야 하는데, 아저씨는 그것을 이제 못 쓰게 되어버린 바람에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거고?”


유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흑색마나의 용서를 받지 못했고, 그러므로 아직까지 흑색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이곳 흑색영역 속에서 갇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시드가 순수한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말해봐라.”

“도플갱어는 아저씨의 몸과 능력을 훔쳐온 거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도플갱어는 그러고 나서부터 갑자기 흑색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랬다.”


시드의 찰랑이는 검은 머릿결이 유논의 입가를 스쳤다. 황금빛에 검은색 약간 섞인 별빛 같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그러면 도플갱어가 흑색마나를 쓸 수 있었던 건 아저씨의 능력을 훔쳤기 때문이잖아요.”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왜 정작 도플갱어가 훔쳐온 힘의 원주인인 아저씨는 흑색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거야?”


유논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몰랐다.

어째서 흑색마나는 끝끝내 그를 용서하지 않았으면서, 도플갱어에게는 그리도 쉽게 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힘을 주었는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른다. 나도 몰라. 나도 이제는 흑색마나에 대해 잘 모르겠다.”


그는 과거에는 흑색마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마나가 곧 흑색마나요, 그를 상징하는 마법의 색 또한 흑색이었다.

세상이 그를 흑색의 대마법사라 불렀다.

그는 흑색마나의 친구이자 부모요, 발견자이자 지배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흑색마나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째서 도플갱어에게 힘을 주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흑색마나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없었다.


그는 흑색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죄인이었다.

기한조차 알 수 없는 형벌이었다.


세상이 멸망할 때부터 그에게 채워진 족쇄.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이 무한한 죗값을 다 치룰 때까지 징역이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흑색마나의 불감증不感症을 지녀 마법을 잃은 마법사 유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흑색마법을 부릴 수도, 이곳 흑색영역에서 나갈 수도 없다.


“···아저씨.”


괴로워하는 유논의 모습에 시드는 조심스레 그에게로 다가갔다.


유논이 상처입고 고통 받는 모습. 그가 그동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심중 깊은 곳의 거대한 슬픔.

다쳤기에 가장 인간다워 보이는 유논의 마음. 충격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실망스러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한 초인의 민낯.


그것을 처음으로 목도한 시드는 금방이라도 눈물 흘릴 것처럼 슬퍼지면서도, 또 그녀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약간은 기쁘기도 했다.

언제나 단단해 보였던 유논에게 약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에, 자신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에.


시드는 그녀가 유논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말했다.


“그런데 아저씨.”

“···말해봐라.”

“내가 보기에는, 까망이들이 아저씨를 용서하지 않았다거나, 아저씨를 미워해서 아저씨를 돕지 않는다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


유논은 말이 없었다.

그저 혼란함과 고통 가득히 휘몰아치는 검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


“내가 까망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했잖아? 나는 지금도 그 모습들이 보여.”

“지금도···보인다고?”

“응. 지금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저씨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까망이들이 보였어.”


시드는 심호흡 끝에 말했다.


“까망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아저씨 곁에 있었어. 지금도 계속 아저씨한테 다가가고 싶어 하고 있어. 아저씨의 등 뒤에서, 발아래에서, 혹은 더 멀리 시야 바깥에서···.”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어 하고 있어.”


여전히 유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까망이들이 아저씨를 싫어해서 아저씨한테 다가가지 않는 게 아니라···."


시드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였다.


"···오히려 아저씨가 걔네들을 싫어해서 일부러 밀어내고, 또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어."


작가의말

이번화는 ‘죽을 만큼 아파서’ 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퇴고했습니다. ‘제발 지옥같은 이곳에서 날 꺼내줘’ 와 ‘하늘이 내게 내린 벌인가 아님 그리 쉽게 나를 버릴까’ 라는 가사가 뭐랄까...이번 내용이랑 잘 어울리더군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민초우유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덕분에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후원 자체는 99화때 해주셨는데, 제가 늦게 확인하는 바람에 이제야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너무나도 감사한 k2072_skyking777 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늘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 힘이 나네요. 100화 기념으로 보내주신 후원금 앞으로 더 많이 연재하기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세상 반가운 우간다우 님, 후원금 감사합니다. 후원금 받고 너무 기뻐서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베어나오더군요. 앞으로도 우간다우님을 위해서 열심히 글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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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불쾌한 골짜기(1) +22 20.12.13 846 4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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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4) +11 20.12.11 808 4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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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외전-Boy Meets Girl(4) +9 20.11.25 803 44 13쪽
82 외전-Boy Meets Girl(3) +13 20.11.21 824 42 14쪽
81 외전-Boy Meets Girl(2) +8 20.11.18 840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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