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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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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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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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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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유논(2)

DUMMY

「흑색마나는 사후에 색이 변한다. 색깔이 가장 가시적인 변화일 뿐, 그 이외에도 수많은 성질들이 변하는 것 같다.」


「죽은 흑색마나의 사체는, 금빛을 띄고 있다. 금빛 알갱이나 모래, 구슬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흥미롭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도 그렇다. 내가 단언하건대, 이건 공간의 힘이 아니다.」


「이 황금빛 알갱이를 어떻게 조사해야 할까? 공간의 마력을 통해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반응이 없다. 내가 아는 이 세상의 모든 마법들을 통해 조사해도 진전이 없었다. 실전되었거나 전설상의 마법이라 알려진 것들도 시도해 보아야겠다.」


···

···

···


「맙소사, 드디어 알아냈다. 시간의 마나였다. 이 속에 잠재되어 있던 힘은 다름 아닌 시간마력이었다.」


「···이건 금색마나라고 불러야겠다. 하지만, 온전한 금색마나는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흑색마나의 죽음을 통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죽은 시간의 돌덩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먼 옛날 죽은 공룡들의 화석이 묻혀 만들어진 석유를 현생인류는 몹시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았던가. 이게 설사 진정한 금색마나, 시간을 지배하는 존재에 비하면 털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기연이 될지도 모른다. 분명 연구에 진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공간을 관장하는 흑색마나가 죽어서 시간을 관장하는 금색마나가 된다니. 공간과 시간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는 짐작했지만, 이토록 선명한 역전관계를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금색마나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나는 시간마법의 개념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내 몸에 체화시킬 만큼의 자질은 없다. 내 몸을 금색마나와 시간마력도 받아들일 수 있게끔 개조하는 방안을 생각해 봐야겠다.」


「실패했다. 내가 금색마법을, 시간의 마법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아무리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공간마법과 똑같은 급의 대마법을 그리 쉽게 익히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계속 도전해보자.」


···

···

···


「327번째 실패. 금색마나는 여전히 나에게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연구실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져서 그런지, 계속되는 실패에도 무덤덤해진다. 언젠가는 되겠지.」


···

···

···

···

···


「100438번째 실패. 포기해야겠다. 내가 금색마나를 다루는 데 소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애초에 금색마나와 흑색마나, 시간과 공간의 힘을 동시에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적어도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그 두 마나가 함께했을 시 일어나는 충돌과 융합을 동시에 견뎌낼 수 없다. 몸속에서 실시간으로 핵융합과 핵분열이 일어난다고 보면 된다.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애초에 인간이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인간이라기에는 이미 많은 개조와 발달을 거친 신체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은 턱도 없다. 드래곤쯤 되면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지상의 최후룡을 상대로 실험을 하거나, 이제 와 돌아가서 그에게 금색마나와 흑색마나를 수련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볼 수도 없을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제는 내가 그 양반보다 더 경지가 높다. 확신할 수 있다. 그 양반이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진전이 막혔다. 금색마나도 있고, 흑색마나도 있는데. 정작 시간의 힘을 다룰 수가 없다. 금색마나는 여전히 내가 무슨 수를 써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겠다. 내 가설이 맞는다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흑색마나나 공간마력을 이용해 금색마나를 움직일 수도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아무 반응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세운 가설의 단계에서부터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여태껏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립해온 이론인데. 그게 이번 한 번에 무너진다고. 시작부터 갈아엎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지만 이건 좀···막막하다.」


「어쩌면 이 금색마나가 죽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망한 것들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죽은 금색마나를 되살릴 방법이라도 연구해야 하나? 그게 가능키는 하나?」


「한참을 금색마나를 가지고 씨름하던 도중,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나는 여태껏 수만 가지의 마법 물질들과 주문들로 이미 죽은 금색마나를 자극하려 했다. 그게 통할 리가. 그보다는···.」


「···죽은 금색마나를 이용해 다른 마나나 마력, 혹은 마법 물질들에 자극을 줘 보는 건 어떨까? 이게 옳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바로 시작해보자.」


「이 세상 모든 마법적인 힘들을 전부 실험해서라도 찾아내고 말 것이다. 분명히 하나쯤은, 금색마나의 알갱이에 반응하는 게 있을 거다.」


···

···

···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총 두 가지 물질이 금색마나 속 시간마력에 반응했다. 첫째는 흑색마나. 몇 달간 흑색마나와 금색마나의 사체를 함께 두었더니, 공간의 힘이 시간의 힘에 의해 변질을 겪는 것처럼 색이 점차 변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둘째는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건 애초에 마법 물질도 아니다. 자연 금속이다. 동방 대륙에서는 용조차 탐내던 ‘신의 금속’, ‘별의 철’ 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고. 과거에 동방에 들렸을 때 한 덩이를 운 좋게 구해놓았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얻어놓을 걸 그랬다.」


「이 ‘신의 금속’ 이라는 것은 마나 속에 들어있는 특징적인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다. 그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도 한다. 아무런 이물질도 없을 때에는 은색의 빛을 띠고 있다. 형태 변환도 자유자재인 것 같은데, 이런 금속은 확실히 처음 본다. 신기하기는 하다.」


「이 금속은 일단 시간마력을 담아 놓는 저장고 따위로 사용하고, 더 효율적인 이용법은 나중에 따로 생각해 보아야겠다.」


「일단은 금색마나로 흑색마나에 성질 변화를 가하는 것부터 파고들어 보자.」


「몇 달로는 부족해서, 몇 년간 흑색마나를 금색마나의 사체와 접촉시켰다. 묘한 일이 일어났다.」


「흑색마나의 근본적인 면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검은색이 남아있고, 공간마력이 느껴진다. 흑색마나가 죽었을 때처럼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속에서 몇 줄기 금빛 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선들을 다루려 해 보니, 공간마력만큼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설프게나마 시간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시간의 실이라고 불러야겠다.」


···

···

···


「이제 시간의 실을 이용해 마력을 다루는 것도, 그것을 통해 죽은 금색마나를 조종하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공 여덟 개를 가지고 저글링을 하면서 날뛰는 황소를 진정시키는 것 같은 난이도기는 하지만, 나는 유논이다. 이쯤은 해낼 수 있다.」


「금색마나와 시간마력은, 정말이지 난폭하다.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달려드는 불도저 같다. 통제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간의 일방향성 때문에 저리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미쳐 있는 것일까? 물리학에서는 열역학 제 2법칙, 세상은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식으로만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 미래로만 흘러간다고 설명한다. 엔트로피는 시간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증가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미시세계에서의 가능성 혹은 방향성,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는 척도와 함수라면···엔트로피 또한 하나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오늘도 시간마력을 다루느라 진이 빠졌다. 흑색마나는 이렇지 않다. 항상 순한 양처럼 얌전하다. 폭주했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그랬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그리고 금색과 흑색의 마나 간의 근본적인 성질 차이 때문일까?」


「아니, 아니다. 아니면 그저 흑색마나도 원래는 폭급한 성질인데, 내 앞에서만 순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른다. 흑색마나는 나를 좋아하니까.


······아니, 좋아했었으니까.」


「요즘 들어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다. 흑색마나가 점차 옅게 보인다. 기분 탓일까?」


「아니,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말자. 기분 탓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흑색마나를 인지하는 감각이 이전에 비해 희미해지고 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야 하고, 제대로 만져지지도 않는다. 이전과는 달리 기체 덩어리를 만지려고 허우적대는 기분이다.」


「내 흑색마나에 대한 장악력도 자연히 떨어졌다. 이전만큼 흑색마나와 공간마력을 자신 있게 다룰 수 없다. 한 몸처럼 나와 같이 움직이던 것들인데. 팔다리를 잃은 불구의 심정이 이러할까. 생각보다 훨씬, 훨씬···상실감이 크다.」


「흑색마나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자기 몸 일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건 그 대가겠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지금 돌아간다 해도 비슷한 결단을 내릴 거다. 흑색마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직 해야 할 도중 연구들이 많은데, 시간이 촉박하다. 내 공간 장악력이 이보다 더 약해지기 전에 어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해야 한다. 박차를 가하자.」


「차원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열쇠가 시공간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 나는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전에도 이에 관해 적은 바 있지만, 내 신체로는 시공간의 힘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연약하다. 애초에 4차원을 인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설사 온갖 개조를 통해 가까스로 시공간의 힘을 버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할지라도, 4차원에 발 내딛는 그 순간 몸이 펑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대책이, 나를 대신해 시간과 공간의 힘을 버티고 4차원의 장벽, 그 경계를 열어젖힐 매개체를 만드는 것이다.」


「3차원과 4차원을 건너는 일종의 통로, 혹은 문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래, 문.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기만 한다면 누구나 4차원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일종의 차원문인 것이다.」


「문의 내부 구조 설계는 대략 가닥이 잡혔다. 시간의 실들과 흑색마나들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끔 하는 초고도의 정밀한 마법의 진을 만들 것이다.」


「균형이 중요한 작업이다. 시간마력과 공간마력 간의 세밀한 균형. 어느 한쪽이 더 많거나 강세라면 차원문은 발동과 함께 시공간의 특이점으로 변해 모든 것을 빨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실패가 나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본래대로라면 자신 있었겠지만, 흑색마나에 대한 친화력을 상당부분 잃은 요즘에는 공간에 대한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아 실패할까봐 두렵다.」


···

···

···


「예상했던 문제가 터졌다. 단순히 흑색마나와 금색마나, 공간과 시간의 마력의 조합만으로 제작한 마법의 진은 시공간의 교류 에너지를 버티지 못했다. 형태가 금방 불안정해져서, 도저히 저것을 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마법을 문의 형태로 딱 맞게 고정시킬 만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


「마침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해볼 만한 도전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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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뼈대는 ‘신의 금속’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쓰게 될 날이 올 줄 알고 보관해 놓기를 잘했다. 공간마력과 시간마력을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 그 특이한 체질의 금속이라면 차원문이 가동될 때의 시공간 파장을 능히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성공했다. 실험의 결과, '신의 금속'은 버텨냈다. 이제 마법을 신의 금속에 정밀하게 녹여내는 작업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완벽한 차원문의 형상을 만들고 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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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금속’이 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 말고도 소량이 남았다. 너무나도 소량이어서, 이것을 가지고 차원문과 관련된 작업을 하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이걸 어디에 쓴담.」


···

···

···


「적합한 사용처를 찾았다. 이걸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드는 데에 써야겠다. 차원문을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일종의 문 열리는 버튼을 누르는 작업을 수행시키는 거다.」


「원래는 내가 공간마력을 이용해 문을 작동시키려 했는데, 내가 지닌 공간의 힘이 날이 갈수록 약해져 힘들 것 같다. 공간마력을 얼마든지 저장할 수 있는 이 금속을 이용해 열쇠를 제작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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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의 제작이 완료되었다. 내가 지닌 모든 마법 기술들을 총동원했다. 용의 숨결과 드워프들의 기술, 공간과 시간의 마법까지···다 만들고 나니 어째 열쇠보다는 지팡이와 비슷한 모양새다.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물질이니 열쇠의 모습으로도 바꿀 수 있겠지만, 지팡이도 나쁜 것 같지 않아 이대로 놔두었다.」


「생각해보면 이 물질에는 마력을 증폭시켜 전도하는 특성도 있으니, 확실히 지팡이로도 적격일 것 같기는 하다. 이전의 내 마력은 그런 번거로운 행위가 필요 없을 정도로 흘러넘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흑색마나와 공간마력이 너무나도 희미하다. 그러니 지팡이의 도움이라도 받는 수밖에.」


「‘열쇠’의 이름을 ‘이름 없는 지팡이’라고 지었다. 괴상한 작명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적합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던 걸 어떡하겠나. 언젠가는 어울리는 이름이 생기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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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수만큼이나 끊임없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첫 번째 문 샘플이 완성되었다. 두 번째 문 샘플은 없다. 첫 번째를 가동시키며 천천히 고쳐 나가는 수밖에.」


「다행히 흑색마나를 보는 눈이 완전히 죽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세한 건 시험 가동을 해 보아야 알 수 있겠지.」


「성공한다면, 이 문에게 붙일 이름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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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가동 준비가 끝났다. 내가 창조해낸 마법 생명체를 다른 차원대의 세상에 진입시킨 후 주위를 살피고 돌아오라 명령할 예정이다.」


「단번에 지구로 가는 문을 제작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지구의 차원 좌표를 모른다. 이런 식으로 불특정한 차원 좌표에 맞추어 문을 가동시키며 점차 범위를 좁혀 나가는 수밖에 없다.」


「제발, 제발. 단번에 성공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성공의 기미라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 차원문이 실패한다면, 여기서 더 무엇을 얼마나 고쳐야 제대로 된 문을 만들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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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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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도약에 성공했다! 내 눈으로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공간마력과 시간마력의 파동, 그리고 마나의 움직임이 결과를 알려주었다. 내가 만든 문은 분명 차원의 장벽을 넘어섰다. 내가 해냈다. 이제 마법 생명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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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가동이 끝났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마법 생명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문의 작동 과정의 오류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마법 생명체가 무슨 변고라도 당한 것인지 전혀 판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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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마법 생명체를 쉰 마리도 넘게 보냈다. 이대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무언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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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차원문에 더는 이상이 없다. 작동 과정 중에서 생명체에게 해를 끼칠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마력의 파동이 차단되어 수명에 이상이 생길 여지도 없고, 공간 간의 인력도 정상적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직접 들어가 봐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뿐이다.」


「다른 차원의 어떠한 존재가 내가 보낸 마법 생명체들을 전부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없애 버렸다면, 내가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대항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나하나가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의 호문쿨루스들이었는데, 차원문으로 돌아올 틈도 없이 해치워 버렸다면 보통 상대는 아닐 터. 나도 전성기 때에 비하면 천지차이 수준으로 약해졌으니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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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번째 차원문 가동 시작. 시험 대상: 유논. 시공간 좌표: 103번째 시간 실의 귀퉁이를 꺾은 장미꽃의 우주적 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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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에서 돌아왔다. 부상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이었다. 문을 넘자마자 그 ‘존재’가 공격해오는데, 확실히 강력했다. 내 마법 생명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죽어나갈 만 했다.」


「나도 재수가 없었다면 놈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비해 공간마력과 흑색마나에 대한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어도, 시공간에 대한 이해만큼은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기에 간신히 비길 수 있었다.」


「나와의 승부가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자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며 협상을 시도했다. 다시 생각해도 흉측한 몰골이다. 온통 썩은 살점과 뼈로 가득하여 존재하는 부정형의 무언가. 놈은 스스로를 바깥세계의 신, 외신外神이라 칭했다.」


「놈이 말하길, 나는 자신과 거래를 할 자격이 있다고 한다. 승산이 쉽게 보이지 않자 장사꾼으로 태도를 전환한 것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약삭빠른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아쉬운 건 내 쪽이었고, 그곳은 내가 아니라 놈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척을 져서 하등 좋을 게 없다. 나는 놈의 거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놈에게 ‘지구’라는 차원에 대해 물었다.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테니 아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알려달라고, 그곳의 좌표를 안다면 더욱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동시에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


「놈은 지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내가 말한 것과 비슷한 특징까지 지닌 타차원이 한두 곳이 아니라 특징짓기 어렵다며, 대신 비슷한 종류의 차원들이 위치한 차원 좌표를 건네주었다. 그 대가로 수많은 마법 생명체들의 시체를 놈에게 건네주어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시 차원문을 타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놈이 나에게 일종의 마법적 명함을 건네주었다. 다른 차원에서도 놈을 소환하는 절차에 대해 알려주는 명함이었다.」


「영험한 존재의 혈액과 다량의 신선한 시체들, 그리고 어두운 마력을 품고 있는 최소한의 연결 창구만 있으면 어느 차원에서든 자신을 소환하여 거래를 요청할 수 있다며, 애용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용만 머릿속으로 외워놓고 명함은 태워 버렸다. 저런 불길한 걸 내 근처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저런 존재를 다시 소환해서 거래를 맺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

···

···


「그래도 놈의 정보는 믿을 만했다. 아니, 그보다는 저게 아니면 다른 길이 없는 거라고 봐야겠지.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여태껏 어두운 암실 속에서 벽과 땅을 더듬으며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기분이었는데, 드디어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만 같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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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던 사실. 외계의 악마와의 조우, 그리고 놈이 기거하던 타차원과의 접촉을 통해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내 차원문이 완벽하게 의도대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나는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이 안전하게 차원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다 나의 천재적인 발명품 덕분이다.」


「계속 문, 혹은 차원문이라고만 부를 수 없으니 이것을 이제부터 게이트Gate라 명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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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번째 차원 도약을 준비 중에 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다. 외계의 악마가 이야기한 차원 좌표는 내가 사용하는 시공간 좌표와 완전히 체계부터가 달라서, 적용하기 쉽게 치환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그 새 좌표를 게이트에 적용하는 것도···문을 새로 또 만드는 것도 아니고 좌표를 조정하는 것뿐인데도 벌써부터 버겁다. 내 마법의 힘이 너무나도 약해졌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쳤다. 지난번의 사례로 이미 게이트의 안정성은 입증되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다. 우선은 마법 생명체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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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수십 가지 차원들을 돌아다녔다. 나에게 적대적인 곳도 있었으며, 친근한 태도를 보인 곳도 있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 우주문명을 누리는 곳도 있었고, 마도문명이 발달해 신기한 마법 공학을 이용하는 곳도 있었다. 인간과는 신체 구조부터가 명확히 다른 지성체들이 사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 어디에도 지구는 없었다. 지구와 한없이 유사한 차원계는 있을지언정, 지구는 없었다.」


「애초에 쉽게 찾으리라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도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던 간에, 난 해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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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내 고향을 찾아 차원을 방랑한다. 아마 내일도 그러겠지. 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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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식할 만큼의 기술을 지닌 몇몇 차원들에서는 이미 나에 관한 이야기가 퍼졌다는 것 같다. ‘지구’라는 차원에 대해 물어보고 다닌다는 흑색 방랑자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라. 그 소문을 듣고 지구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찾아오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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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발달된 차원 분석 과학기술을 지닌 타차원의 종족들과 그들의 모선에서 대화를 나눴다. 게이트가 하필이면 그들의 모선 안쪽으로 나를 이동시키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의 소문을 들었는지, 적대 세력이 아니라는 오해가 풀리자 나를 융숭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나 같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말했다. 세계 전체의 총력을 모은 기술 체계로 차원의 영역에 도전한 것이 아닌, 일개 개인의 역량만으로 타차원의 벽을 뚫을 힘을 손에 넣은 경우···. 어떤 차원에 정착하더라도 대단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나를 은근히 포섭하려는 눈치였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에게도 당연히 지구에 관해 물었다. 그들은 차원 간의 교류가 아예 막혀 있는, 지구 같은 ‘원시 차원’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대신 그에 관해 알고 있을 다른 차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 좌표들이, 우주의 대기만큼이나 차가운 숫자들이 내 다음 단서가 되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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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을 유영하는 우주의 괴물을 만났다. 나와는 달리 전신의 일부가 n차원의 영역에 걸쳐 있어 그것을 통해 다른 차원에 침투해 공격하는 부류 같은데, 겨우 놈의 발을 묶은 뒤 도망칠 수 있었다.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붙어볼 법도 했겠지만, 점점 힘을 쓰기가, 전투를 벌이기가 힘겨워진다.」


「나도 늙은 건가? 생물학적 나이는 아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리고 마법의 노쇠함을 떠올려 보면···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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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일한 차원 도약 수단, 게이트가 점차 불안정해진다. 오래 사용하긴 했다. 신의 금속도 무한한 내구성을 지닌 물질이 아니고, 흑색마나와 시간의 실도 부족해졌으며 무엇보다 단 하나 있는, 게이트의 핵 역할을 하는 금색마나의 시체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가장 크다.」


「이제 가능한 차원 도약의 횟수가 몇 번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지구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실패하는 것이다.」


···

···

···


「매번 차원 이동 직후에 문의 미세한 결함들을 수리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이제 한 다섯 번 남았나. 그저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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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번 차원 이동 이후 문이 기능을 중지한다면, 나는 영원히 그곳 타차원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세 가지 차원에서 인생을 나누어 살아가는 존재가 되겠군.」


「이게 내 마지막 차원이 될 거라면, 이왕이면 그곳은 기술이 굉장히 편의적으로 발달했고, 또 평화로워 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씨 좋은 미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


「적어도 변기와 탄산음료 정도는 있는 차원을 원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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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변기와 탄산음료가 있는 차원.」


「···아니. 더 정확히는, 지구의 차원 좌표를 찾은 것 같다.」


작가의말

이번화는 역대 최장기록이군요. 한 화가 이렇게까지 길어진 건 처음입니다.

+언젠가는 sf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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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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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논(2) +10 20.12.26 853 49 25쪽
106 유논(1) +10 20.12.25 852 46 20쪽
105 샤를로트(3) +3 20.12.25 810 42 17쪽
104 샤를로트(2) +12 20.12.24 819 42 14쪽
103 샤를로트(1) +19 20.12.23 853 48 13쪽
102 흑색마나(5) +5 20.12.23 842 46 14쪽
101 흑색마나(4) +17 20.12.22 848 52 18쪽
100 흑색마나(3) +23 20.12.21 835 52 15쪽
99 흑색마나(2) +21 20.12.20 870 46 15쪽
98 흑색마나(1) +15 20.12.19 873 45 16쪽
97 불쾌한 골짜기(3) +15 20.12.18 835 45 17쪽
96 불쾌한 골짜기(2) +5 20.12.18 808 37 16쪽
95 불쾌한 골짜기(1) +22 20.12.13 846 47 16쪽
94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5) +28 20.12.12 802 39 15쪽
93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4) +11 20.12.11 808 41 15쪽
92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3) +11 20.12.10 828 39 14쪽
91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2) +18 20.12.09 873 45 13쪽
90 톱니바퀴가 돌아갔기에(1) +26 20.12.08 898 52 13쪽
89 외전-제국의 적(3) +23 20.12.05 848 51 16쪽
88 외전-제국의 적(2) +16 20.12.04 847 46 12쪽
87 외전-제국의 적(1) +19 20.12.03 849 48 13쪽
86 외전-Boy Meets Girl(7) +12 20.12.02 817 42 13쪽
85 외전-Boy Meets Girl(6) +8 20.11.28 812 46 13쪽
84 외전-Boy Meets Girl(5) +11 20.11.26 823 46 11쪽
83 외전-Boy Meets Girl(4) +9 20.11.25 803 44 13쪽
82 외전-Boy Meets Girl(3) +13 20.11.21 824 42 14쪽
81 외전-Boy Meets Girl(2) +8 20.11.18 840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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