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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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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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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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5)

DUMMY

“그렇다면···기다리는 일만 남았나.”


유논은 홀로 남은 무덤가에 선 채 중얼거렸다.


과거의 벽 뒤에 숨겨진 시드의 비밀을, 용언의 주인을 찾아낸다라.


말이야 거창하지만, 실제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무언가 대단한 수사 기법을 활용하고 싶어도 애초에 마법의 장이 이곳 별궁의 묘지만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다.

한 걸음이라도 영역 외부로 내딛었다가는 곧바로 본래의 시간대로 끌려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은 가만히 자리한 채 무료히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모녀를 무덤에 묻은 직후요, 과거의 한 축에서 대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시드에게 용의 마법을 사용하려는 범인이 나타날 것이니.


그가 무덤과 관 속에서 시드를 꺼내 용의 씨앗을 심는 순간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곳 과거세계에서의 유일한 소명이었다.


묵묵한 인내로 오랜 기다림을 견뎌,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인내라는 것─괴로움을 견디는 강철 같은 끈기와 극기의 와중에도 끊이지 않는 꾸준한 집중력은, 유논의 특기나 다름없었다.


끽해야 수십 년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 뇌가 녹아내리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면, 이쯤은 하품이 나올 만큼 쉬운 일이었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왔건만, 오히려 은근한 휴식으로 느껴질 지경.


“······.”


유논은 울창한 초목의 중간에 선 채, 옛 시대의 그림자에 파묻혀 자박한 비 웅덩이 위를 거닐었다.


묘지를 둘러싼 나무의 짙푸른 녹색에, 가슴이 울렁인다.


마법사는 손을 뻗어 이슬 묻은 잎을 매만졌다.


그 산듯한 자연의 감촉을 간만에 만끽하고픈 심정이었으나.


손가락은 야속하게도, 투명하게 일렁이며 나무를 스치고 지나쳤다.


갈 곳 잃은 채 허공을 방황하는 미래인의 손길. 유령이 벽을 통과하듯 수풀과 마주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린다.


···예상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못내 입맛이 썼다.


되새기는 사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보고 듣는 것뿐이었다.

그조차도 간신히 행할 수 있었음으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외부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생생한 멸망 이전의 정경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애초에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럴 마음이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그의 육신은 현실의 시간대에 멈춰 있다. 지금 과거의 일각을 엿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체에 불과한 바.


더군다나 지금 이 옛 묘지 또한 과거의 현장 자체라기보다는 그 공간적 외양만을 보여주는 일종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건 현실의 과거 축에는 영향이 갈 리가 없고, 마찬가지로 이곳 투영된 옛것들의 세계 또한 그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


그는 미래에서 온 염탐자, 인과에서 벗어난 철저한 외부자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저기 저 나무처럼 가만히 주위를 관조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주위를 살핀다.


어찌 보면, 그는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곳이 좋겠다.”


유논은 묘지에서 가장 품이 넓은 거목 아래, 평탄하게 다져진 땅에 주저앉았다.


샤를로트와 시드의 무덤이 한눈에 깔끔하게 잘 보이는 자리였다.


앞으로 그가 오랜 세월을 지내게 될 일종의 초소. 유논은 앉은자리에서 공간감각을 뻗어 묘지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어나면 금세 눈치 챌 수밖에 없도록 그리 촘촘한 거미줄을 쳐둔 뒤.


눈을 감았다.


시간은 느릿하게, 그러나 멀찍이 흘러갔다.




* * *




슬픔이 비로 내리던 때는 한여름이었다.


거기서 때가 지났으니,


쏟아지던 폭우도 멈추고, 아지랑이 되어 피어오르던 열기도 식었다. 곳곳에 보였던 여름의 벌레들은 추풍에 밀려 온데간데없었다.


첫 번째 계절, 마법사는 더위와 이슬로부터 마법을 창안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발긋한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고, 과일나무의 수가 적잖아 곳곳에서 과실들이 툭툭 떨어졌다.

추락하는 인력의 증거물들을 보며, 마법사는 제 자신이 영체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머리 위에 열매 하나쯤 달라붙어 있을 것이라 여겼다.


만일 그게 가능했더라면, 세월이 더 지나 머리 위에 나무 한 그루쯤 자라는 광경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인데.


두 번째 계절, 마법사는 아쉬움에 파묻혀 식물의 무학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는, 벌거벗은 계절이 찾아왔다.

핵겨울의 잿빛 설원과는 완연히 달라, 새하얀 광채 발하는 백색 눈이 세상을 뒤덮는다.

오랜 세월을 때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었다.


세 번째 계절, 마법사는 찬란한 설맹雪盲의 빛줄기를 음미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니 천천히, 새싹이 자랐다.


가을에 뿌린 싹들이 서서히 돋아나는 정경. 꽃들이 조심스레 피고, 온난한 추위가 불현듯 다가온다.


네 번째 계절, 마법사는 날리는 꽃가루와 돌아온 철새들의 비행을 탐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들이 계속되었다.

몇 번의 봄이, 여름이,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지났을까.


정적인 나무들을 닮아가던 마법사는 미동 않는 껍질 속에서 생각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묘지를, 무덤을 찾은 인물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별궁에 위치했다고는 하나 다름 아닌 카라얀 황실의 묘지였고, 시드와 샤를로트뿐만 아니라 다른 황족들도 함께 묻혀 있기에 황실과 연이 있는 조문객들이 꽤나 많이 찾아왔다.


그리고 카라얀의 3황비는 꽤나 덕을 쌓은 인물이었는지, 개중에선 죽은 그녀와 그녀의 딸의 묘를 방문하는 이들의 수도 상당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떤 수상한 이의 기척도 감지할 수 없었다. 누구도 시드의 무덤을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시드의 관은 미동 없이 얌전했고, 속의 내용물 또한 일어서는 일 없이 안식할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시간이 흘렀을 즈음에는, 방문객들의 수마저 줄어들어 이제는 묘지를 드나드는 이라고는 황실에서 고용한 관리인뿐이었다.


매번 정해진 시각마다 찾아와 무표정한 낯으로 묘의 정경을 자로 잰 듯 정확히 관리하는 자.

카라얀의 비보가 들려올 때면 새로 구멍을 파고, 그렇지 않을 때면 비로 낙엽이나 쓸곤 하는 자.


죽은 이들의 안식처를 지키는 별궁의 묘지기, 스스로의 직업에 만족하지도 불만하지도 않는 듯한 청년이 그의 일상을 침범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조차도 떠내려가는 세월의 주변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사의 인지에 녹아들었다.


빙산이 햇볕에 젖기까지 얼마가 걸렸던가.

잔인한 시간이 묫가의 참새를 죽이기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충분한 세월이 흐르고, 청년이었던 묘지기는 장년이 되었다.

피부에 주름살이 생기고, 살집이 부쩍 늘어난 그 모습을 보며 나무가 가지를 흔들던 때.


그런 무렵에, 갑자기 세상이 시뻘개졌다.


만물이 붉게 달아올랐다.


작열하는 섬광.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말라비틀어졌다. 사악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식물들이, 동물들이 불타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휩쓰는 열풍이, 빛과 열의 쓰나미가 묘지에까지 들이닥쳤다.


충격파가 서 있는 것들을 억누르고, 유기물들을 전부 검게 소각시키는 가운데.


마법사는 홀린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손으로 내리꽂은 지상의 태양,

가공할 크기의 초고온 플라즈마 화구가 저 너머의 풍경으로 보였다.


도시의 중앙에 돌연 모습을 드러내다가, 이내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변모해 피어오른다.


···그리고, 따가운 빛의 폭력이 가실 때쯤.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아 불씨와 재만이 남았을 때쯤.


잿빛 눈이 내렸다.


회색으로 물든 하늘, 돌연 얼어붙은 기온. 타고 남은 것들이 낙진 되는 고요한 도시의 일면.


핵겨울의 원시原始.


떨쳐냈다 여긴 비린 맛이 아직까지 입안을 맴돌았기에, 마법사는 침묵한 채 오래도록 그 광경을 안구에 새겨두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동반했던 식목들은 스러졌고, 대지는 황폐해졌다. 온통 잿빛 죽은 것들로 뒤덮여, 아이러니하게도 사자들이 안식하기에 불쾌한 곳이 되어버렸다.


무엇 하나 살아있지 않은 온전한 죽음의 성지. 이따금 오염된 괴수들만이 들락날락하는 냉정하고 또 무정한 묘지.


그곳에 여전히, 흑색의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슥──슥──슥──.



돌연 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필시 묘지기일 터다. 그러고 보니 찾아올 때가 되긴 하였다.


그리 사고했다.


어느새 주위 환경의 일부가 되어 버린 묘지 관리 도중의 소음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흐트러진 땅을 고르게 피며 긁는 소리에도, 영차 하며 잿더미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소리에도, 푹─푹─쌓인 눈들을 삽으로 파내 제설하는 소리에도 일말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내면 가득 들어찬 멸망의 기억을 응시한 채, 서클 텐으로 가는 차원의 열쇠를 만지작대며, 묘지에 접근하는 다른 기척은 없는지 예의주시하며 살피기를 계속할 뿐이다.


그런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푹───푹───푹───.



삽으로 파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잿빛 눈을 다 파내고 이제는 흙을 옮기는 것인지, 이전과는 달리 질척하지 않고 딱딱한 소음이었다.


그렇다, 흙을 파는 소리였다.


“······.”


묘지의 흙을.


유논은 오래간만에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단 한 번도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의 묘로부터 엇나간 적 없었던 고개의 방향이 한 사내를 가리켰다.


그는 삽을 든 채, 시드의 무덤에서 흙을 파내고 있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얼어붙은 대지가 움푹 파여 나갔다.

이대로라면 삽시간에 관이 있는 지하까지 도달할 기세였다.


유논은 수십 년의 세월 덕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여유롭게 움직이는 묘지기의 삽을 응시했다.


저 자가 묘지기를 죽이고 그의 물품을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비질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더 빨리 눈치를 채지 못했던 이유.

비질하는 소리에서부터, 땅을 파는 소리까지 전부. 묘지를 관리하는 리듬이 완전히 묘지기와 동일했다.

지난 수십 년간 그의 환경과 동화되었던 묘지기와 완전히 동일한 행동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유일한 차이라면, 평소대로라면 비석 주위의 잡초들을 관리하였을 시간대에 지금은 무덤으로 다가가 땅 파며 도굴하려 들고 있다는 격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점이 같았다.


아니, 같은 정도가 아니었다. 저 자가 바로 묘지기였다.


유논은 수십 년간 태연히 묘지기 행세를 하며 무덤을 관리했던, 그러나 방금 돌연 도굴꾼으로 돌변한 자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외양마저 익숙했다.

어느새 중년으로 변모해 있는 한때의 청년, 살이 많이 불어나 느껴지는 푸근한 분위기.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만 같다.


풍만한 몸으로 뒤뚱대면서도, 능수능란하게 묘지를 관리하는 저 모습은 그가 알던 묘지기의 것이 맞았다.


···다만 평범한 묘지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축적된 익숙함에 사고가 파묻혀 연상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넘겼었지만, 기실 처음부터 당연히 의심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묘지기가 핵이 떨어지고 지상이 오염된 가운데 묘지를 관리하러 출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툭──.



기괴하리만치 기계적으로, 제 할일을 한다는 듯, 묘지를 관리하는 중이라 주장하듯 무심히 흙을 파내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삽 끝이 관에 닿았기에.


이내 천천히 주위를 파낸 뒤, 구덩이 깊숙이 들어가 어둠에 묻힌 관을 빼낸다.


그 요정나무로 된 껍데기는 방사능에 영향 받지 않은 채, 처음 묻었을 때와 똑같은 빛깔이었다.


중년의 묘지 관리인은 관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내려놓은 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빛살 같은 움직임으로 관 속 아이의 가슴팍에 제 손을 박아 넣었다.



푹────!



마법적 방부 관리 탓에 조금도 썩지 않은 살을 파고들고, 이내 심장을 움켜쥔다.



“아···!”



사자의 피가 용솟음치며 튀어 오르는 광경에, 그 유논조차 눈을 치켜뜬 채 탄성 지르며 움찔했다.



그리고,̷̝̘͓̺̱̙͓̦̞͉̫̠̗͙͉̭̮̟͉̃̔̓̓͊̂̅̔̀̄̆̒̾͛̾̏̂̀͆̅͗̈́́̽͠͝͝͠ͅ 금빛이 번쩍였다.̷̧̢̛̛̛̥̝̠͚̣̦̺̖̠̫̟̬͈͓̣̟͚̪͙͙͇̦̰͕͖͕̲͔̟̙̤̟͂̊̈́̂̽̄̍̿̓̊͂̉̋̈́͐̅̀͂̎̊̍̅̀͋͘̚̚͘͘̚͜͝͝ͅ



필멸의 지혜로는 해독하지 못할 시간마력의 문자가 줄줄이 쏟아진다. 저주받은 지식들의 홍수가 뇌를 깨뜨릴 듯 위협적으로 두들겼다.

어딘가의 황금 쇠똥구리가 굴리는 똥에 깔려 죽는 터무니없는 환상이 스쳐 지나간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려 한 대가로 영체의 작은 일부가 소멸할 뻔한 위기를 겪은 끝에, 마법사의 영혼은 과열된 감각을 일깨웠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부풀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를 열자, 아이를 안아든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가슴에서는, 놀랍게도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다. 두근대는 소음이 귀에 선명히 들렸다.



···중간과정이 통째로 생략되었다.



필름을 잘라낸 듯, 시간을 한 겹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장면을 건너뛰었다.


아이의 심장에 손을 박아 넣는 순간에서, 갑자기 모든 게 끝난 뒤 아이를 들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으로 시간의 순서가 넘어가 버렸다.

분명 그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도, 심지어는 관에서 아이를 꺼내는 광경조차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가 엿보려 했던 것이, 차마 이곳 묘지의 나약한 공간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종류의 정보였던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등가의 개념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서도 집약된 공간과 고등한 시간이 따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방금 절단된 찰나 속에서 중년인이 사용한 용언은 지나치게 고등한 시간의 이치를 담고 있어, 이곳의 옅은 공간만으로는 온전히 보관할 수 없었는지 기억이 손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들춰 보려 하면, 깨진 파일을 억지로 열어보려 할 때처럼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타임 슬립이라도 한 듯, 돌연 순간의 간격이 날아가며 중년인의 시술이 전부 끝난 이후로 넘어와 버린 것이다.



···결국 그 탓에 용의 마법에 관해서는 조금의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낭패라면 낭패라고 볼 수도 있을 상황이었으나, 유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들어 올린 채, 볼일을 전부 봤다는 듯 묘지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지난 수십 년간 이 단번의 행동을 취하기 위해 묘지기로 살아왔던 세월을 전부 청산하고 떠나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 타오를 듯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푸짐한 몸매를 자랑하며 움직이던 자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지금 유논이 앉은 채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처음으로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마법사는 묘지기의 얼굴─이전의 형체가 살 속에 파묻혀, 후덕한 인상만이 남은 안면을 바라보며,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떠오르는 것은 자유도시 갈란에서의 기억이다.



‘내 애완동물을 잃어버렸다네. 찾아 줄 수 있겠지?’



그곳의 마법상점에서, 시드를 만나기 전 받았던 한 의뢰. 그간 멈춰 있었던 그의 시간이, 그때를 기점으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었다.



‘종은 변종 불꽃 샐러맨더. 아직은 어린 해츨링일세.’



유논은 딱딱하게 굳은 동공을 움직여, 다시금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딱딱하게 굳은 사고의 중심부를 대신해, 곁다리의 시냅스들이 전류를 튀겼다.

반자동적으로 본래의 그가 할 법한 작업을 대신 수행한다.


그는 변종 샐러맨더를 찾아 데려오는 의뢰를 맡겼던 중년인의 외양을 떠올렸다.


저 허름한 묘지기의 옷을 벗기고, 그 자리에 대신 부유해 보이는 상인의 의복을 입힌다.

거기에 더해 하관에는 유쾌한 느낌을 주는 멋들어진 콧수염이 자라난다면.

특유한 무표정한 면모를 지우고, 어딘가 능청스럽고 유쾌해 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씌운다면.



‘그나저나, 마정석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내가 갓난아기 정도 크기의 마정석을 지닌 사람을 아는데···.’



닮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비슷한 외견이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마침 맡기고 싶은 의뢰가 있었는데, 관심이 있다니 다행이군.’



돌연,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귀에서는 삐이─하는 이명이 울린다.


동시에 심상心象이 떠오른다.


제 불타는 애완 도마뱀을 되찾으며 기뻐하던 풍채 좋은 상인의 모습이, 파충류를 사랑하는 우습고 뚱뚱한 꼴의─그러나 분명 어딘가 수상한 면모가 있었던 중년인의 모습이.


“······.”


제국주의자들의 의뢰를, 시라센 괴물둥지에 갇힌 것으로 추정되는 직계 혈족을 데려와 달라는 내용의 일을─


─그리하여 그에게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바로 그 의뢰를 소개한 중개상의 모습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이, 눈앞의 사내와 겹쳐 보인다.


몇몇 부분만 바꾸면 정확히 일치한다. 인상이 달라져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 뿐,


자세히 바라보면 단순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도플갱어마냥 완벽히 같은 외양이다.


동일한 사람이다.



“···하.”



그때 그 살찐 도마뱀 애호가, 중년의 중개상과 지금 눈앞의 용언을 보유한 가짜 묘지기는,


완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유논은 입술을 짓씹은 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딘가 된통 당한 듯한 심정이지만.



아무튼, 단서는 찾았다.


과거를 둘러본 것의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건, 저기 저 용언의 주인─그때 마주쳤던 중개상을 찾아서, 용의 마법을 강탈하는 것뿐.


그는 아직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 멈춘 중년인의 묘한 눈길에 응답하듯, 이를 뿌득 갈았다.


“···곧 찾아가겠다.”


필요하다면 세상 모든 공간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수색할 터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Ep.5 침묵의 가을(Silent Winter)


End.


작가의말

이번 화는 묘사도 많이 들어간 데다가, 반전을 뽐내는 파트였던지라 쓰느라 고생을 좀 했네요. 분량도 꽤 많았고요. 

이 반전에 대해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기대가 되면서도 두렵네요.


가장 걱정되는 점은, 그간 시간차가 하도 길었다 보니 독자 여러분들이 2화부터 등장했던 도마뱀 좋아하는 살찐 중년인 중개상을 기억하실지 의문이더군요. 지금은 무려 206화이니까요. 소설 연재를 시작한 지도 거의 1년 가까이 지났고요.

하지만 플롯상 처음부터 정해진 전개였기에 바꿀 순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중간중간에 계속 기억을 환기시킨답시고 인물과 관련된 내용을 집어넣긴 했습니다만...얼마나 효력이 있었을지 싶네요.


도마뱀 중개상에 관한 내용을 만약 기억하지 못하셨다면, 그래서 반전을 즐기지 못하셨다면...상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이니까요. 초보 작가로서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를 욕해주십시오.


끙..저는 이만 쉬러 가보겠습니다.

막간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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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외전-백룡설산白龍雪山(4) +4 21.06.03 387 20 13쪽
212 외전-백룡설산白龍雪山(3) +4 21.06.01 421 20 13쪽
211 외전-백룡설산白龍雪山(2) +2 21.05.31 466 23 13쪽
210 외전-백룡설산白龍雪山(1) +3 21.05.27 509 22 14쪽
209 막간-수호자(守護者, Guardian)(3) +7 21.05.26 531 27 16쪽
208 막간-수호자(守護者, Guardian)(2) +3 21.05.25 483 27 14쪽
207 막간-수호자(守護者, Guardian)(1) +7 21.05.21 538 23 16쪽
»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5) +8 21.05.14 613 26 19쪽
205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4) +3 21.05.13 484 25 16쪽
204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3) +3 21.05.12 479 26 14쪽
203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2) +7 21.05.11 493 30 15쪽
202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1) +4 21.05.07 515 28 17쪽
201 용의 씨앗(10) +4 21.05.04 526 2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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