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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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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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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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4)

DUMMY

오염된 장마가 주륵주륵 내렸다.


유논은 별빛 우비, 호신강기를 쓴 채 구멍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낙진의 비를 얻어맞고 있었다.


“······.”


인생에서 둘째로 찾는 장소의 정경에 말문이 턱 막힌다.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전신을 옥죄었다.


거뭇한 안개에 휩싸여, 그는 황실 묘지의 입구에 있었다.


샤를로트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제국의 황비였기에, 죽어서도 이곳 황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이라도 남겼더라면 들어주었을 것인데.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부질없다.’


유논은 고개를 휘휘 저어 어지러운 상념을 흩었다.


제국의 여인이 죽었으니, 응당 황궁에 묻혀야만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애초에 샤를로트는 황궁 말고 다른 곳에 몸을 뉘였지.’


그녀가 죽던 당시 태양황궁은 불타 망가진 채였으니, 그리하여 그녀가 묻힌 장소는 별궁 옆에 딸린 자그마한 황실 묘지였다.


그러니 그곳을 손수 찾아온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자르카니슈와의 전투 도중에 별궁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도록 지킨 것이, 스스로의 그 판단이 실로 적절했다.


그곳의 묘지가 모든 일의 시발점임을, 그 속에 그가 찾던 실마리가 있음을 알고 행한 일은 아니지만.

그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 훗날 샤를로트의 무덤을 다시 한 번쯤 찾아보려고 그리했던 것뿐이지만.


결국은 그게 돌고 돌아, 시드를 살리기 위한 최적의 수가 되고 만 것이다.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필연일지도,


그 또한 이 모든 게 샤를로트의 죽음, 그녀의 묘와 연관되어 있다는 무의식적인 깨달음에서 비롯된 의사 결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들어가야지.”



유논은 시답잖은 잡념들을 떨치고, 황실의 묘지 구획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질척하게 묻는 바닥의 진흙들이 심히 거슬렸으나, 털어 내거나 허공을 날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추모하고자 하는 자의 방식이 아니기에.


죽은 이들은 땅 속에 묻혀 있기에,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


···또다시 번개가 쳤다.

우레에 귓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논은 고개 숙인 채 잿빛 무덤가를 가로질렀다.


어두운 빗물, 더러운 흙탕, 썩고 오래된 것들의 잔해를 뒤집어쓴 채 묵묵히 걷는다. 그리하여 무덤의 중심가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시드의 심층 의식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났었다.


시드가 곧 샤를로트라 주장하는 이면의 그였다.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겨 있던 어떠한 설득력이 그를 세뇌시켰다. 그리고 한동안, 유논은 시드가 샤를로트라 믿으며 움직였었다.


그리고 현실로 되돌아온 지금, 그는 그 ‘어떠한 설득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시드와 샤를로트는 닮았다.


독기의 골짜기의 도플갱어처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는 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사람 자체가 닮아서, 비슷하게 보였다는 뜻이다.


새카만 머리칼에 태양-별을 보는 듯한 호박색 눈동자야 직계 혈족들의 특성이니 같은 것이 당연하다지만.

닮은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어딘가 갇혀 있는 자들 특유의 서글픈 분위기, 그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천성의 불꽃과도 같은 활달함.

그가 사랑했던 모든 요소들이 소녀에게서 똑같이 보였다.


시라센 괴물둥지에 갇혀 있었던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과,

황도 카라얀에 갇혀 있었던 샤를로트 캣 카라얀.


두 사람은 놀랍도록 유사했다. 외양과 성격 모두가 그러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저 자그마한 소녀로부터 옛 연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기에,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시드가 신경 쓰였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와 그리 쉽게 친해졌고, 그녀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으며,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악몽 속 또 다른 유논 또한 시드를 샤를로트라 착각했던 것이다. 닮아서, 같은 사람이라 헷갈릴 만한 공통점이 너무나도 많아서.


과거에는 단순히 우연이라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가문 출신이니, 특유의 외견이 같아 그런 인상을 품게 된 것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안다.


시드와 샤를로트가 그리도 닮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덤에 도착했다.



유논은 우중충한 대지 위에 털썩 무릎 꿇었다.

본래 녹색 풀이 돋아 있어야 했을 무덤가, 기분 나쁜 액체로 고여 있는 그곳의 바닥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진다.


이 흙 아래, 샤를로트가 있었다.

제국의 가장 실력 있는 목수가 짠 요정나무의 관이 느껴졌다. 그가 직접 삽으로 땅을 파고 묻은 사자의 안식처였다.


“······.”


유논은 무릎 꿇은 채, 엉금 기어 묘비에 도달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뻗어 비석을 매만졌다.


그 글귀를 살갗에 아로새기며, 아파하는 안구로 읽는다.


─무덤의 주인은 샤를로트 캣 카라얀Charlotte Cat Karajan.


묘비명은···.


시야가 흐릿하다. 물기가 범람하는 탓에, 눈가를 몇 번이고 닦아내고 나서야 앞이 어설프게나마 보였다.


유논은 끈적한 검은 물이 흘러내리는 묘비명을 읽었다.



─소녀, 여인, 그리고 어머니.

─소녀로 사랑했고, 여인으로 괴로워했으며, 어머니로 죽었기에.


─여기, 자식 곁에 잠들다.



자식 곁에.


대전쟁 도중, 폭격에 사망한 샤를로트 캣 카라얀은 그녀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어린 딸의 무덤 옆에 묻혔다.


유논은 힘없는 고개를 틀어 샤를로트의 무덤 바로 곁에 놓인 작은 묘비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끝에 기울어지고 갈라진 그것, 오염된 먼지와 이끼로 뒤덮인 글씨 위를 손바닥으로 훑는다.

조심스럽게 매만진 끝에 드러난 글귀.


무덤의 주인은, 샤를로트의 딸.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Elizabeth Seed Karajan.



묘비명은.



아직 꽃피지 못한 씨앗이, 어미와 함께 잠들다.─



“······.”


유논은 담담히 오물 고인 웅덩이, 아이의 무덤 위로 손길을 뻗었다.

검은 흙을 헤집고 끝까지 팔을 밀어 넣는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안쪽의 대지를 뚫어서, 관에 닿는다.


툭.


어미의 것과 같은 요정나무 관의 감촉이었다.


그 관의 끄트머리, 죽은 아이의 요람을 붙잡고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후두두두두두─



깊숙한 무덤이 완전히 망가지며, 부서진 땅의 조각들이 빗물과 함께 흩날린다.


유논은 더러운 소나기에 씻겨, 잿빛으로 도색되는 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세상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아이의 관. 죽은 샤를로트의 딸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그 뚜껑을 열어젖힌다.


“······.”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입가. 떨리는 눈가. 주먹 쥔 채 피 날 때까지 살갗을 파고드는 손톱.


유논은 관의 문을 거칠게 내던진 채,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이 있어야 할 관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공간감각으로 눈치 채고 있었던 대로.


···텅 비어 있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직접 묻었던 죽은 샤를로트의 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어느새 생생한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마법사의 제자가 되었고, 다음 대의 용으로 선택받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잿빛 설원 위에서 곤히 잘 자고 있다.

유논이 설치해둔 보호의 마법 안에서, 용의 씨앗과 서서히 융합되고 있다.



그렇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시드와 샤를로트가 닮은 이유?


아이가 제 어미를 닮은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냉혹한 유전이, 물보다 진한 피가 윗세대의 성질을 아랫세대에 그대로 전해준 것에 불과할진대.



“···하.”



유논은 비석 위에 머리를 박은 채 이를 악물었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꿇은 채로 계속해서 부르르 떨었다.



새삼 충격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으나 믿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었으니.


유논은 별궁의 문서들을 뒤지며 발견한 황실의 가계도를 떠올렸다.

샤를로트 캣 카라얀의 이름 바로 아래, 직계 비속-친딸로 적혀 있었던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의 이름.


처음에는 무언가 착오가 있었겠지 싶었다.


그야 말이 되지 않으니. 시간대부터가 달라, 지금 저 갓 열여섯 된 소녀 시드가 과거 샤를로트가 낳은 그 아이일 수가 없다 여겼다.


나이가 다르다. 샤를로트의 딸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적어도 스물을 훌쩍 넘긴 연배여야 했다.


그러므로 황실의 관리들이 전쟁통에 황급히 일거리를 해치우다 잘못 기입했을 것이라 여겼으나─시드의 심층 의식을 겪은 지금, 묘비에 적힌 글귀와, 내용물 없는 관의 모습을 명확히 제 눈에 박아 넣은 지금에 와서는.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은 샤를로트 캣 카라얀의 딸이었다. 수십 년 전에 어미의 품에서 죽은 바로 그 아이였다.


심장이 더는 작동하지 않음을 손수 확인하였거늘.


분명히 숨을 멈추었던 그 아이가, 어째서 핵이 떨어진 환상세계로 돌아와 그의 제자가 되었는가.

어떻게 시간을 뛰어넘고, 죽음으로부터 회귀해 열다섯 소녀의 모습으로 마법사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인가.


의문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단서는 이게 끝이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었던 샤를로트의 아이 엘리자베스가 어찌 된 영문인지 가슴에 용의 씨앗을 품은 채 되살아나, 지금 그가 아는 시드가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중간과정─이 관을 열고 그녀를 되살린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찌 용의 심장을 그녀에게 심어놓았는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서 어떻게 대한 끝에 지금 이 순간까지 오게 된 것인지.


시간의 흐름에 제대로 영향 받지 않은 시드의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을 되살린 존재, 용의 씨앗의 제작자, 용언의 주인이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작 시드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전부 두꺼운 세월에 덮여, 잊힌 비밀이 되어 가라앉아 버렸다. 분명 이 묘지에서 일어났을 게 분명한데도, 시간의 장벽에 갇혀 알 수가 없다.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과거의 장막을 들추고 진실을 알아내는 것.


수십 년 전의 묘지로 돌아가, 그곳 소녀의 무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는 것.


“······.”


유논은 무릎 꿇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빗줄기들이 천공을 수놓는 광경을 안구에 담으며, 젖은 시야 속에 세상을 구겨 넣었다.


그리하여─원을 그린다.


서클, 원(一).


묘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얌전히 숨겨 두었던 흑색의 위세를 널리 떨쳤다.

마법사의 부름에 흑색마나가, 모든 공간을 다루는 힘이 깃든 물질이 일제히 울어 응답한다.


세상에 달 없는 밤이 찾아왔다.

거대한 흑색 헤일로가 천상과 지상을 동시에 뒤덮은 채, 황도 전체를 제 영역 아래에 두고 회전한다.

마법사가 부리려는 마법에 발맞춰 한 몸처럼 자연스럽게 앞서나간다.


쏴아아아──쏟아지던 빗물이 문득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보였다. 코끝에 내려앉던 구정물이 돌연 역전했다.

수많은 빗줄들이 하늘로 다시금 말려 올라간다. 나온 먹구름으로 돌아가는 그것들 덕에, 시끄럽던 소나기의 소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내던졌던 관의 문짝이 다시금 허공을 휘저으며 복귀한다. 뚜껑 제대로 덮인 관이 땅 속으로 쿠구구구-하는 소리와 함께 파고들었다.


흙더미가 도굴당한 무덤을 덮으며,

손상되었던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의 묘는 이전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마법사의 인도를 따라 날아오른다.


끝없는 우주공간을 유영한 끝에, 오직 공간성만이 존재하는 흑색세계의 표면에 발을 디뎠다.


오직 검은 것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영역이기에, 검문을 마치려면 무엇이든 흑색黑色이어야만 한다.


유논은 문제가 없었다.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흑색의 마법사이므로.

문제는 샤를로트와 엘리자베스의 무덤, 그리고 묘지였다.


마법사는 황급히 검은 고리로 묘지 전부를 빈틈없이 감싸고, 흑색마나와, 공간의 성질을 담은 내기와 마력을 전부 풀어 시야를 흑색으로 흩뿌렸다.


그러고 나니 조금이나마 흑색이 되어, 간신히 장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확보되었다.



──────지직.



새카만 헤일로가 문을 열었다.


이내 검게 물든 세상이 개념의 세계로 진입한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마법사가 제 영지라 선포한 샤를로트의 무덤, 그곳의 묘지뿐이다.


‘장소는, 묘지.’


공간 전체가, 다차원의 영역에 걸친 모든 샤를로트의 묘지가 부름에 모습을 보였다.


‘시간은, 과거.’


유논은 시드와는 달리 시간을 다루는 마법사가 아니기에, 마음대로 과거를 엿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공간을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과거의 ‘공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기억을 엿보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해낼 수 있었다.


공간과 시간은 유일하게 서로에게 간섭할 수 있는 동등한 영역의 차원이기에─


의식은, 묘지의 기억은 과거로 뻗어나간다.


과거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순간, 그 속 묘지라는 공간이 지닌 기억.

암흑으로 차있던 태초부터, 대지가 생성되던 시기, 그리고 제국이 세워지고 황궁이 만들어지던 시기까지.


온 지식의 홍수가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지척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건드리지 않고 참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기에.


그가 보고자 하는 과거는 처음부터 오직 하나뿐이었기에.



파악──────!



문득 칠흑뿐이던 세상에 빛이 밝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만 방사능에 물든 오염수가 아니라, 자연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깨끗한 빗물이었다.

피부에 닿으니 차갑다. 혀로 핥으니 달다. 이게 멸망 이전의 빗발이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그는 홀딱 젖은 채, 어두운 하늘 아래 무릎 꿇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묘 앞에, 엘리자베스의 묘 앞에.


얼핏 보면 현재의 정경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묘비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어제 만든 것처럼 매끈했고, 글귀는 선명했다. 손으로 닦지 않아도 잘 보인다.


그가 무릎 꿇은 대지 또한 푸르렀다.

젖은 잔디가 싱그러운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세상. 가장 슬프고 어두워야 할 묘지조차 밝은 녹색의 수풀들로 둘러싸인 공간.


이토록 소중한 멸망 이전의 세계 속에서,


과거의 유논은 울고 있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감정, 이전의 자신이 지녔던 지독하고 또 끔찍한 슬픔.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것임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만큼이나 거대한 격류였다. 인간인 이상 휩쓸릴 수밖에 없다.


돌이키길─이때의 경험 탓에,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전쟁을 끝내고야 말겠다고 결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한낱 전쟁보다 한 소녀가 더 중요하다.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그녀를 구하는 게 더 급했다. 어디를 가든 함께하겠노라 맺었던 맹세를 지켜야만 했다.


지켜야 할 이를 지키지 못했던 절박함을 떠올리면, 옛 기억의 울적함쯤이야 어렵잖게 이겨낼 수 있다.


유논은 눈의 물기를 닦고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은 샤를로트의 묘지.


때는 모녀를 땅에 묻고 난 직후.



그는 과거로 돌아왔다.


그러니 이제는 세월 속에 묻힌 진실을 파헤칠 차례였다.


작가의말

다음화면 에피소드가 끝나겠군요. 참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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