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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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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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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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4)

DUMMY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왕을 대신해 전장 곳곳의 네크로맨서들에게 고함지르는 윌리엄 스왈로우에게 말한다.


[알겠네. 가도록 하지. 전장의 지휘는 그대에게 맡기겠어. 다만···.]


문제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윌리엄 스왈로우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었다.


전장에서 왕이 모습을 감추는 것은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군세는 왕의 존재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대왕이 함께하기에, 모두가 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싸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왕이 사라진다면 사기가 깎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왕의 이탈에는 단순히 정신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으로부터 전장 전체에 뻗어지는 보랏빛 아우라. 군세의 병사, 장수들에게 이르는 광범위한 강화의 효과마저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군세의 영역 안에 있는 전장이니 왕이 멀리 떨어지더라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유지되겠지만, 아무래도 직접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보다는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상황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최적의 길은 지금 전력만으로 어떻게든 대왕이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겠지만···.


왕이 전장에서 이탈한 상태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둘째치고서라도,


상대가 무려 흑색의 마법사였다. 대왕에 대한 믿음이야 물론 충만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으실 거다.’ 라고 자위하기에는 결국 네크로맨서가 지닌 한계는 어쩔 수가 없다.


사자왕은 월등히 강력한 지배력과 감응능력을 지녔을지언정, 결국 네크로맨서를 초월한 존재까지는 아니었다.

개인의 역량보다는 거느린 수하들의 역량에 집중하는, 가장 강한 시체가 아니라 그 시체를 거느린 주인이다. 일대일의 결투보다는 드넓은 전장에서 제 역할을 발휘하는 군주.


그런 군주가 홀로 돌아가 세계 최강 급의 마법사와 대적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흑색의 마법사의 위험함, 그가 정화교 쉘터에서 보였던 위용을 기억하는 만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사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흑색의 마법사, 혹은 흑색의 마법사라 주장하는 존재가 손에 쥔 것은 다름 아닌 군세의, 그리고 대왕의 명줄이었다.


대왕과 절반쯤 한 몸이 되어 버린 고대 리치의 라이프 베슬, 군세의 수정 심장.


저것이 없다면 대왕의 반쪽도 죽는다. 군세를 강화하는 능력도 사라지며, 감응력과 지배능력도 대폭 감소할 것이다.

물론 그러고도 여전히 강력한 네크로맨서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이전에 비하면 한참은 뒤떨어지는 위용일 것이다. 혼자서 군세를 거느리는 초월적인 능력은 다시는 꿈꿀 수 없다.


한마디로, 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가 무너진다.


그러한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흑색의 마법사를 만나야만 했다. 그가 바라는 요청을 전부 들어주어야만 했다.


혹은 그를 맞상대하여 이겨서, 그의 손에서 수정 심장을 빼앗아야만 했다···.


‘터무니없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왕이 직접 만나야 한다니, 결단코 안 되었다···.


“폐하, 호위로 기사단장이라도 부르셔야 합니다. 그라면 혹시─.”


그라면 혹시 모릅니다. 흑색의 마법사를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시간은 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리 말하려던 때였다.


[그대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


차가운 즉답.


맞았다. 안 된다.


이 판국에 기사단장마저 전장을 이탈한다면, 전장을 완전히 버린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버틴다고?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나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도 세 배에 가까운 전력 차이를, 시체 거인이나 죽음의 기사단장 같은 강자들의 능력, 그리고 왕의 힘으로 억지로 메꾸고 있는 것 아니었나.


왕이 떠나는데, 기사단장마저 없어진다면.

그렇다면 수정 심장을 찾으러 가는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돌아올 때쯤이면 군세는 이미 망해 있을 것인데 무슨 소용이겠는가.


[기사단장을 데려가기는커녕···오히려 그가 전장에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겠지. 그가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군세가 결코 버틸 수 없을 테니.]


그리 읊조리는 대왕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최전선. 최정예의 제국 기사들과 돌연변이 패밀리의 빅 브라더들의 합공을 상대하는 검은 갑주의 기사가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한 움직임. 중검을 묵묵히 휘두르는 흡사 늪과도 같은 검술에 온갖 공세가 무효로 돌아간다.

일백에 가까운 전사들이 전부 저 기사를 상대로 포위망을 펼치고 있는데도, 그럼에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넘지 못할 철벽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홀로 전선을 묶어두고 있는 흡사 일인군단의 전략무기!

시체 거인이 온갖 포격들을 몸으로 얻어맞으며 주의를 끌고 있다면, 그동안 그는 땅 위에서 적들을 끈질기게 묶어두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단장, 생전의 기사왕···한때 마스터의 경지, 검의 정점에 올랐던 사내.

대전쟁 시절 집중포격에 사망한 그는 지구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사자왕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고,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사방장군 중 서방의 기사단장, 데스나이트 지그문트 리히테나워.


죽음의 검은 화염계 돌연변이 하나를 썰으며 왕의 부름을 받았다.


“부르셨나이까.”

[내가 전장을 이탈해야만 하네.]

“···알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는다.


무심히 기관총 다발을 빗겨내며, 기괴하게 변형한 돌연변이의 손톱을 칼날로 뭉개며.


죽은 기사왕은 그저 상황에 대해 말했다.


“버티지 못할 겁니다.”

[알고 있네. 다만 그대에게 미리 힘을 불어넣고 떠난다면?]


이번에는 그 귀기 넘치는 데스나이트조차 흠칫했다. 때문에 멀리서 날아온 총알들이 갑주 속을 헤집었으나,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래. 승기를 잡을 비장의 수로 준비했으나···보아하니 승기는커녕 버티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라도 사용해야 할 듯 싶다.]


대왕의 탄식. 죽음의 검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검을 찌르며 대뜸 말했다.


“외람되지만 부족합니다.”

[그래, 그러겠지.]


본래는 생전의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는 기사왕이나,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수정의 힘을 대량으로 부여하면 일시적으로 부작용을 감수하고 이전의 경지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 준비해둔 비장의 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확실히, 왕이 빠진 전장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감이 있었다.


온전한 위용을 지닌 마스터의 존재는 분명 강력하지만, 홀로 전장을 책임지기엔 모자라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대전쟁 이전, 모든 국가들이 병사들을 양성하는 대신 기사들을 훈련시켜 소드마스터를 하나라도 더 키워내려 노력했을 것이다.


결국 마스터는 발로 뛰고 검으로 죽이는 인간이다. 점이 아무리 강해도, 선으로 움직이는 전선과 면으로 움직이는 전장을 전부 막아내기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리 생전의 기사왕이라고는 해도, 전장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의 이탈을 전부 책임지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전장을 휩쓸고 혼란의 구렁텅이로,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또 다른 존재의 조력이 필요했다.


좀 더 커다란, 좀 더 요란한 존재가,


그런 존재가 마침 군세에 있었다.


[그래서, 자네 말고 다른 이의 힘도 빌릴 생각이야.]


데스나이트는 곧바로 알아들은 듯 검으로 주위를 휩쓸며, 투구 안쪽의 회색 눈을 치켜떴다.


“신수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허나 최근 들어 영 말을 듣지 않는다고, 명령도 거부하고 겨울잠에 들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나는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편이니 웬만하면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강제로라도 깨우고, 참전하게끔 시키는 수밖에. 남들에게 권장할 만한 모범적인 사령의 수단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가는 당장 망할 판국이다.


아무리 멋대로 구는 신수, 분명 감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속을 알 수 없는 그 괴상하고 강력한 존재라고는 해도, 이런 거대한 위기 앞에서는 분명 힘을 빌려줄 것이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그런 생각으로 신수를 향해 의념을 쏘아 보냈다.


군세의 사방장군 중 마지막-동방의 신수,


한때 최후룡, 백색의 알렉시오스라 불렸으나 방사능 오염으로 죽어 버린 그 용의 유해를.


죽고 난 뒤 감정의 잔재만 남아 사령술에 따라 움직이는 전장의 지배자, 본 드래곤을 부른다.



────────.



치열한 전장, 위태로운 군세, 간절한 대왕의 심사를 반영하듯 보랏빛 기운이 노을과 함께 넘실거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왕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되었다.]


그 자색으로 일렁이는 안광에, 옆에서 지켜보던 윌리엄 스왈로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신수가 응답한 겁니까?”

[그래. 어째선지···불안정한 감정이 느껴지기는 했다만, 그래도 내 말을 들었어. 신수의 속도라면 이곳까지 10분 내에 도착할 거다.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그 말에 총군사의 낯이 화색을 띄었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그건 당연히 가능합니다만, 대왕님의 안위는 결국···.”


결국 더는 남아나질 않았다. 이것이 군세의 전력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왕을 지킬 비밀 호위 따위는 없다.

마을을 지키는 유령 군체가 있기는 하나···흑색의 마법사에게 당한 것인지 감응조차 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결국 홀로 나아가, 흑색의 마법사를 만나고 그의 손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나, 전쟁의 향방은 결국 그들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전장만 신경 쓰라.]


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윌리엄 스왈로우를 밀어 보냈다. 이쪽을 힐끔거리면서도 이내 지휘하기에 바빠 침 튀기며 소리치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뒤,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상공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왕이 전력을 다해 뿜어낸 보랏빛 기운이 전장의 모든 언데드들에게 쏟아진다.


개중 가장 독보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역시나 최전선의 데스나이트였다.


새카만 갑주에 둘러싸여 있었던 죽음의 기사가, 점차 생기를 되찾는다. 죽음과 삶이 반쯤 뒤섞인 듯한 회색의 육체, 인간 시절의 외모로 되돌아온 채 검에서 보랏빛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낸다.


그 상태로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며 전차를, 대형 괴수들을 연달아 베어 넘기는 기세. 이전까지 느릿하던 중검이 순식간에 쾌속의 칼날이 되어 전장을 종횡무진했다.


저 신위라면 군세가 왕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도록 도울 수 있을 터.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한숨과 함께 손으로 수인을 맺자, 돌연 몸 반쪽의 수정이 터질 듯 달아오르며 요사스런 빛깔을 뿜어냈다.


음산하고 사악한 에너지를 줄기차게 뽑아내 전장의 연합군 병력들의 시선을 잔뜩 끈 다음, 한 줌 빛덩이로 변해 폭발하면서 하늘을 가로지른다.


쏜살같이 날아가, 죽지 않은 자들의 마을로, 그의 수정 심장이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향했다.




* * *




천공이 자색이다.


잿빛 대기를 가로지르는 보랏빛 번개, 꿈틀대는 메마른 하늘.


흑색의 마법사는 눈을 떴다.


“왔군.”


저 멀리, 죽음의 제왕이 한 줄기 광선이 되어 세상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굳이 말이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요란한 풍경이라, 주변의 다른 이들도 잔뜩 경계한 채 일어서 무기를 들어올렸다.


벌써부터 반쯤은 괴수의 형상으로 변한 포식왕과 외골격에서 김을 뿜어내며 전투태세를 취하는 지저왕자.


유논은 평온한 낯으로 손의 보랏빛 수정을 든 채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탁.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자색의 유성, 살포시 내려앉은 세계 최고의 네크로맨서.


유논은 이때다 싶어 달려드려는 포식왕 카르발네스를 손동작으로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반갑게 인사드리고 싶지만, 그러기 쉽지 않겠군요.]


서서히 고개 들어 올리는 서늘한 왕의 한쪽 눈에서는 귀화가 이글거리고 있다.

무표정한 해골의 안면과, 서글픈 인간의 안면이 합쳐져 비뚤어진 낯.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음산한 사기를 흩뿌리며 말했다.


[본 왕의 물건을 지니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흑색의 마법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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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흑과 백(Black & White)(1) +1 22.03.24 199 9 15쪽
270 스승과 제자(4) +6 22.03.23 218 12 15쪽
269 스승과 제자(3) 22.03.23 190 13 13쪽
268 스승과 제자(2) +3 22.03.23 193 11 13쪽
267 스승과 제자(1) 22.03.23 191 11 13쪽
266 드래곤 사냥(7) 22.03.23 202 10 12쪽
265 드래곤 사냥(6) +2 22.03.22 197 15 14쪽
264 드래곤 사냥(5) 22.03.22 187 1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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