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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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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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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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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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운다 나의 거짓 1

DUMMY

태운다 나의 거짓


점차 무뎌지는 발걸음. 쌓여서 풀리지 않는 피로, 그러나 피로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건 중단되지 않는다. 프로야구 선수 9월 중순 정도로 보면 된다. 습관적으로 하다가 에러를 낳고 관중이 분노하는 그런. 관중이 보기에 저 선수 저것만 고치면 괜찮을 텐데,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 알기는 알아도 그게 안 되는 상태. 타석에 들어서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파울볼을 계속 때리는 선수들. 그러다가 이기는 게 신기하다.


마음은 홀가분하다. 야간 습격은 효과적이었고 우리 피해도 미미하다. 습격목표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고 몸이 풀어진다. 이제 작계는 끝나 책임감에서 조금 자유로워졌고 이제 우리가 원하는 걸 원하는 시간에 때린다. 다만, 사령부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이러한 편한 시절을 뒤로 하고 상부에서 원하는 목표로 이동할 것 같다. 상부에서 원하는 건 아마도 지금까지 작전 중 가장 어렵고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마지막 남은 여력을 쏟아 붓고 누가 살아남을지 장담 못한다. 지역대는 이미 그 징후를 통신문에서 느끼고 있다. 반드시, 어떤 중요하고 강력한 것을 때리라고 할 거 다. 통신이 전문을 받을 때마다 섬뜩하다. 사령부 전문이 지옥의 관문으로 가는 편도 열차표 같다. 지금까지 작계 후 임시 선별목표 두 개를 수행했지만 점차 강해진다.


어쩌면 컨베이어벨트에 하나둘 씩 계속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영혼을 가졌다는 몸뚱아리들이 하나 둘... 그러나 그렇다고 그 순서를 거부할 자신도 없다. 남들이 보면 그저 산에 모인 살인마 도적떼 같겠지만 우리 안에도 룰이 있고, 그 룰과 법칙이 존재하는 무시할 수 없는 작은 ‘사회’. 남들은 이 사회를 이해하기 힘들 거다.


살고 싶다. 누구나 살고 싶다. 우린 젊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다. 컨베이어벨트의 순서는 없다. 닥치면 그게 순서다. 생포를 거부한 가망 없는 종신형 탈주범 무리. 서로 시커먼 수염과 장발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사람은 선사시대 이전인데 코팅이 벗겨진 하얀색 총구가 손에서 빛난다. 우리의 자부심은 하나다. 게릴라. 우린 밤을 지배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적 현역사단을 끌어들인다. 더러운 손과 누런 치아. 구강에서 토하는 역겨운 냄새와 근질거리는 때가 눌러앉은 몸. 그런 모양새에 3할이 북한 군복을 입었기에 더욱 정체불명으로 보인다. 순간순간 저게 아군이라니... 그런 생각.


앞서 가던 이하사가 멈추더니 어깨를 으쓱. 어두워서 어디였는지 까먹은 것 같다. 이하사가 아직 산에서 직감으로 모든 걸 기억하는 수준은 아니다. 많은 산을 경험하다 보면 결국 다 피부로 감이 올 것이다. 난 내륙전술(전술종합) 3년차부터 점차 터득하기 시작했다. 지도와 지형을 일치시키는 감. 지도로 초행길에 길을 잃지 않는 법. 제대로 가고 있나 알아채는 눈썰미. 산세를 읽는 법. 산을 보고 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찍는 법. 지나쳤던 지형을 암기하는 것. 그곳을 다시 지나칠 경우 하지 말라고 해도 암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고참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알아서 체득하는 거다. 지도 한 장 없이 하사 첫 해에 갔던 내륙전술 은거지를 찾아갈 자신이 있다. 내가 다녔던 루트 하나만 걸리면 백퍼 찾는다.


어느 능선으로 넘어가야 저 산을 가장 손쉽게 덜 힘들게 넘을까. 그건 지도에서부터 눈에 보여야 한다. 내륙전술 세 번에 이것저것 다 합하면 순수하게 산에서 있었던 기간은 적어도 6개월이 넘는다. 다니다 보면 산은 다 비슷비슷한데, 그렇다고 거만하게 생각하다가 산에게 당한다. 나에게 산은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로 다가오고 또한 그 생각에 맞게 조신하게 행동한다. 깔보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산이 갈구지는 않는다. 산이 갈구면... 죽을 수 있다. 산은 도심에서 돌아다니다 죽을 확률보다 당연히 높다. 등산로 따라다니는 건 그저 산책로일뿐. 우린 수풀을 헤치며 인적이 드문 수직 수평 사방으로 길을 뚫는다. 산은 모습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거대한 동물 같다. 산이 무얼 죽이려고 마음먹어 죽이는 게 아니라, 죽던 말던 방치하고 인간의 죽음에 감정이 없다. 기본적으로 산은 상당히 위험한 야생이다. 등산로를 벗어나 혼자 가면 드디어 그 위험들이 당신을 주목한다.


아무리 뭐래도 가장 민감한 것은 두 가지. 물을 얻는 것과, 어디로 넘어야 최단거리로 시간을 절약하는가. 수십 개의 유명한 ‘재’를 완전군장 행군으로 넘었다.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경험해봐야 하지. 가을은 풍성하고 안락하다. 오르고 내리기는 봄이 가장 좋고 여름에는 지열로 쪄 죽는다. 마지막 시험대가 겨울산이다. 설산은 다치기 쉽고 먹을 것도 없다. 땅이 꽁꽁 얼어 낙상하거나 슬립 한 번으로 적지 아니 다친다. 게릴라는 죽음의 공포만큼 다치는 게 무섭다. 치료를 못하니까.


지금은 그래도 가을. 그런대로 괜찮다. 여기서 조금 더 계절이 지나면 이 북한의 산은 사람 숨기 힘들어진다. 낙엽이 지고 나무들이 헐벗으면 숨을 곳들이 급격히 줄어든다. 남한의 산도 늦가을이 되면 수목 거품이 꺼지고, 눈 올 때가 되면 산의 머리숱은 1/5 이하로 줄어 난감하게 그대로 드러난다. 가지와 잎사귀가 사라진 나무들은 부피가 아니라 선(line)이다. 빽빽하게 보이는 건 가지와 잡풀, 나무는 적자생존으로 큰 놈 제외하고 죽거나 태양을 받으려 기형이 된다. 나무들 생존을 위한 안전거리가 겨울이 되면 숭숭 비어 아무 것도 못 가린다. 그런 겨울산에 영하로 체감 30도는 각오하고 들어가면 산이 달리 보인다. 덥수룩한 수염에 고드름 씹어 먹는 게 설산의 게릴라다.


눈은 게릴라에게 위험하다. 눈이 내리면 후미경계조는 흔적제거용 싸리 빗자루라도 만들어서 쓸고 다녀야 한다. 늦가을부터 낙엽이 떨어져, 그 낙엽에서 물기가 완전히 말라버리면 바스락 바스락 소리도 많이 나고, 수풀과 낙엽에 발자국 눌린 것이 추적자 눈에 잘 보인다. 여름이면 발에 눌린 수풀이 시간이 지나 자기가 알아서 서려고 노력하거나 다른 풀이 치고 들어와 지워준다. 2주 간격. 여름에는 가지가 잘려 떨어져도 기본적인 습도 때문에 3일이 지나도 그런대로 생생하지만 가을 겨울에는 건조하기에 금방 말라 변색되고 바스락거린다. 화목은 둘째 이야기다. 과연 눈 내릴 때면 아군이 여기 도달 하겠지?! 못 오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겨울까지 닥치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여기 겨울산을 훈련처럼 고로쇠 스키 소풍으로 생각할 수 없다.


서 있는 이하사에게 더 올라가라고 수기한다. 그러자 이하사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뭐니 뭐니 해도 계곡이 'Y'자로 예쁘고 하향이 완만하게 길어야 물이 많다. 산 자체가 품은 물이 많아야 사람 먹을 물도 있다. 산세가 가파르면 비가 와도 물이 빠르게 밑으로 흘러 사라진다. 완전한 삼각형 모양의 단일 산은 물이건 무엇이건 다 없다. 다 빠지고 산만 있다. 산 모양이 울룩불룩하고 계곡들이 굽이치며 길게 늘어져야 게릴라들에게 좋은 여건을 준다. 당연히 물이 안 빠져 여기저기 고이고 맴돈다.


우리가 올라가는 산길에서 물 뜨러 내려가는 곳의 표식은 없지만, 그 그림. 오르내리던 산 각도 나무 등이 내 눈에 딱 맞아야 거기다. 각인된 정물화처럼 바로 감이 온다. 어떨 때는 땅바닥을 보다가 거기 다 왔음을 안다. 특징적인 작은 바위와 가지 모양 하나로도 온다.


2개 팀 연합으로 작전하고 퇴출로 산을 오르다 이틀 정도 쓸 물을 획득하기 위해 셋이 나섰다. 중대장은 그나마 경험이 있는 나에게 물 뜨기 조장을 맡기면서 하사와 중사 하나를 붙였다. 2개 팀 13명이 마시고 취사할 물. 세수는 물 뜨러갈 때 하고, 떠온 물은 먹거나 취사에 쓰고 종종 발만 간단히 닦는다. 뒤를 돌아보니 후배 정중사가 201을 걸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라온다. 빨리 오라고 손짓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난 또 눈을 감고 잠시 소리를 듣는다. 감청을 하자 버릇처럼 손이 총구를 든다. 눈을 감았다 뜨지만 여전히 어둠, 귀 뒤에 손을 편다. 다시 눈을 뜨니 저 동녘에서 동이 트려고 미세한 밝음의 기미가 보인다.


‘동 트면 여러 모로 좆같은데...’


요즘은 작전이 끝나면 곧바로 추격이 붙어 힘에 겹다. 그러나 밤에 추격하는 부대와 낮에 수색하러 올라오는 부대는 다르다. 밤에 추격하던 부대는 산이 깊어진다 생각하면 거기 정지하던가 내려가고, 바로 그 지점부터 아침이 되면 새로운 제대가 도착해 추격을 시작한다. 컴컴한 가운데 우리가 자국을 실수로 남기면 문제가 된다. 그건 야투경을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밤눈 좋은 고참들이 맨눈으로 후미경계에서 확인하며 따라와야 한다. 위험은 산 자체에 있다. 산 별로 다른 점도 있지만, 모양과 곧 예상되는 전형적인 특징들이 전혀 다르지 않다. 어쩌면 똑같다. 그리고 사람이 숨을 곳은 정해져 있다. 놈들 야전경험이 많을수록 우린 더 더 더 위험하다. 하지만 그들도 이러한 전국적인 게릴라전에 경험 있는 부대를 모두 투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병력을 지금 어디서 빼나. 서로가 목숨 걸고 밀고 올라가려고 또한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판에.


만약 똑같은 상황에서 추격대라면 우린 반드시 잡는다. 왜냐? 적어도 3일을 주야로 추격할 자신이 있다. 상대는 수십 명 게릴라 부대이며 흔적을 안 남길 수가 없다. 잠을 못 자면 대체로 실수한다. 완전히 종적을 감추려면 산이 아니라 산‘맥’에 들어가야 한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숨는 거다. 추격해서 잡으려면 주야로 계속 따라가야 한다. 우린 카멜백에 물 이빠이 넣고 전투식량이나 특전식량 다섯 개 정도 넣고 판초 하나면 땡이다. 그 군장 상태로 지속적으로 추격하면 안 잡힐 것이 없다. 평시나 강릉사건처럼 주간수색 야간매복을 한다. 전시 매복은 그곳을 다니는 징후가 확실해야 가능하다. 결론 : 주야로 계속 추격해야 한다. 그런 추격은 뛸 필요가 없다. 징후를 찾으면서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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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태운다 나의 거짓 2 20.12.16 389 16 11쪽
» 태운다 나의 거짓 1 20.12.14 421 13 11쪽
158 게릴라의 길 2 +3 20.12.11 443 19 13쪽
157 게릴라의 길 1 +2 20.12.09 479 17 13쪽
156 남조선 항공륙전 3 +3 20.12.08 474 26 12쪽
155 남조선 항공륙전 2 20.12.07 409 24 11쪽
154 남조선 항공륙전 1 +1 20.12.04 483 26 11쪽
153 격납고 2 20.12.03 418 19 12쪽
152 격납고 1 20.12.02 434 20 11쪽
151 마지막 가을비 5 20.12.01 365 23 10쪽
150 마지막 가을비 4 20.11.30 371 19 14쪽
149 마지막 가을비 3 20.11.27 367 20 16쪽
148 마지막 가을비 2 20.11.26 446 22 11쪽
147 마지막 가을비 1 20.11.25 448 24 11쪽
146 분주한 여명 속으로 2 20.11.24 413 23 15쪽
145 분주한 여명 속으로 1 20.11.23 387 23 15쪽
144 히포크라테스의 백로 2 20.11.21 411 22 11쪽
143 히포크라테스의 백로 1 +1 20.11.20 413 21 11쪽
142 횃불처럼 3 20.11.19 391 23 15쪽
141 횃불처럼 2 20.11.18 403 2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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