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8.12 12:00
연재수 :
379 회
조회수 :
231,909
추천수 :
6,987
글자수 :
2,076,964

작성
20.11.17 11:55
조회
444
추천
22
글자
12쪽

횃불처럼 1

DUMMY

어떤 가방끈 긴 사람이 그랬다. 인생은 비논리와 우연의 연속이라고. 그런 걸 어려운 말로 쓴 책을 사서 구차한 설명까지 읽을 마음 좆도 없지만, 생사가 무수히 반복되는 곳에서는 새롭게 다가온다. 먼저 가는 자와 남은 자의 차이를 모른다. 누가 뛰어나서도 모자라서도 아니었고, 어떤 사람은 무작위를 거부하고 희생을 자처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지만, 산 자는 먹어야 한다.


북한 군모와 더벅머리, 누런 치아와 듬성듬성 난 수염. 씹는다. 배고프다는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본능은 이미 씹고 있다. 치아가 부단히 밥알을 씹으면서도 사방으로 눈이 튄다. '식사'가 아니라 인간의 밭을 도둑질하는 야생 노루 같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게 진짜라고 판단되면 초고속 카메라도 잡기 힘들 정도로 훅 날아올라 튄다. 총알을 5cm 차이라도 벌리는 민첩한 생존본능. 그 본능의 버튼이 울리면 즉각 모든 걸 버리고 튀어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그 사람이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가짜 같다.


셋.

중위, 그리고 중사와 하사.


오랜만에 밥을 했다. 생쌀 안 씹는 게 어디냐. 찌그러진 반합에 수통 물을 붓고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모아 불을 피웠다. 밤에는 절대로 못한다. 담뱃불도 몇 킬로미터를 가는데, 작은 모닥불이라도 얼마나 멀리 갈 것인가. 그러나 한 번은 맘 놓고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산탈출이 일어나기 전에, 지역대장이 몇 명 모인 작은 모닥불가에서 자신의 서러운 마음을 토로했었다.


“아군은 안 올라오고. 우린 산중에 고립되었다. 먹을 걸 찾기 위해 산 내려가는 이 더러운 기분을 그만 하고 싶다. 크게 한탕으로 완전히 승부를 보고 싶어. 이 무슨 창피한 짓이냐. 여기 모인 사람들... 자네들이 전파하면 내 말은 다 전해지겠지? 나중에 말야. 우리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심지어 먹지도 못해서 다 죽어갈 때, 우리가 흩어져 있더라도, 내가 시작하거나 누가 시작하거나 불 한번 존나게 때서 봉화처럼 피우자. 그걸 본 사람도 봉화를 피워. 여기저기 큰불 피운 그 다음날 밤에, 우리 죄다, 누가 살았건, 저 도시로 들어가서 마지막 끝장을 보자. 도시를 불태워버리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우리 치졸하게 살진 말자. 우리가 옛날 무장공비냐? 무장공비는 북으로 도망칠 곳이나 있었지. 우리... 기회 되면 화끈하게 한번 싸지르고 마지막으로 모두 내려가자. 도망치는 것도 지겹다.”


뜸도 잘 들어 반합 수북이 뚜껑을 밀고 올라온 쌀밥. 오랜만에 뜨거운 밥술을 목으로 넘긴다. 여유 있게 수저를 쓴 것이 언제였나 모른다. 뜨끈뜨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잡곡이 많이 섞였지만 그래도 알알이 옹골지게 씹히는 곡식. 반찬은 무 토막과 몇 가지 야채. 산으로 올라올 때 긁어온 것이다.


대원들은 먹을 걸 취득할 때 취사물을 제외하면 소금을 먼저 뒤졌다. 소금 안 먹으면 기력이 빠진다. 소금은 민가나 군부대나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밥과 무와 야채와, 옛날 약방에서 종이로 접는 것처럼 보관하다 풀어헤친 소금. 밥을 입에 넣고 야채를 씹다가 소금을 손가락으로 집어 아가리를 하늘로 들어 털어 넣는다. 된장 고추장이 있으면 좋겠지만, 여긴 그런 거 희귀하다. 된장은 어쩌다 구할 수 있지만, 남한식 고추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금방 지은 밥을 된장에 북북 비벼 먹는다면 이제 그건 특식이다. 소금이 없어도 북한 반찬들이 짜다. 소금 떡이다. 그것마저 못 먹으면, 소금은 비닐에 넣거나 종이로 여러 번 접어 포켓에 넣고 다니다가, 땀 많이 흘리고 물도 많이 마셨다고 생각할 때 입에 넣어 삼킨다. 염분 부족은 서서히 몸에서 반응한다. 그 징후를 모르면 무기력의 시선으로 그 무기력을 좀 이상하다 생각하며 체력이 하강한다. 인간은 체력을 수평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체력이 떨어지면 그 상위를 못 보고 약간 피곤한가? 그 정도로 좋게 생각한다. 잘 먹고 쉬어 그 위로 올라가야 상태가 심각했다는 걸 안다.


길고 긴 야전훈련에서 돌아오면, 강력 세제로 서너 번은 담갔다 빼야 군복에서 불 땐 내가 사라진다. 훈련 끝나고 정비 시간에 그 불 땐내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깨닫는다. 입고 훈련하는 동안은 냄새에 적응되어 몰랐다. 그 땐내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말 독특한 것. 어디 비교할 냄새가 없다. 불가에서 항상 불 쬐고 밥 하고 담배도 피우면서 절고 절은 냄새. 돌아와서 영내에서 좀 있다 보면 그 냄새가 살짝 그리워진다. 아무래도 영내는 체력단련에 주특기에 사격에 측정에 빡빡하나, 야전은 그래도 일종의 낭만이 있다. 훈련은 힘들어도 팀별로 은거하면 의외의 파라다이스. 마른 가지에 불을 싸지르는 그 맛. 지금 이 셋에게 그 냄새는 일상이 되었다. 불을 마음 놓고 피울 수도 없다.


쌀과 물이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다는 것. 적지 않은 호사다. 낮에 불을 피워도 교범에 따라 최대한 연기 안 나게 노력하고, 연기가 많은 젖은 나무는 쓰지 않는다. 한 명이 불살을 정리하고 한 명은 서서 계속 가지와 모자로 연기를 분산시켰다. 측정 훈련에서 자칫 실수하면, 연기를 발견한 통제관이 나타나서 지랄지랄 했을 거다. 통제관들은 ‘전사!’를 입에 달고 산다. 흙으로 화로통 형식을 만들거나 굴뚝 비슷한 것이 교범에는 나와 있지만, 훈련 때 고체연료가 주로 나오니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먹으면서도 삽탄 된 총은 바로 옆에 놓고 자물쇠만 걸어 놨다. 중사와 하사가 취사를 하고, 중위는 총을 들고 주변을 50미터 정도 사방으로 나가 천천히 확인하고 돌아왔다. 멀리서 중사가 수저 뜨는 시늉을 하자 중위도 돌아와 반합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떠 입에 넣고, 연다아 집어넣은 야채가, 소가 여물을 씹는 것처럼 입가에 꿈틀거린다. 야채가 씨바 몸에 좋다며.


반합이 거의 비자, 중사가 하사에게 말한다.

“다 긁어 먹어. 아까우니까.”


중위와 중사는 입을 쩝쩝거리면서 다시 사주경계를 시작한다.


1분이나 지났을까?


수저로 반합 긁는 소리가 끊어졌다.


중사와 중위는 무언가 이상함, 주변 공기가 깨는 걸 감지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일단 생각과 행동을 멈추게 한다.


귀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하사는 한 손에 반합을 한 손에 수저를 들고 퍼질러 앉아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나이에 맞게 보송보송 난 수염에 밥알이 묻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수초 같은 수염과 밥알 사이로 흐른다. 둘은 말하고 싶었으나 사치스런 문학은 더 이상 안 통한다. 정말 할 말만 한다.


중위 인상이 어두워지며 먼 산을 본다. 자신도 좀 대차게 울고 싶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작전 초반에는 죽고 사라진 팀원들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울었다. 메말랐다. 남이 자기를 위해 울어주는 것도 기꺼이 받고 싶지 않다. 중위는 가려운 듯 자기 손바닥을 본다. 자기 손에 죽어간 북한군들은 울어줄 사람이 없는가? 다 똑같다.


중위는 쪼그려앉아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는다. 사관학교 졸업하고 바로 이 부대에 지원하고 당첨되어 자부심을 느꼈고, 밖에 나가 노란색 모표가 반짝이는 베레모를 쓰면 가슴도 펴지고 당당했다. 그러나 그건 평시다, 평시. 군인은 전시에 무엇을 입었건 본질적으로 익명화되고 무감각해지고 더러워지며 순간 자신을 돌아보면 초라하다.

중위가 천천히 손을 뻗어 하사 어깨에 얹고 움켜쥔다.


“그러지 마.”

하사가 중위를 보면서 묻는다.

“먹어야 합니까? 이렇게 쪽팔리게.”

“쪽팔려도 쪽팔린 척 하지 말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럼 죽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까?”

“몰라.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씨발 살자 그냥.”


셋은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고 불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발견되기 쉬운 것이 불자리. 날씨가 안 좋거나 안개 보슬비가 내린 상태라면, 불자리 근처 땅이 좀 마른다. 불씨 하나까지 완전히 죽이고 나서 흙으로 완전히 덮고 그 위에 낙엽과 가지를 놓는다. 불을 완전히 안 끄면 위에 덮은 낙엽이나 가지가 말라 누렇게 변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런 포인트가 발각되면, 무심코 전에 갔던 길을 가다 매복 당한다. 담배꽁초는 피우고 나서 재를 완전히 털고, 담배 겉 종이를 빼내 돌돌 말아 던진다. 남에서 가져온 담배를 피웠을 때는 필터 솜을 8개 이상으로 찢어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 던진다.


처음, 팀에서 전사자가 나왔을 때, 며칠을 먹을 게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전사자는 머리에 총을 맞았는데, 두상 1/4 정도가 날아가, 그게 그 사람인지 땅에 떨어진 수박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이 꽉 찬 인형이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떠난 사람은 점차, 차가운 인형처럼 변했다. 핏기가 사리지고 하얗게 변해 굳었다. '우린 인형이다.'


셋은 어제 저녁 밑으로 내려가 민가를 뒤져 보급투쟁을 해왔다. 애초 목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에 군인이 근처에 없는 곳을 골랐다. 물론 군인이 보였다면 실탄 때문에라도 공격해 보급품을 보강해야 한다. 실탄도 실탄이지만 세 명이 가진 대검 혹은 칼은 합해서 대여섯 개. 상대를 깊게 찔렀을 때 바로 빼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기에, 예비로 죽은 자의 대검도 반드시 가져온다.


총소리는 추적이다. 칼을 빼서 되가져오려면 척추나 골반 같은 굵은 뼈에 박히는 걸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두개골. 안 빠진다. 두개골을 내려치듯이 칼을 갈기는 건, 일부러는 아니나 흥분하면 가끔 나온다. 흥분하면 상대가 사람의 사지가 아니라 그냥 빵 하나로 좁혀 보인다. 한방 줬는데 지랄하면 아무 데나 찌르고 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몸통을 질렀는데 척추에 칼이 박혔으면 빨리 포기하고 가는 게 좋다. 잘 안 빠지고 칼도 빠가가 났을 가능성이 크다. 야전삽이 없어 땅을 팔 일이 생기면 북한군 총검을 쓴다.


셋이 가져온 것은 잡곡 쌀 10kg과 기타 먹거리와 소금. 쌀밥은 몸에 안정을 준다. 어쩌면 심리적이다. 밥 먹는다, 밥 먹는다, 밥은 쌀을 의미하니까. 여기 사람들이 많이 가진 강냉이나 감자 고구마도 반합에 넣고 삶으면 적잖이 힘도 나지만, 그래도 혀와 입은 계속 쌀을 찾는다. 김치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지는 오래 됐다. 고기는 북한군 보급창고나 털어야 통조림으로 얻을 수 있고 산은 황폐화되어 잡아먹을 것이 없다.


"라면 먹고 싶다."


셋은 오늘밤도 일대 정찰에 나선다. 어둠 내리기 전에 은거지로 쓸 장소를 선택하고 사방의 위험을 확인해야 한다. 수풀 사이로 조용히 걸어 다닌다. 숲의 정령귀신처럼 조용히. 낮이라도 수기로 대화하며 진행한다. 하룻밤 쉬는 것은 잠보다 자리를 정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도 모르게 코를 골거나 잠꼬대를 할 수 있다. 자다가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곧바로 손으로 상대 코나 입을 덮으면 안 된다. 그러다 동료에게 칼 맞을 수도 있다. 손가락 검지 끝으로 미간을 아주 가볍게 톡톡 쳐본다. 그러면 상대가 알아듣고 자기가 소리를 경계한다.


북파가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팀의 습관이 되었다. 만약 머리를 칠 수 없을 때는 상대의 (최대한 오른손) 검지 부근을 손으로 살포시 쥔다. 아무리 자고 있어도 적이 손가락을 건드릴 수도 없고, 검지는 방아쇠를 뜻하며, 오른손은 순간 대검을 잡을 손이다. 만약 바로 옆으로 적이 지나가는데 공격하지 말라고 뜻을 전하려면 자고 있는 동료 오른손을 누르거나 덮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함경도의 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0 태운다 나의 거짓 2 20.12.16 389 16 11쪽
159 태운다 나의 거짓 1 20.12.14 420 13 11쪽
158 게릴라의 길 2 +3 20.12.11 443 19 13쪽
157 게릴라의 길 1 +2 20.12.09 479 17 13쪽
156 남조선 항공륙전 3 +3 20.12.08 474 26 12쪽
155 남조선 항공륙전 2 20.12.07 409 24 11쪽
154 남조선 항공륙전 1 +1 20.12.04 483 26 11쪽
153 격납고 2 20.12.03 418 19 12쪽
152 격납고 1 20.12.02 434 20 11쪽
151 마지막 가을비 5 20.12.01 365 23 10쪽
150 마지막 가을비 4 20.11.30 371 19 14쪽
149 마지막 가을비 3 20.11.27 367 20 16쪽
148 마지막 가을비 2 20.11.26 446 22 11쪽
147 마지막 가을비 1 20.11.25 448 24 11쪽
146 분주한 여명 속으로 2 20.11.24 413 23 15쪽
145 분주한 여명 속으로 1 20.11.23 387 23 15쪽
144 히포크라테스의 백로 2 20.11.21 411 22 11쪽
143 히포크라테스의 백로 1 +1 20.11.20 413 21 11쪽
142 횃불처럼 3 20.11.19 391 23 15쪽
141 횃불처럼 2 20.11.18 403 2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