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당신이 잠든 사이에 (7)
“제가 내린 답이 맞습니까?”
몸을 덮쳐오는 동료들에게 짓눌려 김홍준은 한국어로 작게 중얼거렸다.
꼬리아는 병원을 찾았다.
친선경기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접수대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깨끗한 병원 복도를 걷는 내내 꼬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했다.
그건 어제의 경기 결과 때문도 자신의 입지에 대한 걱정 때문도 아니었다.
2주가 흘렀음에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프랑크 코어페슈크 때문이었다.
꼬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코어페슈크가 입원한 병실 바로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 꼬리아는 힘들게 손을 움직였다.
문손잡이를 잡고 열려는 순간, 병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된 겁니까?”
열리다만 문을 붙잡고 선 꼬리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아무것도 얻은게 없다면 이 일을 그만둬야지.”
감독의 목소리였다.
대화 상대는 누구일까?
꼬리아는 마음속에서 스물 스물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밀어내며 문틈으로 눈을 갖다 댔다.
침대 맞은편에 감독이 앉아 있었다.
“경기 결과야 뭐. 엉망이었지만 말이야.”
“홈에서 5:1이라니.. 지난 경기는 7:0 아니었습니까? 운영진에서는 아무 말 없는 겁니까?”
“계약하기 전에 이미 언질을 해뒀으니. 프리 시즌 경기 결과로 잘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서포터 측의 생각은 다를 텐데요?”
활발하게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꼬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치켜 올라 간 눈이 의심으로 번뜩였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점수보다 더 중요한게 있으니 감수 하는 거지.”
“안소니는 어땠습니까?”
“꼬리아 말인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여주더군. 그 정도로 불만이 쌓인 줄은 몰랐어. 본래 내가 세운 계획은 자네를 대신 하는 제2의 리더를 만드는 거 였는데... 그 녀석이 뻘짓은 하는 덕택에 완전히 엎어졌지.”
“코어페슈크니크에 병이라.. 걸작이네요.”
병실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꼬리아는 하늘로 치솟은 눈꼬리로 불타는 눈빛을 줄기줄기 흘려보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은 이제 진원지가 되어 문을 흔들고 있었다.
“저 문 원래 저러나? 왜 저리 흔들려?”
“글쎄요. 평소에는 저렇지 않은데?”
“으아아아아아악!”
벌컥 문이 열리고 꼬리아는 병실 안으로 뛰어 들었다. 기습적인 괴성에 병실 안에 있던 두 사람이 토끼눈이 되어 꼬리아를 쳐다봤다.
꼬리아는 그런 둘을 쓸어 본 후 손에 들린 꽃다발을 침상을 향해 집어 던졌다.
무슨 암기처럼 날아오는 꽃송이에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가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그 환자답지 않은 날렵한 몸동작이 꼬리아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런! 개X끼야! 으아아악!”
김홍준은 훈련장에 서서 정면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어색한 표정의 감독과 건장한 체구의 미남 한 명이 들어왔다.
둘은 묘하게 긴장된 표정으로 팀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2주만에 팀원 전원이 다 모이는군.”
알빈이 말했다.
꼬리아가 알빈을 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2주간 있었던 일은 감독을 통해 전해 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모두 다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우우우우~!-
사내다움이 물씬 묻어나는 야유가 흘러나왔다.
감독 옆에 서있던 미남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팀원들을 쓸어봤다.
“프랑크를 죽여라! 프랑크를 죽여라!”
단두대 둘러싼 시민들 같은 팀원들의 외침을 들으며 스톰포겔스 텔스타의 주장이자 주전 미드필더인 프랑크 코어페슈크는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봐! 이건 다 생각이 있었던 일이야! 나라고 너희들을 속이고 싶었겠어!? 난 그냥 감독이 시키는대로 연기를 했을 뿐이야!”
변절자를 보듯 하던 시선이 알빈에게로 향했다. 서늘한 시선을 받자 알빈은 근엄하게 그 시선들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프랑크의 협조는 자발적인 것이었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프랑크에게로 옮겨졌다.
자고로 악독한 독재자보다 변절자가 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마련이다.
모든 선수들이 프랑크에게로 달려들었다.
“으악! 그만해! 오늘 훈련 끝나면 쏠게! 쏜다고! 먹고 싶은 거 말해!”
선수들에게 감싸여 프랑크는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을 향해 선수들이 말했다.
“난 바비큐!”
“난 하링(청어 절임) 통조림 열 상자!”
“난 비터발른 스무 상자!”
선수들의 요구가 하나 둘 쌓여가자 프랑크는 다른 의미의 비명을 질러댔다.
김홍준은 멀찍이서 그 비참한 풍경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김!”
알빈이었다.
김홍준은 소란의 옆에 서있던 알빈을 바라 봤다.
그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이고 있었다.
소란을 뒤로 하고 감독의 개인 사무실 소파에 앉은 김홍준은 책상 쪽을 쳐다봤다.
“텔스타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좋습니다.”
“고향이 그립지는 않고?”
“오히려 떠날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알빈은 김홍준을 쳐다봤다.
찰나 간의 고요가 사무실에 내려앉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김홍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를 왜 부르신 겁니까?”
김홍준의 질문에 알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알빈은 조용히 김홍준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버거워질 즈음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꼬리아에게 다 들었네.”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김홍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전직 경찰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알빈과 조우하고 처음으로 김홍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알빈의 시선에서 흥미라는 것을 느꼈다.
시드 마스렉이나 요한 루이스, 미하일 로쉐어블을 볼 때, 그는 항상 그런 눈빛이었다.
김홍준은 그것을 좋은 신호라고 받아 들였다.
“그런 식으로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네.”
“감독님은 어떠십니까?”
“자네, 내 별명을 아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고 김홍준은 대답했다.
“우두머리 늑대 말입니까?”
“고고한 늑대 라는게 듣기는 좋아도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 무리를 이끌려면 항상 눈치를 봐야 하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혹시 내 자리를 넘보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 말이야.”
김홍준은 말없이 알빈의 말을 들었다.
“선수 시절에는 그게 어렵지 않았네. 동료들은 먼저 나에게 다가와 고민을 털어 놓았고 감독들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내가 감독이 되고 나서는 달랐어. 그 이유를 알겠나?”
군복무를 한 김홍준이었다.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김홍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리를 이끄는데 실패한 늑대의 결말이 이전에 내가 맡았던 팀이네. 감독은 선수들의 동료가 아니네. 어떨 때는 적이 되기도 하지. 시즌 내내 나는 파벌의 반대 쪽에 서있는 선수와 힘겨루기를 해야 했네. 그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
김홍준은 일전에 봤던 기사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삼류 가십지에 실린 기사로 팀에서 불화를 자초한 한 선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선수는 현재 에레디비지에의 다른 클럽으로 이적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자네는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네. 내 계획은 프랑크와 함께 일을 꾸미며 그가 나를 동료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였고 두 번째는 그런 그와 나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른 팀원들까지 나를 그들 무리의 한 축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었네.”
요컨대 이런 이야기였다.
그는 이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스스로 지주가 되기보다 마름이 되어 소작농들을 조종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선수 시절의 그를 동경했던 팬들이라면 실망하고도 남을 발상이었다.
김홍준은 알빈을 바라봤다.
선수 시절 날카로웠던 눈매나 턱선은 선수시절 보다 무뎌져 있었다.
그는 빛을 잃었다.
선수 시절의 빛은 잃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늑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 무리의 전면에서 기세등등하게 울 수는 없어도 그는 여전히 늑대다.
노회한 늑대로서 자신에게 걸 맞는 위치를 찾고 거기에 적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김홍준은 그 모습에 박수를 칠 지언정 비웃음을 흘릴 생각은 없었다.
“내가 자네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했을 거라 생각하나?”
“심복이라도 되라는 말인가요?”
알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관리자네. 내 역할을 자네에게 맡길 수는 없지. 그 세 망나니와 고참들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어주게. 그거면 족해.”
“그거 꽤나 어려운 일인데요?”
김홍준의 대답에 알빈은 서랍에서 서류 다발을 꺼내 내밀었다.
“어려운 일에는 그만한 보답이 따라야지. 이리오게.”
알빈의 손짓에 김홍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서류 다발이 놓여 있었다.
“일단 아마추어 계약으로 시작하지.”
“계약...입니까?”
김홍준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3개월의 절반을 넘어가는 시점.
아마추어 계약 일 뿐일지라도 김홍준으로서는 처음 맺는 선수 계약이었다.
김홍준은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며 사인을 해나갔다.
조항은 모두 확인했고 하자는 없어 보였다.
사인이 모두 끝나고 김홍준이 몸을 일으켰을 때, 알빈이 말했다.
“더 할 말은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홍준은 몸을 돌렸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알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경기에서 자네가 보여준 답. 마음에 들었네. 또 기대하지."
그 말에 김홍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문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 작가의말
오류 및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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