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집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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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laa
그림/삽화
리건
작품등록일 :
2020.11.17 09:21
최근연재일 :
2021.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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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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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비장군 사당 (하)

판타지 소설로 송나라 역사를 배우다!




DUMMY

북쪽에서 몹시 찬 바람이 불어와 한바탕 휩쓸어버린 것처럼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동작이 얼어붙었다.


‘뭐라고? ······.아전?’


아전은 관아에서 일하는 모든 하급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장명아전(長名衙前)이었고 또 하나는 아전차역(衙前差役)이었다. 장명아전은 장기적이고 직업적으로 관의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자리여서 경쟁이 치열했다.


그와 달리 아전차역은 백성 중 형편이 1등호인 사람에게 부역을 주는 것인데 돈 많은 집의 돈을 뜯어내겠다는 게 주목적 같았다. 이름만 그럴듯하게 아전차역이었지, 그 부역 때문에 돈도 날리고 목숨도 잃는 일이 많았다. 아전차역으로 재산은 반 만 날리고 목숨은 부지해 집으로 돌아갔다면 운이 좋다고들 했다.


관아의 일은 서무가 번잡하고 재물이 오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재물의 손실이 생기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관리는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 책임을 아전차역에게 떠넘기곤 했다.


아전차역에게 물자의 운송 책임을 맡기거나 창고를 지키게 하는 등의 업무를 주고 손실이 발생하면 손실액 모두를 담당 아전이 지도록 했다. 아전차역일만 제대로 하면 될 것 같지만 그 전에 탐관에게 직접 착취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


미리 알아서 뇌물을 바치면 비교적 위험이 적은 곳으로 배치해 주었고 생각만큼 돈을 바치지 않았다 싶으면 두고두고 괴롭혔다. 어떤 이는 손실액 배상을 위해 천 리 떨어진 동경성까지 가야 했는데, 동경성에 가서도 3년을 머물며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손실액 내역을 받아보니 배상액수가 한 냥이 채 못 되더란 얘기는 전설적이었다.


아전차역의 기간은 일 년이었고, 모두 장정(병역 의무 나이로 20세부터 60세 사이) 초년 대 나이나 장정 말년 나이에 부과되었다. 관아에 특별히 일이 많아지면 수시로 공문을 발송해 부역을 충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무슨 큰일이 있다는 소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매년 하던 대로 서하 역도들이 가을걷이 한다고 내려왔다 가는 것 정도일 터인데 뜬금없이 한 씨네처럼 완전히 망해버린 집으로 어떻게 그런 차역이 나왔단 말인가?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나자가 앙심을 품고 손을 썼으리란 짐작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천육은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노기충천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나자! 자네 우리 집을 완전히 망하게 하고 말겠다는 건가? 그런 악랄한 방법을 쓰다니, 밭을 차지하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군! 우리 밭을 가지면 자네 밭하고 붙여서 하나가 될 테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 심보 아니야!”


“한천육, 사람 억울하게 왜 그래요!”


이나자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온갖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는 정말 억울한 사람 같았다.


“요 몇 년간 형님네에게 아전차역이 안 나왔잖아요. 그러다 이제 때가 돼서 나온 거 아니겠어요. 원래는 두 달 전에 관아에서 사람이 나와서 부역을 보내라고 하잖아요. 아, 그때는 형님네 작은 아들이 병이 나서 도저히 안 될 때잖아요. 그래서 관아 반두로 있는 사돈댁에 가서 사정을 얘기했단 말입니다. 두어 달만이라도 미뤄줄 수 없겠냐고요. 제가 아주 사정사정했어요.”


“속에 없는 말은 그만하게!”


한천육이 비웃었다.


“아전 부역은 본래 1등호로 충당하게 돼 있지. 우리는 셋째의 병 치료하느라 재산이 거의 다 없어졌어. 겨우 한 묘 반 남은 게 전부라 4등호도 겨우 될까 말까 한 처지인 거 자네도 알 텐데. 게다가 셋째는 이제 겨우 열여덟이라 장정이 되려면 2년이나 남지 않았나. 지금 우리 집에 장정이라곤 나 하나라 누가 봐도 명백하게 단정호(單訂戶:장정이 한 사람만 있는 집. 북송의 군역법에 따르면 단정호, 무정호, 여호 등은 부역할 필요가 없는 집이었다.) 아닌가. 아전도 부역도 우리 집에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형님도 알면서 그래요. 4년마다 장정부를 새로 만드는 거 말이오. 새로 장정부를 만들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고요. 현에서는 형님네가 장정이 둘이 있는 1등호로 돼 있다고요.”


한천육은 흥, 하고 냉소했다.


“내가 관아에 가서 사실대로 말하지. 나 같은 단정호를 억지로 끌고 가서 아전을 충당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세.”


이나자는 한천육이 어떻게 저렇게 답답한 소리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건 이 이정이 나서서 보증을 해줘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자네······. 너······.”


한천육은 이나자가 이렇게까지 파렴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분통이 치밀어 올라 이나자를 가리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호인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살 만큼 남들과 얼굴을 붉히며 싸워본 적이 없었다. 화가 솟구쳐오르니 뇌혈관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이나자! 모든 같은 고향 사람들 아닌가? 어째서 사람을 그렇게 갈 데 없이 몰아붙이나?”


한천육의 술친구 류구(劉久)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의 집 마당에 아주 오래된 홰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류괴수(劉槐樹)라고 불렀다. 류괴수는 한천육과 수십 년 지기 친구였다.


“여, 류괴수! 한채원네를 대신해서 말을 해 보겠다는 건가요?”


이나자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채원네를 대신하겠다. 좋아요. 그럼 누가 가게 될지 볼까요? 현에서는 사람이 필요하다고만 했지 누구를 꼭 집어 말하지는 않았단 말요. 이번 아전차역은 그럼 류괴수 집에서 하면 좋겠네?”


류구는 그 소리에 그만 기가 질렸다. 아전차역 일 년이면 가산도 날리고 사람도 죽어 나갈 건 뻔한 일이라 자기네 집에서 사람을 보내겠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큰 한숨을 내 쉬고 한천육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형님, 미안하게 됐소.”


그렇게 말하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자리에 앉았다.


“또 누구 없어? 한 씨네 대신해서 아전차역 가고 싶은 사람?”


이나자는 의기양양하게 좌중을 둘러 보았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이나자는 사람들을 완전히 굴복시켰다고 생각한 듯 한천육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형님, 뭐 마지막 권고라고 생각하시고 들으쇼.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그 채소밭을 완전히 넘겨주고 또 댁의 양낭도 파시오. 양낭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잖아요. 그래서 그 돈으로 현에 가서 여기저기 돈을 좀 쓰며 한두 달 애쓰다 보면 아전차역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을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강의 냉랭한 눈빛과 마주쳤다. 얼음 칼끝 같은 차가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자 이나자는 온몸의 털이란 털이 다 곤두서는 듯했다.


한강의 두 눈썹은 짙고 촘촘했다. 너무 두껍지도 와잠처럼 구불거리지도 그렇다고 일직선으로 날카롭게 뻗지도 않았다. 붓에 새까만 먹을 찍어 일정한 힘으로 길게 긋다가 살짝 들어 올린 듯해서 모양이 잘 단조된 예리한 검을 연상시켰다. 눈썹이 그렇게 생겼으니 본래도 단순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얼굴에 풍부한 표정을 부여했다. 이나자를 향한 두 눈이 번쩍 빛나며 눈썹을 치켜올리자 예리한 두 자루의 칼이 한꺼번에 찔러오는 것 같았다.


이나자는 소년 시절 산에 갔다가 호랑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아 생명은 건졌는데 지금 한강의 눈빛을 받으니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자 이나자는 주춤 물러났다.


그때 부엌에서 한아리와 한운낭이 이나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이나자, 네 놈이 간이 부었구나!”


사십 대 여자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소리가 울리면서 천장 위를 가렸던 장막이 들썩했다. 그러자 그 위에 쌓였던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한아리가 고함을 지르면서 손에 무언가를 들고 휘잉, 소리가 나게 휘두르며 나타났다. 그러더니 하늘을 찌를 듯한 살의를 내뿜으며 이나자에게 달려들었다.


한강의 외조부는 당항족과의 전투에서 세 자루의 창으로 7명의 몸을 꿰뚫었다고 했다. 그 공으로 도두의 자리에 올랐으며 경원로 군대에서는 꽤 유명했다.


한아리는 들고 온 물건을 투창처럼 던졌다. 그게 유성이 지나가는 것처럼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아주 간발의 차이로 이나자의 귓가를 스치고 반대편 문에 가서 쾅, 하고 부딪쳤다. 부딪친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귀가 먹먹했다. 바닥에 쿵 떨어진 물건은 한아리가 집에서부터 가지고 온 밀방망이였다.


한아리가 밀방망이를 던지며 무서운 기세로 죽일 듯 달려들자, 이나자는 너무 놀라서 그나마 남은 전의마저 완전히 상실해 연신 마른기침을 해댔다.


“한 채원, 아리 형수, 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말아요. 이틀 후에 고분고분 성안으로 들어가 아전차역을 하지 않으면 형님이 곤장 맞는 건 물론이고 셋째 아들 앞길마저 완전히 막힐 거요.”


이나자는 얼른 그 말을 하고 몸을 돌리더니 뛰듯이 도망갔다. 한아리는 사당 대문 밖까지 쫓아가며 이나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욕을 퍼붓다가 씩씩대며 돌아왔다.


곁채엔 적막만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천육은 머리를 숙인 채 한숨을 쉬고 있었고 한아리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밀방망이를 집어 올려 손에 꽉 쥐었다. 한운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이나자가 한 씨에게 자기를 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기도 모르게 한강의 옆에 가서 몸이 닿을 듯 붙어섰다.


한 씨네 식구 네 명 중, 한 명은 괴로워하고 한 명은 화를 내고 한 명은 울고 있었는데 오직 한강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얼음장같이 변한 운낭의 손을 꼭 잡고 부드러운 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큰일 난 거 아니야. 이 오라버니가 다 해결할게!.”


어린 운낭을 위로하고 난 후 한강은 술잔을 들고 일어서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소리로 말했다.


“왜들 그러세요? 잔치가 막 시작됐잖아요. 이나자 같은 인간이 우리의 기분을 망치게 둘 수는 없잖습니까.”


“셋째야······.”


류괴수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한강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한강네를 도와주지 못해 몹시 부끄러웠다.


“이나자 그 사람 사돈이······.”


“황대류가 뭘 그리 대단하다고요!”


한강은 하하,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 속에 살의가 있었다.


“이나자가 권세만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며 재산을 빼앗았으니 국법을 우습게 알고 있다는 건데요. 나중에 왕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받을 날이 올 거예요. 그때 여기 계신 숙부님들은 증언만 해 주시면 됩니다.”


한강이 아무런 근거 없이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호방하고 원대한 기백을 느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한강을 처음 보는 것처럼 우러러보았다. 맞아, 그는 수재잖아! 현에 들어가면 현윤(县尹:지현을 가리킴)도 그를 보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말을 걸 정도잖아. 황대류가 진거의 수하라고는 하지만 글 읽는 선비와 비교할 바가 아니지!


한강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시원시원한 태도로 말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한강을 따라 술잔을 들었다. 처음처럼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장군 신께 감사를 올리고 소원을 빌려고 마련한 자리이니만큼 나머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아리와 운낭은 부엌으로 돌아가 새로 데운 음식들을 들고 왔고, 한천육은 손님들에게 술을 권했다. 표면상으로는 한 씨네가 큰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강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맑게 거른 투명한 술이 잔에서 일렁였다. 차가운 눈동자가 움직이는 물결 따라 일그러지고 음흉하게 변했다. 한강의 마음을 그대로 비춰준 듯했다.


“하늘이 만든 재난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난은 빠져나가기 어렵지.”


한강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의 얼굴에는 험악한 살의는 사라지고 봄바람이 부는 듯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하늘이 만든 재난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난은 빠져나가기 어렵고말고!’



저자 주석: 송 신종과 왕안석은 차역이 너무 가혹해서 나중에 군역법을 개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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