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집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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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laa
그림/삽화
리건
작품등록일 :
2020.11.17 09:21
최근연재일 :
2021.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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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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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결사의 각오 (하)

판타지 소설로 송나라 역사를 배우다!




DUMMY

“아버지, 어머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가 가셔서 하실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는 사람 중에 관리가 있어요? 아는 이들이라야 모두 야채 파는 사람들일 텐데 진거와 황대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대로 있다가는 그 채소밭이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셋째 네가 가면 가능하겠냐?”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2년 전 유학을 놀이 삼아 나갔다 온 게 아닙니다.”


한강은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아들은 횡거 스승께 배웠고 동창생들 거반은 벼슬하는 집안 자제들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관직도 버리고 스승님께 와서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어요. 이나자가 그래 봤자 황대류과 사돈지간일 뿐이고 두 사람은 진 압사에게 부탁했을 텐데, 진거도 아전에 지나지 않잖아요. 황가, 진가는 관원도 아닌데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현에서 진 압사보다 권세가 많은 사람은 없어. 지현조차도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군다고 하지 않던.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진주에서는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걱정으로 잔뜩 찌푸린 한천육의 눈매가 펴지지 않았다. 진거는 대단한 실세를 가졌다. 현윤도 감히 그에게 밉보일까 두려워하는 판이었다. 그가 보기에 아들은 범 앞에 하룻강아지라,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만 믿고 진거에게 대들었다가 피를 보는 건 역시 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또 어때서요? 진거는 성기현 관아에서 20여 년을 있었어요. 그들 조부 때부터 합치면 근 백 년은 되겠죠. 현 관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하고 군대도 그자의 편을 들어 주었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도 나왔겠죠.”


“하지만 성기현 관아를 벗어나면 주 관아예요. 압사는 고사하고 성기현의 지현도 진주성 전체에서는 한참 뒷자리일 뿐이에요. 정말 집이 다 망했다 쳐요. 제가 유생의 신분으로 주 관아에 가서 북을 두드리면 경략 상공이라 해도 저에게 곤장을 칠 수는 없다고요.”


한강은 이미 결심이 섰다.


“이나자가 먼저 시작했어요. 이제 제가 열 배로 되갚는다고 누가 라고 하겠어요? 큰 형과 둘째 형도 전사했고, 저도 병을 앓다가 겨우 일어났어요. 이제 이나자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으니 나가서 억울하다고 외쳐도 돼요. 이나자는 우리가 패가망신하기를 바라니까, 자업자득하게 만들어야죠.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한천육과 한아리는 고개를 숙이고 한강의 말을 곱씹었다.


한강은 누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한운낭이 파 뿌리처럼 하얀 손으로 자기 옷 한 자락을 꼭 쥐고 있었던 바람에 한강이 움직이자 살짝 당겨진 것이다. 갸름한 얼굴에 보석같이 박힌 까만 눈동자가 깜빡깜빡하며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강아지처럼 잔뜩 겁먹고 있는 표정을 보자 한강은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부탁드릴 게 있어요!”


한 씨 부부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한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운낭은 그동안 저를 돌보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어요. 어린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궂은일 힘든 일 가리지 않았잖아요?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도리지 않습니까? 저는 운낭의 노고를 저버릴 수 없어요.”


한운낭은 나이가 어려서 머리를 올리려면 2~3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한강이 진주성으로 가고 난 후 의외의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부부가 되지 않은 이상 하녀를 값나가는 물건 취급을 하는 게 보통이라 팔고 싶으면 그냥 팔았다. 자신이 성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밭을 남기려고 운낭을 어디로 팔아버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야, 나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


한아리는 한강과 한운낭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금방 알았다. 그녀는 시골의 아낙네 같지 않게 영민했다.


“운낭이 우리집에 온 지 4~5년이나 되었지. 애가 부지런하고 조신해서 나는 벌써부터 내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식을 파는 건 축생도 안 하는 짓이야. 너는 걱정할 것 없다. 운낭은 내가 잘 데리고 있다가 네게 줄 거다.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한 씨네는 땅도 집도 팔 수 있지만 딸은 절대로 안 팔고말고!”


한아리의 말을 듣고 한강은 몹시 기뻤다. 한아리가 그렇게 하겠다면 반드시 지킬 것이다. 한운낭은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울었다.


“어머니······.”


한아리는 한운낭을 가슴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 같으니, 왜 울어! 이 어미 마음을 몰랐단 말이야?”


* * *


다음 날.


한강은 수려한 두 눈썹을 곧게 펴고 의연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청색 도포를 입고 책이 가득 든 궤를 멘 채 서운해 어쩔 줄 모르는 부모와 운낭을 두고 나룻배에 올랐다. 한천육은 한강을 성안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으나 한강이 한사코 거절했다.


한편 이나자는 한천육에게 관아의 공문도 보냈겠다, 이를 쑤시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찌감치 서서 한 씨네가 나룻가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배 위에 오른 사람은 한천육이 아니라 한강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루터 부근에서 한강을 본 마을 사람 중에 장군 묘에 안 갔던 사람들은 뭔 일인가 하고 의아해했고 장군 묘에 갔던 사람들은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 씨네 셋째 수재가 왜 성안에 가나? 설마 아전차역하러 가는 건가?”


“그럴 리가. 글 읽은 선비인데?”


“고소하러 가나? 그래 봐야 황대류 손에 들어가게 될 텐데?”


“성기현 관아가 진주성에서 몇 번째로 알아줄 것 같은가? 한 씨네 수재가 얼마나 똑똑한데! 주(州) 관아도 거리낌 없이 갈걸. 아무리 황대류라해도 주 관아 문을 막아설 수는 없을 걸세.”


“한 씨네 셋째가 보통이 아니라고. 외지에 나가 유학하고 돌아오더니 사람이 아주 달라졌더라고. 이나자가 이번에 너무 심했어. 뜨거운 맛을 보고야 말걸.”


“뜨거운 맛뿐일까······.”


한강은 뱃전에 앉아 출렁이는 물이 배에 부딪히며 철썩,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바람은 스산하고 역수의 물은 차가운데’하는 구절이 생각나며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생각하니 집에서 겨우 4리 남짓 떨어진 진주성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어떻게 감히 진시황제를 암살하러 떠나는 형가의 비장함에 빗댈 수 있겠나 싶었다. 어쩌면 조금 전 이별할 때,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은 운낭의 눈을 보니 몹시 심란한 때문이기도 했고, 근심 걱정이 가득한 부모님의 당부가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강은 자신이 있다고 했지만 진거나 황대류는 사실 무서운 세력이었다. 가족들이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오장육부에 사무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강은 뱃전에 앉아 눈을 감고 강물에 손을 담갔다. 초겨울의 차가운 물이 뼛속까지 시려 왔다. 한강은 황대류나 이나자쯤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대적하기 힘든 사람은 황대류 뒤에 있는 진거였다.


황하 지류 중의 지류인 적수는 폭도 그리 넓지 않았고 가을비가 온 뒤의 강물은 잔잔했다. 뱃전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여정이 벌써 끝났다. 배에서 내린 후 뒤를 돌아다 보니 맞은편 강기슭에 가족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강은 오른손을 들어 힘껏 휘젓고 몸을 돌린 후에 5리 밖에 있는 진주성을 향해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진주성은 송나라 서북 변경 지역의 전략 요충지이자 일 로(一路)의 중심지였다. 지리적으로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하천과 골짜기가 만나는 곳이라 남북으로 왕래하며 장사하는 다양한 부족의 상인들도 많았다. 이 장군 사당과 마찬가지로 진주성은 이십여 년 전 한 상공(한기)이 진주 지주였을 때 크게 증축 확장했다.


그 당시 동쪽과 서쪽 성 밖에는 시장이 번성했고 성벽에 의지해 사는 민가가 만 호를 넘어섰다. 진주가 부유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서하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성 밖에 사는 민가를 매번 공격했다.


한 상공은 부역을 동원해 수개월에 걸쳐 성벽을 증축했다. 그러면서 동, 서쪽 성 밖에 있던 민가와 상점들을 모두 에워싸면서 확장했다. 그 덕분에 백성들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준 한기를 기려 사람들은 진주성을 ‘한공성(韓公城)’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연유 덕분에 진주성은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남북 양쪽에서 보면 새 성벽 안에 구 성벽이 끼워진 형상이었다. 반은 새것이고 반은 오래된 성벽은 높이가 삼 장 반이나 되었는데 성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뚝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한강이 걷고 있는 관도(官道) 양옆으로 상인들의 난장이 늘어서 있었고 성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떠들썩해졌다. 난장은 관도 주변을 빼곡하게 메우는 것도 모자라 넉 장 넓이의 관도를 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행상들은 등짐을 지고 오거나, 광주리를 메고 오거나, 혹은 낙타에 짐을 싣고 와서 도로 양쪽에 펼쳐놓았다. 양 떼를 직접 몰고 와서 그 자리에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안에 들어가서 장사를 하려면 성 통행료로 세금 2리를 내야 했고 성내 시장에서는 3리의 자릿세를 내야 했다. 돈을 버는 일은 쉽지 않았으므로 상인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생각에 대부분 성 밖에서 자리를 폈고, 그러다 보니 성 밖에도 커다란 초시(草市)가 형성되었다.


한강이 걸어가는 내내 물건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도로 양옆으로는 찻집과 주점이 즐비했다. 장사하는 상인들은 한족뿐만이 아니고 번족(蕃族) 상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 통과 신분증을 얻기 어려워 성 밖에 자리를 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초시를 천천히 둘러보면 흥미로운 물건이 꽤 많을 듯했다. 그러나 지금 한강은 한가롭게 시장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주 남문에 도착하니 임무에 충실한 성문 수병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하나하나를 검사하고 있었다. 검사받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몸을 탁탁 치며 몸에 물건을 지니지 않았다는 표시를 하기도 했다. 검사를 받느라 사람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천천히 움직였고 드디어 한강의 차례가 되었다. 문 통로에 지켜서 있던 수병(守兵)은 한강을 흘긋 보고는 보따리를 풀라 말라 하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왜 저 사람은 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 들여보내는 겁니까?”


열 몇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수병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글 읽는 선비잖아! 몸 검사를 하는 건 문(文)을 욕되게 하는 거야!”


성문 수병이 대답했다.


한강이 신분을 밝히기 전에, 수병은 한강이 문인이란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살포시 날렸다. 그러자 영락없이 글 읽는 선비의 풍모가 느껴졌다. 서쪽 변경에서 넘어온 간첩은 절대 가질 수 없는 품격이 있었다.


한강은 성문의 어두침침한 통로를 통과하자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크고 작은 길이 종횡으로 뻗었고 점포와 저택들이 수천 채가 있었으며 행인들이 끊이지 않고 지나갔다. 후세의 도시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한강의 기억에 있는 경조부와 비교해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골목마다 말 탄 기병들이 순찰하고 있었고 성벽 위에는 궁수들이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진주는 방비가 삼엄한 요새였다! 상업 활동이 아무리 활발하다 해도 성안에 함축되어 있는 숙살지기(肅殺之氣)는 지울 수 없었다.


상업이 발달하고 군대의 위세가 엄중한 곳, 그곳이 서북 변경 지역의 웅장한 성, 진주였다!




저자 주석: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을 초시라고 불렀답니다. 북송은 상업이 발달했고 각지에 초시나 시골 장터가 아주 많았습니다. 초시들은 나중에 대부분 진으로 승격했지요. 그 진에서 현지 관아가 거둬들인 세금이 성 전체에서 거둬들인 것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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