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과, 날카롭게 부딪치는 무기와 갑옷의 금속음, 그리고 무장으로 육중해진 몸이 지면을 울리는 진동까지.
이 모든 전장의 합주곡에 로빈은 곧바로 눈을 떠야 했다.
여전히 몸은 누가 올라탄 것 마냥 무거웠지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홉 병사들의 눈동자가 충분한 충격요법이 되었는지 그의 정신은 선잠에 빠졌다가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뚜렷했다.
“상황대기 떨어졌습니다, 분대장님.”
로빈은 당혹스러워하는 타헌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는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의 얼굴에도 이미 짙은 그늘이 드리워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결코 지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렌턴 앞에선 패기 있게 장담했지만, 오히려 악마 같은 교관보다 이 병사들의 앞에서 자꾸 고개가 숙여지고 만다.
“그래. 마지막으로 군장 확인들 해보고. 다 된 사람들은 먼저 나가 있자.”
“알겠습니다.”
로빈이 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곤 이마부터 천천히 피곤을 쓸어내렸다.
대담한 기세를 유지하려 했지만, 사실 이 막사 안에서 그 누구보다 크게 긴장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손의 떨림은 멈췄어도 가슴의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비어있는 막사를 눈에 담아두기 위해 천천히 둘러보다가, 막 나가던 참이었던 타헌을 불러 세운다.
“타헌, 잠깐만.”
“예, 분대장님.”
“다들 군장 제대로 챙긴 거 맞아? 물건이 많이 남는데.”
로빈과 타헌의 시선이 분대원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나뒹구는 반합과 종이더미들을 훑는다.
로빈이 의문을 가진 이유는 이 물건들이 쓰레기를 흘린 것이라 하기엔 묘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던 탓이었다. 타헌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병사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건, 그러니까 일종의 미신인데,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나가면 뭔가 죽으러 가는 기분이잖습니까? 그래서 다들 개인용품을 몇 개 남겨두고 나가는 겁니다.”
“아······.”
이제 방금 부임한 초임 기사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로빈은 쑥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군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럼 되도록 좋은 물건이 좋겠지? 이 정도면 되려나?”
그가 꺼내든 것은 변색된 가죽 수통. ‘좋은 물건’의 정의에 대해 의아해하는 타헌에게, 로빈은 씨익 웃더니 수통의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이건 와인이잖습니까!”
빽 소리를 지르는 타헌에게 로빈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그의 목소리를 다그친다.
“ ‘은벽의 낭만’이라는 여관의 장미와인인데, 이게 꽤 괜찮거든. 원래 훈련소에서 몰래 마시려고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돌아오면 다 같이 한잔하자.”
“저야 좋습니다! 술을 입에 못 댄지 넉 달은 된 것 같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웃는 그들의 위로 낮은 나팔소리가 스쳐지나간다. 그것을 신호로, 로빈과 타헌은 웃음을 지운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자, 나가자.”
“예.”
천막을 나서는 로빈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바싹 말라가던 입술도 어느새 윤기를 되찾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순간, 흥분돼서 잠을 못 이루었다는 지나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자신은 어떤 형태로든 앞서야만 하는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로빈이 ‘기사’라는 ‘검’으로서만 전장을 상상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분대장이라는 이름은 표면적으론 말단 직책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지휘권’을 가진 시작점이기도 하다. 고명한 장군들도 이런 말단 직책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자신들이 가진 기사로서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왔기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완벽한 검은 완벽한 기사를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완벽한 기사는 신뢰받는 지휘관을 위한 작은 조건일 뿐이다.’라는 훈련소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로빈은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어느새 거뭇한 안개가 하늘을 삼키기 시작했고, 간신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태양은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초전이 야전(夜戰)이라는 사실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로빈의 머릿속은 다른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1소대! 1소대 집합! 빨리빨리 안 올래!?”
카랑카랑 익숙한 그 목소리에 로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만다. 덕분에 앞서가던 분대원들이 마치 미친놈 보듯이 힐끗 뒤돌아봤지만, 재빠르게 돌변시킨 근엄한 목소리로 무마할 수 있었다.
“빨리 가자.”
로빈은 분대원들을 재촉해 목소리를 찾아간다. 어수선하던 주변은 어느새 정리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부상병과 시신의 후송이 빠르게 이루어져 막사 근처의 불편한 신음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동시에 작전에 투입될 병력 자체가 적다는 불편한 진실 또한 함께 드러나고 만다.
북쪽 진입로로 다가가자, 로빈과 분대원들은 여러 개의 군장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올라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지나를 찾을 수 있었다.
“1소대 3분대, 분대장 로빈슨 듀켓 외 9명 집합 완료했습니다.”
로빈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손을 올리는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미소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확인, 위치로.”
경례에 답하며 짧게 핀 지나의 붉은 웃음을 로빈은 놓치지 않는다. 아직까진 지나도 여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여유에서 비롯된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듬직하게 로빈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1소대는 다 온 거야? 2소대, 3소대 인원 파악 빨리 안 할래?!”
영력이 실린 지나의 목소리는 주변뿐만 아니라 온 진지를 뒤흔들 기세였다. 싸우기도 전에 그녀의 힘이 다 빠질 것 같아 걱정인 사람이 비단 로빈뿐만은 아니었으리라.
고함을 멈추지 않던 지나의 뒤로, 한 병사가 다가와 귓속말을 전한다. 그 내용이 뭐였는지는, 곧바로 지나의 목소리를 통해 모두에게 노출된다.
“뭐? 이게 다야?”
모여 있는 인원을 빠르게 훑는 지나의 핏발 선 시선.
“150명도 안 되잖아! 장난하냐!”
지나는 탄식을 내지르더니 자신의 발아래에 있던 군장을 격하게 짓밟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군장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병사들의 신음이 터져 나온다.
“후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깊은 신음을 흘리며, 지나는 자신의 에페를 검집째 뽑아 등 뒤로 젖히더니 양 옆구리에 끼운다. 그 여유로운 몸짓이나 태생적으로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인상, 단정치 못한 복장까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녀가 초임장교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본인은 2대대장 대리를 맡은 국립기사 소위 아뮤르 지나라고 한다.”
그녀의 이름에 병사들이 술렁이는 것을 지나는 빠른 목소리로 허락하지 않는다.
“주목! 보다시피 우리 대대는 전투원이 150명도 안 되는, 중대급편제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출정해야 한다. 이건 숨길만 한, 숨길 수 있는 사실도 아니기에 내가 먼저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밤을 저 추운 숲속에서 총알이랑 칼싸다구 맞으며 보내고 싶지 않으면 내 지휘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초임이라 의심되고, 불안한 사람도 있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일단 좀 닥치고 내 말 좀 들었으면 좋겠다. 알았나?!”
“예엣!”
“야간작전에 기습이므로, 기도비닉 유지하며 이동하도록. 갑옷이랑 무기에 미리미리 흙 묻히고 안경 같은 것도 죄다 벗는다. 각 분대장들은 분대원들 해당 사항 준수하도록 출발 전에 확실하게 다시 확인해.
우리가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양동으로 1대대와 3대대가 적들의 시선을 끌어줄 거다. 그들이 출정하면 우린 곧바로 숲을 통해 이동, 적이 점령 중인 파이튼 성을 급습한다. 자세한 사항은 이동 전에 각자 분대장들에게 하달할 것이다. 이상.”
지나가 단상(?) 위에서 내려오자 병사들은 곧바로 군장을 내려놓고 무기와 갑옷에 흙을 펴 바르기 시작한다. 부딪치며 소리를 낼 수 있는 중갑이나 식기들은 죄다 두고 가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는 분이십니까?”
로빈이 열심히 검에 흙을 묻히고 있는 도중, 타헌이 뒤에서 다가서며 묻는다. 그녀의 연설 내내 로빈이 실실 웃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 동기니까.”
“아, 정말입니까? 아뮤르라니 대단합니다! 저분, 훈련소에선 어떠셨습니까?”
짙은 위장으로 덮였음에도 그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로빈은 자신의 대답에 과장을 더할 필요도, 그 결과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음을 기억해낸다.
“뭐 독보적이었지. 중간평가에서 일등 했고, 훈련과정 중에도 그때그때마다 장난 아니었지. 쟤는 믿어도 좋아. 내가 보증할게.”
타헌은 또다시 감탄하며 넉살 좋은 누런 웃음을 지었다.
“아, 좀 안심이 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분대장님은 중간평가에서 몇 등이셨습니까?”
“어? 아아 뭐, 그냥저냥 상위권이었지. 지금 3대대 쪽 나팔소리 아니야? 빨리 준비하자. 애들 챙겨.”
적시에 나팔이 울린 덕분에 로빈은 어색해질 뻔했던 상황을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숲속으로 들어서고 밤이 되어 대화가 금지될 때까지, 그는 타헌의 정말로 괜찮으니 몇 등인지만 알려달라는 끈질긴 괴롭힘을 받아야 했다. 타헌은 나름 로빈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분대원들과의 거리감을 좁혀주기 위한 수단으로 그 대화 주제를 고른 모양이었지만, 로빈으로선 그 대답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기대의 무게, ‘중간평가’의 등수가 그를 향한 분대원들의 신뢰를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훈련을 받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생도에겐 적잖은 부담감이었다.
로빈이 아예 꼴등이었다면 오히려 쉽게 진실을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 ‘지휘관’으로서의 기대감을 갈구하기에 그가 검을 잡은 시간은 너무나 빈약했으니까.
때문에 ‘어중간한’ 등수로 타헌을 포함한 분대원들이 자신에게 기대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애매하게 두는 것보다는, 그저 긴장을 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남기는 편이 낫다고 로빈은 생각했다. 그는 끝까지 웃음과 애매한 거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이 숲과 하늘을 삼키고, 앞서가는 사람의 뒤통수조차도 희미한 행군이 그들을 맞이한다.
빽빽한 나무가 그렇지 않아도 희미한 달빛마저 방해하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와 벌레 소리만이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전부였으며 뒤통수에서 피어오르는 불안만이 그들이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선두에서 나아가는 지나가 계속해서 작은 낌새에도 대대의 이동을 정지, 정찰대의 척후를 반복적으로 지시했기 때문에 행군 속도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나의 신중함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대대원들 모두가 분명히, 그리고 확실하게 목표에 다가서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어둠을 가르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간간이 비치던 달의 위치가 머리끝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다시 한번 지나가 주먹을 쥐어 들어 보였다. 천천히 몸을 낮추는 대대원들 사이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고, 척후를 위해 로빈과 그의 분대원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세 명. 순찰 중인 것 같다.”
지나의 영력이 실린 목소리가 대대원들의 귓가에 낮게 울리며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숨을 멈춘다.
지나가 그 사실을 알림에 있어 영력을 사용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빈은 빠르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발견한 ‘적’이 ‘기사’였다면, 그녀는 섣불리 영력을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소대장님,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만.”
분대원 중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 로빈 또한 최대한 눈을 부릅뜬 채 영력을 개방하여 지나가 눈에 담은 광경을 찾고 있었지만, 완벽한 어둠 속에서 그가 확인한 그림자 중에 제대로 사람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지나의 목소리는 낮고 섬뜩하면서도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난 보여.”
뒤이어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작은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그리고 갑자기 불어오는 얇은 바람.
지나가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약해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로빈과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몇몇 병사들뿐이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다른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바람이 다시금 그들 사이를 비집고 파고든다.
“이동한다.”
짧은 명령. 지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병사들 사이를 헤집으며 로빈에게 다가온다. 로빈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눈인가- 로빈은 속으로 웃었다.
“100미터 정도 더 가면 우측으로 크기가 비슷한 나무 세 그루가 연달아 서 있는 곳이 있어. 그 아래 시체들이 있을 테니, 분대원들 시켜서 정리 좀 부탁해.”
시체들.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것에 지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눈동자는 곧바로 대대의 선두를 향해 어둠 속으로 삼켜진다. 지나의 말대로, 로빈과 그의 분대원들은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온 달빛 아래에서 세 구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커다란 바늘로 목에서 정수리까지 꿰뚫린 듯한 시체와, 목이 통째로 잘려나간 시체.
세 구의 시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상처와,
생소한 군복.
로빈은 소름이 끼쳤다.
어떠한 고함이나 비명조차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공격이 일격으로, 그것도 목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만들어낸, 목소리를 잃어버린 세 구의 시체.
지나의 이런 신속함에 대한 경외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로빈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 명을 뚫고 베어버린 지나의 검이었다. 이들을 찌르고 베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로빈은 이 완벽한 어둠이 고맙기도 했고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타헌과 분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시체의 흔적을 지우고 곧바로 행군의 뒤를 쫓았다.
머지않아 다시 한번 행군이 멈춰 선다. 그러나 이번엔 로빈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면서도 작은 불빛이 그 원인이었다. 지나는 불빛의 확인을 넘어 아예 그 정체를 꿰뚫어 보았는데, 급조된 참호 주변에서 무언가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여섯 명의 적군-이라는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수, 가능하겠어?”
지나의 물음에, 석궁병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방해물도 많고.”
지나는 잠시 고민한다.
저것이 만약 단순한 작업장이라면 그대로 정면 돌파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불빛이 만약 경계초소고, 초소 내부에 비상연락망이나 경보기가 설치되어있다면 작전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면서도 단 한 번에 모든 적들을 제압해야 한다.
“사수들,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3분 후에 한발씩만 저쪽을 향해 발사해. 적중 여부는 상관없다. 알겠나?”
지나의 명령에 석궁과 활로 무장한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들이 화살 소리에 시선을 돌리면 내가 왼쪽에서, 1소대 3분대장이 오른쪽에서 덮친다.”
로빈은 깜짝 놀란다.
‘명령’을 받은 자신의 몸이 자연스럽게 지나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지나가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움직인 탓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깨닫지 못한 사이 검까지 뽑아 든 상태였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대대원들에게서 멀어질수록 로빈의 심장은 적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빈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처음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린다.
‘사람을 벤다.’
그는 처음으로 사람을 벨지도 모른다는 기대, 혹은 걱정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지나의 속도와 맞춰서 도약을 할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가지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적들에게 들키지는 않을지,
교전 중에 잘못 검을 휘둘러 지나를 베지는 않을지,
내가 기사로서 너무나 형편없어서 오히려 적 병사에게 당하지는 않을지,
자신이 거쳐 온 어떠한 훈련 중에서도 야간에 적의 초소를 급습하는 방법론 따윈 아직 없지 않았나는 등의,
크고 작은 수많은 걱정들이 그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을 벤다.’
그는 어느 정신교육 시간, 드렌턴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너희가 자주 하는 질문 중에서 첫 살인에 관련된 것이 많다. 대부분 그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나 후유증에 관한 질문이지. 뭐, 걱정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너희와 같은 어린 기사들을 봐오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이건 정말로 믿어도 좋다.
너희가 처음 사람을 벨 순간이 오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바로 다음 사람을 베어라.
무감각의 형성이니-, 내면의 정당화라느니-, 그딴 것들은 결국 그 짧은 순간에 결정되는 법이니까. 이 과정을 빠르게 압축한 기사가 그렇지 않은 기사보다 훨씬 기사로서의 성공률이 높다. 뭔 말인지 알겠나?”
어둠 속에서, 로빈은 ‘다음 사람’을 되뇌었다.
검을 쥔 손의 힘은 어느새 희미하게 풀려있었다.
요동치던 가슴도 완벽한 숲만큼이나 고요해져 있었다.
그는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짐을 느낀다.
“사람을 벤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쐐액-
날카로운 물체가 어둠을 가르는 소리.
동시에 로빈은 작은 불빛을 향해 몸을 날린다.
- 작가의말
이 글을 봐주시는, 그리고 추천해주시고 선작해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연참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이후로도 계속 즐겁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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