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악연(惡緣), 선연(善緣)(4)
“안돼!”
“아아악~ 제발!”
그레이스의 비명이었다.
태산은 황급히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앞과 옆에서 나타난 상대는 차이니즈 마피아거나 브리티쉬 갱이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적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칼을 휘두르며 튀어나온 놈에게는 눈에 손가락을 찔러넣어 옆으로 제쳐 날려버렸다.
총을 들이민 놈에게는 손목을 잡아채 견갑골 뒤로 밀어내 어깨를 완전히 분리해 버렸다.
‘크아악’
그레이스가 염려되어 계단을 무시하고 위층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그녀의 침실 안쪽에 한 사람을 부여잡고 울음을 마냥 쏟아내고 있는 그레이스가 보였다.
그녀는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품에는 알프레드가 손을 잡은 채, 안긴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레이스의 정면에는 중국전통 대도를 든 사내가 자신의 대도를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태산이 쏜살같이 다가가 그레이스의 앞을 막아섰다.
“니쉬쉐이?(你是谁?누구냐 넌?)”
“What are you gonna do?(니가 알아서 뭐하게?)”
난데없이 등장한 것도 모자라 말장난까지 해대니 놈이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중국식 대도를 세로 베기에 이어, 가로 베기를 기합 한꺼번에 완성했다. 이른바 ‘십자 베기’라는 검술이었다.
알프레드의 가슴에 드러난 상처와 깊이를 보니 이놈에게 당한 것이 맞는구나. 굉장히 깊은 상처로 복부의 장기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산은 ··· 멀쩡했다.
아니 정확히는 태산이 입고 있는 옷이 열십자로 베어져 너덜거렸다.
‘크흡!’
태산이 놈의 머리를 한 손에 잡아 들어 올렸다. 손에 쥔 중국식 도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태산을 공격했지만,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태산이 가볍게 힘을 주자 놈은 끈 떨어진 줄인형 마냥 풀썩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놈을 한쪽으로 던진 뒤, 서둘러 그레이스를 살펴보니 반쯤 혼이 나간 듯했다.
“그레이스! 나야! 정신 차려 봐!”
“으으···.”
“당신은 괜찮은 건가?”
“흐흐흑···.”
여전히 그레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알프레드로 인해 더더욱 정신이 혼미해 보였다.
태산은 알프레드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자상으로 인한 외상과 내부장기의 손상이 매우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혈이 많았고 부위가 광범위해 응급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태산은 침대보를 찢어 상처를 둘러싸 맸다.
조금이라도 출혈을 멎게 도우려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금방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서둘러 봉합해야 하는데 어쩌지···.’
태산이 고민하는 사이에 바깥에서는 더욱 격렬해진 전투로 총성이 호텔과 골프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산은 급히 전화로 권혁과 이강준에게 상황공유와 아울러 의료지원을 요청했다.
“그레이스! 우린 여길 빠져나가야 합니다.”
“안···돼요. 알프레드를 두고 갈 순 없어요.”
“내가 데려갈 거예요. 그러니 일어나요.”
“아···빠는···요?”
“아까 6층에 계신 것을 봤어요. 일단 우리가 빠져나간 뒤에 내가 가서 모셔올게요.”
“정말이죠? 약속해줘요.”
“알겠어요. 약속하리다.”
태산이 알프레드를 안아 들자 그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듣고 차이니즈 마피아 두 녀석이 공격해 왔다.
태산은 알프레드의 몸을 공중에 띄움과 동시에 오른손 스트레이트 한 방을 날렸다. 스트레이트를 날린 몸의 회전력을 이용한 몸 전체의 회전차기를 연이어 날렸다.
‘퍽! 빡!’
정확한 타격음이 증명하듯 그 둘의 머리와 목이 함몰되어 쓰러졌다.
태산의 동작 끝은 마치 알프레드를 처음부터 앉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충격도 주지 않은 모습으로 받아들었다.
“그레이스! 내 등에 업혀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목을 잡고 놓지 말아요. 알았죠?”
“네! 알았어요.”
태산은 그레이스가 업히자 바로 베란다 쪽으로 뛰었다. 그리곤 몸을 굽혔다 펴며 밤하늘로 자신의 몸을 솟구쳤다.
‘슈와앙’
밤하늘 높이 뛰어오른, 아니 날아오른 형국이 되었다.
전투 중인 어느 사람도 태산이 뛰어오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쿠웅’
태산이 떨어져 내린 높이는 어림잡아 오십여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착지한 곳이 아스팔트임에도 엄청난 발자국이 발생하였다.
‘끼이익’
‘쿵쿵’
태산의 앞에서 차량이 급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서다 속도를 못 이기고 앞뒤의 차들이 서로 추돌하였다. 다행히 큰 충돌이 아니어서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차에서 내려선 사람은 권혁과 이강준, 그리고 우리 대원들이었다. 차량 주위를 둘러 경계를 펼치며 태산이 내려놓은 알프레드를 의료지원팀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등에 매달린 그레이스를 안아 내리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레이스! 내가 가서 당신 아빠를 모셔올게요. 그러니 어디 가지 말고 꼼짝 말고 여기 있어요. 알았죠?”
“네, 부탁···해요. 제발요.”
“그레이스와 알프레드를 부탁합니다.”
권혁과 이강준은 굳게 다문 입술로 간단히 대답하고는 의지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이 몸을 굽혔다. 펴자 엄청난 높이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걸 경공(輕功)이라고 해야 할지, 높이뛰기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6층에서 대치 중인 장첸과 그랜드마스터 채프먼은 더는 대화가 진전되지 않자, 생사결을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보시게, 오해를 풀 생각이 없다면 끝장을 봐야 하겠지?”
“고통 없이 보내드리지요.”
인원은 장첸의 수하가 훨씬 많았다.
채프먼의 수하는 겨우 셋!
그마저도 기관단총이 아니라 권총으로 무장되어 더욱 열세였다.
고풍스러운 VIP룸의 문짝은 총격의 흔적으로 더는 견디지 못해 떨어져 내렸다.
기둥과 테이블에 몸을 숨겨 대응 사격을 준비하던 채프먼의 부하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저마다 남은 탄창과 탄환을 확인하고 있었다.
“5발 ···.”
“클립1개.”
“난 1발”
그사이 장첸의 부하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그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탕타탕!’
‘탕!탕!’
반격의 총성이 그치고 일순 정적이 흐르자 차이니즈 마피아들은 저들이 총알이 떨어졌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거침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죽음을 집행하려는 순간 복도 뒤편에서 기관총의 난사로 무방비에 서 있던 중국갱단원들이 쓰러졌다.
“늦어 미안해.”
“챨스 이 친구야! 왜 이제야 오는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장첸의 패거리 뒤쪽에서 챨스가 나타나 협공을 가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장첸은 대치하기보단 베란다를 통해 서둘러 남은 인원들과 아래층으로 후퇴를 했다.
다가온 챨스는 동료들에게 총기와 탄창을 나눠주며 합류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그보다 알과 그레이스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원팀은?”
“십오 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더 이상 헬기 지원은 안 되는 건가?”
“세 대 모두 파괴되어···, 다른 롯지에서 온다면 삼십 분 이상이 걸립니다.”
조금 전 합류한 챨스의 도움으로 약간의 안정을 찾은 그랜드마스터는 자신의 딸과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서둘러 이동을 하는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그들이 대화하던 방안으로 수류탄이 투척 되어 폭발이 발생하였다.
“크아악, 우욱”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첸의 부하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칼춤을 추었다.
‘서걱’
‘슈와악’
“크악!”
칼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챨스는 기관총으로 칼을 막아서며 박치기를 했다.
그는 스트리트 파이터 출신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주먹 싸움은 자신이 있었다.
그가 잘 사용하던 패턴이 박치기였다.
보통은 상대방을 코뼈와 함께 안면 함몰로 기절시키거나, 반쯤 죽이는 데에는 효과가 좋았다.
그런데 장첸은 강적이었다.
전혀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챨스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로 역공을 가해왔다.
챨스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였기에 뒷걸음치는 중에도 원투 어퍼컷과 연이은 스트레이트와 훅의 콤비네이션을 구사했다.
만일 일반인이었다면 최소한 기절할 정도의 헤비급 펀치였기에 챨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허나, 장첸은 달랐다.
그는 객가방 비밀 해결사 출신의 전문 전투원이었다. 소위 말하는 무공 고수였다.
챨스의 무위를 헛수고로 돌려버리기라도 하듯 비웃어 보이며 뒤돌아 차기로 그의 턱을 작살내 버렸다.
‘퍼~억’
챨스의 쓰러진 몸뚱이 주위로 다른 프리메이슨 대원들도 죽임을 당해 쓰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한 사람!
그랜드마스터 채프먼이었다.
“노트북과 비밀번호를 넘기면 당신과 가족의 목숨은 보장하겠소.”
장첸이 아량을 베풀 듯이 뜻을 전하자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목숨을 부지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자네도 가질 수 없을 걸세.”
“그 말씀은 굳이 벌주를 택하신다는 것이지요?”
“아니! 노트북은 이미 너희들 때문에 부서져 버렸단 이야기지. 그러니 내 굳이 비밀번호를 알려줄 필요도 없다는 말일세.”
“거짓말이라면 그 대가 또한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허허,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나저나 누가 나와 같이 갈 텐가?”
채프먼의 손에는 조그마한 수류탄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왼손 엄지에 끼워진 안전핀의 고리를 흔들어 보였다.
“이런 ~ 씨~ 피해!”
‘콰콰쾅!’
6층 VIP룸 전체가 폭발로 흔들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주변의 참혹한 실상이 드러났다.
베란다 쪽에 뛰어내린 태산은 주위를 살폈다. 폭발로 무너져내리는 6층과 5층 사이로 달아나는 차이니즈 마피아 단원들이 있었지만, 굳이 쫓아가질 않았다.
태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랜드마스터 채프먼의 팔과 다리는 이미 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폭발의 흔적으로 무수한 상처가 남겨진 얼굴과 몸만이 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태산은 찢긴 커튼을 뜯어내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레이스에게 이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래층에서는 여전히 산발적인 총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딱히 관여할 부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몸을 돌려 베란다로 나가려는데 권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왜 건물 안으로··· 들어왔을까?’
가볍게 층층을 중앙 계단에서, 계단이 아닌 한 계층씩을 훌쩍 뛰어 내려섰다.
2층 리셉션장 입구와 로비에서 대치한 병력들이 쏟아내는 총탄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기둥과 벽이 철근을 드러낸 채 너덜거렸다. 로비의 기둥을 엄폐물로 등지고 미스 페레이라의 손을 잡고 있는걸 보니 구하기 위해 기사도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태산은 그랜드마스터의 시신을 내려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여기서 뭐 하세요?”
“태산씨! 저놈들이 생각보다 화력이 쎕니다.”
“제가 막을 테니 얼른 데리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태산이 빗발치는 총알을 막아서자 그를 방패삼아 권혁이 미스 페레이라를 끌고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태산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시신을 챙기러 돌아오는 사이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날리던 종이 중 한지 몇 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본 한지 들이구나.’
유독 한 장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히며 날아다녔다.
달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한지와 폭발의 파편에 섞여 날리는 흙먼지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 뭐지? 뭐라고 보인 것 같았는데?’
얼른 종이를 잡아서 살펴보았다.
“C···u···.”
“···r······e.”
태산이 철자를 읽는 그 순간이었다.
“뭐? 왜 이래? 글자가 왜 바뀌냐?”
태산이 종이를 잡고 자세히 살피던 그 순간에 이면에 비치던 글자가 바뀌었다.
“療”
- 작가의말
“療”
치료할 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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