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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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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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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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21

DUMMY

이스카르와 찬크에르, 둘의 이야기는 길어지나 보다. 돌아올 기미가 없다.


결국 에이브안의 집에서 머물기로 하고, 리아는 아이리스와 자주 신세지던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아이리스의 덩치가 커져서, 특히 꼬리가 길어져 같이 자는 데 조금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고 함께 잤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음에도 여전했다.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 아버지랑 예비신랑의 대화 같은 거라지만 큰 다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두 사람을 걱정하며 침대에 누운 리아.


점점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리고 ‘따님을 저에게 주십쇼!’라고 외치는 드라마 같은 상황이 상상됐다.


버틸 수 없는 기분이 된 리아는 몸을 배배 꼬았다.


80세 노인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질색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만은 8살 여자아이 그 자체이기에 스스로도 징그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변명을 하며 리아 멈추지 않았다.


‘히히히. 부, 부끄럽지만 나름 좋을지도······ 헤헤.’



“뭐하니?”

“힛! 허엇. 어, 어머니?”

“아이리스가 부르길래 뭔가 했더니······ 하. 내 딸이지만 정말.”

“우왓. 어머니! 그보다 두 분! 두 분은 돌아오셨나요?”

“아직이다만 곧 돌아오겠지. 우린 어서 밥이나 먹자꾸나. 아이리스도 배가 고픈 모양이야.”

“넵.”


조용했지만 그럭저럭 활기찬 분위기로 식사를 마치고, 리아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는 두 사람을 기다렸다.


날은 어느새 저물어 노을이 펼쳐졌다.


편하게 있잔 마음에 아이리스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두들겨졌다.


기다렸던 소식이 왔다.


리아는 얼른 일어나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열린 문 앞에는 찬크에르 혼자만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근데······ 아버지는요?”

“그는 지금 자고 있다.”

“주무신다고요?”


‘날이 저물긴 했지만 벌써 잠잘 시간은 아닌데?’


의아하긴 했지만, 딱히 큰 다툼은 없어 보인다. 의문을 접고 리아는 바로 집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이야기는 끝나신 거죠? 그럼 집으로 돌아가요.”

“아니. 잠시만 기다리렴.”

“응? 할아버지?”


멈춰 세운 에이브안은 다가와 장신의 찬크에르를 올려다봤다.



“자네, 오늘은 우리 집에서 머물다 가게나.”


거부 따윈 용납하지 않는, 확정 사항인 듯 단호한 목소리.


찬크에르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반대로 리아는 이스카르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새 다가온 필리아의 손에 이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돌아온 집안에는 이스카르가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었다.


애당초 마을에 술이 있는지도 몰라 놀랐지만, 이스카르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걸 보니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다.


안심한 리아는 살며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시끄럽지 않게 아이리스와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점심쯤이 되어 돌아온 찬크에르는 예상했던 대로 이야기가 잘 끝나 정식으로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하지만 집에 찬크에르가 머물 방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그래서 이젠 리아와 아이리스의 방이나 마찬가지인 좁은 방을 증축하기로 했다. 아이리스까지는 어떻게든 괜찮았지만, 찬크에르도 머물게 되면 아무래도 비좁았으니.


물론 이는 이스카르와 필리아의 의견이었다. 놀랍게도 두 부모님은 외간 남자와 딸이 한방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덕분에 리아가 다시 오징어가 되는 일도 있었지만 무사히 증축공사는 바로 시작됐다.


공사는 찬크에르가 자진해서 도맡았다. 마력이 방대한 그였기에 도와줄 필요도 없이 마법으로 순식간에 증축이 진행되었다.


먼지 하나 안 날리며 벽을 허물고, 근방의 흙을 마법으로 날라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쌓는 등, 그 모습은 실로 굉장하여 리아가 무심코 ‘건설업 하면 대박이겠는데’라며 허튼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런 차질이 없던 때에 찬크에르가 필리아에게 물었다.



“필리아, 기왕 하는 김에 집 전체에 보강과 증축을 해도 되겠나? 여간해서는 흠집 하나 안 날 집으로 만들 수 있다.”

“아뇨.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집은 남편과 딸의 추억이 잔뜩 있는 집이니까요. 함부로 바꾸고 싶지 않아요.”

“음! 그렇군.”


굉장히 감명받았는지 찬크에르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들은 필리아의 말을 곱씹었다.


이후로도 작업은 순조롭고, 달리 할 것이 없었던 리아는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 끝나갈 무렵, 루데릭이 찾아왔다.


루데릭은 눈을 크게 뜨고는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집과 이쪽을 번갈아 봤다.



“리아, 그놈은······ 누구야?”

“응? 아. 루데릭, 안녕. 이쪽은 찬크에르라고 해. 내······ 으음? 뭐라고 해야 하지?”


할 말을 찾지 못하니 찬크에르가 나섰다.



“루데릭이라고 하는가? 난 찬크에르다. 리아와 함께 살아갈 자다.”

“하, 함께요?! 헤헤······ 하지만, 찬크에르?”

“뭐지, 리아.”

“찬크에르는 말이 너무 딱딱해요. 사실 자상하고 머, 멋······진데 말이 너무 딱딱해서 오해받을까 걱정돼요.”

“그, 그런가. 동포도 나에게 딱딱하다고 했었다만 잘 모르겠다.”

“그럼 표정부터 같이 바꿔나가도록 해요. 알겠죠?”

“알았다. 잘 부탁하지.”

“아! 루데릭, 미, 미안. 잊고 있었어. 그, 저기······? 루데릭?”


왠지 루데릭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쪽만 떠들어서 화난 줄 알았지만, 부릅뜬 눈을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괜찮은 건가 싶은 리아는 다가갔는데, 돌연 루데릭은 돌아간다는 말만을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어, 어쩌지?! 혹시 진짜 화났나? 으음. 안 되겠다. 따라가 봐야겠어요!”

“흠. 아니. 그게 아닌 듯하다. 리아, 내가 가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린 찬크에르는 작업을 마저 끝마친 다음에 곧장 루데릭에게로 갔다.


믿고 맡기기로 한 리아는 증축으로 넓어진 방에서 부모님들과 가구를 정리하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더니, 이스카르에게 같이 살기로 했으면 믿고 기다려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핀잔을 듣게 되었다.


물론 알고 있다. 전세의 자신 또한 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러나 감정이 들끓어 진정이 안 된다.


이스카르도 포기한 듯 내버려두고, 리아는 계속해서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집안을 돌아다녔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찬크에르는 저녁이 될 때쯤에서야 돌아왔다.


리아는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어, 어떻게 됐어요?”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 루데릭, 그는 단지 나를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확인이요······?”

“아아. 그는 시험해봤을 뿐이었다. 리아를―― 여동생을 잘 지킬 수 있는가를.”

“네?!”


‘루데릭이······?’


하긴 냉정히 생각해보면 루데릭은 땍땍거리면서도 여러모로 잘 챙겨줬었다. 그 이유가 동생으로 여긴 것이었다면 그럴듯하다. 형제가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가 만개한 리아는 그대로 루데릭의 집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양어깨를 찬크에르가 붙잡아 멈춰 세웠다.



“리아, 그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내일이라도 찾아가 보는 게 어떤가.”

“우음······ 알겠어요.”


일리가 있던 터라 리아는 수긍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숨바꼭질이 펼쳐졌다.


단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루데릭은 그런 리아를 피해 달아났다. 정말 열심히 단련했었는지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루데릭을 따라잡기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마력레벨은 루데릭보다 훨씬 높다지만 이번에 한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에이브안에게 배웠던 것처럼 육체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보니, 마력량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즉 원체 근력이 낮으니 근력 강화의 효과는 아주 미미했고, 이 상황은 리아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술래인 리아가 영원히 루데릭을 쫓아다닐 듯했던 숨박꼭질은 의외로 쉽게 막을 내렸다.


촤아아악~!


돌부리에 걸린 리아가 화려하게 넘어져서······


속도가 상당했기에 날아가듯 슬라이딩하는 리아를 깜짝 놀란 루데릭이 뛰어와 받아 세워줬다.



“아야야. 아프네.”

“뭐 하는 거야? 바보도 아니고.”

“바보라니! 루데릭이 도망가서 그렇잖아!”

“내 탓이냐?”

“응.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루데릭이 도망쳤잖아. 으으······ 아퍼.”

“고맙다고? 뭐가?”

“어제 들었어! 여동생을 맡길 수 있을지 걱정해줬다며?!”


쓸린 다리를 매만지며, 별것 아닌 듯 대강 한 이 말에 루데릭의 얼굴은 팍 구겨졌다.



“그 자식······ 뭘 입이 가볍게 떠벌리고 다니는 거야?”

“헤헤. 고마워. 정말로 기뻐―― 오빠? 아니면 오라버니?”

“그, 그만둬. 진심으로 징그러우니까.”

“싫네요~ 루데릭도 귀여운 여동생이 생기니까 좋지?”

“············.”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허둥대던 루데릭이었으나······ 이 말을 듣자마자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웃음기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된 루데릭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냉철함 그 자체였다.



“후. 헛소리는 그만하고 상처나 보러가자.”

“허, 헛소리?! 자, 잠시만. 앗! 나 다치지 않았어. 내려줘, 오라버니!”

“윽······ 오라버니 타령 좀 그만해. 내가 창피하니까.”


창피하다면서도 끝까지 내려주지 않는 루데릭.


그 모습을 보아 리아는 한번 봐주기로 했다. 대신 공주님 안기로 업어준 탓에 빨개진 루데릭의 얼굴이나 관찰했다.


아이 같은 얼굴이 이제는 나름 듬직한 소년쯤으로도 보인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던 리아는 돌연 먹잇감을 보듯 눈빛을 날카롭게 했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루데릭의 목을 잡고는 볼에 뽀뽀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루데릭이 황급히 목을 뒤로 빼면서 피하긴 했지만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리아는 더는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품에 안겨 집으로 배송되기로 하였다.


집 앞에는 찬크에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녀왔다고 말하는 순간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분노가 자리를 잡게 됐다.


그의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되어 기쁜 한편, 고개를 갸웃한 리아는 루데릭에게서 내려와 다가갔다.



“왜 그래요?”

“······리아, 옷은 왜 그런가?”

“네? 무슨······ 헛?! 그, 보, 보지 말아주세요!”


슬라이딩이 제법 심했나 보다. 찬크에르가 보던 부분을 쳐다보니, 원피스 같은 한 벌 옷이 등 쪽에서 다리까지 쭉 찢어져 있는 게 아니겠는가.


서둘러 찢어진 부분을 감췄지만, 찬크에르의 살벌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내 루데릭에게 따지기 시작해 한참을 말리고 설명하는 등의 작은 해프닝이 발생했다.


이래저래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루데릭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었고, 찬크에르와도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리아의 입가에는 자그마하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 이후로도 이따금씩 작은 사건들이 발생했었지만, 찬크에르는 큰 문제 없이 마을에 잘 적응했다.


주민들에게는 찬크에르가 용왕이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그저 아이리스를 낳은 단순한 드래곤 정도로 말해두었었다.

그래도 드래곤이건만. 다들 무섭지도 않나, 크게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친근하게 어깨를 두들기는 강심장의 면모를 보여줬다.


보고 있었던 리아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자연스레 마을의 일원으로 찬크에르를 받아들여 주는 것에 고마웠다.


찬크에르도 썩 괜찮았던지 얼굴에 잔잔한 미소까지 띠고 있어 걱정은 없을 듯하다. 다들 잘 모를 무표정에 가깝지만.


어느 날은 한철 때인 밭일을 도와 잡초 뽑기를 하기도 했다.


찬크에르도 도왔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고급품. 한 번 만져본 필리아도 옷의 질감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혹여 더러워지지는 않을까 염려됐다. 옷을 빌리려 해도 신장이 큰 찬크에르에겐 맞는 옷이 집엔 없었고.


하다못해 다른 주민들에게라도 빌리려 했지만, 찬크에르 본인이 거절했다.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전혀 상관없다며. 더군다나 옷은 많다기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노심초사를 비웃듯, 찬크에르는 의외로 금방 숙달되어 나중에는 마법으로 넓은 지역을 한 번에 모두 정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어느 날엔 에이브안이 찾아와 찬크에르를 빌린다며 데려가기도 했다.


매번 그 혼자만 오게 하여 걱정도 됐지만, 약간 신나 보이는 에이브안을 보면 나쁜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궁금했기에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찬크에르에게 용건이 뭐였냐고 물어봤으나, 대화를 했다고만 하면서 도통 알려주지를 않았다.


또 몇 번은 신기하게 잭도 찾아와 뭔가를 물어보고 가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진지하게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등, 대화가 끝났을 땐 매번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가끔은 루데릭도 찾아와 대련을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절대 따라오지 못하게 엄포를 놨다.


그건 불만이었으나, 은근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찬크에르를 보노라면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찬크에르, 그는 마을에 잘 적응하여 한 명의 주민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 겨울. 쌀쌀해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도 눈이 오는구나, 하고 하늘을 봤던 리아는 평소처럼 손을 잡고 걸어주는 찬크에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잘 생겼어.’


여전히 안타까운 생각뿐인 리아의 곁엔 찬크에르 뿐이었다. 아이리스는 없었다.


오늘만이 예외인 건 아니다. 아이리스는 최근엔 같이 자지도 않고 필리아들이 있는 방에서만 잠을 청했다. 또 리아와 찬크에르가 둘이 있으면 얼른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배려해주는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피하니 조금은 안타까운 기분이다.


‘한 쪽씩 손을 잡고 걸어가면 딱 가족 같아 보일 텐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떠오르는 건 아빠와 딸,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드래곤이 걷는 모습뿐이다.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가족처럼은 보이질 않는다.


아빠와 딸만큼은 가족이 분명하긴 했지만 그걸 어찌 인정하겠는가.


툴툴거리던 리아는 시선이 느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찬크에르로, 그는 상냥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익숙해져 이제는 눈이 마주치더라도 바로 고개를 돌리진 않게 됐다. 그래도 두근두근 뛰는 심장 때문에 리아의 볼은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근질근질했던 리아는 무안함을 감출 겸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눈! 눈이 와요. 이쁘지 않아요?”

“아아. 그렇군. 오랫동안 보아온 광경인데도 각별히 아름다워. 분명 리아와―― 가족과 함께 봐서 그러겠지.”


완벽하진 않아도 이젠 제법 딱딱하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된 찬크에르. 그는 이따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 모두가 다른 사람이 하면 느끼해서 치를 떨 그런 말들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러나 찬크에르가 하면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의 것도 그렇다. 정확히 심장을 가격하였다.


‘우윽! 머, 멋있어······가 아니라, 정신 차려! 이대로 가면 난 무조건 홍당무 확정이야.’



“으으. 맞다! 찬크에르는 분명 오래 살았죠? 이쁜 것들도 많이 봐오고 그랬겠어요.”

“아니. 그렇게 봐오진 않았다. 멀리서 다른 존재들이 사는 걸 보긴 했지만, 사명을 위한 것이었고, 이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았어.”

“사명이요? 그러고 보니 사명을 받았다고 했었는데, 누구에게요?”

“신들이다. 다섯 신들에게서 세상의 존재들을 관리하라 명받고 우리들은 태어났지.”

“시, 신이요?! 신이 정말로 있어요?”


갑자기 신이라니······


딱히 무신론을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구에서의 기억 때문에 신이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있다면 언제나 불평을 쏟아내는 욕받이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찬크에르가 직접 신들에게 사명을 받았다니 분명 거짓이거나 착각은 아닐 거야.’


쉽사리 믿지 못하겠다는 리아에게 찬크에르가 추가로 부연 설명을 해줬다.



“신은 확실히 존재한다, 리아. 우리 말고도 사명을 받고 태어난 존재들도 있지.”

“다른 분들도 있어요?”

“정령들이야. 그들도 다섯이 사명을 받고 태어났어.”

“저, 정령님들이요? 그분들도 진짜 있어요?!”


찬크에르는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을 밝게 한다든지, 어렸을 때 들었던 정령님이 진짜로 있다니. 이세계 대단하네······’



“저기, 찬크에르! 그분들의 사명은 뭐예요?”

“그들의 사명은 우리와 달리 세계를 관리하는 것이야.”

“세계요?? 그······ 날이 밝고, 지고 하는 거요?”

“비슷하다. 세상의 법칙 같은 것을 정하고 관리하는 존재들이지.”

“와~ 진짜 있는 분들이구나······ 어? 근데 정령님도 다섯 분밖에 없어요?”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흠. 인간은 정령이 세상 곳곳에 존재하여 관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만, 그들은 오직 다섯뿐이야. 우리들처럼 피조물······ 자식들을 만들어대지 않았으니.”


재차 드래곤의 이야기에 찬크에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리아는 그가 꺼리는 이 이야기를 더 건들지 않기로 하고, 지금 들은 정보나 정리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구나. 그렇지만 다섯이서 전부 관리할 정도면 굉장하다고 할 수준을 넘어섰는데?’



“으음······ 그런데 그, 죄송한 말인데, 신님들은 뭘 하세요? 전부 다 맡겨놓고.”

“리아, 신들의 힘은 강력하다. 섭리 따윈 그들 앞에서는 없는 것과 다름없어.”

“그 정도인가요?”

“달리 신이 아니라고 해야겠지. 그만한 존재들이 세상에 개입하면 오히려 엉망이 되기 십상이야. 그래서 우리 같은 자들을 탄생시켜 관리를 맡기는 거다. 가끔 이곳에 사는 존재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때도 있긴 하지만.”

“추, 축복!! 그, 그렇군요. 신님은 대단하시군요.”


‘여기서는 정말 신이 축복을 내려주는구나. 다른 이야기들도 스케일이 너무 커. 어쩌면 난 지금 천기누설 같은 걸 들은 거 아냐? 인류 최초로.’


그런 허황된 생각이 들 만큼 지금 들은 이야기는 오엘문리아라는 세계의 근간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라 여겨진다.


덜컥 겁이 난 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찬크에르. 이런 엄청난 얘기를 저에게 해줘도 되는 거예요?”

“전혀 상관없다. 나와 같이 살아갈 리아가 아닌가? 거기에 알아도 문제랄 것도 없어.”

“그럼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언제든지.”


문제 될 게 없다면 가릴 것도 없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다. 전세의 기억이 있다지만,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기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았으며, 이해조차 안 되는 현상들도 한가득하다.


리아는 그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물었다.


과연 용왕이랄까, 찬크에르는 같이 걸으면서도 막힘없이 줄줄 이야기해 주었다. 덕분에 정령이나 신에 대한 것들은 꽤 자세히 알게 되었다.


우선 정령은 용왕들과 달리 거의 반쯤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한다. 그렇지만 딱히 상하관계는 없고, 서로 만나기도 힘들어 오래 알고만 지낸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덧붙이기로 정령은 반신이기에 보이는 자도 극소수로, 옆을 지나가더라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인간 세상에는 개입조차 하질 않으니 아예 없는 존재라 봐도 무방하다고 한다.


정령과의 사이는 분명 사명을 받은 동지끼리라 나쁜 건 아니라고 했는데······ 낌새를 보면 친한 것도 아닌 듯하다.


그리고 신에 대해서는 의외로 찬크에르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나마 아는 건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며, 유일하게 생명의 신만은 만국 공통으로 생명의 신이라 불린다고 했다.


에이브안에게도 자주 들었던 터라 익숙한 생명의 신은 그 직명 때문에 용왕들의 직속상관이 아닌가 싶었지만, 모든 신들이 상관 같은 존재이며 직속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정령들도 마찬가지란다.


이 외에도 여러 신을 알려줬지만······ 유일하게 딱 한 신이 마음에 걸렸다.



“저기, 찬크에르.”

“응?”

“운명의 신님이요. 분명 글로디아 님이라고 했죠?”

“글로디아 님이 왜?”

“운명의 신님이 계신다는 건, 운명이라는 게 진짜로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분이 그리 불리지만······ 신들이 가진 힘이나 섭리를 전부 다 알고 있지는 않아서 모르겠군. 우린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태어났으니.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리아.”

“아니요! 괜찮아요. 자자. 사과하지 말고 웃어요. 네?”


표정이 어두워지는 찬크에르에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리아는 그를 달래려 방긋 미소 짓고는 손을 잡아 이끌었다.


곧 찬크에르에게 다시금 은은한 미소가 걸리고, 리아는 만족하며 같이 눈을 구경하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걸으면서도 리아는 여전히 운명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특히 자신은 8살 밖에 안 됐음에도 여러 사건을 겪었다.


박식한 에이브안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극소량의 마력만을 지녀 태어난데다, 그로 인해 반년 동안 잠이 드는 등. 이것 말고도 마수와 대화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의 기억이 있는 나 자신이 이상함 그 자체다.


내가 엄청난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같은 생각을 하기에는 80세의 인생을 살아봤다. 그런 걸 믿고 흥분할 시기는 지났지만, 운명의 신이 존재한다는 소릴 들으니 아무래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거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까지 든다.


그 증거가 아이러니하게도 신들의 존재를 알려준 찬크에르다.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일을 당해 아이리스를 잃게 된 그는 본인도 차례차례 마수와 마물이 나타나는 상황에 악의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했다.


진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그렇게 황당하게 잃은 아이리스는 어찌된 우연인지 자신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생에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한 용왕이 찾아왔다.


다른 용왕들은 각지에서 다른 존재들과 생활하기도 하는 등 어쩌면 만나볼 기회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찬크에르는 아니다. 그는 사명이 아닌 일로 자리를 떠나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즉 만나기도 어려운 용왕 중에서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찬크에르와 만났다는 게 된다.


몰랐다면 모를까, 운명의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운명이라는 것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게 더 힘들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런데다가 찬크에르와 만났을 때 난 아이리스와 함께 죽을 뻔했어. 그를 원망하진 않지만······ 만약. 만약에 다른 위험이 또 찾아온다면?’


가장 만나기 힘든 용왕도 찾아왔는데, 다른 강대한 존재가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공격한다면?


물론 찬크에르가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때는 자신만이 아니라 아이리스까지도 지켜야 한다. 마을에 직접 찾아왔다면 주민들까지······


용왕인 찬크에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같은 용왕이나 동급인 상대에게도 통용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땐 과연 아이리스. 내 소중한 아이를 지킬 수 있을 있겠는가.


――그때처럼 아이리스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단순히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오싹한 기분에 소름까지 돋았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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