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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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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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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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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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DUMMY

“이, 이것이 진정 사실입니까? 우린 단순히 마족과 교류가 있던 인간의 마을이라고······”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아시리트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바지탄스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보다시피. 여기서 이주한 마족들은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고 삶을 다했겠지. 그래서 이전에 교류했던 이야기만이 이베시온에 남겨졌을 거다. 우린 그걸 들은 거고. 더 많은 이야기나 문헌들이 있었겠지만, 그것도 이들이 없애버렸겠지. 이 마을을 위해서······”


전부 자신의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바지탄스는 이 일지에 적힌 사람들이라면 그랬을 거 같았다.


실제로 800여 년도 더 전이지만 이베시온에는 다른 나라와의 교역한 기록들은 제법 많았으나, 이 마을에 관한 내용만은 구멍이 숭숭 뚫린 듯 거의 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것도 대부분이 구전의 행태 같은 아리송한 것들 뿐이었다.


‘이 마을과 제일 가깝던 마국의 도시는 이베시온 뿐이니 다른 도시에는 아예 정보 자체가 없겠지.’



“그러면 저희들은······”

“아니. 애당초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몹쓸 짓이었다. 일지를 보고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알았다고 해서 바뀔 일이 아니야. 그렇지 않나?”

“······.”


그렇다. 무슨 변명을 하든 자신들이 저지르려 했던 일에는 아무 정당성은 없다. 마족으로서의 긍지조차 내버린 것이었으니까.


계획을 알고 있던 아시리트와 티라이드, 이 둘도 같은 의견이었는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바지탄스를 비롯해 갑자기 묻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란 건 아니었다. 말을 건 사람이 누군지는 안다.


우리들의 구세주니까.


그 목소리를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들린 음성은 너무나 차갑고 이질적이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린 시선에는 자리에서 일어선 은발과 분홍 눈의 구세주―― 이스피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셋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뻔했다.


에르처럼 살기를 내뿜는 건 아니었다. 마력을 내뿜어 위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몸 안쪽에서부터 지금 당장 용서를 구하라 외치고 있었다.


이스피리아―― 우리의 은인이자 여신인 아가씨는 절대 우리가 하려 했던 일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영혼부터라고 말해도 좋았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죄하는 게 우리와 이분을 위한 일이라며 전신이 외치고 있었다.


굳어진 그들을 두고 리아는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죠. ‘무엇’을 하려 했었죠?”


흐리멍텅해 보였던 인상은 그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해맑게 웃어 보였던 미소는 자취를 감춰 무표정이었으며, 인간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정 하나 줄 것 같지 않은 차디찬 눈이 맑게 빛나며 심연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거짓을 고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만약이라는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러한 가정은 자신의 안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듯했다.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긴장감에 바지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시리트와 티라이드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며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참회를 고하고 싶은 듯 보인다.


패자, 패왕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좋았다. 뭔지 모를 위압감을 내뿜는 리아에게 방에 있는 전원, 하물며 그 무서웠던 찬크에르조차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였다.


이제 열 살 조금 넘은 작은 아이가 지배하는 방엔 침묵만이 흘렀고, 겨우 마음을 정한 바지탄스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 저희는··· 이······ 이 마을을······ 야, 약탈······ 하려 해, 했습니다.”


털썩.


간신히 말을 마친 바지탄스는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 아시리트와 티라이드도 곧장 무릎을 꿇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어려움에 부닥친 이를, 그것도 마족이건만 받아들여 줬더니 약탈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딴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루데릭과 잭, 에이브안은 대놓고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담아 노려보았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은 리아였다. 격해졌으면서도 아무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찬크에르만이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가운데, 리아가 다시 조용히 말하였다.



“그래서요. 약탈하고 나선?”


약탈까진 그래도 어떻게든 용서를 받을 수도 있어 보인다. 아직 일을 저지르진 않았던데다, 바로 마음을 접었으니까.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리아에게 분노를 산다고 생각하니 바지탄스는 몸이 떨려왔다.


추방이면 다행이고, 여차하면 죽는다. 어떻게든 추방 선에서 끝나도록 해야할 거다.


부하들의 목숨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 그러나 자신의 추방이나 목숨 따윈 어찌 돼도 상관없었다.


――그저 아가씨에게 실망과 분노를 사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 생각이 들자 조금 전에는 떨어지지도 않던 입이 열려 셋은 참회하듯 외쳤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못 드립니다. 그래도 믿어 주십사 합니다! 처음엔 분명 그러한 계획을 획책했지만, 아가씨를 뵙고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하지만 마족의 긍지조차 버린 더러운 계획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러니 부디 저의 목 하나로. 부하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 상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저희는 그러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지탄스 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관이면서 말리지 않은 제 잘못이 더 큽니다. 그러니 부디 저 하나로 모두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아뇨! 저 또한 이 계획을 알고 있었던데다 아가씨께 활도 쐈던 제 잘못이 작진 않습니다. 부디 대장과 아시리트를······ 제 목이 그리 값어치 있다 생각하진 않지만, 부디 우리 부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딱.


서로 소리 높여 외치는 가운데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진정되어가는 걸 느꼈다.


마법······?


공포나 패닉에 빠진 사람을 진정시키는 마법이 있는 건 안다. 군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주 볼 일이 있는 마법이기도 했다. 아시리트도 사용할 줄 알고.


그만큼 제법 흔하여 군에 있지 않아도 아예 못 볼 정도의 마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에게 적용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이런 류의 마법은 대체로 받는 대상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화과는 무산되기 일쑤였다. 공포나 패닉에 빠진 사람이면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할 수 없어 두어 번 사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단번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마법의 발동어는커녕 아무런 마력조차 못 느꼈다.


발동어는 그렇다 치고 쉽게 넘길 수 있었다. 어제 찬크에르가 집을 지어줄 때도 아무 발동어 없이 모두가 잘 수 있는 크기의 집을 만들어 경악했었으니까.


그런데 기본적으로 생물은 남이 거는 마법을 거절한다.


조금 전은 약간 패닉상태와 비슷했던데다가, 나름대로 경험을 쌓은 노련한 베테랑이었다. 혼란, 매혹 등의 마법에 저항하는 훈련은 착실히 해왔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리 쉽게 걸렸는가? 애당초 마력도 안 느껴졌는데 마법은 맞긴 한 건가?


무수히 의문이 들었지만 감각으로 봐서는 마법 같다.


강제로 진정된 바지탄스는 생각을 정리하고 놀란 눈으로 손가락만 튕겨 세명에게 동시에 마법을 건 상대―― 이스피리아를 봤다.



“여러분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물어본 건 약탈하고 난 이후에요.”


여전히 다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차갑게 대답을 종용하는 리아.


그랬었다. 리아가 물어본 건 처음부터 이다음의 일이었다. 이쪽의 참회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바지탄스는 표정을 읽어보려 했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내 감정만이 아가씨에게 들여다보이는 듯해.’


강제로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요동쳤다. 하지만 이 이상 입 다무는 걸 용납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바지탄스는 주먹을 꽉 쥐어 용기를 돋게 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약탈하고 난 뒤엔······ 부족한 식량으로 이번 해를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이곳 주민들을······ 최소한의 자비라 생각하여······”


모두 그의 말을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죽이려 했습니다.”


바지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데릭이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들아! 약탈하려던 것도 모자라 죽여?! 뭐가 최소한의 자비냐?!”


분노에 지배당한 루데릭은 바지탄스에게 전력의 마력을 담은 주먹을 그의 얼굴에 때려 박으려 했다.


하지만 한 걸음 뗀 시점에 찬크에르에게 팔을 붙잡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거 놔, 찬크에르!”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루데릭. 조금 진정하도록.”

“뭐가 안 끝나?! 이 자식들이 자기들 입으로―― 너······”


말을 흐린 루데릭은 힘을 뺐다.


찬크에르는 냉정해 보였지만, 사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아이리스를 잃어버렸을 때와 동등할 정도로 분노했다.


아니. 소중한 사람들이 더 많아진 만큼 그보다도 더욱 열화와 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눈앞에 있는 무뢰배들―― 이제는 버러지나 쓰레기 정도로 보이는 이들을 털끝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평소 침착하기만 한 찬크에르의 이런 모습은 굉장히 드물다.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그도 엄연히 감정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지금 바지탄스들은 살 수 있었다.


찬크에르는 심판자라 부르는 용왕 중에서도 그 기준이 엄격하다는 암룡왕이다. 그 엄격함이, 용왕으로서 생명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마음이 제동을 걸었던 거다.



“칫.”


혀를 찬 루데릭은 근처 벽에 기대 바지탄스들을 째려봤다.


아직도 쥐어 패고 싶지만, 찬크에르도 참는 것이다. 자기만 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리아, 여동생의 말하기 힘든 분위기가 이 이상 함부로 나서는 걸 주저하게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신성하다고 해야 하나?’


리아 주제에 신성하다니.


루데릭도 자신의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평소의 리아와는 많이 달랐다. 주위를 압도하는 뭔가가 있다.


그런 리아는 잠자코 있다 주변이 정리되자 말하였다.



“최소한의 자비라······ 그렇군요. 확실히 겨울이 다가오는데 곧 수확할 시기인 밀과 보리를 약탈당한다면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아사하는 분들도 나오겠지요. ――이전이었으면. 하지만 지금은 저와 에르가 있고, 밭도 다행이 넓혀놨죠. 축적한 식량들도 있어서 당신들을 모두 받아들이더라도 식량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제 말이 어떤가요, 촌장님. 틀린 부분이 있나요?”

“뭐······?”


루데릭은 냉철하게 바지탄스의 말을 분석하는 리아에게 섬뜩함을 느꼈다.


리아가 아니다.


그리 생각할 정도로 평소 주민들을 좋아하고 걱정하던 자신의 여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무엇 때문에 마을을 떠났었나? 자신과 아이리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위해 망상 같은 위험에 대비한다며 떠났던 거다.


그렇게까지 했던 리아가 자신보다 화를 내진 못할 망정 바지탄스의 저 불합리한 개소리를 긍정한 것이다.


다르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지금 이 리아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랐다.


심란한 루데릭을 뒤로 하고, 에이브안은 촌장으로서 답했다. 14살이라는―― 그것도 손녀에 불과한 리아를 본인과 대등한 입장의 사람이라 인정하며.



“아니. 전부 맞는 말이다. 저들을 받아들이더라도 식량엔 전혀 문제가 없을뿐더러, 새로운 일손까지 늘어났지. 생활적인 부분엔 오히려 보탬이 많이 될 거다. 신뢰할 수 있을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그런가요? 그럼, 바지탄스 씨. 당신에게 묻지요. 당신들은 아직도 우리 마을에 해를 끼칠 의향이 있습니까?”


판결을 기다리던 바지탄스는 고개를 들었다.


이쪽의 말을 완전히 믿어주는 건지 알 수 없다. 리아는 여태 진실공방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거짓은 하나도 입에 담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만을 했고, 지금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지금껏 한 말들로 봐서는 우리들의 구세주는 반드시 용서해주시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애당초 이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을 거고, 에이브안에게 식량은 충분하냐고 확인받지도 않았을 테다.


그래서 망설여졌다. 정말 이것으로 용서받아도 되나 싶어서.


일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원래부터 자신들은 그럴 목적으로 이곳으로 왔다.


때마침 식량이 모자라지 않아서, 리아와 찬크에르라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있었기에 그만둔 게 아닐까. 반대의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이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렇지만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저뿐만 아니라, 부하들 모두는 이 마을과 아가씨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결단코 그러한 수치는 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군요.”


그리 말한 리아는 방안을 둘러봤다.



“바지탄스 씨―― 마족 분들이 우리 마을에서 지낸다는 데에 이의 있으신 분 있나요?”

“에······?”


역시 예상대로였다. 리아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이쪽을 믿어줬다.


이런 반응에 아시리트와 티라이드 그리고······ 루데릭은 믿을 수 없어 했다.



“자, 잠깐. 그렇게 쉽게? 처음부터 우리 마을을 약탈하러 온 놈들이 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믿는다고?”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루데릭의 의견에 동조해 아시리트와 티라이드는 빤히 리아를 쳐다봤다.



“네, 오라버니. 바지탄스 씨가 한 말은 진심이고, 어길 마음도 없다는 건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네요. 이대로 넘어가라는 것도 서로 앙금이 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럼, 바지탄스 씨?”

“예! 말씀하십시오.”

“이걸 물어보지 않았네요. 여러분들은 이후 어떻게 지내실 건가요? 마국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면 이곳에서 정착을 원하시는 건가요?”

“마국으로 돌아가는 건 녹록지 않을 테지만, 이곳에서 정비한다면 돌아갈 순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바지탄스는 옆에 있는 부하들을 봤다.


둘은 달리 묻진 않았으나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바지탄스는 확고한 의사를 담아 말하였다.


“저희는 이 마을······ 나트알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끔 이베시온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도시 주민들의 주검을 수습하여 명복을 빌어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허락받으실 필요는 없어요.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오시면 됩니다. 당신들은 포로가 아녜요. 지내시다가 마을이 마음에 안 든다면 언제든지 떠나셔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정착하신다면 모두를 도와 같이 생활해주신다면 고맙겠어요.”

“예. 배려 감사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당신들은 마국의 군 소속이 아닌가요?”

“국경수비대 소속이긴 합니다만, 이베시온은 국경에서도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군 소속이라 해도 지리적 요충지도 아닌 곳이라 도시 방범대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정보도 변변찮은 것들만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일지에 적힌 대로라면 테그리다데 블러드티어 씨―― 마왕은 다른 종족과의 융화를 원하는 듯싶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죠. 만약 아니라면 당신들은 배신자나 탈영병으로 낙인찍힐 텐데 괜찮으세요? 그러면 당신들의 왕인 마왕을 저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음······ 아마 없다고 예상은 하지만, 그 부분은 부하들에게 들어보고 돌아가길 희망하는 자가 있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흰 마왕께 충성을 맹세하고자 도시 경비대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베시온, 그 도시를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거기에 제 마음의 주인은 이미 아가씨로, 다른 자를 모실 생각 따윈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대장과 함께 아가씨를 모시겠습니다!”

“절 모시거나 할 필요는――”

“――웃기지마!”


벽에 기대고 있던 루데릭은 튀어나와 소리쳤다.



“모시며 살고 싶다고?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니들 따위를 리아의 곁에 둘까 보냐!”

“오라버니······”

“루데릭!!”


방안에 노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은 소리의 진원지로 향하고······ 그곳에는 에이브안이 있었다.


에이브안이 이리 화내는 건 굉장히 드물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그는 지금 촌장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


그리고 그 감정에 따라 에이브안에게서 강대한 마력이 바깥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찌를 듯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지고, 루데릭뿐 아니라, 바지탄스들도 식은땀을 흘렸다.



“어리광부리지 마라, 루데릭. 이 자리에 참여한 의미를 알고 있는 거냐? 마을을 대표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개인의 감정만을 내세우는 자리가 아니라는 거다.”

“큭······ 죄송합니다.”


조용히 사과하는 루데릭. 아무리 조숙하게 보이더라도 그는 이제 16살이다.


리아처럼 전세의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소년에 불과한 것이다. 부족한 점은 아직 많은데다 리아와 관련된 일이라 평정심이 쉽게 무너졌다.


그런 루데릭을 찬찬히 바라보던 바지탄스는 말했다.



“도련님.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건 공감합니다. 그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조금이라도 믿어 주십사······”


말을 하며 바지탄스는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마력이 모이더니――


뿌득! 콰직!


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뭘?!”

“바, 바지탄스 님!”

“대장! 파, 팔을?!”


루데릭은 망연자실하게 바지탄스의 왼팔을 봤다.


뼈가 살까지 뚫고 나와 근육과 신경을 손상시킨 저 왼팔은 확실하게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다.


그랬다. 바지탄스는 자신의 손으로 전사로서의 생명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의 파트너인 대검은 물론이거니와 싸울 힘 자체를 깎아내린 거다.


바지탄스가 강하다는 건 감각으로 알았다. 아마 잭이나 에이브안 정도로 강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한쪽 팔을 포기한 거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도 나름 검을 휘두르는 자다. 한쪽 팔을 포기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완벽한 의지의 표명이라 봐도 무방했다. 바지탄스 자신이 한 말은 거짓도 무엇도 아닌 사실만을 말한 것임을. 정말로 바지탄스는 리아를 모시며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용서가 안 되신다면······”


바지탄스는 자신의 한쪽 뿔, 마족이라는 증거이자 긍지라고도 할 수 있는 뿔을 잡았다.


망설임 없이 서서히 힘이 들어가며 압력이 가해지고――



“그만. 거기까지 하세요.”


리아의 부름에 의해 멈춰졌다.



“바지탄스 씨, 절 모신다고 했죠? 그렇다면 그 팔도 절 도와주시는데 필요합니다. 멋대로 버리는 건 용서하지 않아요.”


딱.


리아는 짧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바지탄스는 서서히 마비가 되어 가던 왼팔에서 전류가 흐느는 듯했다. 그리고 팔을 으스러뜨릴 때보다도 더한 고통에 참을 수 없게 되어 신음을 흘렸다.



“크아! 으······!”

“바지탄스 님!”

“대장!”


팔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바지탄스를 보기 힘들었던지, 아시리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이마를 땅에 박고는 넙죽 엎드려 외쳤다.



“아가씨! 부디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하다면 제가······ 제가 대신 벌을 받을 테니 더 이상 바지탄스 님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처절한 외침이었다. 아시리트가 얼마나 바지탄스를 위하는지 절절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들이 증오스러운 루데릭조차도 가슴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리아는 여전히 감정이 없어 보이는 시선으로 아시리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뭘 착각하고 계시나요. 저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취미 따윈 없어요. 바지탄스 씨의 팔을 다시 보세요.”

“네······?”


아시리트는 고개를 들었다.


눈망울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륵 떨어지고,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리아는 재차 다시 보라 권하였다.


바지탄스의 으스러진 왼팔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아시리트가 쳐다봤을 때는 이미 거의 다 나아가고 있었다.


바지탄스가 고통에 괴로워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죽어가던 감각이 되살아났기에 통증이 어마어마했던 거다.



“이, 이건······?!”

“대, 대장의 팔이!”


아시리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가씨, 혹시 이건······ 치유마법입니까?”

“맞아요. 정확히는 [치유]와 [정화]죠. 세균이 들어가면 곤란하니까요. 바지탄스 씨를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저, 정화?!”


아시리트만이 아닌, 바지탄스와 티라이드도 눈을 부릅떴다.


[정화]란 온갖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적의 마법. 그만큼 그 마법은 쓸 수 있는 자가 극도로 적었다. 환상속의 마법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마법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루시아스교의 성녀와 성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으로, 교단은 [정화]가 생명의 신께서 내린 축복이라 대대로 선전했던 거다. 더불어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다녔기에 실존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지금은 마족과 인간의 갈등이 심해졌기에 대륙 중앙에 있는 총본산―― 세인트리안에는 갈 수 없게 되었지만, 루시아스교는 마국 내에도 있기에 마족들에게도 유명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을 쓸 수 있는 리아.


무릎을 꿇고 있는 셋은 같은 생각을 했다.


――자비로운 우리의 여신께서는 정말로 성녀였다고.



“당신들의 처우를 결정했어요.”


꿀꺽.


바지탄스들은 자세를 바로잡아 경외하는 성녀, 리아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아까 포로가 아니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했던 걸 번복할게요. 바지탄스 씨와 아시리트 씨, 티라이드 씨, 세 분은 다른 마족 분들을 대신해 앞으로 평생 저를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세요. 그걸로 이번 일은 모두 물에 흘려보내도록 하죠.”


바라마지 않던 바람이다. 되려 관대하기만 한 처사.


망설임도 없이 셋은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표했다.



“아가씨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루데릭은 리아에게 물었다. 확인을 위한 것으로, 아까와 달리 어리광부리는 건 아니었다.



“리아,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네. 누군가가 절 모신다거나 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요. 그리고 평생이에요. 죗값으론 충분하다고 봐요.”

“그게 아니라, 왜 하필 곁에 두려고 하는 건데?”

“이들도 바라고 있고, 무엇보다 제가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만약 리아를 다치게 한다면――”

“――아뇨. 바지탄스 씨들에겐 미안하지만, 설령 제가 무저항으로 있더라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제가 다칠 일은 없다는 거죠. ······그리고 정말로 바지탄스 씨들이 저를 배신하고 공격할 거로 생각해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루데릭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저만한 각오를 보였던 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저 같은 꼬마 계집을 섬기는 거니 나름의 벌도 되겠죠.”


그렇게 말한 리아는 몸을 돌렸다.



“촌장님 그리고 경비장 님. 마을의 일인데 저 혼자 마음대로 결정해서 죄송하게 됐어요.”

“아니다. 납득이 가는 선이었단다. 이야기를 번복했던 것도 우리를 납득시키기 위함이었겠지. 솔직히 말해 이들이 날뛴다면 우리로서는 처치 곤란이고, 기습이라도 당하면 무력하게 죽을 테니.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우리에게 해가 없다는 보증은 없다. 그 부분은 어떠니?”


바지탄스들의 행동을 보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표로 모여 대화하는 자리이다. 주민을 지킬 의무가 있는 촌장으로서도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 뜻을 알았는지 리아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확실하게 마법으로 제약을 걸어두려고요.”

“계약마법이니?”

“조금 다른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대충 말씀드리자면 우리 마을사람들에게 평생 해를 끼치면 안 되게 하는 마법이에요. 새로이 주민이 되는 분들에게도 적용이 되죠.”

“그걸 모두에게 건다는 뜻이니?”

“네. 예외를 남겨둬서는 엄한 불안만 조장할 테니까요.”

“훌륭한 판단이다. 믿고 맡기마.”


대화를 마친 리아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듯한 모습인 바지탄스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세 분,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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