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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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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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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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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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DUMMY

“후아아암. 잘 잤다. 에르는······ 아, 할아버지 집에서 머문다고 했지.”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맑은 햇살이 비치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해는 없고, 참새 같은 새라도 엄청나게 크겠지만······’


리아는 막 일어나 조금 멍한 머리로 우드득 기지개를 켜면서 밝은 방 안을 둘러봤다.


너무나 그리운 방안은 떠나기 전과 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필리아가 청소도 해주어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로, 덕분에 바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분명 청결마법으로는 청소해도 바닥에 쌓이니까 이렇게 유지하긴 귀찮았을 텐데······”


오랜만에 느끼는 부모님의 사랑에 리아는 감동하며 옆을 봤다.


그곳에는 회색빛의 머리칼이 흐트러진 아이리스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단잠에 빠져있었다.


자신과 에르를 닮은 얼굴을 사랑스럽게 보면서 리아는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줬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보면 볼수록 귀엽고 잘생겼네.”


속눈썹도 길고 어여쁜 것이 꼭 만화 속에서나 등장할만한 어린 왕자님 그 자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여 절대 모자로는 안 보이겠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오라버니처럼 소꿉친구로 보이는 거 아니야? 아니면 남매라든가. 가족처럼 보이는 건 그래도 기쁘지만······ 난 엄마인데. 설마······ 동생까진 아니겠지? 같은 베개도 사용하는 사이인데―― 아. 베개는 남매라도 같이 사용할 수 있겠구나. 뭐가 됐든 안돼! 남매로 보이면 엄마로서 위엄이······’



“우~으······응~ 엉?”


아이리스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막 기상하여 초점이 흐릿한 회색빛의 눈동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옆에 있는 리아를 발견하고는 하품을 하며 아이리스는 일어났다.



“어머니?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앗. 엄마 때문에 깼니? 미안해 잘 자고 있었는데.”

“뭐······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잖아요. 잘 주무셨어요?”

“응. 엄마는 잘 잤지. 오랜만에 집에서 자서 좋았어. 아이리스도 간만에 집에서 자니까 좋지?”

“저는 할머니의 방에서 많이 잤지만요.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서 자니까 좋긴 하네요.”

“후후. 에르와도 같이 자는 데 익숙해졌으니까 앞으로도 같이 자는 거다? 알겠지, 아이리스?”

“에휴. 알았어요. 할머니들과 자는 건 가끔 할게요.”

“정 그러면 나도 같이 가서 다섯이서 잘까? 아······ 에르는 거북할 수 있으려나? 부모님도. 그래도 에르 혼자 자기엔······”

“어머니! 그거에요!!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분명 어머니랑 자고 싶을 거예요. 아빠는 가끔 혼자 자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잘난 용왕이잖아요?”

“후훗. 그렇게도 다 함께 자고 싶은 거니?”


아이리스의 귀여운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됐지만, 에르 혼자 잔다는 생각에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인 양 달려들었다.


그런 거듭되는 설득에 리아의 마음은 차츰 기울어져만 갔다.


똑똑.



“응?”


문 두들기는 소리에 대화는 잠시 중단되고,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보이는 마력은······ 필리아였다.


‘아침부터 떠들어서 깨셨나.’


일단 마력으로 봤을 땐 화나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혼나진 않겠다는 생각에 리아는 얼른 침대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밖에는 5년 전과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모습의 필리아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젊은 시절이 엄청나게 긴 오엘문리아에서 급격히 늙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가련해 보이는 필리아를 보니 정말 기쁘고 반가웠다.


그 기분 그대로 리아는 필리아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잘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단다. 후후. 아침부터 떠들썩하고 즐거웠니?”

“네. 우리 집이라 좋았어요.”


자신의 대답에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필리아의 손길에 리아는 그리움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 집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몰랐는데, 어머니, 보이는 것과 달리 가슴이 크시구나. 그래서 나도 조금은 성장할 수 있었던 건가? 정작 키는 별로 안 컸지만······’


얼굴을 압박하는 감각으로 대강 가늠해 볼 때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인 관측을 하고 있던 리아의 옆으로 아이리스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 잘 잤니, 아이리스?”


필리아는 바로 리아에게서 떨어져 이번에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떨어지는 필리아가 엄청나게 아쉬웠지만, 아들을 상대로 질투할 수는 없었고 둘이 웃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네. 저는 잘 잤는데, 간만에 할머니들과 함께 자고 싶어요.”

“어머! 우리도 아이리스가 그리웠는데. 이제 우리들과 함께 자기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단다.”

“아뇨.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오히려 매일! 네, 맞아요. 매일 같이 자도록 하죠. 아빠는 함께하기 그러니 넷이서 자죠!”

“그래도 찬크에르씨 혼자 주무시게 하는 건······”

“잘 생각해보세요, 할머니. 아빠는 아직 어렸던 어머니를 데리고 5년이나 외박했습니다. 무려 5년을! 그러니 며칠이나 한두 달 정도는 혼자 지내도 전혀 상관없을 거라 사료됩니다!”

“으음. 그렇지만······”


손을 붙잡고는 강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의견을 피력하는 아이리스.


그 파상공세 같은 설득에 필리아가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필리아의 마음이 거의 다 넘어가는 것을 본 리아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괴, 굉장해. 내 아들이지만 정말 너무 대단해. 우리 어머니를 저리도 쉽고 빠르게 설득하다니. 예전부터 날 닮아 귀엽고, 똑똑했지만 이젠 어머니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야? 진짜 대단해!’


결국 1주일에 한두 번은 같이 자기로 결정되려 하고 있었다.



“으하암. 다들 잘 잤니?”

“엇.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어머나, 일어났어요? 아침 준비할게요. 자, 다들 씻으세요.”


이스카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화는 끝났고, 협상은······ 극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칫.”


아이리스는 조용히 혀를 찼다.


너무 버릇없어 보여 리아는 한마디 하려 했으나, 그만큼 아쉬운 게 아닌가 싶어 강하게 나가진 못했다.


어쩌면 협상을 중단시킨 이스카르에게 원한이 생기진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밝게 인사하는 걸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그럼 씻고 올게.”

“아. 저도 같이 가요, 할아버지.”


역시 착각은 아니었는지 아이리스는 씻으러 욕실 겸 화장실로 가는 이스카르를 따라 같이 들어갔다.


리아도 내심 같이 씻고 싶었지만······ 이스카르와 함께 씻기에는 이젠 정말 무리여서 포기했다.


물론 아이리스는 괜찮다. 아들이고 아직 7살, 지구로 따지면 이제 막 초등학생이니 전혀 문제없었다. 아이리스만 갔다면 냉큼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오히려 앞으로 같이 씻을 시간이 몇 년 안 남았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씩 초조해졌다.


아이리스는 이전부터 같이 씻는 걸 피하는 조짐이 있었지만, 에르와 살고 나서부터는 언제나 자신을 피해 달아났다.


간단하게 말해 모자간의 단란한 목욕 시간 자체가 애당초부터도 적었던 거다. 그러니 더더욱 초조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도망치는 핑계가 자신은 남자라고 했던 것도 같은데······. 단순히 도망치기 위한 변명은 아니었구나. 그때는 생후 24개월 정도밖에 안 됐으니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아이리스는 똑똑하니 부끄러웠을 수도 있었겠어.’


조금 반성했지만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시도해볼 속셈이다. 쉽게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운 모자지간의 특별한 시간이니.



“근데 아직도 탕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나?”


드래곤 때와는 달리 온탕으로 바뀌었다는 소리를 에르에게 듣기는 했지만, 요즘에는 같이 씻은 적이 없다 보니 잘 모르겠다. 씻는 시간이 제법 길긴 했으니 여전히 탕에 잠기는 걸 좋아하는 듯싶지만.



“부럽다······ 아버지도 탕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니 즐겁겠네.”


원래 이스카르에겐 탕에 들어간다는 개념이 없었지만, 아이리스가 목욕을 즐기는 모습을 보더니 이후엔 본인도 자주 즐기게 됐다.


서로 씻는 방법도 비슷하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되려 꽤 좋은 편에 속한다.


고로, 둘의 목욕 시간은 상당히 화목하여, 물 끼얹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나도······’


정말 즐거워 보이는 소리에 리아는 더욱 포기하기 싫어졌다.


정말 재밌게 잘 즐겼는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둘이 욕실을 나오는 시간은 제법 걸렸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


필리아의 요리가 거의 다 되어가는 즈음이라 서둘러야 했다.


탕은 포기한 리아는 빠르게 청결마법으로 후딱 씻고는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으음. 역시 부담돼.”


아무리 키가 안 컸다지만, 10cm는 조금 넘게 커졌기에 집에서 입던 옷들은 전부 짧았다.


5년여 전, 집을 떠날 때 필리아가 성장에 맞게 옷을 크기별로 준비해주려고도 했지만······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받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부담을 주기 싫어 거절했었다. 잠옷만은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아졌어도 개의치 않고 입었지만.


결국 옷을 새로 장만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에르가 가지고 있던 옷을 리폼해줘서 해결해줬다.


다만······ 에르가 지닌 옷들은 전부 고급품이었다.


그의 동포들이 세상에 나가 돌아올 때면 매번 여러 물건을 주던 게 쌓였던 것이라는데, 선물이었던 만큼 각자 당시 시대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로 좋은 물건으로만 엄선했다고 한다.


전부 백방 억 소리 나올 것들이었으며, 차원수납에 넣어 놨던 것들이기에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모두 새것처럼 깨끗이 잘 보존되어있었다.


그 안에는 분명 지금 시대에는 역사학적으로 매우 귀중하고 가치를 따지기 무서운 물건도 많았으나, 에르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리폼에 필요한 질 좋은 옷을 꺼내 뚝딱 수선할 뿐이었다.


‘과감하게 자를 때는 내가 다 식겁했어.’


물론 에르는 몰랐기도 했거니와 알았다 한들 아낌없이 썼을 거란 느낌이 든다.


거기에 에르의 솜씨는 훌륭했고 센스까지 좋았다.


만들어진 결과물은 지금 당장 왕을 알현하러 간다고 해도 복장에는 전혀 트집 잡히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드는 옷이 탄생하게 됐다.


‘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분명 뜬금없이 찾아가더라도 타국 중역의 자녀인 줄 알고 매몰차게 내쫓지는 않겠지.’


그런 옷이 3벌이나 만들어졌다.


이것도 엄청 비쌀 거 같은 옷들이 잘려 나가 지레 겁을 먹고 말렸기에 3벌로 끝난 것이었다. 당초 에르는 열댓 벌을 만들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완성된 옷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값비싸 보였다. 입는데 겁날 만큼······



“그나마 위안이라면 너무 화려하진 않아 평상복으로 아예 못 입을 정도는 아니라는 건데······”


리아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옷을 보았다.


흰색을 바탕으로 짙은 검정으로 포인트를 두고, 금실과 은실로 자수가 수놓아진 드레스―― 아니, 속의 안감은 있지만 부풀어 보이게 하는 효과는 없었기에 원피스 같은 느낌이 강했다.


세트로 회색의 겉옷도 있었다.


겉옷도 마찬가지로 금, 은실로 자수가 놓아졌고, 드레스와 같이 입었을 때 자수가 이어지며 전혀 다른 모양을 만들어지도록 치밀하게 짜인 것이었다.


에르와 아이리스, 그리고 자신의 색을 따와 만든 작품과도 같은 이 드레스는 입는 사람도 잘 고려하여 혼자 입기도 편했다.


하지만······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시골 마을에서 입기에는 무척 부자연스럽다.


산속에서는 보는 시선도 없어 계속 입고 있었지만, 마을에서는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아, 아니야. 에르가 만들어 준데다가 엄청 예쁘잖아. 아이리스도 비슷한 옷이기도 하니 나름 가족 같아 보이겠지. 응. 그렇게 생각하자. 어차피 다른 두 옷도 마찬가지고······. 어젠······ 잘도 입고 돌아다녔구나.”


조금 체념하며 리아는 거실로 나왔다.


식사 준비는 모두 끝나 다들 기다려주고 있었다. 다행히 옷차림에 대해선 별 언급이 없었다.


안심한 리아는 희희낙락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응?”

“왜 그러니?”

“아, 아뇨. 그······ 어머니? 채소뿐인데, 두 분은 괜찮으신 거예요?”


식탁에 차려진 요리는 고기류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풀떼기의 향연. 절대 정상적인 한끼 식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필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였다.



“어제 잔치에서 들었단다. 고기 종류를 먹기 힘들어한다며?”

“엇, 네. 그건 그런데······”


그러고 보니 어제 아무도 고기를 권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리아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머릿속은 잔치할 때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장면을 정확히―― 마치 비디오를 재생한 듯 생생히 떠올렸다.


‘오라버니랑 할아버지가 알려줬구나. 알려준 건 에르고.’


이 정도로 선명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당시 알았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역할 분담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머릿속에서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기에 그만큼 다른 일엔 신경 쓰기가 어려웠다.


쉽게 말해 바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처럼 바로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심 조심은 하고 있지만.


‘기억력이 좋아져서 다행이야. 당분간은 지금처럼 다시 되짚으면 문제는 없겠지.’


그런데 몇 년 전의 일까지도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는 건 좀 이상하다. 좋아져도 너무 좋아졌다는 느낌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리아, 그건 그만하고 말해주렴.”

“응? 뭐를요, 어머니?”

“혼잣말―― 아니, 고기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니?”

“하긴 옛날에도 마수고기를 좀 꺼리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 그게요.”


이스카르도 의아해하고, 리아는 볼을 긁적였다.



“마력레벨을 어느 정도 올리고 나서부터 그러더라고요. 분명 냄새는 너무 맛있을 거 같은데, 막상 먹으려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빠져요.”

“이유는 모르고?”

“네.”

“하아. 모르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또 못 먹는 게 있니?”

“어······ 달걀 같은 알 종류도 못 먹겠어요.”


어느새 채식주의자 마냥 된 딸의 모습에 필리아는 고심이 많아졌다. 아마 앞으로의 식단을 구상하는 게 아닐까.


걱정은 안 된다. 실수로 고기를 넣었다 한들 이젠 거의 감별사 수준으로 바로 판별해낼 수 있기에 곤란한 일 따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유는 먹을 수 있으려나······? 아! 그게 아니지 참. 모두 날 배려하느라 채소만 먹을 필요는 없어!!’


리아는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저 때문에 식단을 통일하시지 않아도 돼요. 제 몫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특히 아이리스는 이제 7살! 많이 먹고 쑥쑥 커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적게 먹다 저처럼 못 크면 안 돼요!”

“아, 알았단다. 혹시 싫어할까 봐 그랬어. 괜찮다면 리아의 것은 따로 만들기로 할게.”


기세가 좋았던 탓일까. 필리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즉각 수용해줬다.


하지만 그 드물었던 모습도 잠시. 이내 필리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우리 리아가 별로 크지 못한 이유가 먹지 못해서였니? 후후후······ 찬크에르 씨가 돌아오면 꼭 좀 물어봐야겠구나. 아무리 채소뿐이라지만 못 먹어서라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구나. 우후훗······”


머리 한구석에선 비슷한 일이 떠올라 그립기도 했지만, 돌아올 때도 예상했던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에르의 위기야! 잘못하면 사냥당할지도 몰라!’


비상사태에 리아는 혼비백산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할머니, 이의 있습니다! 바보 아빠는 무죄가 아닙니다!”


아이리스였다.


리아와 달리 차분하게 앉아있던 아이리스는 손을 들고 발언함과 동시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응? 아이리스?”

“리아는 잠시 기다리렴. 자. 아이리스? 무슨 소리인지 말해보렴.”

“어머니가 그리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어머니는 일주일, 혹은 한 달 내내 물만 드신 적도 있습니다! 그 물조차도 며칠이나, 몇 주에 한 번이었습니다! 영양은 충분히 모자랐던 겁니다!!”

“아, 아이리스?! 다, 다 알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아, 아니에요, 어머니. 그거 때문이 아닙니다!”


리아는 최대한 필사적으로 에르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필리아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져만 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스카르도 조금씩 인상이 일그러뜨려졌다.


일이 점점 커진다.


‘아이리스. 왜 이리 심술을 부리니?!’


에르와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인의 아빠가 사냥당할 수 있는 중대사였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건가 싶어 당혹스럽기만 하다.


――똑똑.


한겨울 같은 냉기가 가득한 거실에 울리는 노크 소리.


그리고――



“다녀왔다, 리아. 식사는 제대로 했나?”


――피고인으로 몰아지고 있는 에르가 돌아왔다.


‘왜 이 타이밍에?! 좀 더 할아버지 집에 있어도 될걸!’


어차피 식사 시간에도 늦었는데 이 순간에 돌아온 그가 좀 야속하기만 했다.



“에르!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세요!”

“리아는 조용히 하렴. 자자. 찬크에르 씨? 부디 이리로.”

“그래, 찬크에르. 이리 와서 앉아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으음. 상관은 없네만······ 리아와 아이리스는 왜 그런 건가?”


리아는 필리아에게 가로막혀 발언권을 잃고, 에르는 안내되는 대로 의심 없이 자리에 착석했다.


심문은 곧바로 시작됐다.


믿고 맡겼는데 어떻게 물만 먹일 수 있느냐로 시작된 맹렬한 추궁.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한 달간 물만 먹인다는 게 말이 되냐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에르에겐 잘못이 없다. 그는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줬었다. 그저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처음에는 잘 챙겨 먹었다.


그러나 마력레벨이 높아질수록 배고픔이 잘 느껴지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는 공복이라는 느낌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은 멀쩡하기만 했다. 물 하나 먹지 않는 등의 실험도 해봤다. 아이리스가 이야기한 것도 이 실험 중의 하나였고.


즉 식사는 필수가 아니라 취사선택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이니 식사하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던 거다. 그래서 쉬는 시간도 없이 훈련에만 매진했었다. 실제로도 도중에 흐름이 끊기지 않아 매우 효율적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황을 필리아에게 잘 설명할 자신은 안타깝게도 없다.


그 마음을 알겠던지 에르는 눈을 마주하고는 든든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하다, 필리아. 그대 말대로 리아는 물 말고는 잘 먹으려 하질 않았지. 그조차도 생각나면 마신다는 정도야. 아무리 안 먹어도 된다지만, 보는 입장에선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잘 설득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그래서 필리아······ 그대에게 부탁이 있네.”

“어, 네. 말씀하세요.”

“식사하게끔 말해주지 않겠나? 리아는 그대의 말이라면 잘 들으니 말이야. 오늘도 가족들과 함께라면 오랜만에 식사를 할 거 같아 그 모습을 보려 시간에 맞춰 돌아왔지.”

“그전에 안 먹어도 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은 알겠어요.”


에르의 부탁을 수락한 필리아는 휘릭, 고개를 돌렸다.



“리아······? 어떻게 된 거니? 찬크에르 씨는 식사하게끔 했었다는데. 응?”


그렇다. 에르는 열심히 권해줬었다. 절대 방치 아동처럼 대하지 않았다.


‘휴~ 다행히 혐의가 벗겨진 거 같네.’


완전히 안심한 리아는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아요! 에르는 언제나 채소만인데도 훌륭한 요리들을 만들어줬어요! 처음에는 조금 서둘긴 했지만······.”

“······.”

“그, 그래도 점점 채소요리의 달인이 되어가서, 지금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 최고예요! 어머니도 맛을 본다면 깜짝 놀라실걸요?! 그러니까 절 위해 이렇게나 애써준 에르는 무죄입니다! 사냐앙······은 안 됩니다!”


아주 논리적인 말에 필리아도 인정하는지 미소를 지었다.


싸늘한 눈초리와 차가웠던 분위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분명 평소의 청순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분위기의 필리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째선지 무섭다.


다가가는 것도 멈추고 리아는 뒷걸음질 쳤다.



“그래. 찬크에르 씨는 무죄야. 사냥당할 이유가 전혀 없단다. 괜한 의심을 한 내가 미안하기만 해. ――하지만 말을 안 듣고 주변에 걱정을 끼친, 리아! 네가 사냥······이 아니라, 혼나야 하겠구나.”

“어? 저, 저기, 어머니?”


말릴 틈은 없었다.


한순간에 다가온 필리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리아를 안아 올려 본인의 무릎과 허리에 고정하듯 끼웠다.


지각 능력이 좋아진 리아는 이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수만 번은 반복한 듯한―― 그래. 마치 몸에 새겨 놓은 듯한 엄청난 숙련도와 단련된 기술이야!’


물 흐르듯 진행되는 동작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수준까지 기술을 연마한 필리아에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정도로 대단했지만······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


분명 에르의 혐의가 벗겨진 것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어째서 불씨가 나한테 튄 거야?! 왜 내가 피고인이 된 건데?!’


리아는 이해할 수 없음에 당혹해했으나······ 형벌은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다.


――‘엉덩이 팡팡’이란 참혹한 형벌이.












“우으······ 어째서 제가 엉덩이 팡팡을 당해야만 했던 건가요?”


무려! 한 달이 지났음에도 리아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고, 에르에게 보인 것도 창피하여 걸으면서 물었다.


물론 신체가 강인해져 어지간해서는 다치지도 않고, 필리아도 이전처럼 잘 조절해줬었다.


그렇지만 아픔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아픔보다는 14살이나 되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혼난 게 창피한 거야. 진짜로 아파서 눈물을 찔끔 흘린 게 아니다?’


저 혼자 찔려 누군지 모를 이들에게 변명한 리아. 그리고 에르의 죄책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리아. 내가 부탁했다지만, 애당초 내가 똑바로 했다면 그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설마 그토록 상대를 굴욕적으로 만드는 형벌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실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는지 에르는 굉장히 심란해 보였다.



“우왓! 제, 제가 잘못해서 혼난 거예요. 에르 때문이 아니에요! 그, 그렇지, 에르! 밭일! 밭일 도와주는 건 정말 괜찮나요?”


엉덩이 팡팡의 창피함보다도 그가 이리 괴로워하는 모습이 더더욱 보기 힘들다. 그래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말을 돌렸는데, 의도를 알아챈 에르는 살며시 미소 짓고는 흐름에 탑승해줬다.



“전혀 상관없어. 이전에도 몇 번 해봤었고, 리아와 함께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즐겁고 재밌어.”

“오······ 그,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환하게 웃는 에르의 모습에 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5년이나 같이 살면서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호의에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저 반짝거리는 미소만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할 말도 잃고 홍조를 띤 채 리아는 요즘 출근처가 되어버린 밭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 뒤를 에르는 쿡쿡 웃으며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모두 일찍 오셨네요.”

“오. 리아 왔니?”

“여. 오늘도 부부가 같이 왔어? 보기 좋네.”

“부부!! ······아, 아뇨. 아직 부부가 아니에요. 아쉽······지만.”

“하하. 곧 성인이 될 텐데, 그때 결혼할 거 아니야? 그런데다가 이미 아이리스도 있고. 식만 올리지 않았지 영락없이 부부잖아. 안 그래?”

“맞아. 마을에서 누구보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엄연한 부부지.”

“우······! 정말! 다들 너무 놀리세요.”


16세면 성인으로 치는 이곳에서는 결혼도 이 나이에 벌써 가능했다.


평균 수명이 200년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이른 나이에 성인으로 취급하는 건 그만큼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초인이지만 동물, 벌레도 초인인 거다. 죽을 위험은 많은 것이다.


어쩌면 지구보다도 훨씬.


그래서 2년 후면 결혼도 가능해지는 나이이지만, 에르와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진짜 그만 놀려줬으면 하네. 우리들의 결혼을 반겨주는 건 좋지만, 적당히 해줘야지. 부끄러워서 혈압이 올라 죽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될 것만 같잖아.’


불만을 토로하면서 리아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들 것을 챙겼다.



“저, 저는 이쪽에 씨와 모종이나 챙겨 갈게요!”

“그래, 알았다. 근데 적당히 하렴. 찬크에르 씨와 같이한다지만 너무 일만 하지 않니. 무리는 하지 말고.”

“괜찮아요. 제가 돕고 싶어서 그래요. 이제야 받은 만큼 돌려드릴 수 있게 됐는걸요? 무리하는 것도 아니고요.”

“후후. 그러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구나.”

“하하······ 저, 그럼 다녀올게요.”


감개무량한 듯 보이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머쓱했던 리아는 모종을 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렇게 리아가 향한 곳은 땅이 잘 갈린 고른 밭.


이곳은 보은의 일환으로서 리아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줄곧 만들었던 곳이었다. 에이브안이 만든 밭도 있었으나, 식량만은 넉넉했으면 하는 마음에 아예 새로 만들어버렸다.


에르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도리어 리아는 단순노동으로는 자신만 한 일꾼은 찾을 수 없을 거라며 자화자찬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높은 마력레벨과 그 마력에 적응하고 있는 신체로 인해 지치지 않는 기계 같이 되었기 때문에, 반복적인 일이 많은 노동에는 최적화였다.


‘밭일에서 수행의 보람을 느끼는 건 기분이 묘하지만······’


하지만 몸을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 좋았다. 아직은 몸에 적응 중이었던 지라 좋은 훈련이 되었었다.


마법은······ 까딱 힘 조절을 잘못하면 참사가 벌어지기에 그만뒀다.


이 또한 몸에 적응중이기 때문으로, 표현이 안 좋지만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너무 넓힌 건가?”


리아는 새로 개간한 넓은 토지를 쳐다봤다.


하나씩 재배하는 종을 늘리다 넓어진 밭은 마을에 원래 있던 밭만큼이나 거대해져 있었다. 커졌다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흥을 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넓어지긴 했다만, 이 정도 밭의 관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리아는 쉬고 있어도 돼. 내가 최고의 작물을 길러내 리아에게 대접하도록 하지.”

“마, 마음은 기쁜데 기왕이면 같이하도록 하죠. 함께 기른 작물이 더 맛도 좋을 거예요. 아마도······”

“음. 과연.”


리아의 심장에 타격을 준 에르는 감명받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차원수납을 열어 가져온 씨앗과 모종을 꺼냈다.


‘역시 편리하네.’


지금은 자신도 어느 정도 차원수납의 원리를 이해하여 사용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상당히 불안정하여 넣어 놓은 걸 다시 꺼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하는 시뮬레이션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차원수납은커녕 어지간한 마법조차 사용하기 여의찮다.


그래서 어지간한 물건은 에르가 전부 맡아주고 있는 실정이다. 꼭 맡겨야 하는 게 아니라면 오늘 가져온 모종처럼 그냥 자신이 들고.


‘뭐, 나중 일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일이나 할까?’



“······읏차~!”


허리를 핀 리아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둘러봤다.


일은 순조로워 오후 1시쯤에는 끝나버렸다. 결과도 만족스러워 모종이 일렬로 정렬하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더불어 꽤 많은 양을 들고 왔는데도 힘들지는 않았고, 허리를 굽혀 일일이 모두 심었으나 전혀 지치지도 않았다.



“에르, 이쯤하도록 하죠.”

“응.”


아무리 움직여도 끄떡없는 농업기계가 된 몸에 리아는 뿌듯함을 느끼며 에르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돌아갔다.


사실은 더 심고 싶었지만 넓히고 넓혔음에도 밭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거기에 이 이상은 풍족을 넘어, 비축해도 제때 먹기 힘든 양이 된다. 아쉽긴 했지만 먹을 걸 함부로 할 수도 없으니 여기까지 해야만 했다.


그 모종 심기도 오늘부로 끝이다.


앞으로는 여유롭게 물을 주고 기르면서 자라는 잡초를 뽑는 일 정도만이 남았다. 그것도 에르가 다 하려 해서 ‘몸을 움직여 키운 작물이 더 맛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막았지만.


물은 호수에서 끌어오는 다른 밭과 달리 이쪽은 새로 만들었기에 수로도 없어 직접 물을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에르가 한 방에 마법으로 물을 뿌려주어 이쪽은 농업기계로서의 일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



“리아! 그쪽도 다 끝났어?”

“어머니, 고생하셨어요. 바보 아빠는 덤으로 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이쪽을 발견한 루데릭과 아이리스가 다가왔다.


루데릭은 에이브안이 새로 만든 밭에서 잭과 일한다고 들었었다. 오전에는 그곳에서 일하고,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패턴이다. 아이리스는 달리 할 게 없다며 루데릭을 따라가 돕는 거고.


그리고 셋은 아무리 잡초를 뽑는 일밖에 안 남았다지만 오전에 끝내버리는 기염을 토해냈다. 찾아가 본 바로는 절대 작은 밭이 아니었는데도.


이는 육체 능력이 엄청난 오엘문리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로, 지구에서도 기계를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는 비슷한 속도를 낼 수도 있지만 맨몸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거다.



“둘 다 수고했어. 오라버니도 이제 점심 먹을 거지? 같이 먹자!”

“알았어. 오늘도 리아의 집에서지?”


익숙한 듯 말하는 루데릭.


그럴 만도 했다. 요 한 달간 일과가 끝난 다음에는 언제나 함께 밥을 먹었으니 말이다.


단, 그 자리에는 필리아와 이스카르는 없다. 왜냐하면 부모님들은 매번 도시락을 싸가서 현장에서 수다를 떨면서 먹기 때문이었다.


루데릭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 이 시기에는 매번 모든 주민이 한 자리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매일 축제처럼 보낸다고 한다.


필리아들은 몸이 약한 리아 때문에 여태 참여할 수가 없었는데, 뒤늦게나마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의 수다 모임이다. 어른들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테니 이렇게 자신들만 집으로 와 밥을 먹었다.


‘난 세심한 부분도 신경 쓸 줄 아는 배려가 넘치는 여성이니까. 괜히 방해할 수야 없지. 절대 모두가 놀리는 게 창피해서가 아니야.’


그렇게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도착한 집에서 리아는 식사를 마쳤다. 요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이 했지만.



“후우······ 잘 먹었어요, 에르. 매번 고마워요.”

“뭘. 최근 리아가 계속 식사해줘서 나도 만드는 보람이 있어서 좋아.”

“음. 뭐어······ 바보 아빠 주제에 훌륭하긴 했어.”

“으응?! 아이리스! 아빠에게 그런 말버릇은 안 돼요!”


이건 넘어갈 수 없다.


도를 넘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부분을 하나하나 넘어가다 보면 아이리스가 불량소년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은 두고 볼 수 없다.


드문 리아의 지적에 아이리스는 싫은 표정을 지었으나, 순순히 에르에게 머리를 숙였다.



“으윽. 죄송해요. 잘 먹었어요, 아빠.”


조금 다운된 분위기 속에서 루데릭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리 찬크에르가 싫어도 그렇지······ 좀 너무했다?”

“뭣?! 그, 그렇게나 심해 보였어? 따,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하하. 루데릭, 리아. 둘 다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 아비에 대한 아들의 투정이라 생각하면 이 또한 행복할 뿐이야.”


에르는 정말 표정이 풍부해졌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밝은 미소나 소리내어 웃는 모습은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정말 어딘가의 왕자님이나 대귀족처럼 보이기만 했다.


‘물론 내가 볼 때지만.’


하지만 객관적으로도 그러했다. 틀림없이 동의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음음. 에르는 정말 멋지니까. 이제는 멋진 거 말고는 다른 건 전혀 보이지도 않는걸?’


하물며 앞치마를 입은 모습까지도 어울린다.


――그리고 이런 남자랑 2년 후에 결혼한다.


‘헤에······. 기대된다―― 저, 정신차려, 이스피리아! 막상 그때가 돼서 정나미 떨어진 에르가 아이리스를 데려가 헤어질 수도 있어! 반드시 함께 있고 싶다고 여길만한 여자가 되어야 해. 지금처럼 식사부터 세탁, 아침기상까지 모든 걸 에르가 해주는 걸 당연시 하면 안 돼!’



“············.”

“응? 오라버니랑 아이리스, 무슨 일이라도 있어? 표정이 왜 그래?”


묻는 말에 둘이 뭐라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에르가 잔잔한 미소를 내단 채로 말하였다.



“리아, 사랑스러운 당신과의 결혼인가······ 음. 분명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겠지. 벌써 마음이 설레는군. 하지만 2년인가······ 지금껏 한순간이라 생각했던 시간인데 멀게만 느껴지는군.”

“헛! 에, 에르! 이제는 제 생각도 알 수 있는 건가요?!”


‘어떻게?!’


리아는 진지했다.


에르도 당연히 진지했다. 보면 알 수 있다. 그 외의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니······ 사실 루데릭과 아이리스가 똥 씹은 얼굴이 되어 조용히 문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긴 했다. 금방 잊혀버려서 그렇지.



“하. 아이리스, 우리는 이제 그만 훈련하러 갈까? 조금······ 많이 여기 있기 괴롭네.”

“어머니, 저희는 먼저 나가있겠습니다. 두 분은 천.천.히 즐겁게 정리하시고 오면 될 거 같아요.”

“어, 어? 먼저 가 있으렴?”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나빠 리아는 당황하면서도 황망히 배웅했다.



“둘 다, 어떻게 된 거지?”

“후훗. 아비에게 배려할 줄도 알다니. 벌써 다 큰 건가. 어쩌면 이게 자식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성장한다는 그것일지도 모르겠어.”


뭔가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리아는 일단 매우 따스하게 웃는 에르와 함께 뒷정리를 했다.


‘평소엔 아이리스도 함께 했지만······ 에르의 말로는 배려해주는 거라 하니 그냥 둘이서 하지 뭐. 에르도 기분 좋아 보이고. 헤헤.’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리아는 그릇을 날랐다. 에르는 그걸 받아 생활마법으로 닦아 정리했다.


4인분의 식사였지만 역시나 마법이 있는 곳답게 금방 끝났다.


그 모습을 뒤에서 싱글벙글 지켜보고 있던 리아는 에르와 손을 잡고 먼저 나간 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전 루데릭과 함께 훈련했던 숲속 공터였다.


루데릭과 아이리스는 밭의 개간과 모종을 심는 일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어 시간이 넉넉해지자 최근 이곳에 자주 오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하니 검으로 대련하고 있는 루데릭과 아이리스가 보인다.


캉. 치잉! 킹!


금속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조용히 에르와 자주 앉던 전용석에 천을 깔고 앉아 구경했다.


‘흐음. 오라버니도 5년간 정말 열심히 훈련했네. 마력레벨도 100 근처에 육박해있고.’


이전 루데릭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에이브안의 마력레벨을 따라잡아 재회했을 땐 상당히 놀랐었다.


‘할아버지랑 잭 아저씨도 200 정도에 있어서 대단했지만.’


다만 루데릭에겐 이게 좀 문제였다.


성장을 한 것까진 좋았지만, 비슷한 능력과 실력의 상대가 없었던 거다. 그 덕분에 제대로 된 대련을 여태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잭도 더 강해졌기에 여전히 몇 수 접어주는 상대였고.


그래서 아이리스가 왔을 때는 정말 좋아했다. 인간으로 변한 아이리스의 신체 능력은 루데릭과 거의 비슷했으니.


실력도 원체 금방 배워가는 아이리스였기에 대련하기도 안성맞춤이라며 요즘은 매일 이렇게 구슬땀을 흘리고는 했다.


참고로 아이리스의 검은 에이브안이 마법으로 철을 제련해 만들어 준 것이다.


거기서 마법이 정말 편하다는 걸 느꼈다.


에이브안은 무려 모루나 용광로도 없이 오로지 철만으로 바로 검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다. 철의 순도도 좋았겠지만, 현대공법으로 만든 듯 높은 완성도였다.


거기에 그 마법은 활용도도 다양해서 요새 벽에 썼던 매끈한 돌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됐었다. 마을에서 쓰는 칼이나 농기구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지역과 교류도 없는 곳에서 잘도 괭이라든가 만들어서 쓰는 구나 싶었는데, 이는 전부 에이브안의 작품이던 거다.


재료들도 에이브안이 탐지마법으로 찾아서 쓴 것이니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대장간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성형]이라 불린 그 마법이 대단한 거지만. 흐음. 분석은 거의 끝나가니 나도 쓸 수 있으려나? 이러나저러나 할아버지는 대단해. 에르마저도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건 즐겁다고 하고.’


채앵!


잠시 딴생각하는 동안 승부가 갈렸다.


승부는 매번 그렇듯 루데릭이 근소하게 앞서는 형태로 끝이 났다.


검을 놓친 아이리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아, 하아. 벌써 이정도로 검을 다루고 대단한데? 역시 내 친구야.”

“헥. 헥······ 헥.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죽겠는데 너는 아직도 여유만만이면서. 어, 어머니가 보실 땐 어땠어요?”

“엄마? 어엉······ 나는 둘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짚자면, 아이리스는 몸의 통제가 잘 안돼서 힘의 집중이나 반응이 느려. 그래서 오라버니의 속도를 억지로 따라잡는 데에 체력을 점점 많이 쓰고 있더라. 검술은 잘 몰라서 뭐라 하긴 어렵지만······ 체력이 점점 부족해지니 밀리는 것도 당연하겠지?”


처음은 말하기를 꺼려했지만 막상 입을 여니 술술 아이리스의 단점을 지적해 버렸다.


그렇지만 아이리스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5년간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익숙한 것이다. 오히려 제삼자의 눈이 아니고선 여간 짚기 어려운 문제점임을 알기에 아이리스는 차분히 지금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그런 아이리스와 달리 루데릭은 새롭기만 한지 살짝 놀란 듯했다.



“자주 와서 구경하긴 했지만, 그렇게나 자세하게 지적해 줄 수 있다고? 굉장하네. 그럼 나는 어때?”

“글쎄. 비교할 대상이 마땅찮아서 잘―― 아. 그렇지! 오라버니, 나랑도 대련하자!”

“뭐? 리아 너랑? 다치면 어떡하려고.”

“야, 루데릭. 누가 다친다고? 어머니가 맨손으로 싸워도 우리는 상처하나 내기 힘들어. 아니, 잠깐―― 이거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렇지만 마법은 몰라도······ 힘 조절은 잘하셨으니······ 괜찮으려나?”

“맞다! 그러고 보니 리아의 마력레벨은······ 좋아! 한 번 해볼까?”


결정됐다.


리아는 도중부터 중얼거리는 아이리스에게 검을 빌렸다.


‘음. 사이즈는 적당하려나?’


리아와 아이리스의 신장 차이는 거의 없다. 아이리스가 몇 cm 큰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빌린 검도 적당한 크기로 괜찮았지만, 잭에게 배울 때도 그렇고, 산속에서도 줄곧 자기 키만 한 검만을 휘둘러왔기에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뭐, 괜찮겠지. 에르, 잠시 다녀올게요. 아이리스는 좀 떨어져 있으렴.”

“응. 편히 다녀오도록 해, 리아.”

“어······ 적당히 해요, 어머니?”


가족들의 마중―― 특히 산뜻하게 미소 짓는 에르의 마중을 받으며, 리아는 루데릭의 앞에 섰다.


루데릭은 이쪽이 괜찮을 거란 보증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의욕이 충만해 보였다.


리아도 의욕을 다졌다. 에르가 정나미 떨어지지 않게끔 제대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기에.


‘오라버니의 검술――이라고 할까, 손발 모두 쓰는 싸움법은 전부 분석하고 이해해뒀어. 따라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 같아. 근데 리치는 좀 짧으려나?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르 이외의 사람과는 대련해본 적이 없어, 리아는 검의 어색함과 루데릭의 힘에 맞춰줄 요량으로 오른손에 든 검을 연습 삼아 휘둘러봤다.


슈슈슈슉!


소리가 거의 겹칠 정도로 바람을 갈랐다.


생각처럼 잘 움직여준다. 이 정도라면 나쁘지 않아 보인다.



“어, 어머니! 그렇게 의욕 내지 않아도 돼요! 루데릭 별것도 없는 놈이에요.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요! 어이, 바보 아빠! 어머니 좀 진정시켜!”

“훗. 무슨 소릴 하는가. 나와 훈련하는 모습을 자주 보지 않았나? 마법은 아직 불안정해도 힘 조절은 잘했지. 그리고 마을에서의 생활로 인해 ‘거의’ 완벽해졌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거의’라는 거잖아. 완벽은 아니지?”

“괜찮다, 아이리스. 검의 날도 없는데다, 팔 하나나 다리 하나쯤 떨어진다 해도 흉터하나 없이 멀쩡히 치료할 수 있다. 게다가 리아가 루데릭에게 다칠 일은 만에 하나, 억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문제는 없지. 후후후······”

“루, 루데릭······ 도대체 바보 아빠한테 무슨 짓을 했던 거야? 남 말할 처지가 아니잖아. 모, 모르겠다. 알아서 잘 살아남도록 해, 루데릭······”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내일 또 뵈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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