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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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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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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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DUMMY

“폐하의 자비로운 온정에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선두의 주빈을 따라 수행원들도 착착 예를 보였다.


그런 그들이 보이는 예법은―― 세인트리안의 것이었다.


면회실에서 속속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아크티알은 뒤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벨페르는 즉시 품에 손을 넣어 소형화된 [방음]의 마도구를 작동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준비됐음에도 아크티알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전이었다면 바로 벨페르의 의견을 들으려 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게 다 그 귀축 공주 때문―― 아니, 덕분이라고 해야겠군.’


물론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자의 충고―― 빈정거림은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일국의 전권을 쥐고 나라의 발전과 더불어 저 기생충들까지 거의 박멸해낸 전적도 있는 공주다.


더욱 놀라운 건 벨페르가 예상하기로는 완전 박멸도 가능했을 거라고 한다. 그러지 않은 건 단지 약간의 숨통을 남겨두어 최후의 발악―― 본 대의 투입을 억제함에 있다는 판단이다.


그런 공국의 현 정세는 실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안정적이다. 아마 주변국 중 유일하게 기생충들의 입김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라이지 않을까.


실로 경외롭다.


하지만 그러한 아크티알의 경외는 떠오른 장면에 의해 곧바로 사라지고는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 장면이란 바로 입가를 가린 소베르비아였다.



“신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센 참으로 바람직해요.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어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죠. 이해는 합니다. 그 신하가 재상님과 같이 유능하신 분이니. 다만, 그러한 식이라면 군주의 발전은 없죠. 지금도 보기 좋게 쭉쭉 퇴화하고 계시어요. 예전엔 좀 더 쓸만하신 분이었는데······ 지켜보기에도 처량하니 슬슬 스스로 생각이라는 걸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귀축 공주란 이명에 어울리게――아크티알이 붙인 별명―― 일말의 사양도 없다. 분명 가린 입가 안쪽에는 비웃음을 띠고 있을 터다.


자신이 왕이라는 걸 알긴 하는가 싶다. 그렇지만 하는 말 자체는 반박할 마음조차 생기지도 않는 정론이다.


당연히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계속 신경은 썼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저리도 신랄하게 떠들어대니 살짝 마음이 꺾일 지경이다. 욱하는 벨페르를 말리기도 힘들었고.


그만큼 너무나도 지당한 말.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런 이야기를 굳이 들어야 할 정도로 자신은 형편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성격이 나쁘더라도 일단은 동맹국인데 단순히 비꼬려고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불만은 접어두고 새겨들어야겠지.


아크티알은 충고에도 따를 겸 정리한 생각을 천천히 풀어보았다.



“이 타이밍에 찾아온 거다. 역시 그 일 때문이겠지. 학원의 견학도 요청해왔으니. 다만 그가 있어서 들킬만한 일은 없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나?”

“아뇨. 확정은 못 했을 겁니다. 정체를 파악했었다면 곧장 항의라든가 책임을 추궁했겠지요. 하다못해 신병의 인도라도 요구했을 겁니다.”

“시기상 그녀라는 심증만 있단 뜻이로군.”


수긍한 아크티알은 크게 숨을 토해냈다.



“이래저래 생각이 짧아졌어. 의식하니 확실히 그 점이 뼈아프게 다가오는구먼. 과연 소베르비아가 잔뜩 면박을 줄 만했어.”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자네 잘못이 아니다. 짐이 겁이 많았을 뿐이지. 후우······ 그건 그렇지만 도대체 뭐가 어찌 된 건지 알 수가 없군. 전혀 흐름을 모르겠어. 당최 그 두 번째 마력의 방출은 뭐란 말인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마력 감지에 있어 구분을 잘하지 못하는 자신조차도 너무나 많은 양 때문에 손쉽게 구분이 가능할 정도였다. 동일인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둘 다 무시무시한 파장이라는 것만큼은 같았지.”


당시를 떠올렸는지 벨페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체험학습 때의 일과 더불어 아내의 일에 보복을 한 게 아닐까 싶다만. 어떤가, 벨페르. 정보는 구해졌는가?”

“예. 며칠 전에 암부를 통해 전달이 왔습니다.”


대답한 벨페르는 어쩐지 말을 아꼈다.


그가 이러는 경우는 드물다. 더군다나 정보는 이미 며칠 전에 왔다고 한다. 필시 상황의 해석이 곤란할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숨에 모든 걸 정리하여 전달하였을 터였다.


조금 조바심이 나지만 귀축 공주에게 이 이상 비꼼 당하는 건 사양이다.


잠시 기다리니 벨페르는 예상대로의―― 아니,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을 이야기하였다.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인트리안에서 사도, 디바오러가 재림했다고 합니다.”

“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고 할 뻔했다. 여느 때처럼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는 건가도 싶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벨페르를 며칠이나 고민하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하니 단숨에 납득이 됐다.


그야 사도의 재림이라니 누구라도 믿기 힘든 내용이지 않겠는가.


아마 벨페르는 각 방면에서 올라오는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관료들과 한참을 씨름했을 거다.


벨페르는 이러한 생각들을 읽었는지 진지한 눈을 향해왔다.



“정말 사도가 재림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헛소문 따위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큽니다. 벌써 세인트리안의 인근 도시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니 말이죠. 조만간 이곳도 시끌시끌해질 겁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는 거다. 근거는 있겠지?”

“······신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언’이라 불리는 그거 말인가? 선전을 위한 허풍이라 여겼거늘. 실존하는 거였나?”


신언에 대해서는 말만은 들어봤지,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성녀를 통해서만 내려온다는 신탁은 세인트리안의 고위 관계자들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그래서 당연히 권위를 높이려는 방편이지 않을까 했다만······’


아크티알은 궁금증을 담아 시선을 보냈다.



“정확한 실체는 저 역시도 단언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럴듯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흐음. 허나 사도에 관련된 내용이다. 분명 세인트리안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터다. 그런데도 인근 도시까지 퍼진 거라면······ 방조? 사실이기에? 아니, 그런 것치고 그들의 사자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다면 대대로 선전했을 거다. 그렇다는 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소문이 확산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거겠지. 우리의 귀에도 들어왔으니.”

“훌륭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 놓치신 부분이랄까,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눈짓으로 물으니 벨페르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세인트리안은 소문에 대해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사도―― 디바오러에게 성전을 선포했으니 말이죠.”

“뭣?!”

“놀라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신탁, 규모가 크다고 했던 건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게!”

“알겠습니다.”


놀라 눈을 부릅뜬 자신에게 벨페르는 여전히 유쾌한 모습으로 본인이 아는 정보들을 전해주었다.



“즉, 성자를 사칭하는 변절자라 여겨 대뜸 성전을 선포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신탁을 내리는 진짜였다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문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렇습니다.”


벨페르는 저리 말하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사도를 칭하는 변절자가 누구인지 알고 성전을 선포했을 것이다.


체험학습 때의 일은 세인트리안의 짓이니 말이다. 물론 조사 자체는 중지하여 이렇다 할 증거는 없다만 심증과 더불어 소베르비아의 확신까지 있으니 확실할 거다.


그런 그들이다. 깊게 관련되다 못해 일을 벌인 장본인들인데 모를 리가 없다.


――어린 소녀와 이를 수행하는 성인 남성. 이 인상착의를 파악했었다면 더욱이나.


이전 사건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자라면 이스피리아와 찬크에르. 단박에 이 둘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정체는 불명이라······ 역시 그가 뭔가 손을 썼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그도 아니면 사도에게 성전을 선포했기에 섣불리 입장을 발표하지 못한 것일 수도.”

“민심이 흉흉하니 말이죠.”

“전설에서나 듣던 사도다. 그런데 모처럼 다시 이 땅에 재림했건만 그따위의 대응을 했다니······ 참으로 곤란하겠어. 후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지만 조금은 통쾌하군.”

“말씀대로.”


요새 쌓인 울분이――소베르비아 건도 포함하여―― 쑥 가시는 느낌이다. 앞으로 골머리를 앓을 미래를 생각하니 더더욱 꼴 좋다는 기분이다.


벨페르도 근래엔 고심이 많아 보였는데 잘됐다. 둘이서 한동안 이 기분을 만끽하기로 하자.



“하지만 역시 용왕이라는 건가······ 정체를 특정 당하지 않은 건 당연하겠지만 거대 운석에 신탁까지, 정말 못 하는 게 없군. 세인트리안은 정말 곤란하게 됐어. 우리도 지금처럼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지.”

“저 또한 같은 생각이고 매우 지당한 의견입니다만······ 어쩌면 이번 일과 더불어 체험학습 때의 사건은 그가 관여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보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신탁 말입니다. 그 신탁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였다고 합니다. 파견 나가 있던 정보국 요원들도 직접 들었다 하니 확실할 겁니다.”

“그가 무언가 손을 쓴 게 아니겠는가?”


신언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용왕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페르의 의견은 달랐는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의 성격상 아내에게 위험이 닥치게 내버려 둘 거라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하더라도 본인을 자인 디바오러라 칭했겠지요. 이후에 반드시 주목이 따를 테니.”


약 보름 전, 사용인 행세를 하던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아크티알은 말을 받았다.



“한데 신탁은 세인트리안 전역에서 들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확성]이라 한들 소모되는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한 개인이 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이는군. 더군다나 그 말엔 알 수 없는 강제력이 있다지 않았나? 분명 [확성]보다는 고위의 마법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걸 어린 소녀가―― 인간이 해냈다기엔 조금 믿기 힘들군.”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폐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서훈식 때의 그녀를.”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작은 체구로 본인만큼 거대한 대검을 손쉽게 들던 것을.


더욱이 그 대검은 오로지 무게만으로 바닥을 갈라버리던 흔치 않은 광경도 연출해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잊을 리가 없다.



“후작에게 대단한 실력 따윈 없지만 그렇다고 일반인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녀 이외의 다른 사람에겐 무거워지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이후 던진 검을 잡을 때 난 소리로 판단컨대 그건 또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 단정은 못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소베르비아 공주가 탐내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접근하기 위함이 아닌가 의심도 해봤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듯싶습니다.”

“그녀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아크티알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검과 주먹으로 체험학습 때의 일을 해결했다고 한다. 소베르비아가 준 각본―― 이후에 검붉은 드래곤의 비늘과 함께 전달되어온 서신에도 적혀있던 사항이다. 그래서 서훈식 때도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자신과 벨페르만은 무덤덤했었다.


다만······ 이스피리아는 거짓말이 티가 나기에 그녀는 되도록 사실만을 전한다는 서신의 내용이 조금은 걸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 자신이 검과 주먹으로 싸운다는 게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껏 입을 맞춰 말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이스피리아는 마법반이기 때문이다.


올라온 보고로는 그녀의 마법 실력은 초일류. 입학 첫날의 수업에서는 부순 자라고는 2명뿐인 허수아비를 무영창으로 단숨에 고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술식을 고쳐쓰기는 했지만 특별한 일 없이 잠잠했었다.


그래서 관심을 거두었지만, 얼마 전인 체험학습 때 그녀는 통신마법을 비롯하여 [장벽] 및 [비행]까지 무영창으로 해냈다는 조사 결과를 받았다.


명백히 학생의 수준이 아니다. 그러긴커녕 비교할만한 자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대마법사인 리카드조차도 지식은 모르겠지만, 마법 실력에서만큼은 단연코 그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마······ 그녀도 레오노반처럼 이전의 마법 체계―― 원초마법을 쓰는 것이겠지.’


이러한 이스피리아인 거다. 그러니 더더욱 상상이 안 간다. 비밀인 원초마법은 용왕 덕에 배울 수 있었다 치더라도 어찌 그 어린 나이에 전사로서의 함양까지 쌓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렇기에 소베르비아가 원하는 것인가?!’


얼마 전 창공을 가로지른 빛을 떠올리며 아크티알은 고개를 돌렸다.


벨페르는 날카로운 시선을 향해왔다.



“아마 폐하의 짐작대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그럼 앞선 일들을 비롯하여 모두 그 어린 소녀가 해냈다고?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희가 용왕이란 이름을 너무 의식했던 것이겠지요.”

“어쩌면 덤 취급하지 말라던 라프리트의 이야기는······”

“······하나 확실한 건 만약 그 거대 운석이 이곳에 떨어졌다면 절대 원만히 막아내지 못했을 거란 겁니다.”


오늘로써는 처음으로 있는 벨페르의 단언. 그만큼 정보의 정확성은 높다는 것이고, 그만큼 운석의 크기가 범상치 않았다는 의미이다.


세인트리안이었으니 그나마 무사히 막아낸 것이지 않을까······


말문을 잃은 아크티알은 침묵했다.


지금이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랄까, 너무 용왕의 위광에만 신경 쓰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에 무심코 신께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이제야 그 건방진 귀축 공주가 왜 그녀에게만은 그리도 저자세로 나가는지 절실히 이해가 간다.


‘라프리트도 그런 거라며 알려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무래도 소베르비아의 눈은 진짜인 듯싶군. 입학 초기에 바로 그녀 하나에 올인했으니. 의심의 여지도 없겠어.”

“더불어 저희에게도 그녀의 행동을 강제할 방편이 전혀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아차린 점도 대단했지요.”

“그래서 친우로서 우정을 쌓았다는 말인가······”

“힘으로 굴복시킨다는 건 한낱 망상에 불과하니. 차라리 제국을 점령한다는 게 훨씬 현실적이겠지요. 제아무리 소베르비아 공주라 하더라도 이미 결혼까지 한 그녀를 묶어둘 인연은 달리 없었을 겁니다.”

“하긴. 그렇게 같이 다닌다는 데 둘의 사이를 모를 리가 없겠지.”

“폐하께서도 보셨다시피 그녀는 거짓말에 영 소질이 없었으니 말이죠. 금방 들켰겠지요.”


아크티알은 크게 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뭐, 좋다. 소베르비아가 원하면 우리는 방치할 뿐이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다루기 벅차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 덕분에 공국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단 것에 만족하도록 하지.”

“예. 정말 그것만으로도 최고 국빈으로 지정한 게 조금도 아깝지 않게 되었습니다.”

“애당초 동맹은 아예 배제한 상황이었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이 벨루디스에 복덩이로군.”

“이후 공국에 간다고 한들 그녀의 성격상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침략전쟁에는 손을 빌려주지 않을 터. 되려 잘하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가능성까지도 있습니다. 그걸 고려해보면 그녀를 받아들인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습니다.”

“큰 이득임과 동시에 족쇄라는 건가······ 어찌 됐든 그녀가 다시 이곳을 보게 하려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겠군.”

“누차 말씀드리지만, 최소한 적대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 아니, 자네의 말대로다. 서로 명심하고 있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벨페르를 보며 아크티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페르. 귀족들의 동향, 특히 알렌나시안 후작 파벌의 감시를 좀 더 늘려주게.”

“분부대로.”

“학원은······”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학원은 그대로 유지하심이 어떨는지요?”

“그렇군. 여태 잘 지내왔는데 괜히 거슬리게 할 필요는 없지. 곁에는 그도 있을 테고. 최고 국빈이니 이후 둘의 사이가 알려지더라도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겠지. 큰 걱정거리였던 레오노반도――”


말을 하다 멈춘 아크티알은 슬쩍 벨페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떠했는가?”


무엇을 묻는지 반박에 안 벨페르는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소베르비아 공주가 급히 찾아왔을 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습니다만······ 방금 막 저희도 재확인했듯 공주의 눈은 진짜였습니다.”

“그렇지······”


동의한 아크티알은 눈을 감고 떠올려보았다. 이스피리아의 서훈식 하루 전날 갑자기 찾아온 그녀, 소베르비아를.


자신이 준 특권을 마음껏 행사하여 집무실로 직행해온 그녀는 대뜸 들어오자마자 말했었다.


――왕세자의 선정을 잠시 미루어달라고.


뜬금없는 이야기에 정말 황당했었다. 본인이 직접 빨리 왕세자를 임명하라며 다그친 주제에 인제 와서 미뤄달라니. 장난을 치는 건가도 싶었다.


그렇지만 유독 즐거워 보이는 소베르비아의 이어지는 말에 그러한 생각은 쏙 들어갔다.


그녀는 뭘 잘못 주워 먹은 건지 레오노반이 달라졌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당연히 암만 소베르비아의 말이더라도 바로 믿진 않았다. 오히려 벨루디스를 혼란하게 만들려는 계획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었다.


사람이 하루아침 만에 바뀐다는 게 어디 쉽게 믿기겠는가.


하지만 소베르비아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다시금 같은 말을 해주었다.



“레오노반 전하가 달라지셨어요. 내일 직접 보시면 바로 아실 거여요. 지금의 그는 왕으로서 군림하기에 그 그릇과 자질에 부족함이 없어요.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가 단언해드리죠. 이대로만 가면 레오노반 전하는 공국의 입장에서는 귀찮아질 정도의 명군으로 자랄 겁니다.”


물론 다시 들었다 한들 당장에 믿음은 가지 않았다. 되려 의심만 증폭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동생 엘리아드에게는 라프리트와 비교하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평가를 받는 레오노반이기 때문이다.


딸의 사랑이 지극한 엘리아드다 보니 지나치게 편중은 돼 있겠지만 그다지 틀린 평가만은 아니었다. 자신조차도 엘리아드와 비슷한 의견이니.


아들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레오노반은 문제가 많다.


솔직히 죽은 왕비가 남겨 놓은 피붙이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연을 끊고 유폐했을 것이다.


그만큼 레오노반은 솔선하여 자국인 벨루디스를 파국으로 내몰고 있었다.


단순히 내부 정계를 혼란스럽게 한 것에 그친 게 아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는, 걸린다면 제아무리 왕자라 하더라도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는 짓들도 제법 했다.


본인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자신이 뒷수습해주었기에 수면 위로 떠 오르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문제아―― 아니, 망나니나 다를 바 없이 오만하게 살아온 레오노반이다.


재능과 능력은 있지만 썩히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 힘을 비열한 궁리에만 쏟는 실정. 왕으로서의 자질은 솔직히 동생인 레온하트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소베르비아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진작에 파악해둔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소베르비아가 갑자기 다른 말을 한 것이다. 레오노반이 왕으로서의 그릇이 충만하고 이후 명군이 될 거라고.


동맹했다고는 하지만 소베르비아는 엄연히 타국의 공주다.


동맹 관계가 끝나면 적국으로서―― 그녀의 능력을 직접 겪어봤던 만큼 세인트리안 못지않게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걸 예감케 했다. 그러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밖에 안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정말로 레오노반이 달라진 것이다.


꿈을 꾸는 건가 싶어 서훈식 때 가신들의 눈을 피해 벨페르에게 은밀히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레오노반은 파세―― 소꿉친구 겸 시종으로서 오랫동안 따라왔던 그녀를 어느 순간부터 물건처럼 대해왔었다. 분명히.


당시 교육계였던 궁정 마법사도 이를 눈치채고 지적하였지만, 반성은커녕 고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로 잡았어야 했건만······ 사춘기겠거니 방치한 게 실수였다.


레오노반은 가속이 붙듯 더더욱 선민사상에 빠져들었다. 알렌나시안 후작 파벌에 몸을 담았을 때부터는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이윽고 파세 같은 사용인들을 넘어 왕족 이외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행동만큼은 왕족의 품위를 지켰다만 속이 빈 강정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반쯤 포기했었다.


언젠가 나아지겠거니 기다렸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둘째인 레온하트가 성장하여 지지 세력을 키우면 왕세자의 자리를 임명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능력은 분명 레오노반보다 뒤떨어지지만, 왕으로서 중요한 덕목은 두루 갖추고 있었으니.


그를 위한 준비도 본격적으로 들어갔는데······


상황이 반전했다.


선민사상에 물들기 전, 편견 없고 명석했던 레오노반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엔 냉철하지만 상냥함이 존재하였다. 이 모습만 보더라도 일목요연하다.


특히 오랫동안 부당한 처우에도 꿋꿋이 성의를 다해 레오노반을 모시던 파세. 입장상 감사를 전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멍청한 아들 때문에 고맙고 미안하다며 수도 없이 감사를 전해왔던 그녀의 얼굴에서 칙칙한 근심이 사라졌다.


레오노반 또한 무척이나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파세와 편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놀랍지만 태도에서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변화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본인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렌나시안의 파벌.


차례차례 인사하러 오는 그들을 레오노반은 아무런 사심 없이 공평한 시선으로 평가하는 게 보였다.


그토록 기대해왔던 아들의 변화에 무심코 좋게 여긴 게 아니다. 분명 레오노반은 다시금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였고, 이후 대하는 태도에서도 차이점이 드러났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어찌 사람이 이리도 갑작스럽게 변한 것이란 말인가.


소베르비아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도 싶었지만 달리 대답해주진 않았다. 그 대신 이 말을 남기었다.



“왕세자의 선정. 차분히 생각해보시어요.”


기한도 1년으로 넉넉하게 늘어났다. 내정간섭이니 그 이상 자세한 언급은 없었지만 소베르비아조차도 두 왕자 사이에서 왕세자를 정하는 게 제법 어렵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한시름은 덜었다만······ 소베르비아. 뭔가 걸리는 듯했던 공주의 태도가 신경이 쓰여.’


그게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아크티알 빠르게 포기했다. 아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추론해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섣부른 추측을 하기도 그렇고.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구먼.”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곧장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었으면 하는군. 사태가 짐의 손에서 멀리 벗어난 느낌인지라 영 개운치가 않다네.”


존명의 뜻을 밝히는 벨페르를 보며 아크티알은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는 요즘 무얼 하며 지내나?”


걷다가 떠오르는 생각에 물으니 벨페르는 뭔가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가?”

“아,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는 그······ 방과 후 공부 그룹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를 통해 최근 일련의 사태들은 혹시 그녀가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도 도달할 수 있었지요.”

“당최 무얼 하기에 그러나?”


벨페르의 인식을 바꾼 계기라니. 조금 궁금하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듣던 아크티알은 잠시 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에 점차 멍청하니 눈과 입을 크게 벌리었다.











카앙!


쇠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린다.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와 진동은 결코 살살 부딪친 게 아님을 직감하게 했다.


하지만 정작 이 소음을 만들어 내는 당사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나 보다. 자신이 든 검을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흡!!”


작은 기합과 함께 검격을 내지르는 성인 남성. 그리고 조용히 이를 요격하는 어린 소녀.


이 둘이 만들어 내는 금속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무수히 이어졌다.


캉. 카앙. 캉. 키잉――!


근육이 울긋불긋한 성인 남성과 여리고 여린 소녀. 한눈에 보기에도 체급의 차가 확연하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성대한 착각을 할 수도 있으리라.


――소녀가 휘두르는 거대한 은빛 대검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본인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검을 소녀는 너무나도 쉽게 한 손으로 휘둘렀다. 대충 막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소녀는 울긋불긋한 겉보기와는 달리 매섭고 빠른 남성의 검격을 모두 정확히 떨궜다.


저만한 검을 휘두르는 것도 놀라운데 정밀하기까지 한 것이다.


더욱이 너무나 빠른 공방에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잘 보면 기합과 더불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성과 달리 소녀는 가만히 앉아 책을 보듯 평온하다.


외형과 달리 실력의 우위는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남성도 그것을 느꼈는지 마력을 끌어올렸다.



“[백격일참].”


백 번의 일격을 한 합에 시행하는 초고속의 공격. 비집고 나갈 틈도 없이 정면을 가득 참격이 메운다.


이 기술은 남성의 오리지널 투기술로, 남성의 모든 게 담긴 일격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담은 거다. 남은 체력과 힘 모두를. 이후 한동안 남성은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를 각오하고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남성이 살아있으니 당연히 파훼한 존재는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이다. 모두 [백격일참]에 생명의 불씨가 꺼졌었다.


그렇기에 필살. 쓰는 것조차도 손에 꼽는 [백격일참]은 남성에게 승리를 알리는 지침이나 다름없다.


이를 앞에 둔 소녀의 미래도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선혈을 흩뿌리는 장면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소녀 또한 자신의 미래를 예견했는지 팔을 늘어뜨려 무저항으로 맞이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 소녀에 한해서 단연코 그러한 미래 따윈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소녀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성조차도 그러했다. 본인의 승리는 조금도 예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살이란 이름이 오늘로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 예감은······ 옳았다.


――번쩍.


오른쪽 상단을 비스듬히 섬광이 갈랐다.


그리고 남성은 보았다.


오른손에 쥔 대검을 소녀가 천천히 머리 위로 가져가고 있는 것을.


이해조차 되지 않는다. [백격일참]을 정면에서 분쇄하는 와중이건만 준비 동작을 취하다니. 마치 인과조차 거스르는 듯하다.


다만 이거 하나만큼은 명확하게 느꼈다.


이 일격만큼은 뭔가 다르다고, 여태까지 주고받았던 공수들은 어린아이의 장난이었다는 걸.


이것이야말로 검의 진수. 잔꾀 따위는 없이 오로지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둘러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임을 떨리는 온몸의 세포로 이해했다.


저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든 그 세월이 어떠할지 짐작조차 안 된다.


경이롭다.


이에 3배 이상이나 어린 소녀임에도 남성은 진심으로 경외심을 품었다.


아니, 검을 휘두르는 자라면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과 같을 것이다.


남성은 그리 확신하며 상쾌하게 웃었다. 동시에 위로 올린 검을 양손으로 잡은 소녀에게서 빛이 엄습해왔다.


팅!


바닥에 잘린 검신이 땅에 박히며 소리를 냈고, 남성―― 그리모르는 목덜미에 닿은 금속의 차가움을 느끼며 두 손을 들었다.



“완패다. 내가 졌다.”






검을 거둔 리아는 사뿐히 머리를 숙였다.



“수고하셨어요―― 가 아니라! 거, 검! 저기······ 죄송해요!!”


너무 집중해버렸다. 투기술까지 모두 쓴 그리모르의 실력이 예상보다도 훨씬 대단했기에 더욱이나. 특히 마지막에 쓴 [백격일참]이라는 기술은 그 매서움이 무심코 세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제법 힘이 들어갔는데······


제법 떨어진 땅바닥에 박혀있는 검신―― 반듯하게 잘린 단면을 본 리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내 리아는 빠르게 상체를 위아래로 진자운동 하듯 흔들었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과에도 그리모르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다. 반대로 뭔가 허탈한 듯도 하다.


‘그야 그렇겠지.’


저 혼자 흥분하여 일을 저질렀는데 이제 와 사과한들 어이만 없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러건만 그리모르의 입장에서는 정말 맥이 빠질 수밖에 없을 거다.


역시나 털썩 주저앉는 그리모르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검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아. 어차피 학원에서 지급하는 거였으니까. 물론 이렇게 댕강 잘라버리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지만.”

“히익! 벼, 변상을······ 어, 얼마쯤 하나요? 당연히 비싸겠죠?”

“됐어. 학원 거라고 했잖아. 학생 주제에 뭘 걱정하는 거냐. 만약 변상하더라도 내가 할 테니까 아가씨는 신경 꺼.”

“저, 정말요?!”


다행스럽게도 딱히 변상하진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신경이 쓰이네.’


일을 저지른 건 이쪽인데 혹시라도 그리모르가 변상이라도 하면 좀 찝찝하다.


잠시 고민하던 리아는 대검을 귀걸이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실례 좀 할게요.”


그리 이야기한 리아는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그리모르 옆에 놓여있던 검의 잔해―― 손잡이 부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짧게 튕겼다.


조금 떨어진 곳에 박혀있던 검신이 날아왔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은 리아는 잘린 부분을 서로 대보았다.



“음······ 되려나? 아니다. 당연히 되겠네.”


너무 당황해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고치는 건 아주 쉽다는 걸 알았을 텐데. [성형]은 물건을 고치는 데에 특화한 마법이라 해도 무방하니.


너무 눈에 띄지 말라는 루비아의 충고를 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체험학습 때의 일로 이미 잔뜩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하지도 않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등골이 간질거리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학원 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고, 일부 학생들에게는 선망의 시선도 받고 있다.


‘전부 어어엄~~청 창피하지만.’


여하튼 어지간한 일로는 이젠 그다지 더 주목받을 것도 없게 됐다. 루비아도 한 번 생긴 인식은 바꿀 수 없다며, 적당한 수준이라면 마음껏 행동해도 된다고 지침을 바꾸었다.


그래서 며칠 전 검을 들고 찾아온 그리모르의 부탁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만이라도 좋으니 자신과 대련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물론 마음 같아서는 그를 질질 짜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가속할까 봐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모르는 한없이 진지했었다. 선생님이라는 체면치레도 없이 무언가 결심을 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날 당장 그리모르와 검을 맞댔다.


그렇게 시작된 게 벌써 5일째. 상급 훈련장이라는 이곳에서 2학기가 시작한 이래로 방과 후마다 매일 대련을 해왔다.


즉흥적인 기분이긴 했지만 만날 때마다 차츰차츰 본 실력을 발휘하는 그리모르에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응. 안 그래도 내 검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할까 생각했는데 덕택에 좋은 대련 상대가 생겼어. 하지만 역시 처음엔 꽤 많이 봐줬었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투기술―― 전력을 다한 그리모르는 처음 검술 수업 때 상대해봤던 그와는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났다.


오늘 본 그리모르라면 공국의 근위대장, 디카이로트와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디카이로트 씨가 좀 더 위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리아는 고친 검을 그리모르에게 돌려주었다.



“무결의 기사라······ 꽤 거물이 나오는군.”

“앗! 저 또 혼잣말했나요?”

“‘또’라는 걸 보니 버릇인가 보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래도 아가씨는 이래저래 어벙하기도 하니까.”

“윽. 네······”


솔직하게 조언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그리모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곧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렇군. 난 아직 그 기사 양반에게는 못 미치는 건가.”

“아, 아뇨!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에요. 그날의 컨디션이라든지 외부 환경들에 결과가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아아. 괜찮아. 기분 나쁘다거나 한 게 아니야. 되려 아가씨에게 부탁하길 잘했다는 기분밖에 안 드니 걱정 마슈. 리카드 형씨가 아싸리 허락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어······ 학원장님이요?”

“그래. 갑자기 행정 일을 맡기길래―― 아니, 이쪽 사정이야. 그보다 아가씨는 뭘 어떻게 수련해왔던 거야? 나보다 강하다는 건 바로 알아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과연 드래곤 슬레이어답달까? 정말로 세상은 참으로 넓군그래.”

“드, 드래곤 슬레이어는 제발 참아주세요.”

“내 물음에 답을 해준다면 고려해보지.”


선생인 주제에 학생을 상대로 치사하게 군다.


하지만 달리 취할 선택지가 없으니 리아는 툴툴거리면서도 대답하였다.



“제가 한 훈련은······ 글쎄요. 딱히 없네요. 아까 본 제 검 있죠? 오로지 그 검을 들고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도록 신체를 단련한 것밖에 없어요.”

“소문은 들었어. 무지하게 무겁다고 했던가?”

“네에.”

“응?”

“아, 아뇨.”


보아하니 그리모르는 서훈식 때의 사건을 자세히는 모르는 듯하다. 그렇지만 딱히 캐물을 의도는 없는지 크게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그만한 무게라면 확실히 휘두를 수 있게끔만 해놔도 도움이 되긴 하겠군. 검을 아령 대신으로 사용한 건 좀 아이러니하지만. 참고로 단련 방법은?”

“어음······ 일단 검을 드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렇다. 그 대검은 손안에서 형태를 갖춘 순간 잡고 있던 손을―― 손목째로 뜯으며 땅에 박혀버릴 정도의 무게를 자랑했다. 그러니 들기 위해선 당연히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투기술로 몸을 강화했다는 건가?”

“맞아요. 하지만 그걸로는 바로 들 수 없었죠.”

“미안한 소리지만 아가씨는 원래부터도 근력이 별로 없어 보이니까. 제아무리 마력이 많다지만 근력의 향상은 크지 않았겠지.”

“정확하세요.”

“그럼 어떻게 지금처럼 된 거야?”


그때의―― 산속에서의 일들을 떠올린 리아는 몸을 살짝 떨며 말하였다.



“[치유] 덕분이에요.”

“응?”


전혀 상상되지 않는지 그리모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단해요. 억지로 계속 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근육의 파열이나 인대의 손상 등은 바로바로 [치유]로 고쳐가면서요. 그러면 싫어도 차츰차츰 근력이 붙을 수밖에 없겠죠?”

“······그걸 얼마나 반복했어?”

“반년 내내 해서 겨우겨우 들어 올릴 정도는 됐어요.”

“쉬지도 않고 줄곧?”

“마력은 많으니까요. 피로도 마력레벨이 높아지면 별로 생기질 않으니 쭉 검과 씨름할 수가 있었죠.”

“아가씨라면 그렇지 않을까 했지만······ 정말 도가 지나친 무식한 단련법이군.”

“저, 저도 반성은 하고 있다고요.”

“당연하지. 보나 마나 화장실은커녕 식음도 전폐했지? 그러면 누구라도 걱정하지. 저기 있는 아가씨의 보호자가 어떠했을지 눈에 훤하구먼.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계속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하게 여겨지는군. 정신력도 정신력이지만 줄곧 [치유]를 쓰고 있었을 거 아냐?”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는 순간조차도 근육이 찢겨나갔으니까요.”

“와우······ 아가씨는 진짜 마력이 넘쳐흐르나 보네. 난 따라 할 엄두도 안 나는걸. 뭐, 애당초 [치유]는 할 줄도 모르지만.”

“어라. 도와드릴 수 있는데 한번 체험해보실래요?”

“됐네요. 학생에게 거기까지 손을 벌릴 수 있겠냐? 나도 선생질을 하고 있는데 계속 그럴 수도 없고 말이야.”

“쳇. 모처럼 고통을 나눌 동료가 생기나 했는데.”

“이봐, 아가씨. 말이 세는뎁쇼?”

“헛?!”

“······.”

“호호······ 아, 아무것도 아녜요. 아! 그렇지. 제법 피로해지셨죠? 생각난 김에 치료해 드릴게요.”


눈빛이 따갑다. 하지만 기껏 모른 척 둘러댔는데 자신이 언급할 수는 없다. 그리모르의 신체를 치유하고는 휘파람 소리를 내어 제 발 저리는 심정을 감추었다.



“하아······ 아가씨도 보기와 달리 제법 괜찮은 성격이네.”

“에헤헤. 뭘요.”

“칭찬하는 게 아니야.”


그리모르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치료해준 건 고마워.”

“제대로 괜찮아지셨나요?”

“그래, 완벽해. [백격일참]을 썼다는 기분조차 안 들어. 물론 마력은 텅텅 비었지만.”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역시 그 [백격일참]이라는 거 상당히 몸에 부하가 큰 기술이었군요?”

“그렇지. 나도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싶은 순간밖에 안 써.”

“그, 그런 걸 학생에게······”

“에이. 그냥 넘어가 줘. 어차피 아가씨에겐 그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잖아. 무려! 드래곤 슬레이어니까. 그보다 다음 단련법이나 말해줘.”

“그건 그만두시라고―― 응? 다음이요?”

“엉. 검을 들 수 있게 된 다음 말이야.”

“아아. 그거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 당시 제가 아는 검술이라고는 상단에서 내려치는 정면 배기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거만 쭉 반복했어요. 최근······ 어, 학원에 오기 전까지니까 대략 3년쯤은 됐네요. 줄곧 한 건 2년쯤이지만.”

“······.”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의아함에 시선을 내려 그리모르를 쳐다보니 그는 뭔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리모르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집중할 때의 깊이가 중요한 건가? 2년······ 고작 2년 만에 그만한 경지라니.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의 집중력이란 그리 길지 않아. 2년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한들 정작 무아지경으로 집중하는 시간 자체는 많으면 한 달, 짧으면 며칠에 불과할 거야. 어쩌면 아가씨의 2년은 남들의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이었을지도. 과연 그거라면 조금 납득이 가네.”

“뭐가요?”

“아냐. 그냥 아가씨의 대단함을 재확인했을 뿐이야. 그보다 난 이제 됐으니까 다른 사람이나 봐줘.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잖아? 난 잠깐 쉬고 있을 테니 좀 떨어져서 하고.”


그리모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확실히 두근거리는 심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그가 있었다.


――얼마 전 서훈식 때 안면을 튼 제국의 대귀족, 레스 린 프라바이드가.


작가의말

그리모르 : 어라? 나리,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슈? 분위기가 좀 달라졌숨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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