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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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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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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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DUMMY

조용한 기숙사의 침묵을 뚫고 살짝 경첩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건 이 방의 주인. 동료이자 친구인―― 다시금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그녀, 이스피리아였다.


그런 그녀의 뒤를 그 남자―― 찬크에르레이가 따랐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매달고.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짧았다. 이쪽을 보자마자 곧장 적에게나 향할 냉혹한 시선을 보내온다. 물론 진짜 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그냥 남자의 성격과 눈매가 원래 저러할 뿐이다. 적의 자체는 전혀 없다.


그 증거로서――


스윽.


찬크에르가 아주아주 미세하게 묵례해 보였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는 뜻이니라.


이런 식으로 찬크에르는 매번 인사를 해왔다. 어지간한 사람은 알 수 없거나, 착각이라고 여길 정도이기는 해도······


불만은 없다. 일단 감사를 전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되려 이쪽을 믿고 아들의 사용인으로서 있게 해준 그 강단이 놀라울 뿐이다. 만약 자신이었으면 이리 시원스레 맡기긴 아무래도 주저했을 테니.



“우으으으······ 오늘 하루는 정말 고됐어.”


문이 닫히자마자 이스피리아가 왠지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거기에 실린 감정은 불만이랄까,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하다.


이유야······ 오면서 들었기에 대충 짐작은 간다.


지금도 귀를 기울여보면 저 멀리 쑥덕거림이 들려온다.



“야야! 프라바이드의 도련님이 이스피리아 님께 고백했대!”


――라며, 들뜬 이들의 목소리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찬물을 끼얹듯, 싸늘하면서도 단호한 음성들이 끼어들었다.



“아니래.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의 말로는 잘못 와전된 거래.”

“그래그래. 프라바이드 님 본인이 직접 해명하셨다는데? 그리고―― 설렌다는 건 알겠는데, 상대가 누구인지 잊지 마. 흥미 위주로 가십거리인 양 떠들다 큰일 날 수 있어.”


목소리와 마력으로 판단컨대 평소 리아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랄까, 조금 과하게 잘 따르는 이들이다. 듣기로는 그녀와 함께 세스 녀석의 일로 휘말린 아이들이라나.


어쨌거나 저러한 쑥덕거림과 해명을 듣노라면 오늘 리아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다만, 학원에 재직 중인 것을 비롯하여, 이 모든 상황이 알고 있던 그녀와는 괴리감이 있어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다.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저 아이의 일상이니.’


여하튼 평화롭다. 이전처럼 문제를 몰고 다니긴 하지만.



“후훗.”

“우응? 앗?! 델리안, 빨리 오셨네요?”


웃는 소리에 이쪽을 발견한 리아가 두두두두, 종종걸음으로 뛰어온다.


이를 보며 델리안은 생각했다.


이 또한 자신이 알던 그녀와는 다르다고.


이전 자신이 알던 그녀는 억척스럽고 사내다웠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장부 같았달까. 하지만 그 시원시원한 성격과 더불어, 여자가 봐도 이쁜 외모가 곁들어진 그녀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한정으로.


안타깝게도 이스피리아의 언행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경어 자체를 쓰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어투까지도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불량배들처럼 좋질 못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붙어있는 이력은 대륙 최강이자 영웅, 대주교이자 성기사단의 단장이다······


이런 엄청난 것들이 주렁주렁 달려있건만. 외모와 분위기 그리고 직책 등, 머릿속에서 그렸을 그녀의 환상이 깨지던 그 장면은 정말 각별―― 아니, 꿈이라도 꾼 듯 넋이 나간 사람들의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무수히 많은 칭송을 듣는 그녀가 실제로는 이런 맹하고 가벼운 사람일 거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용케도 대주교와 단장, 이 두 자리를 그녀에게 내어줄 생각을 했다고 감탄도 인다.


하지만 이후 사람들은 속았다며 그녀를 경멸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하나?


무수히 많은 사람의 환상을 깬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스피리아는 어쩐지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긴커녕 신묘한 분위기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털털하게 대하는 그녀를 존경하며 따르기만 하였다.


여전히 성스럽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덕분에 [정화]를 쓸 수 있음에도 저 아이는 성녀란 말을 좀처럼 듣질 못했었지. ······음? 그러고 보니 다른 한 명의 성녀. 아마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했던 여자였지? 지금도 여전 할는지 살짝 궁금하군.’


실제 만나진 못했지만 능력 하나 안 되면서 토벌대에 참가하려고 온갖 억지를 부렸다는 둥, 드물게 혀를 내두르며 질색하던 이스피리아가 기억난다.


아마 어지간히도 현실 구분을 못 하는 몽상가이지 않을까······


‘성녀······답게 말인가. 뭐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겠지.’


그딴 만난 적도 없는 인간보단 지금이 중요하다. 놓치긴 아깝다.


곧장 생각을 멈춘 델리안은 앞을 봤다.


만면에 가득 웃음꽃이 피어난 리아가 보인다.


자신이 알던 그녀는 절대 저렇게 웃지 않았었다. 살짝은 잔재처럼 닮은 부분이 조금은 있었지만.


뛰어오는 몸짓조차도 기억 속, 사내나 다름없던 그녀와는 광년 단위로 거리가 멀다. 보통의 또래 여자아이나 다름이 없다. 세스와 자신마저 능가했던 인간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지금의 이스피리아는 한마디로――


귀여웠다.


아니, 너무너무 귀엽다. 객관적으로도 가느다란 손발 하며, 어여쁜 외모는 확실히 귀엽다. 주책맞게 살짝 깨물어주고 싶기까지 하다.


특히 보호욕을 절로 생성해내게 만드는 저 순진무구함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도 조금만 신경이 느슨해진다면 칠칠치 못하게 헤벌쭉거릴 자신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한 번 풀린 감정은 주체할 틈도 없이 곧장 무릎 위에 그녀를 앉혀놓고 몇 시간이고 간에 마구 쓰다듬겠지.


하지만 체면상 그럴 순 없으니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헤헤. 고생하셨어요, 델리안. 힘들진 않았나요?”


바로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이스피리아. 그 모습은―― 어쩐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아이들 같았다.


뚜득――



“엇? 데, 델리안?”


이스피리아가 뭐라 부르고 있지만 이성의 끈은 이미 끊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녀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놨다.



“······.”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다. 마음껏 욕망에 몸을 맡기자.


빠르게 패배를 선언하니 더는 사양할 게 없다.


델리안은 곧장 이스피리아의 허리를 감싸고는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 만져봤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걸림 하나 없이 매끈하게 훑어지는 머릿결의 감촉이 훌륭하다. 너무 과하지 않게 은은히 퍼지는 화이트 로즈의 향기도 괜찮았다.


분하지만 찬크에르. 그의 관리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내심 조금 아쉽게 생각하고 있으니 바로 밑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이스피리아의 기척이 전해진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으음? 오오. 델리안 냄새 좋아! 그리고······ 의외로 크시네.”


단순하다고 할지, 사소한 건 신경을 안 쓴다고 해야 할지. 역시나 금세 순응한 리아가 편안히 몸을 눕힌다.


머리도 완전히 이쪽에 맡긴 그녀는 한동안 킁킁, 숨을 들이쉬더니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고백 사건만을 빼고.


오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운가 보다.


뭔가 부산히 움직이는 얌전한 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아깝다.


뭐가 아까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깝다.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델리안은 최근 새롭게 구상한 마법을 저도 모르게 발동했다.



“응?”


마법의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이 아이를 속이긴 어렵다.


그리고――


귀엽다.


동작 자체는 이전의 그녀도 가끔 하던 것이었으니 그리 특별할 건 아니었지만, 저 똘망똘망한 눈동자 하나만으로도 그 귀여움의 정도가 다르다.


미안하지만 이전 그녀는 절대 오르지 못할 성역에 도달해있지 않을까도 싶다.



“이것도 영구 보존을―― 아, 아니. 흠흠.”

“······.”


고개를 올려 게슴츠레하게 보는 리아.


델리안은 모르쇠 작전으로 나갔다. 물론 이 와중에도 새롭게 구상한 마법, [기억 편찬]을 멈추지 않았다.


[기억 편찬]은 기억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마법으로, 번거롭게 기억을 일일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 없이 분류한 카테고리를 떠올리기만 하면 편하게 그 안에 있는 기억만을 볼 수 있는 마법이다.


일종의 앨범화. 하지만 일상을 보내는 데에선 꽤 기억에 혼선을 빚는 등, 그 감각이 조금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그만큼 번거로운 마법이었기에 후에 마도구 형식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여의찮아 임시로 혼에 새겨둔 상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항목 중, 주목적이었던 ‘이스피리아’의 영역이 요 며칠 사이 빠르게 내용물들을 채워나갔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꽤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었다고 델리안은 흡족해했다.


그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어 더욱 꼭 리아를 끌어안았다.


얼버무릴 속셈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행동이 리아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 금세 헤벌쭉한 얼굴이 되어 가슴속으로 더욱 깊게 머리를 기대었다.



“아! 근데 우리 아이리스는요?”


한참을 떠들다 생각났는지 이스피리아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피곤했던지 일찍 들어가 쉬겠다더구나. 자네가 오면 알려달라고는 했는데······”

“에이. 잘 쉬고 있을 텐데 일부러 부르긴 미안해요. 내일 인사하도록 하죠.”

“후후. 그러려무나.”


그리 말한 델리안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아쉽게 이스피리아를 내려놨다.



“식사는 어찌하겠느냐?”

“으음. 오늘은 저도 좀 지치기도 해서······”


말을 흐린 이스피리아는 힐끔, 찬크에르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에헤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끝! 자자, 델리안 먼저 씻으세요. 저 오래 걸리잖아요.”


어서 먼저 가라며 손을 잡고 끈다.


하지만 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흐음. 형식상이라고는 하나, 난 현재 자네의 사용인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고용주보다 먼저 씻겠나. 게다가 매번 말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사용인 방도 세면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니 난 거기서 하면 된단다.”

“우우! 거긴 좁잖아요. 기왕 씻는 거 널찍한 곳에서 느긋하게 해야죠.”

“어차피 금방――”


말을 하다가 떠오른 생각에 델리안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 같이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네?”

“혼자 하는 것보단 그편이 빠르지 않겠니. 게다가 나도 자네가 하는 목욕에 관심이 있었단다. 마침이고 하니 좀 알려주겠나?”

“어, 알려주고 할 것도 없는데······ 그냥 몸을 담그는 것뿐인지라.”

“뭐 어떤가. 우리 쪽에선 드문 풍습이니 기왕이면 제대로 배워두고 싶구나. 여차할 때 창피를 당할 순 없잖니.”

“창피를 당할 일이 있나······?”


그냥 대충 둘러냈을 뿐인데, 방금 대답이 결정타였나 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리아가 절실히 통감한다. 무얼 통감했는지는 전혀 공감할 순 없었지만.


기세가 오른 리아는 냉큼 델리안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세면장의 초입, 탈의실로 들어서자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엉덩이를 뒤로 뺀 엉거주춤한 자세도 그렇지만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시선이 방황한다.



“왜 그런가?”

“어, 그게······ 저기······ 괜찮나요?”

“뭘 말하는 겐가?”

“옷······이요. 버, 벗잖아요.”

“그야 탕에 들어가려면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렇군. 속옷은 입고 들어가는 풍습인가? 하지만 여러모로 찝찝할 거 같은데······. 꽤 특이하군.”

“아뇨아뇨! 목욕인데 속옷도 당연히 벗어야죠. 그리고 목욕 예절이라든가, 이 나라에 그런 풍습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곳에 있는 욕조도 에르가 만들어줬거든요.”

“그럼 뭐가 문제인 게냐?”


되묻는 말에 리아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무언갈 결심한 듯 큼지막한 옷장 앞에 섰다.


몇 번의 심호흡도 하는 등, 한동안 가만히 있던 리아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아주 빨갛게 농익었다.



“데, 델리안도.”

“음. 알겠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리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흠······ 혹시 부끄러워하는 건가?’


몰래 살짝살짝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분위기라든가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그래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또 색다르다.


아이다운 감성 하며, 남성이 있든 말든 훌러덩 옷을 벗고 씻던 이전 그녀와는 천지 차이. 약간 조숙하면서 섬세한 모습이 귀엽다. 무지하게.


싱긋 웃은 델리안은――


······조용히 이스피리아 영역에 새로운 장면을 추가했다. 만족스럽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서 있을 수만은 없다. 사양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일 겸, 손수 먼저 천천히 옷의 단추를 풀러 나갔다. 리아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벗은 옷들을 옷장에 걸어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가서 물을 채워두도록 하지. 자넨 천천히 하게나.”


대답은 없었지만 델리안은 살짝 웃고는 세면장으로 들어섰다.



“흐음······ 몇 번 보긴 했었지만 설마 이걸 그자가 만들었을 줄이야.”


팔짱을 낀 채 2~3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욕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만든 사람의 센스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이다. 제법 사치스럽게 꾸며진 이곳에 원래 있던 샤워기나 세면대와 함께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린다.


조금 분한 기분을 느끼며 델리안은 다가가 안쪽을 살펴봤다.



“자세히 보긴 처음이지만······ 분명히 이 마개를 닫고 물을 만들어 넣는 것이겠지. 따로 수도를 공급하는 곳은 없어 보이니. 한데 이건 무슨 재질이지? 뭔가 안이 비어있구나.”


살짝 두들겨보니 통통 소리가 난다. 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재질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물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느낌으로는 생성으로 만들어 낸 것이지 않을까 싶다. 용왕이 만든 것이라 애당초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마력의 잔재는 없어 확신은 못 하겠다.


다만 생성해낸 것이라면 왜 이리도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모르겠다. 이 정도라면 살짝 힘만 주어도 부서질 텐데.



“안이라도 채워뒀으면 좀 더 딱딱할 터이다만······ 아무래도 좋겠지. 들어간다고 부서질 정도는 아니니. 그보단 물이나 채우도록 할까.”


욕조 안으로 들어가 마개를 닫은 델리안은 마법으로 곧장 물을 채워 넣었다.


물은 순식간에 욕조 가득 차오르고, 가만히 서서 무릎 바로 아래까지 차 있는 물의 온도를 맞춰봤다.


어느 정도가 딱 적절한지 알 수 없어 대강 살짝 김이 나는 정도로 했다.



“준비는 이걸로 끝인가? 그럼 다음은 이스피리아가 오면 되는데······ 너무 꾸물거리는구나.”


탁월한 조작 탓에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문밖에서 우물쭈물하는 리아의 기척이 전해진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델리안은······


강제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욕조를 나와 바닥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문을 벌컥 여니 기다란 수건으로 거의 몸 전체를 가린 리아가 보인다.



“데, 델리안 보, 보여요! 가리세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뭔가 간절히 외쳐대지만 무시. 엉거주춤 서 있는 리아에게 곧장 다가가 번쩍 안아 들었다.


꺅꺅대며 놀라 소리치지만, 그것도 무시. 오히려 아이 같은 이 귀여운 모습을 뇌 내에 영구 보존하였다.


뜻하지 않은 이득을 본 델리안은 그렇게 김이 서리게 된 세면장을 가로질러 바로 욕조로 직행했다.



“뜨거운 정도는 괜찮나?”


리아를 안은 채로 탕에 몸을 담근 델리안이 물었다.



“어, 네. 되려 미지근할 정도네요.”

“음? 그러면 더 뜨겁게――”

“――아, 아뇨! 기분상 그렇다는 소리예요! 딱 좋아요.”


너무 뜨겁진 않나 걱정했는데 그러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아무리 초월자라도 뜨거움이나 차가움은 평범하게 느낀다. 기왕이면 기분 좋은 목욕이 되었으면 했기에 무심코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그런데 너무 굳었구나. 이쪽도 전혀 보지 않고. 이스피리아야, 좀 더 편히 있는 게 어떤가?”

“으윽······ 초절정 미녀랑 함께 목욕하는 건데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그리 말해주어 고맙구나. 하지만 자네도 전혀 뒤지지 않게 무척이나 귀엽단다. 자신감을 갖거라.”


진심으로 한 말이다. 무릎 위에서 앉혀놓은 이스피리아는 그야말로 무적. 이길 자신이 조금도 없다. 긴장 때문에 굳은 것조차도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귀엽다. 무뚝뚝한 자신과 비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쳤다지만 너무 긴장하는구나.’


어떻게 하면 이 긴장을 풀 수 있으려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물 위에 퍼진 머리카락을 본 리아가 놀라 소리쳤다.



“델리안! 머리카락을 마셔야죠! 상한다구요. 이렇게 고운데.”

“응? 자네나 나나 겨우 이걸로 머릿결이 상할 리가 없잖나. 만 배 정도 더 뜨겁다면 모를까. 상해도 [치유]로 되돌리면 그만이고.”

“과, 관리는 평소 습관이 중요한 거래요. 사소한 데에서 영향이 나타나니 신경을 써야죠. [치유]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요!”


과연 생물의 한계를 넘어선 자신들에게 관리라는 개념이 통용될까도 싶다만······ 어떻든 간에 상관없다. 이 귀여운 아이에게 어찌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니 리아는 뭔가 고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몸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욕조 밖으로 내밀었다.


주르르르――


뭘 하는가 싶었더니 청결마법으로 젖었던 수건에서 물을 빼냈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이스피리아야. 그냥 봐도 된다만?”

“아, 안 돼요. 지금만으로도 양심에 찔리는데 그건 도저히 버틸 수 없어요.”

“양심······? 뭔진 모르지만 불편하잖니.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아, 아뇨······ 제 쪽에서는 닳는 게 있어서요. 사실 지금만으로도 쭉쭉 닳고 있어요. 빨피라고요.”


그렇게 한사코 쳐다보길 거부한 리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델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착.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렸다.



“젖지 않게 잡고 있으세요.”

“알겠구나.”


건네받은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둔 채로 들고 있으니 리아는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물에 빠진 머리카락을 건져 물기를 짜내더니 양 갈래로 나누었다.


혹여나 몸에 닿을까 지극히도 조심스러운 리아를 차분히 보고 있으니 그녀가 말을 걸어온다.



“자, 이제 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싸세요. 젖지 않게요.”


시키는 대로 하니 리아는 감싼 수건을 잡아 귓가 근처에서 돌돌 말기 시작했다. 도중 민감한 귀를 건드려 움찔할 뻔도 했으나 잘 참아내었다.


그러고 나서 리아는 수건의 끝부분을 뒤쪽으로 넣으려는 듯했는데······ 팔이 좀 짧은 듯하다.


이 이상 더하려면 필연적으로 몸을 밀착할 수밖엔 없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리아는 껴안듯 목뒤로 양팔을 두른 채로 굳었다.


델리안은 뭔가 말하려고 하는 리아를 훅 끌어당겼다.



“데, 데, 델리안?!”


얼굴을 가까이한 리아는 당혹스러워했다. 눈은 여전히 꾹 감고 있었다.



“어서 하거라. 끝내기 전까진 놓지 않을 거다.”

“우으으······”

“자랑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몸이라 생각한다만? 그리고 암만 눈을 감았다지만 움직임의 정교함을 보니 눈을 뜬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물속에 퍼진 머리카락을 끌어오거나 꾹꾹 눌러 물기를 짜냈던 리아였다. 그것도 한차례의 버벅거림도 없이. 당연히 잘 보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대로 정답이었는지 리아는 움찔했다.


‘뭐, 내가 아는 이 아이라면 당연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능글맞게 물었다.



“아니면 노인네의 몸엔 닿기도 싫단 게냐?”

“그,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무릎 위에 앉지도 않았겠죠! 거기다 델리안이 어딜 봐서 노인네라는 거예요?! 본인도 자랑이라고 해놓고는.”

“후후. 자랑이라고 한 적은 없다만, 자네가 그렇다니 마지막까지 문제는 없겠구나. 잘 부탁한단다.”

“아······”


말문이 막힌 리아는 멍하니 굳었다. 참으로 쉽게 걸려들었다.


하지만 끝내지 않는다면 정말 놓진 않을 거다. 리아도 그걸 느꼈는지 작게 숨을 내쉼과 동시에 재기동하였다.


‘과연 기억이 없다지만 나를 잘 알고 있구나.’


제법 그리운 기분으로 델리안은 조물조물 열심히 작은 손을 움직이는 리아를 구경하였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고 있으니 아까 하려던 것이 마지막 작업이었는지, 뒤통수 쪽 수건 밑으로 끝부분을 모두 말아 넣자마자 리아는 바로 종료를 알려왔다.


그리고――


도중 살갗이 스칠 때마다 움찔하면서도 진지하게 임하던 리아는 역시 귀여웠다. 뇌 내에 보관도 착실하게 해두었다.



“돼, 됐어요. 양머리 완성이에요.”

“옆에 달린 이걸 말하는 건가?”

“네.”

“흐음. 양머리보단 마족들의 뿔 같구나. 드물긴 했지만 이러한 형태를 본 적이 있단다.”

“오호. 그러한 분도 계시는군요. 한 번 보고싶―― 헛! 데, 델리안 이제 끝났으니 놔주세요!”

“여전히 기묘한 부분에선 눈치가 좋구나.”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했건만.


아쉽기는 하지만 약속은 약속.


델리안은 손을 풀어······ 리아를 처음처럼 돌려 앉혔다.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를 둘러 배꼽 앞에서 손을 감싸줘 안았다.


소파에 앉아있었을 때와 같은 뒤에서 안는 자세. 다른 건 서로 민낯을 완전히 드러낸 정도다.



“······.”

“······.”

“저기······ 델리안?”

“약속은 지켰단다. 다시 안았을 뿐이지.”

“아, 아니,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넓잖아요. 이렇게 좁게 있을 필요가 있어요?”

“뭐 어떤가. 모처럼 자네가 권해준 것이기도 하니 이대로 있자꾸나. 그러니 맘 편히 머리를 기대―― 응? 지금 보니 자네야말로 머리를 탕에 담그고 있잖나. 나한테는 꾸지람해놓고 본인이 그러면 안 되지. 잠시 기다려 보거라.”


그리 말한 델리안은 탕 밖으로 손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장 [차원수납]을 발동하여 벌어진 공간 사이로 손을 넣었다.


헤맬 일은 없다. [차원수납]의 안인 건너편은 평소 분류별로 물건을 쌓아 놓아뒀으니. 거기다 찾으려던 물건의 바로 앞을 열었다. 촉감을 통해 목표한 물건임을 알고는 바로 꺼내었다.


그렇게 꺼낸 물건은 수건으로―― 퀸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안 받겠다는데도 억지로.


이외에도 퀸에게 받은 선물들은 꽤 있었으나, 모두 개봉조차 하지 않고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혹여나 이를 빌미로 나중에 뭔가 귀찮은 일이라도 부탁할까 봐.


이 수건도 마찬가지로 여태 구석에 박혀 빛 볼일도 없이 지냈었는데······ 실은 오늘 이때를 기다렸었나 보다.


‘음. 퀸이 뇌물로 줄 만은 하군.’


얼핏 기억에 남기로는 성목 근처에서 자라는 목화로 만든 최고급품이라고 했었는데 거짓은 아닌 듯하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꽤 훌륭하다.


다만, 거금을 들이더라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꿈의 물건이라고 은근슬쩍 거드름 피우던 퀸은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래봐야 소모품인데 말이야.’


어이없다고 여기며 델리안은 꺼낸 수건을 망설임도 없이 리아의 머리 위에 올렸다.



“앗. 제가 할게요.”

“아니다. 내가 하마. 어떻게 하는 건지 제대로 기억해뒀단다.”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하니 사양하던 리아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입가에 미소를 그린 델리안은 똑같이 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는 수건을 말아 양머리를 완성하였다.


‘여전히 마족의 뿔 같아 보이지만.’


하지만 리아가 양머리라 했으니 그런 줄 알고 넘겨야 할 것이다.


――아니, 그런 게 뭐가 중한가. 이리도 귀엽거늘.


귀여움은 정의다. 무엇을 닮았는지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보단 리아와 같은 것을 머리에 하고 있다는 게 훨씬 마음이 끌린다.



“그런데······ 뭘 하는 건가?”


탕 속에서 손을 휘휘, 젓던 리아가 흠칫한다.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니 향기로운 향이 느껴졌다. 눈을 내려보니 탕에 둥둥 뜬 잎사귀가 보인다.



“허브인가.”

“마, 맞아요. 라벤더인가 하는 허브에요. 제 고향에서 따온 건데, 목욕할 때 넣으면 여러모로 좋대요. 바로 넣으려고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어요.”

“향이 좋구나. 자네 혼자만 이 좋은 걸 즐기고 있었나?”

“으에? 아, 아뇨, 그게――”

“――농담이었단다. 후후.”

“델리안······”

“미안하다. 사죄의 의미로――”


스윽.


살며시 리아의 양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특등석은 마음에 드나?”


입을 뻐금뻐금하던 리아. 잠시 후 포기하기로 했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몸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는지 턱을 반쯤 탕에 담그고는 투덜댔다. 물론 그런 그녀의 머리가 젖지 않도록 제대로 뒤에서 받쳐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적당히 대꾸해주면서 듣고 있자니 조용해진 리아의 시선이랄까, 감각이 이쪽의 가슴을 향하는 게 느껴진다.



“그, 그나저나 진짜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스타일이시네요.”

“호. 꽤 마음에 들었는가?”

“마, 마음에 든다기보단 좀 의외라서요. 엘프 분들은······ 실례지만 조금 작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거든요.”

“왜 그런 이미지를?”

“그냥 어쩌다가요······”

“인간들에겐 그리 생각되고 있나? 하긴 교류가 끊긴 이후로 시간이 흘렀으니. 하지만 엘프와 인간은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단다. 기껏 해봐야 귀가 조금 긴 정도지. 나머진 개인차구나. 그런 의미에서 나도 그리 큰 건 아니란다. 간신히 상위권에 들겠지.”

“그런가요······”


작게 중얼거린 리아는 고개를 내려 라벤더가 뜬 물속 어딘가를 보았다.


‘제법 신경이 쓰였었나. 하지만 지금만으로도 충분한 듯싶다만······’


리아를 안아 올렸을 때 보았던 그 꽃봉오리는 원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저 체구로서는 무척이나 훌륭하여 동년배 중에서는 맞상대가 가능한 인물은 그리 없으리라. 자신 또한 저 체구일 때에는 약 3배는 작았기에 대적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리아의 걱정은 괜한 일이랄까.


더군다나 성장한 그녀는······ 더욱 엄청났다. 갑주에 가려진 그 진가를 처음 목격했을 때는 무심결에 눈이 가기도 했었다. 다시금 떠올려봐도 풍만한 크기와 흐트러짐 없이 조형미를 뽐내던 그 형태는 정말 완벽하여 아름답게 여겨진다.


지금도 벌써 그 싹이 보이건만. ······정말 괜한 걱정이다.


‘음? 아니군. 이 아이는 지금 초월자이지 않나? 분명 원래의 머리카락은 갈색빛이었었다고. ······아하. 그렇게 된 거로군.’


기억 속 그녀와는 다른, 조금 이른 초월자의 도달.


무얼 고민하는 것인지 알자 꽤 허탈해졌다. 그렇게까지 외형이 중요한 건가 싶어서. 원체 남자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거니와 가꾸거나 하지도 않아서 그런지 공감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신선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자는커녕 어딘가 날이 서 있던 그녀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룰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이 되질 않았었다. 그랬건만 아들까지도 낳고 여느 여자처럼 전전긍긍하다니. 눈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과 달리 델리안의 입가엔 미소가 머물렀다.



“다행이로구나, 이스피리아야.”


의아한 듯 눈을 감을 채로 올려다보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지금은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바랐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다시금 친구가 된 그녀가 앞으로도 행복하게 지내기를.


정말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며 델리안은 잠시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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