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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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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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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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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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DUMMY

송구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는 리카드.


이리저리 마력을 주입하려는 등 꾸물거린다 싶었더니 저러한 방식의 마도구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다른 아티팩트를 자주 다루시지 않으셨나? 아니다. 그것들은 작동방식이 조금 다르려나?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알아본다고 했던 걸 잊고 있었네.’


예전에 미루어두었던 일을 떠올린 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팔찌를 쳐다봤다.


머리카락만치 가느다란 철실 여섯 가닥이 엉킨 형태의 팔찌는 남녀의 알콩달콩한 사이를 강조하기 위해 중간엔 포인트로 덴드롱―― 얼핏 기억하기로는 축복과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닌 꽃장식이 달려있었다.


알록달록 빛을 내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예쁜 모양새는 남자가 착용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모르라면 모를까, 선이 곱도 부드러운 인상인 리카드라면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단단하다.


저기에 쓰인 건 오리진.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쥐더라도 구부러지지 않는 몇 없는 금속이다. 얇은 팔찌에 불과하지만, 그 강도는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착용하기 위해선 별도의 방법이 필요했다. 팔찌는 둘의 손목 둘레에 거의 딱 맞게 제작했으니.


하지만 설마 리카드가 방법을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쩔 수 없으니 리아는 가볍게 다시금 혀를 차고는 그 방법들을 알려주기로 했다.



“끼는 것부터 알려드릴게요. 우선 팔찌를 들고 착용하겠다고 생각해보세요. 기존의 마도구처럼 마력을 주입하시지 않아도 돼요.”

“예······?”


리카드는 매우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리아는 해보면 안다며 재차 권하였다.


어쩐지 미심쩍은 눈치인 리카드는 딱딱 굳은 얼굴로 팔찌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스윽―― 지시에 따른 것인지 팔찌가 늘어났다.


멀쩡히 착용할 준비를 끝마쳤건만. 리카드는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가 의구심이 들 때쯤 리카드는 팔찌를 손목에 채어 넣었다.


스윽.


작동방식에 금세 익숙해졌는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리카드는 손목에서 빛을 발하는 팔찌를 지긋이 보았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조금 딱딱하게 물어왔다.



“[변형]······ 아니, 이 팔찌를 만들 때 쓰셨던 [성형]입니까?”

“맞아요. 그 금속은 형태만 바꾸는 [변형]을 적용하기엔 좀 까다로워서요.”

“마력의 소모가 없는 건 아까 말씀하신 개념의 고정이라는 심상마법의 특징인가요.”

“정확하세요. 마냥 장점만 있진 않지만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저희가 대전쟁으로 잃은 건 다른 게 아니라 심상마법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아뇨.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그런가요?”

“예.”


뭔진 모르겠지만 리카드는 후련하다는 듯 얼굴을 폈다.


그리고 어느덧 현실로 돌아온 세리오가 마찬가지로 급하게 팔찌를 차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엥?! 이, 이거 아티팩트 아녜요?! 어, 어? 근데 방금 이스피리아 양이 만드신 게······”

“예. 이스피리아 양은 아티팩트를 만드실 줄 아시는 거지요.”


순간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세리오는 멍하니 팔찌를 보았다.



“저, 정말 굉장하시네요······ 지, 진짜 만능점포를 여셔도······ 기왕이면 저도 매니저로서 고용해주셨으면······.”


당황한 듯 중얼거리는 세리오를 뒤로한 채 리카드는 여태 방치되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작게 내쉰 한숨과 함께 찻잔을 내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갔다.


하지만 그전에 리아는 먼저 선수를 치듯 잘라냈다.



“감사는 됐어요. 저도 리카드 씨에게 이제 여러모로 받아 갈 예정이에요. 게다가 벌써 그러시는 건 좀 이르다고요? 아직 그 팔찌에 담긴 마법도 제대로 보지 않으셨잖아요.”


고개를 든 리카드는 기분 좋게 웃었다.



“후후. 그렇지요. 멈춰있던 제 꿈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것에 너무 감정적으로 되었나 봅니다.”


‘꿈이라······ 리카드 씨의 꿈은 맘 편히 연구하는 것이려나? ――응? 근데 최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 슬픔이 없는 세계라든가 했던 거 같았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뭐, 됐나.’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보단 어서 보고 싶다. 놀랄 둘의 반응이.


정말 모처럼 나이스 아이디어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최고의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사이좋은 남녀의 중매를 서주는 사람처럼 한껏 기분을 끌어올린 리아는 음흉하게 웃었다.



“자자, 어서 해보세요. 사용법은 간단해요. 팔찌를 찼을 때랑 마찬가지로 발동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되거든요.”


재촉하는 듯한 손짓에 리카드는 곧장 팔찌를 가동했다. 그리고 세리오가 이에 호응하듯 소리쳤다.



“어?! 저, 저기! 이거 머릿속으로 뭔가 신호 같은 걸 보내는데요?”

“아아. 팔찌에 걸린 마법은 한 쌍으로 작동하는 거거든요.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전화를 받는다는 느낌―― 흠흠. 신호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시면 바로 작동할 거예요.”


호기심이 자극당한 것인지 리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의 마법에 잠시 고민하던 세리오는 그의 모습에 결정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팟――!


왠지 이런 의성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빛의 번쩍임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진 않았다.


세리오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고, 곧 자신의 앞에 있는 창을 발견하였다.


창에는 화면이 떠 있었는데, 그 화면에는 리카드가 비치고 있었다. 리카드도 마찬가지. 그의 화면에는 눈을 둥그렇게 뜬 세리오가 나타나 있었다.


서로의 얼굴과 창을 번갈아 쳐다보는 둘에게 리아는 말했다.



“이게 제 선물이에요. 이걸로 언제 어느 때고 서로 연락하실 수 있어요. 물론 거리도 전혀 상관없이 마음껏! 마음에 드셨으면 하네요.”

“자, 잠시만요! 이스피리아 양.”

“왜요? 리카드 씨.”

“이건 설마 체험학습 때의?”

“네. 그래서 어떤가요? 이게 빛 속성의 마법인가요?”

“예? 아, 예. 빛과 바람 속성, 게다가 정신계까지도 섞인 복합마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술식을 본 건 아닌지라 확신할 순 없지만요. 하지만 정말 이런 물건을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필시 상위의 아티팩트입니다만.”

“물론이죠. 개인적으로 이 마법이 빛 속성인지 물어보려고 만든 건데 아깝게 버릴 순 없잖아요. 아, 나중에 기회를 봐서 술식으로 옮겨서 드릴게요. 연구에 도움이 되시라고.”

“······네?”


여기서 어물쩍거리면 또 말이 길어질 거다. 이를 직감한 리아는 딴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궁금한 건데요. 정신계라는 건 속성이 뭔가요?”


의외로 교육자 같은 면모도 존재했는지 리카드는 따지려 드는 걸 그만두고 금세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다양합니다만 보통 저주와 같은 피해를 주는 것들은 어둠 속성, 이외에는 무 속성으로 분류합니다.”

“치유마법은요?”

“빛 속성입니다.”

“이유는요?”

“이유라니······”

“그걸 누가 정했느냐고요.”


거기서 깨달았는지 리카드는 눈을 크게 떴다.



“과연······ 이전에 비슷한 논의를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깊게 고려하지 않았었습니다. 오래전에 분류되었던 기초 학문이었던데다가 그 외에도 할 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히 빛과는 연관이 적어 보입니다.”

“근데 왜 빛 속성이라고 분류됐죠?”

“성스러운 힘이란 이유로 그리 분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의 축복이 어쩌고 하는 그거에서 비롯되었나 보다.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아시죠?”

“예. 직접 술식을 봤으니 말이죠. 같은 빛 속성이라는 [광구]와는 근본 자체가 다릅니다. 기왕 분류한다면 무 속성에 생성 계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 생성 쪽이에요?”

“제가 볼 땐 그렇습니다. 이스피리아 양이 주신 치유 술식들은 전부 생성계 쪽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 생성 계열은 아니고 반쯤 걸친 느낌이지만.”


없어진 사지나 끊어진 신경, 근육의 연결 등을 보면 꽤 일리 있는 의견이 아닐까.


‘음. 난 단순히 재생력을 높이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조금 원리가 다를지도. 이걸 보면 학문으로서 마법을 증명하는 술식의 가능성은 꽤 대단할지도 모르겠네. 전혀 심상마법의 하위호환 같지 않지? 하지만 생성 계열이라······ 꽤 관심이 가던 분야였지. 나중에 델리안에게 물어볼까? 에르는······ 응.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패스.’


스스로도 치유마법을 쓰면서도 의아하던 부분이었건만. 현재 상황을 모면하려 한 단순한 행동이 의도치 못한 방향을 제시한 기분이다.


의외로 값진 것을 얻어간 게 아닐까. 때마침 시험도 끝나서 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내심은 빈둥빈둥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안 되지 안 돼. 아이리스가 저리 열심히 친구들과 공부하는데 엄마인 내가 그럴 수야 없지.’


음음.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턱에 손을 올리고 고뇌 중인 리카드를 쳐다봤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에요. 분류니, 속성이니 틀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라고요.”

“확실히 주 속성이 아닌 마법도 느리긴 해도 노력 여하에 따라 발전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분류를 나눈 건 이미지 구축에 도움을 주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그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긴 듯도 하지만요.”


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리카드의 주의를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적어도 이 시간 이후로 팔찌에 대해 물고 늘어지기는 좀 그럴 테니 더는 구시렁대지 않으리라.


정작 느긋하게 조직 보스의 기분을 만끽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래도 헤프게 웃으며 팔찌를 어루만지는 세리오를 보노라면 나쁘지만은 않다. 되려 저리도 티를 팍팍 내는데도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리카드의 둔감함에 다시 한번 탄식이 나올 뿐이다.


외부자인 자신이 이래저래 참견할 거리가 안 되니 대충 만족하기로 한 리아는 살짝 기지개를 켰다.



“아! 맞다. 또 까먹을 뻔했네. 리카드 씨. 예전에 마력 레벨을 측정하던 아티팩트요.”

“세베브리나의 눈 말씀인가요?”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요.”

“그 아티팩트가 왜······”

“아뇨. 그냥 조사랄까,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십니까······”


그 알아보고 싶은 내용―― 정말 신이 만들었는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괜한 설레발이면 창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에르가 인간이 만든 것 같지 않다고 했으니 확률은 높을 거 같아.’


어지간한 물건에 용왕인 에르가 그런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단정할 순 없겠지만 분명 범상치 않은 물건일 터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난처해 보이는 리카드가 눈에 띄었다.



“여, 역시 좀 무리였나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잠깐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세베브리나의 눈은 지금 이곳에 없어서요.”

“그럼 어디에 있나요?”

“왕가입니다. 전설급의 아티팩트로서 왕성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보실 수 없는 건 아닙니다. 학원에서의 측정이나 연구 등으로 빌려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왕성에 들를 시간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받아오려고요.”

“그렇군요······”


당장은 무리인 듯하다.


뭐, 상관은 없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뿐이지 급한 건 아니었으니. 나중에라도 볼 수만 있다면야 괜찮다.


‘그건 그거고······’


리아는 미안해하는 리카드의 안색을 살펴봤다.


기분 탓만은 아닌지 눈가에 살짝 어둑어둑한 기미가 보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초췌했던 이전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조금은 피로가 쌓인 듯하다.



“리카드 씨. 제대로 쉬고 있긴 하나요?”

“응? 예. 알려주신 치유마법 덕분에 최근엔 숙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자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아니, 그게 아니라 업무를 말하는 거예요. 매번 볼 때마다 혼자 일하시는데, 다른 선생님들도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실무를 혼자 보시는 거예요? 뭔가 이유가 있나요?”

“세리오 씨나 다른 교직원들께서도 같이 업무를 합니다만······ 역시 좀 업무가 과하긴 하죠.”

“아시면서 왜?”


같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세리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손을 리카드는 살며시 잡아주어 다독여줬다. 그리고는 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스피리아 양도 학원에 다니시면서 아마 느끼셨겠지요.”

“뭘요?”

“차별······입니다.”

“아~ 역시 있긴 했군요.”

“부끄럽지만.”


잠시 속이 탔던지 리카드는 남아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제가 학원장으로 취임하고 나선 그러한 불평등을 없애려고 다방면으로 손을 뻗었습니다만 쉽지 않았죠.”

“사람이니까요. 남이 이래라저래라한들 본인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겠죠. 그래서 맡기기 힘들어하셨던 거군요. 일반반과 마법반에 차별을 둘까 봐. 게다가······ 리카드 씨는 세기의 대마법사로 불리는 몸. 마법 우월주의를 부추기면 모를까, 반대의 상황으로 이끌기엔 아무래도 힘들겠죠.”

“하아······ 정말 말씀대로입니다. 그래도 요즘엔 조금 분위기가 완화되었다는 듯도 하니 조금은 희망을 품어도 될까요······.”


리카드는 지끈거린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문제였나보다. 지적이고 침착한 평소와 달리 감정이 크게 겉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다시금 그가 어떤 심상의 소유자인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음음. 역시 리카드 씨는 꽤 착한 분이야. 고리타분하게 머리가 굳어있지도 않고. 우리 마을에서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읏.’


막상 떠올리니 꽤 기분이 나빠진다. 그와의 첫 만남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참상의 자리였으니.


그래. 그의 공격으로부터 아시리트를 감싼 티라이드가 크게 중태에 빠진 걸 어찌 좋게 기억하겠는가.


그렇기에 거기서 회상을 멈추려 했다만······ 재차 떠올리니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려지는 건 나무를 뚫고 땅에 박힌, 찐득한 검붉은색의 액체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살점들로 범벅이 된 얼음의 창. 거기에 왼쪽 복부의 절반가량을 잃고 누워있는 티라이드와 필사적으로 지혈하고 있는 아시리트. 그런 둘에게 무자비하게 마무리 일격을 꽂는 리카드.


무심코 떠오른 그때의 장면이었지만 화가 치민다.



“저······”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 아뇨, 리카드 씨에게 궁금한 게 있어요.”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정말 작은 파문이 이는 정도의.


하지만 막상 의문이 생기니 이상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당신. 그때 왜 우리 마을 사람들을 공격했던 거야?”


자신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무미건조한 음성이 나왔다. 더불어 몸을 얽매고 있던 족쇄도 어느새인가 모두 풀려버렸다.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익숙한 것처럼.


노린 건 아니지만 기왕 이리된 거 잘 됐다.


이 상태―― 개방 상태의 자신에겐 거짓말 따윈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에르나 다이로스 씨 같은 분들뿐이겠지.’


솔직히 스스로도 긴가민가 의심이 들었지만, 검증은 끝났었다. 2년 전, 마을의 새로운 주민이 된 바지탄스들의 심문을 통해서. 사례가 하나밖에 없어서 조금은 신뢰가 안 가지만.


‘뭐가 됐든 길게 유지할 순 없어. 곧장 잠들 수도 있으니까. 서둘러 확인을 마쳐야 해.’



“······.”


뜬금없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세리오는 말문을 잃고 리카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실인지 추궁하려 들지는 않는다. 본인이 끼어들 차례가 아니라고 봤는지, 아니면 분위기에 압도당한 건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평화로운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앞을 보았다.


리카드는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죄책감. 그건 틀림없어 보인다.


그것을 확인하며 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착각했다는 소리는 들었었지. 하지만 제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대충 둘러댄 변명이 아니에요. 당사자들끼리도 다 정리됐는데 추하게 굳이 과거의 일을 들추려는 것도 아니죠. 그저 듣고 싶을 뿐이에요. ――문답 무용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그렇다. 리카드의 성격으로 보면 아무리 마족이라도 그런 식으로―― 대뜸 사력을 다해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실력을 행사하였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티라이드는 분명 죽었을 거다.


――그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몹시도 이상하다.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달까. 어째서 리카드가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그러한 적의를 품고 있다는 말인가.


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이 의문을 가볍게 넘기지 말라고.



『정정. 그건 시전자―― 이스피리아의 몫이 아님. 그럴 의무는 저들에게 있음.』

‘······아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되겠니?’


갑자기 끼어든 아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개방 상태가 아이에게도 통하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에 만능도 아니다. 저렇게 입을 다문다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거짓말을 못 할 뿐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건 아니니.


하지만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애당초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다. 긍지 높은 프라이드를 보면 반드시 그럴 거다.


그러니 억지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은하게 적의에 가까운 기척을 풍기는, 기분이 안 좋은 아이에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어차피 리카드도 마음을 다진 눈을 향해온다. 자신에게 향한 적의도 아니고 하니 아이가 알려줄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자.


아주 작게 고마움을 표하는 의사를 느끼며 리아는 정면으로 의식을 돌렸다.


침착한 듯 보였던 리카드도 분위기에 기가 죽었는지 방의 온도가 떨어진 것처럼 살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이유······ 이유 말입니까.”


진정할 요량인지 리카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분명 불쾌해지실 겁니다.”

“인제 와서 단죄하려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이야기한 대로 듣고 싶을 뿐입니다. 이 상황에서마저도 저에게 먼저 마음 써주는 당신이에요. 그런데 그때만은 달랐어요.”


리아는 고개를 들어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에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봤다.



“미안하게 됐어요. 당신에게도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왠지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나 당신,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마치 자신에게도 들려주는 듯 말한 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을 받은 리카드는 떨던 것도 멈추고 우두커니 넋이 나간 듯 마주 보았다. ――아니, 그전 샹들리에를 보고 있을 때부터 그는 묘한 기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돌연 죽음을 각오한 이의 눈이 된 리카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대로 전 그 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뇨, 마을에 있을 그들의 동료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재조차 남기지 않고 철저히. 필살의 감정을 품고서. 제 목숨과 맞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저는 그들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

“이유는······ 그 둘을 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납득하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스피리아 양.”


리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앞을 보는 그는 왜인지 자신이 아닌, 더 먼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게다가 이스피리아라 부르는 어감도 미묘하게 달랐는데······ 어딘가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하였다.



“끝난 일이라고 했죠. 저에게 죄송할 필요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보다도 오히려 저는 당신께 사죄했어야만 했습니다.”


올곧게 쭉 뻗은 강직한 눈······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여간 감정의 기복이 변하지 않는 개방 상태임에도 유쾌하다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이 상황에서 생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고집불통인 리카드도 나쁘지 않다며. 적어도 무얼 선택하든 염려 가득한 그보다는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분노한 건 그들에게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더 일찍 오지 않았느냐며. 한가롭게 조사나 하고 있을 때였냐며. ――오히려 분노의 대부분은 저에게 향한 것이었죠. 지금까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막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저는 늦었다는 것에 분노한 게 아니라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리카드는 주먹을 쥐었다.



“제가 분노한 건 앞으로 있을 자신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추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기심 덩어리인 저 자신이 말이죠.”


툭. 툭.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됐나, 손톱이 파고든 리카드의 손에서 피가 흐른다.


그것을 힐끔 쳐다본 리아는 물었다.



“이후에 있을 행동이란 ――저를 학원으로 데려오는 걸 말하는 건가요?”


리카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데려온다고 해도 학원이 아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줬어야 했습니다. 아아······ 정말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었지요. 당신께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면서도. 아마 당시의 전 본능적으로 느꼈겠지요. 이번마저도 저는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라는 걸.”


그렇기에 막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는 것인가.


이야기는 대충 이해했다.


――더불어 예전부터 계속 들던 기시감도. 계속 안정화나 시뮬레이션 등 멍한 상태였기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아마 맞겠지.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의 일을 기억한다라······ 리틀의 세계랑 비슷하기도 하고, 마법이 있는 곳이기에 가능한 현상인가?’


상당히 믿기 힘들지만, 이 추론의 신빙성은 높다. 평행세계라고 이전부터 얼추 추측은 해놨었기에 말이다. 덕분에 놀라움도 의외로 적었다.


실제 예시인 세스도 있다. 맞붙을 당시 도중부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던 건 분명 다른 때의 기억을 되찾았기에 그랬을 거다.


그 외에도 비슷한 일을 자신도 겪었었다. 그것도 제법 많이.


‘방금도 막 겪었지. 그래, 그건 다른 때의 나였나? 그리고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 그게 또 다른 때의 내 이름이었군. 세스······ 그 녀석과는 이전에도 꽤 알고 지냈었나 보네. 근데 뭘 어떻게 하면 내가 디바오러의 이름으로 사는 거냐.’


지금은 너무나도 싫어하는 세인트리안에서의 생활. 그것도 성자의 이름까지 받은―― 깊게 관련되다 못해 분명 중직일 위치이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든가 본인의 행보가 전혀 짐작도 안 됐던 리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다 개방을 해제했다.



“우으으으········· 그럼 딱딱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오늘은 아직 연구는 시작도 못 했잖아요?”


목을 살짝 돌려 기분상 뻐근함을 푼 리아는 빼꼼, 혀를 귀엽게 내밀었다.



“저, 저······?”

“흠······ 암만 그래도 이렇게 넘어가긴 좀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진지했는데 역시나 좀 무리겠지.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던 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인 리카드는 멍했다. 딱 봐도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따라오지 못한 모습이다.


‘역시 그냥 넘어가려던 건 아무래도 좀 미안한 짓이겠지.’


리카드가 진지했던 만큼 더더욱 죄책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다시 분위기를 잡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모처럼 부끄럼도 무릎 쓰고 필살의 애교를 부렸는데 뻘쭘하지 않은가.


······더욱이 대충 넘기려 한 행동이었기에 양심이 쓰라리다.


‘어쩔 수 없지. 조금 무례하기도 했고, 이번엔 교훈을 얻었다는 걸로 해야 하나.’


살짝 반성한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라도 꾸는 듯 시선이 따라오는 리카드.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눈빛만큼은 아까와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솔직히 좀 놀랍다. 어딘가 어정쩡했던 여태까지의 그가 다른 때의 일을 기억해낸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니.


‘아니······ 그만큼 그 인생에서 느낀 후회가 강렬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단순 기억만이 전부가 아닌 듯하네.’


아마 당시 체감했던 감정도 전부 느끼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러한 심적 변화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알아볼 게 늘었다.


그래도 이번엔 딱히 헤맬 걱정은 없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된다.


‘다른 때를 떠올린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리아는 눈동자만 돌려 힐끔 자신의 옆을 봤다.


분명 그라면 자신이 쳐다봤다는 것과 무엇 때문에 그런지를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평온한 채였다.


‘어느 정도 내가 알아차릴 걸 예상했었나 보네. 역시랄까. 뭐, 나중에 물어보면 알겠지.’


암만 그라도 더는 둘러댈 순 없겠지. 바로 앞에 묻기 좋은 대상인 리카드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 분위기와 상황에서는 조금 묻기 벅차다.


거기다 분명 리카드와 자신은 많은 연관이 있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꺼려진다.


‘암암. 흑역사라도 밝혀지는 날엔······’


꿀꺽――


부르르 몸을 떤 리아는 황급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뒷짐을 쥐고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코홈――”


리아는 길게 헛기침했다.


물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지만 조금 이상하게 보일 행동을 했음에도 그리 성과는 좋지 못했다.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지 고민하던 리아. 그러던 때에 문득 똑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리카드가 눈에 띄었고, 거기에 담긴 감정이 엿보였다.



“리카드 씨, 말씀도 그렇지만 혹시 후회하고 계세요? 절 베르다드로 데려온 것을?”

“······.”

“아! 말이 조금 부족했네요. 전 당신에게 묻는 거예요. ――지금의 당신에게. 당신도 절 데려온 걸 후회하나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뭐, 사소한 트러블은 조금 있었지만 그건 넘어가요. 어차피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도 아니었고, 살면서 다들 그 정도의 문제는 겪잖아요.”

“국가 재난급의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예상은 했지만 쉽게 풀리지는 않나 보다.


리아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전혀 위기가 아니었어요. 저 사실 그때 꽤 여유가 있었거든요. 진짜 완전 여유, 여유, 여유만만이었죠.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물론······ 다 뻥이다.


생각보다는 세스를 상대함에 있어 여유는 있었지만, 목숨을 걸었던 건 진짜였다. 말처럼 식은 죽 먹기는 절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통하지 않을 변명. 과연 너무 허세가 심했나 보다.


당연하게도 리카드는 한눈에 의도를 알아보았다. 오직 세리오만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성과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덕분에 겨우 리카드가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게 됐다. 아까처럼 마냥 부정만 하는 대화로 이어지진 않을 거다.


리아는 뭔가 말하려는 리카드에게 손을 내밀어 말렸다.



“리카드 씨. 제가 이 학원장실에 처음 온 날 기억하세요? 아아. 지금을 말하는 거예요. 어쨌든, 그때 저에게 물어보셨죠? 학원 생활은 즐겁냐고. 그리고 제 대답은 뭐였죠?”

“······즐겁다고 하셨습니다.”

“네. 그리고 고맙다고 했었죠. 그때의 말은 정말 진심이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그래도 못 믿겠다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학원장님, 절 데리고 와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즐겁게 학원 라이프를 보내고 있어요.”

“아뇨. 저에겐 그럴 자격이――”


또르르.


크게 뜬 리카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아는 따스하게 미소를 지었다.



“달래주는 건 제 역할이 아니겠죠. 대신 짐 정도는 덜어드려도 되겠지요.”


험험. 리아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리카드 씨, 들으세요!!!”


크게 소리치자 리카드는 빠르게 무영창으로 마법을 사용해 눈물을 날려 보냈다. 흐트러진 자세도 빠릿빠릿하게 가다듬었다. 이전 연기지도 때의 일을 몸이 기억하는지 무척이나 잽싼 동작이다.


그 모습을 본 리아는 거드름 피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살짝 뒤로 눕혀 뒷짐을 졌다.


이것이 바로 리아가 생각하는 최대한의 위엄 어린 포즈였다.



“후회하든 말든 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본인이 지고 가야 할 것이에요. 하지만 저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죠. ――리카드 씨! 전 이스피리아입니다. 틀립니까?”

“아, 아닙니다.”

“네. 언제 어느 때든 저는 저예요. 이곳에 오는 것 또한 저 자신의 의지로 온 겁니다. 그런 제가 말하는 거예요. 전 후회 따윈 하지 않아요.”


잠시 멍하니 보던 리카드는 눈을 감았다.



“루데릭도 그리 말했었죠.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동생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에······ 오라버니가요?”

“예. 그리고 그 말대로 언제나 이스피리아 양께선 후회 따윈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의 정신을 일깨워주려 하셨었죠.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멍청했던 전 그 뜻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죠. 마지막의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겨우―― 아니군요. 언제나 그 마지막조차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간신히 알아차렸습니다. 정말 어리석게도.”


참회와도 같은 말을 읊는 리카드를 조용히 보던 리아는 뒷짐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을 돌아 리카드의 옆으로 온 리아는 몸을 숙였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그의 손을 잡았다.



“학자의 손이 이게 뭐예요, 옷도 지저분해졌고. 조심하셔야죠, 당신이 다치면 마음 아파할 사람도 있거든요. 이번엔 제가 서비스로 치료해 드리지만 다음부터는 스스로 하세요. 뭐, 정 그럴 기력이 없다면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받아요. 당신 주위엔 당신의 생각보다도 든든한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남에게 기대는 건 잘못이 아니에요.”


찬찬히 눈을 뜬 리카드는 한순간에 치료된 자신의 손을 봤다.


꽉――


손을 움켜쥔 리카드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줄곧 걱정스럽게 보던 세리오가 있었다.


그녀를 리카드는 한동안 쭉 바라봤다.


――정말 무척이나 따스함과 애절함이 담긴 눈으로.



“아아. 그랬었지요.”


깊은 여운이 담긴 목소리.


피식 웃은 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어음. 마지막으로······ 리카드 씨.”


부르자 리카드는 곧바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취했다.


――너무나 부담스럽다. 특히 그 무게감은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할 정도였다.


괜스레 예전 일을 꺼낸 미안함에 격려의 말을 건네려 했건만······.


순간 바지탄스들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던 리아는 괜한 짓을 했다며, 나중에 다른 식으로 보답할 걸 후회했다.



“말씀하십시오.”


오직 진중함만이 가득한 리카드. 한 적도 없건만 왠지 “하명하십시오.”란, 신하의 말로 들려오는 듯했다.


‘응······ 정말 괜한 짓을 했어. 다음에나 할걸.’


의외의 소득이 있었으나, 손해는 그보다 한참이나 크지 않을까?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벌린 일이다. 누굴 탓할 수도 없으니 소기의 의문을 해결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리라.


마음속으로 눈물을 머금은 리아. 그렇지만 막상 입을 여니 연륜이 느껴지는 자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리카드 씨의 사과는 저 이스피리아가 확실히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사과지만, 우리 마을에서의 일과 함께 용서해드립니다. 그러니 더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예. 정말로······ 제 모든 걸 담아 감사드립니다, 이스피리아 양.”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리카드 씨. 그리고 이제는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에이~ 딱딱하게 그러지 마시고요.”

“후후. 알겠습니다, 리아 양.”

“네. 그걸로 좋아요.”


‘그렇군······ 어쩌면 나도 뭔가의 응어리가 있었나 보군. 그래서 여태 리카드 씨에게 애칭을 허용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가. 의외로 나도 쪼잔한 놈이었구나.’


입가에 미소를 그린 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연구를 시작하죠! 시간은 금이라고요. 오늘은 많이 밀렸으니 팍팍 나가도록 해요. 자! 제가 도와줄 건 뭐죠?!”


긴장감도 싹 사라진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이다. 그렇지만 리카드는 동요 없이 몸을 일으켜 그의 연구실로 앞장섰다.


하지만 리아는 알아보았다. 깔끔한 미소 뒤에 숨겨져 있는 강한 감정을.


신경은 쓰이지만 여기서부턴 본인의 문제다. 게다가 어둡고 칙칙한 그런 부정적인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놔두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뒤늦은 청춘이구먼.’


어쩐지 새삼 노인의 기분이 된 리아는 젊은이의 성장을 따스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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