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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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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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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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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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49-2

DUMMY

“저기, 다들 괜찮나요?”


염려스러운 이스피리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찾은 비비안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만도 하다. 친근하게 본인을 소개한 사람들은 전원 공주님인 소베르비아 못지않은 지위의 사람들이니. 실은 바로 말을 받지 못했을 때부터 이미 결례를 저지른 것과 다름없다. 서두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예를 취하는 것보다 먼저 소베르비아가 말렸다. 너무 딱딱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의견에 이번에도 전원 너그러이 수락해줬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저희야말로 방해꾼이니까요.”


――라고, 일체의 악의도 없이 빙긋 웃는 헤라드의 말과 함께.


그건 좋았다. 이러나저러나 잘 챙겨주는 것이니까. 비비안들도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살짝 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긴장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믿기지 않는 광경―― 각 나라를 이끌 차세대 인물들이 가득 모인 이 자리의 압박감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다.


‘새, 새삼스럽지만 아이리스 군은 지, 진짜 굉장한 사람이네. 누나분도. 이런 분들이 약속도 없이 찾아올 정도로 친한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비비안들처럼 주변은 아랑곳없이 아이리스를 마구 껴안는 그녀를 질투했건만······.


사는 세계가 다르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나자 질투심 따윈 눈 녹듯 사라졌다.


비비안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재차 사과하는 이스피리아에게 황송하다며 답하는 목소리엔 패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겠지······’


그러다 툭 하니 말이 나왔다.



“······그건 싫어.”


스스로도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부정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거밖에 안 되냐고.


이를 놓아버리는 짓은 할 수 없다. 그건 인생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친구를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리스를, 친구를 저버리는 짓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비록 추하기 그지없는 시샘이나 질투라 하더라도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간직해 나갈 거다. 그의 가족이나 주변이 뭐라 하든. 아이리스 본인이 싫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확고한 다짐을 할 때였다.



“어······ 이, 이 음료는 싫나요?”


눈치를 보는 듯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자신만의 세계에서 복귀한 에리사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인물은 이스피리아로, 그녀는 자신이 직접 차를 나눠주려 했는지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눈썹이 축 처져 고개가 살짝 내려간 그녀의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풀이 죽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에리사에게 문득 머릿속에서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아, 아녜요! 호, 혼잣말이에요! 차가 싫다는 게 아니었어요!”


크게 소리친 에리사는 아마 그녀가 놔뒀을 유리잔을 냉큼 내밀었다.


유리잔은 엄청 투명해 속이 훤히 비치는 게 분명 비싼 것이다. 평소였다면 집어 드는 일조차도 조심했을 테지만 당황으로 인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덩달아 당황했는지 이스피리아도 뭐에 홀린 듯 주전자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따라주었다.


‘뒤늦게 든 생각이지만······ 최고 국빈에게 차를 따라 달라는 듯이 행동한 건 엄청나게 큰 결례 아냐?’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고민도 없이 잔 가득 채워진 맑은 푸른빛의 음료를 벌컥 들이켰다.



“와. 맛있어······.”


음료를 모두 목으로 넘기고, 전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무의식적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더 드릴까요?”

“네!”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얼굴이 헤벌쭉 풀어진 에리사는 잔에 다시금 차오르는 음료에 눈을 떼지 못했다. 또 한 번의 무례―― 이스피리아가 따라준다는 사실엔 안중에도 없었다.


쳐다보는 시선 또한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득 따라준 음료만을 마셨다.


홀짝, 홀짝.


아깝다는 기분에 한 모금씩 제대로 맛을 음미했다.


맛있다. 끈적거리지도 않고 물처럼 들어가건만 어찌 이리 달콤한지 모르겠다. 산뜻하게 풍겨오는 과일의 향은 자동으로 코를 울리게 만든다.


무엇으로 만든 건지 궁금증도 생겨나지 않을 만큼 에리사는 이 푸른 음료에 심취해 버렸다.


이스피리아도 헤실헤실 기분 좋게 웃으며 잔에서 음료가 떨어질 때마다 바로바로 채워주니 끝나지 않는 무한의 고리가 완성됐다.


수차례의 반복. 최상위의 귀족들을 앞에 두고 할 짓이 아니다.


역시나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조금 날이 선 소베르비아의 목소리가 이를 끊어냈다. 그렇지만 몸을 움찔한 에리사 귀에 들리는 건 자신을 향한 질책이 아니었다.



“리아? 노파심에 언급하지만, 손님을 대접하는 건 좋아요. 그러나 다른 손님에게 소홀해서는 안 돼요.”

“아, 죄송――”

“――자기소개도 아직이어요. 재차 노파심에 언급하지만, 예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죠. 그리고······ 아무리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리 대놓고 다른 차를 주는 건 상대에게 핀잔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여요. 이 점을 똑바로 숙지해주시어요. 아시겠나요······?”


‘준 음료수가 다르다고?’


딱딱하게 굳어 빠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이스피리아에게서 시선을 옮겨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다.


확실히 소베르비아가 말한 대로―― 아니, 잔부터가 찻잔으로 지적한 것보다 더 노골적인 차이를 보였다. 유리잔을 받은 건 자신과 아이리스, 그리고 같이 온 4명의 동급생뿐이었다.


따라진 것도 저쪽은 향으로 보건대 홍차이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이 마신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비싼 것이겠지만.


‘그리고 그걸 몇 잔이고 마신 나······’


나중에 비용을 청구하는 게 아닐까, 거기에 그 가격은 과연 얼마일까. 온갖 걱정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에리사의 기분은 모른 채 주변의 대화는 계속됐다.



“모처럼의 홍차는 고마우나 저희도 같은 것을 주시지 않겠어요?”

“우으으······ 그, 그게 말이죠······”

“리아?”


이스피리아는 애처로운 눈으로 라프리트를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소베르비아의 의견은 매우 지당한 것이었는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라프리트는 힘겹게 그녀의 눈을 피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 그렇지 않아? 헤라드.”

“조금은. 색이 되게 특이해서 눈길이 갔어.”

“으응? 색? 아까 전의 저 영애를 보고 그런 게 아니었어?”

“그것도 좀 있긴 해. 저리 무아지경으로 무언가를 먹기란 좀처럼 쉽지 않으니.”

“역시 그렇지?”


추가로 들려오는 레스와 헤라드의 대화.


이것으로 확정됐나 보다. 잔뜩 기대된다는 양 음색이 들뜬 둘의 반응에 이스피리아의 어깨가 처량하게 떨궈졌다.



“비, 비축분이······”


피눈물을 흘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중얼거린 이스피리아의 말엔 쓰디쓴 아픔이 느껴진다.


그 불쌍한 모습에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나, 방에 도착한 이후 지정석인 듯 익숙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페리가 내려왔다.


아무런 악의도 없지만 덩치가 있다 보니 몇몇 사람들은 움찔했는데, 페리는 관심도 없이 무심히 이스피리아의 곁으로 와 그녀의 어깨에 앞발을 올렸다.



《어이, 내 몫을 뺄 생각은 하지도 마. 네 몫으로 해결해라.》


마치 위로해주는 듯한 광경이다. 이 훈훈함에 소베르비아를 제외한 모두는 작게 탄성을 냈다.


에리사도 그러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인간과 마수의 깊은 유대에 감동하여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울리지도 않는 말이 들리기도 했으나 저번처럼 환청에 불과하리라.


당사자인 이스피리아도 무척이나 감격하여 울 것만 같이 되어 찬크에르 라는 이름의 사용인 아저씨를 보았다. 그리고 마치 떨쳐내려는 듯 단호하게 말하였다.



“에르! 루비아 씨들의 몫도 준비해주세요!”


찬크에르는 무척이나 고심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모시는 자인 이스피리아의 결단에 흙을 끼얹을 수 없었던지라 눈물을 머금고 부엌으로 향했다.


여분을 미리 준비했나, 아니면 다른 차와는 달리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인지 그는 금방 돌아왔다.


찻잔이 치워지고 대신 놓인 유리컵에 푸른빛의 음료가 담긴다.


이스피리아는 기대가 가득한 레온하트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음료가 따라지는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덧 마셨는지 비어있던 비비안들의 잔에도 새롭게 음료가 따라지고, 그제야 이스피리아가 눈을 떴다. 그 눈은 왠지 공허했는데, 그녀는 입가에 딱딱한 미소를 매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차가운 게 더 맛있을 거예요······”


순간 기운이 없는 그녀의 말이 뭘 말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비비안들이 놀라 외치는 환성, 그리고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깨달았다.


‘지, 진짜로 발동어도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랬다. 이스피리아는 마법을 쓴 것이었다.


소문이야 워낙 자자하니 자신의 귀에도 쉽게 들어왔다. 그러나 직접 보니 얼마나 규격이 다른지 절감한다. 컵 안에 담긴 이 동그란 얼음은 마법을 못 쓰는 일반반인 자신도 뚜렷이 알 수 있게 이를 과시하고 있었다.



“마력이 안 느껴졌어······”


멍하니 컵을 보고 있던 비비안이 중얼거렸다. 일주일 전의 괴롭힘과도 같았던 대련 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 건 상당히 충격적이었나보다.



“아, 그거요?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마력의 낭비 없이 마법을 쓰면 돼요. 100의 마력이 필요한 마법에 100의 마력만을 쓴다. 그러면 남는 게 없으니 주변으로 새어 나가는 마력도 없겠죠?”

“확실히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걸 실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마력조작 능력이······ 그리고 찰나에 술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순간이 아무리 0에 가깝더라도 마력이 흐른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어. 그럼 어째서 마력이 안 느껴진 거지? 뭔가 다른 무언가가 더 있나······?”

“여, 열심이구나······ 그, 그럼 다음에도 오지 않겠니? 오늘의 일도 사과할 겸 제대로 대접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앗!”


잔뜩 흥분하여 벌떡 일어난 비비안. 그러나 지금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대화한 상대가 누구인지를 뒤늦게 인식하고는 안색이 굳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며, 면목이 없는 짓을······”

“아, 아니란다. 괜찮―― 헛! 나―― 아니, 저야말로 멋대로 말을 낮춰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소, 소녀야말로 고귀하신 분들 앞에서 무례를······”

“아앗?! 지, 진짜 괜찮아요. 무릎 꿇지 마세요!”


어수선해진 방안. 일행의 리더 격인 비비안의 실수에 같이 사과해야 하는 건지, 일단은 지켜봐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우왕좌왕했다.


에리사는 이런 비비안들과 달리 분위기 탓에 살짝 긴장될 뿐이었다.


당연하다. 아이리스를 사이에 두고 그냥 같이 다니기만 할 뿐인 동급생들에게 동화할 일은 없다.



“두 분 모두 진정들 하세요. 특히 리아 양은 그 마주 잡은 손을 좀 놓으시고요.”

“그래요. 서로 사과만 해서는 언제까지고 끝이 안 나시어요.”

“음. 기분이 나빠졌다거나 하지 않았네. 잠시 차분해지도록 하세.”

“레온하트 전하의 말씀대로. 우리도 괜찮다.”

“예. 애당초 베르다드는 신분을 막론하지 않는 곳. 저희는 이 이념을 따르기에 입학한 것입니다. 교복 또한 그 연장선. 같은 학생으로서 너무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프리트를 선두로 각자 한마디씩 건넨다.


고귀한 신분임에도 달래주는 듯 부드러운 말에 비비안은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곧이어 이스피리아도 차분해지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살짝 웃었다.



“죄송했습니다. 열중하다 보니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후후. 그럴 수도 있죠. 제 주변에도 비슷한 분들이 많으신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권유해주신 것,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리사 양과 여러분들도 괜찮나요?”

“물론이에요.”

“저, 저도 좋아요, 비비안 님.”


설마 자신에게도 물어올 줄은 몰라 에리사는 허둥대며 말했다.


대답을 들은 이스피리아는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다 함께하는 공부. 분명 즐거울 거예요.”

“예. 벌써부터 고대 됩니다.”


그렇게 온화하게 일단락되자 레온하트―― 왕자가 직접 자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주도로 지체되었던 자기소개의 시간이 도래했다.


한명 한명, 능숙하게 예를 보이는 소개에 다들 미소로 반겨준다.


‘어, 어쩌지.’


차례를 기다리는 에리사의 손에 식은땀이 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실수하지 않을까 지레 겁이 난다.


하지만 기다려 주거나 하지 않는다. 마지막이었던 비비안의 차례가 끝났다.



“호? 거대상회, 흰 날개의 사르케아셨나요. 공국에도 유통망을 꾸려놓은 그 수완과 행동력,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공주님께서 기억해주심에 영광입니다.”


비비안의 집안에 대해 나름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설마 일국의 공주가 한낱 상회를 알고 있다니······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에리사는 더더욱 겁이 났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대로 쓰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까지 됐다.


‘하지만······’


똑 부러지게 행동한다고 다짐했었다. 하루 앞당겨지긴 했지만 물러설 순 없다. 아이리스가 자신과 친구라는 사실에 창피당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에리사는 꽉 쥔 주먹에 힘을 담았다.



“에리사 발렌시하입니다. 천한 신분에 배움이 모자라 부족한 점은 송구하오나, 이후 무례가 되지 않도록 확실히 단련하여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 약조합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지만······”


조금 말을 흐린 소베르비아가 빤히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다 재차 이어 말하였다.



“본인의 굳센 의지를 존중하여 말씀드리겠어요. 자신보다 상위의 분께는 함부로 약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공부하신다면 이러한 부분도 알아두시는 편이 좋아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 전하.”

“전하도 친근한 사이가 아니라면 자국의 왕자나 공주에게만 붙이는 등 여러 관례가 있으나, 뭐, 차츰 좋아지시겠죠. 에리사 발렌시하, 귀녀에게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도록 하겠어요.”


공주님이란 이런 건가. 냉철하면서도 그 넓은 마음에 절로 황송한 기분이 든다.


조금은 동경심을 품게 된 에리사는 여러 말들을 해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담아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스피리아와 라프리트가 문뜩 보인다.


왜 그런 건지 의아했으나 물을 수도 없다. 얌전히 도로 착석하였다.



“어, 음······. 자, 그럼 자기소개도 마쳤으니 우선 찬찬히 목부터 축이기로 하죠. 곰보 코코넛 드링크는 시원하면 더 맛있긴 한데 얼음이 너무 녹으면 밍밍해지거든요. 아, 그리고 전혀 의도하진 않은 만남에 불편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기왕 만나게 된 거, 앞으로도 좋은 만남을 이어갔으면 해요.”


상류 사회는 이런 만남에서조차 입학식 같은 개회사가 있나 보다.


얼떨떨하면서도 익숙한 듯 외치는 이스피리아를 감명 깊게 보곤 에리사는 유리잔을 드는 사람들을 따라 음료를 마시었다.


‘맛있다······’











“금일은 무척이나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으엥? 겨, 결례라뇨! 오히려 내가―― 아니, 제가 여러분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는걸요.”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흰 동생분인 아이리스 군과 동급생. 연상이신데다가 최고국빈인 이스피리아 님께서 공경히 대해주시는 건 너무 과분하십니다. 그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아이리스 군의 친구로 대해주십사 간청드립니다.”

“으응······ 알겠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저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아. 그게 아니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나도 마찬가지로 아이리스의―― 친구의 가족으로서 친근하게 대해줬으면 한단다.”

“예.”


작별의 말을 나누는 이스피리아와 비비안. 그 뒤를 이어 일행인 3명도 지친 듯 보이나 밝은 표정으로 친근히 말을 건다.


그에 비해 한 걸음 물러선 에리사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아니. 경황이 없던 탓에 자기소개 이후로 대화엔 줄곧 잘 참여하지 못했다. 그저 곰보 코코넛 드링크라는 음료만을 혼자 조용히 홀짝일 뿐이었다. 가끔 이스피리아나 아이리스가 말을 걸어주기는 했으나, 횡설수설하지 않고 잘 답했는지 모르겠다. 헛소리만은 하지 않았다고 믿는 수밖에.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먹을 것들 뿐으로, 음료도 음료였지만 많은 종류의 다양한 쿠키들 모두 맛있었다. 덕분에 조금 과식하지 않았나 싶기까지 하다.


‘그, 그야 정말 맛있었는걸. 전하들까지도 놀라시던데.’


하지만 오늘 저녁은······ 건너뛰는 게 좋겠지.



“에리사였지? 아, 발렌시하라고 불러야지, 참.”

“에, 에리사로 괜찮아요. 이스피리아 님.”

“나도 님은 됐단다. 그냥 불러도―― 그건 부담이려나? 그럼 씨로 불러주렴. 님은 좀 딱딱하잖니?”

“네, 네. 알겠습니다, 이스피리아 씨.”

“응, 에리사.”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스피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아이리스를 닮았다.


인사를 마치자 아이리스가 방 밖으로 나왔다.



“저, 잠시 배웅해주고 올게요.”

“그러렴. 잘 바래다주고?”

“네.”


아무래도 여기까지 신세를 질 순 없다고 생각했나,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이리스 군. 굳이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냐. 여기 기숙사는 익숙하지 않잖아? 초대를 한 것도 우리인데 제대로 배웅해줘야지. 너무 사양하지 마.”

“그래그래. 부담 갖지 마렴. 친구를 배웅해주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니?”


듣고 있던 이스피리아도 거들었다.


고민하던 비비안은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봤나 보다. 치마를 잡고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렴! 또 놀러 오고!”


크게 손을 흔드는 이스피리아에게 묵례로 답을 하고 아이리스를 선두로 복도를 거닐었다.


조용한 복도를 천천히 나아가 기숙사의 입구에 도달하자 그제야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실감이 든다.


무심결에 숨을 토해내니 한 걸음 앞에서 걷고 있던 비비안들도 슬쩍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 않은 듯했으나 이들도 상당히 긴장되는 자리였었나 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동은 계속되었다. 에리사도 힐끔 서쪽 기숙사를 보고는 바로 뒤를 따랐다.


그렇게 서쪽 기숙사에서 멀어지자 마침내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비비안들은 작지만 활달한 어조로 오늘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설마 왕자님이나 공주님들이 계셨을 줄은 몰랐다, 다들 너그럽고 관하신 분들이었다는 등 뜻하지 않은 만남에 상기된 분위기다. 듣고 있던 아이리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하게 됐다며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수다는 동쪽 기숙사 근처에 이르러 다른 학생들이 많아지자 서서히 줄어들었다.



“아이리스 군. 여기까지면 괜찮습니다. 일부러 데려다줘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인데 뭘. 근데 여기까지로 정말 괜찮아?”

“네. 기숙사는 저 앞에 있잖아요.”

“음. 알았어.”


수긍한 아이리스는 조심히들 들어가라며 비비안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에리사도.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으응. 오늘은 초대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내일 또 봐.”

“응. 잘 쉬어. 다음에도 초대할게.”


살짝 손을 흔든 아이리스는 같이 온 델리안과 함께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비안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아이리스들이 사라질 때까지 역으로 배웅해줬다.


이들에게 어울려줄 이유는 없지만, 아이리스의 배웅은 자신도 바라는 일. 에리사는 웃는 얼굴로 아이리스의 뒷모습을 쫓았다.



“자, 그럼. 저희도 돌아갈까 합니다만······”


비비안의 권유는 비단 함께 다니는 3명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쪽에도 권했다.


에리사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여태 같이 다닌 것이다. 딱히 친구는 아니지만 혼자 쑥 가는 건 매정하단 느낌이다. 아이리스 때문이라도 자주 마주칠 텐데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하긴 좀 그렇다.


거기에 어차피 멀지도 않은 데다가, 비비안들의 기숙사 방은 1층 내지는 2층――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배정받는 곳이다. 자신과 같은 일반 서민들이 배정받는 4, 5층과는 방향이 다르다. 그러니 1층 중앙계단에서 곧장 헤어질 터다.


계산을 마친 에리사는 비비안들과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지 않게 이 어색한 동행은 별 대화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땅과 신발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다른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여러 소음만이 들리는 적막감이 흐른다.


불편하진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다.


그러한 상태로 중앙계단에 도착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몇 명은 2층까지는 같이 가겠지만 비비안만큼은 1층일 테니 헤어질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같이 왔다. 분명 비비안은 예의를 차릴 테니 자신에게도 말을 걸어올 거다. 그에 대해 답할 말들을 에리사는 구상했다.


역시나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일행을 이끌며 살짝 옆으로 빠지는 비비안. 그리고 돌아본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에리사 양, 오늘은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예. 저도 덕분에―― 응? 저, 저요?”

“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자신이 무얼 했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비비안에게 다른 3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에리사 양 덕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혹여나 실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는데 한결 편해졌어요.”

“마찬가지예요.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솔직히······ 엄청 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후훗.”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이야기하는 걸까.



“제가 뭘 했길래······”


무심코 말로 나온 혼잣말에 비비안을 비롯하여 3명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다 비비안만은 무언갈 눈치챈 듯 중얼거렸다.



“말이 별로 없으시길래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설마 아무 긴장도 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아니요. 소, 손에 땀도 나고 긴장했었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하니 비비안들은 재차 서로를 바라본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거야?’


의문을 가지면서도 이제 쉬고 싶었기에 에리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 말한 비비안은 작게 헛기침하고는 야무진 얼굴의 숙녀로서 자세를 달리하였다.



“붙잡아둬서 죄송했습니다. 여하튼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으로, 에리사 양과는 좋은 교우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에리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말로만 자신도 알았다고, 이쪽도 그러하다고 이야기했으면 됐음에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괜한 문제를 만들 뿐임을 아는데······. 다만 어쩌면 자신에게 예의를 보인 비비안에게 최소한 솔직하게 대해야겠다는 기분이 든 게 아닐까도 싶었다.


이런 차가운 반응에 일행인 3명의 아이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비비안만큼은 아주 냉정하게 치마를 잡고는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에리사 양. 조심히 들어가시길.”

“비비안 님도 조심히······”

“예. 오늘은 이름을 불러주신 것만으로 만족할게요.”


순간 아차 싶었지만 때는 늦었다. 비비안은 고고히 떠나갔다.


‘괘, 괜찮겠지?’


이 일로 혹여나 나중에 트집을 잡는 건 아닐까 무척이나 염려하며 에시라는 인파들 사이로 사라지는 비비안의 뒤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오늘 하루, 당최 어떻게 돌아간 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기분만을 남긴 채로······


작가의말

피, 핑크 머리는 역시 좀... 무섭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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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설정 및 줄거리 요약. 베르다드 편. 22.07.14 85 0 31쪽
164 설정 및 줄거리 요약. 나트알 편. 22.07.14 68 0 22쪽
163 143 22.07.14 76 0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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