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랜시아
쾅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모두가 채현을 바라보았다.
채현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한 마디하였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평상시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절제된 모습을 보여온 팀장의 화난 모습에 팀원들 모두 놀랍고 의아하였다. 도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걸까? 겉으로 내뱉지 못한 말과 추측들이 팀원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채현이 나갔다. 팀원들은 봇물 터지듯 웅성대기 시작했고 채현의 비서인 하영이 채현이 보던 모니터를 보고는 채현을 따라 나갔다.
채현은 옥상 난간에 반쯤 기댄 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김현수 씨 때문에 그래?”
멍하니 있던 채현은 하영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 인간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하영이 채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채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하영의 모습은 들을 준비 됐으니 말하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아니야 됐어”
그냥 속으로 삼키려는 채현의 말에도 하영은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너는 진짜······.”
하영과 채현은 친구 사이였다. 채현이 도린을 따라 드림픽쳐스에 오면서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해 데리고 왔었다. 평상시에는 직장에서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면서 이럴 때는 친구가 되어서 고집을 부린다. 채현은 하영이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할 때는 늘 이기지 못했다.
“김현수 씨가 싱크로율을 낮춰달라고 했어”
“그런······.”
채현의 말에 하영이 놀랐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싱크로율이 낮아지면 로그아웃을 못하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드림픽쳐스가 테스터를 모으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래 호라이즌은 심리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었고 테스터 원을 시작으로 몇몇 지원자를 받아 테스트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테스트 중 문제가 발생하였다. 테스터들이 자신을 게임 속 캐릭터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호라이즌에 너무 빠진 나머지 현실과 가상을 경계 짓지 못했고 로그아웃을 잊어버리고 게임 속 세상에 빠져버렸다. 결국 강제 로그아웃을 진행해야 했는데 그들은 게임에서 로그아웃 한 후에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호라이즌의 경험이 그만큼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덕분에 게임의 개발이 늦어지고 그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가 진행되었다. 예상치 못한 문제에 게임의 개발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했지만 몇몇 투자자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이 정도의 중독성이면 합법화된 마약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냐고 말한 투자자도 있었다. 큰 손 투자자들이 투자가 더 들어오고 채현은 이후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싱크로율 시스템을 도입했다. 싱크로율은 플레이어의 상태를 수치화 해 놓은 것으로 이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게임에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심어놓은 안전장치였다. 그리고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그 사람의 자의식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했고 반대로 싱크로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그 캐릭터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라이즌은 일정 수치 이하로 싱크로율이 낮아지지 않도록 되어 있지만 김현수는 지금 그 락을 해제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김현수는 게임 속 캐릭터 장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현수 씨 요청대로 해줬어?”
“하아, 응······.”
채현이 짧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왜?”
채현은 옥상 난간에 자신의 팔과 머리를 파묻으며 대답했다.
“김현수 씨는 지난번 가장 먼저 플레이에 성공한 사람이고, 싱크로율을 올리는데도 성공했었어. 그래서······. 아니야, 아니야, 모르겠어. 그냥 김현수 씨가 만난 앤 설린이라는 캐릭터가 불쌍했던 거였을지도······. 그리고 권한을 일부 되찾은 지금은 강제 로그아웃도 할 수 있고 데이터를 모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음,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모르겠어 그냥, 김현수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
채현은 처음 김현수의 플레이를 볼 때부터 알 수 없는 짜증이 났다. 아직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김현수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어떤 점이 채현에게 그런 마음을 주는 듯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현재 게임을 클리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고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한 사람이었다. 채현은 김현수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했을 때 다른 팀원들처럼 기뻤다. 기뻐하며 그 사람에게 기대했다. 그래서 그의 플레이를 보며 느꼈던 짜증을 잠시 잊어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짜증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채현은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쓸데 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고 필요할 때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하는 능력 있는 직장인, 그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에 생긴 통제되지 않는 원인불명의 짜증은 채현의 자존심을 건들고 있었다. 불쾌했다.
“위험해지면 강제 로그아웃을 해야 될 것 같아. 준비해줘”
생각을 정리한 채현이 어느새 팀장으로 돌아와 하영에게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여기서 이렇게 있는 것은 더 자신 같지 않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할 일을 한다. 채현은 김현수가 로그아웃을 하면 싱크로율을 낮추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뭘”
채현의 짧은 감사와 함께 하영과 채현이 계단을 내려가 다시 모니터룸에 돌아왔다. 채현이 자신의 자리에 앉고 하영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채현이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하영은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문서를 하나 켰다. 문서에는 김현우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 내용이 보였다. 하영은 채현이 집중하는 것을 보고 문서를 출력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갔다.
***
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 얘기 준 것이 있었다.
“장은...저를 레이디라고 불렀었죠. 편하게 제 이름 이아린을 불러도 된다고 했었는데 차마 그럴 수 없다며 항상 예의를 갖춰 행동하던 기사였습니다. 가끔은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였지만 모범을 보이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기사였습니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장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주의 신뢰가 느껴졌었다. 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기사였을지도 모른다.
[싱크로율이 50%가 되었습니다]
[경고! 이 이상 싱크로율이 낮아질 경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에게 경고를 해왔다. 로그아웃을 못 할수도 있다고 했던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싱크로율이 30%가 되었습니다]
내 몸이 내 몸같지 않았다. 감기 걸렸을 때처럼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꿈 속에서 있을 때 같다는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따.
[싱크로율이 10%가 되었습니다]
“팀장님, 위험할 때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점점 육체가 나의 통제를 잃어가던 중 마지막으로 허공을 향해 말을 하였다.
싱크로율이 카운트 다운처럼 10부터 천천히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디
[싱크로율이 9%가 되었습니다]
[싱크로율이 8%가 되었습니다]
.
.
.
[싱크로율이 2%가 되었습니다]
[싱크로율이 1%가 되었습니다]
[싱크로율이 0%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장이 되었다.
***
“장 언제까지 밖에 계실 건가요? 바람이 차요.”
2층 테라스에 나와 있던 장을 향해 공주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장은 공주를 보더니 아무말 없이 공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장의 행동에 당황한 공주가 장을 보았다. 장의 표정은 동생을 바라보는 오빠의 표정이었다.
“장······.”
공주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을 지켜주던 신전기사의 표정이었다.
“공주님, 중요한 시기에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들모아의 축제 전야제까지만 잠시 개인 시간을 가져도 될까요?”
장이 공주에게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장은 공주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베라딘 성 전투 이후 행방불명된 장은 직위 해제되어 이미 공주의 호위가 아니었고, 루스펠란 왕국의 멸망 후 신전에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종적을 감춘 공주의 허락을 신전 기사인 장이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지금 장은 공주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 베라딘 성으로 파견나가기 전, 공주의 호위였을 때처럼······.
장의 태도 변화에 처음에는 당황한 공주였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 모습은 일국의 공주로서의 모습이었다.
“장, 장은, 지금 왕국의 중대사가 걸린 들모아 시장과의 회담 중에 개인 행동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공주로서 장에게 묻고 싶군요. 장이 말씀하신 그 일은 기사로서 필요한 일 이신가요? 그 일을 하는 것은 기사로서 명예를 지키고 의무를 다함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신가요?”
공주는 왕국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장 개인에게 묻고 있었다.
공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고
아직은 어린 소녀에게서 왕족의 권위와 위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눈 앞의 소녀가 지금은 어려 새싹처럼 살며시 나올 뿐이었지만 앞으로 몇 해 후면 훌륭한 왕족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넵 들모아를 지키시는 이네아 여신과 모든 기사들의 귀감이신 루스펠란의 위대한 기사이자 왕이신 아이작 루스펠란의 이름에 맹세합니다.”
”네 허락하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공주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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