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공주와 왕자 (4)
현우가 게임을 접속하려고 이동할 때였다.
“잠깐만요. 김현우 씨!”
채현이 현우를 불렀고 현우는 채현을 쳐다 보았다.
분명 지금 김현수가 아니라 김현우라 불렀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 근신 중이라 김현우 씨가 응해주시지 않으면 뵙기가 어렵네요”
***
현우와 채현은 회사 앞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를 김현우라고 부른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들으신 건가요?”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현우였다.
“네, 김현우 씨의 어머니로부터요”
“아, 팀장님이 왔다가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어머니가 그런 얘기까지 하셨을 줄은 몰랐네요”
현우가 커피잔을 만지작 거린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현수로서 만났었는데
자신을 현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어색했다.
“김현우 씨, 사람이 어떻게 그럴 실 수 있는 거죠?”
채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네?”
“동생 대신 처벌받으신 거요. 화나지도 않으세요? 또, 그러시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계시잖아요”
현우는 여전히 커피잔을 바라본다.
“후회... 됩니다. 화도 나고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과거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정하면 제 인생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남게 될 것 같더군요.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고 다른 삶을 살기에 20년이 넘는 세월은 길었고 너무 늦어 버렸다는 생각이 저를 괴롭힙니다. 20년이 넘게 그렇게 살아왔고 사람들은 저를 현수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내가 나로서 살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닐까?하는 고민만 숱하게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결국 관성처럼 다시 현수로 돌아가죠. 지금은 그 관성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현우는 자신의 모자란 모습에 잔뜩 웅크러든채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 거렸다.
“정말!! 마음에 안든다니까!!! 김현우 씨를 보고 있으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요”
채현의 말에 현우가 더욱 웅크러 든다.
채현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을 이어갔다.
“김현우 씨, 김현우 씨 어머니가 저에게 김현우 씨를 부탁하시더라고요”
현우가 깜짝 놀라 채현을 바라본다.
“네? 어머니가 왜 그런 말씀을? 어머니께서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네요. 부담 갖지 마세요. 아마도 어머니께서 최근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지시면서 제가 걱정이 많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성인인데 제 인생은 제가 책임지는 거지 팀장님께서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채현은 다시 한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머님이 살 날이 얼마 남으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하시는 부탁을 부담갖지 않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런 얘기까지 하셨나요? 정말 신경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채현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위축되는 김현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더욱 화가나는 것을 꾹 참으며 채현이 말한다.
“하.지.만. 김현우 씨가 말씀 하신 것처럼 김현우 씨도 성인이고 저도 성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그 말대로 할 생각은 없어요. 제 행동은 제가 결정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가 하는 얘기는 그것과 별개로 얘기하는 겁니다.”
“아.. 네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현우가 안심한다.
“전, 김현우 씨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리고 김현우 씨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김현우 씨가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됐습니다. 나쁜 분이 아니라는 것도요. 부탁한다. 책임진다. 이런 것들은 너무 거창해서 싫지만, 좋은 사람은 많이 알수록 좋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이에요”
“?”
현우가 채현을 바라본다.
“게임을 클리어하실 거죠? 지금은 회사에 아무 권한이 없어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없지만 게임을 클리어하시고 김현우 씨가 김현우 씨로서 살아가길 원하신다면 가끔씩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건? 의사로서의 마음이신가요?”
현우가 채현에게 묻는다.
채현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제는 의사 일을 하고 있지도 않는 걸요. 그냥 제 성격이에요. 제 친구가 예전부터 고치라고 한 건데, 김현우 씨 같은 분들을 보면 그냥 두지 못하는 고질병이죠. 그래서 의사가 됐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또, 김현우 씨에게는 미안한 일도 있어서 그에 대한 사죄와 책임을 지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또한 제 성격이지만,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그런데, 지금 대화를 하다보니 김현우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생겼습니다. 방금 살아온 세월 때문에 김현우 씨를 사람들이 김현수 씨로 안다고 하셨었죠? 호라이즌을 플레이할 때 김현우 씨는 김현수 씨이셨나요?”
“그건...”
현우가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자 채현이 말을 이어간다.
“호라이즌을 플레이할 때 김현우 씨는 김현우 씨로서 행동하셨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베라딘 성의 성벽 위에서 딘에게 자신을 김현우라고 소개 하셨던 거라 생각해요”
“그걸 보셨나요?”
“네, 인공지능 케이시에 의해 조작되어 있어서 나중에 보긴 했지만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의문을 가진 채 넘겼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아 네....”
“어쨓든 저는 김현우 씨가 김현우 씨로서 게임을 플레이하셨고 진심으로 게임 속 케릭터를 대하셨기 때문에 클리어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진심이셨던 만큼, 처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셨던 만큼 사람들이 장을 찾고, 김현우 씨를 장과 비교하자 화를 내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 장을 질투하셔서 마지막에 그런 플레이를 하셨다고 생각하고요”
“참 못났죠?”
현우가 더욱 의기소침해져 물었다.
“질투가 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김현우 씨에게서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람이잖아요? 때로는 화를 낼 수도 있고, 때로는 질투할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전 질투할 때의 김현우 씨가 더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김현우 씨는 항상 자신을 숨기고 참고 있는게 보여서 답답함과 짜증이 났거든요. 그리고 저도 최근에 친구를 믿지 못해 김현우 씨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화도 내고, 질투도 하고,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반성하고, 그 실수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저는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저는 제 잘못으로 인해 김현우 씨를 위험에 빠트렸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 팀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서 제가 위험했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괜찮아요, 책임까지 지시지 않으셔도 돼요”
현우가 부담스러워하며 손사래를 친다.
“또, 또, 그런다. 이럴때는 당당해 지셔도 돼요.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김현우 씨가 위축되고 그러세요. 당당하게 책임지라고 하세요. 김현우 씨는 친구를 믿지 못 해 잘못을 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제가 못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채현이 현우에게 호통을 친다.
“아니요, 오히려 대단하고 멋있으시다고 생각해요”
“그럼, 김현우 씨 자신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주세요. 그럴 수 있다. 실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려는 너가 멋있다고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현우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말씀대로 일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호라이즌에 빠져들었던 것은 그곳에서 제가 김현수로서가 아니라 김현우로서 행동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오랜만에 화도내고 질투도 하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던 현우가 채현의 말을 인정했다. 현우의 답변을 들은 채현이 아까의 말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김현우 씨가 호라이즌을 김현우 씨로서 플레이하셨다면 저는 김현우 씨가 김현우 씨로서 사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일 것 같은데요?”
“아!”
“김현우 씨, 게임을 클리어하시고서 김현우 씨가 김현우 씨로서 살아가실 예정이시라면 제가 김현우 씨를 아는 사람으로서 김현우 씨를 김현우 씨로서 대해드릴게요. 그러니, 김현우 씨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의 삶에 빠지지 마시고 이곳에서의 삶을 조금 기대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김현우 씨는 현실을 살아내셨으니까 호라이즌의 중독성을 이겨내시고 다시 돌아오실 거라고 믿을 게요. 이제는 김현우 씨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현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저는 김현우 씨가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믿는다면 클리어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김현우 씨의 진심이 인공지능 케이시와 테스터1 신유화 씨를 감동시켰다고 생각하고요. 말씀드렸었죠? 김현우 씨는 모든 테스터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고 실적이 좋은 플레이어라고. 이제 질질 끌어 온 이 이야기를 끝맺을 때가 됐어요. 김현우 씨라면 하실 수 있어요. 오랜시간 잠을 잔 공주를 깨우실 수 있을 꺼에요. 사람을 믿지 못해 한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할 것 같아요. 저는 김현우 씨를 믿고 기다릴게요.”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김현우 씨는 현실을 살아내셨으니까요’
채현의 말을 들은 현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과 삶의 방식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뜨거운 감정이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현이 고마웠다.
여태까지 사람들은 현우에게 현우가 지금까지처럼 하면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현우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현우는 게임 속에서 특별하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현우는 다들 막연하게 현우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왔던 것의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현우가 현우로서 한 행동들이 답이 되었던 것이다.
현우는 현우로서 행동했기에 화도 내고, 질투도 냈고, 그 때문에 동료도 죽었다.
최악의 결과에
다른 사람이라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아니라 장이라면?
역시, 지금까지처럼 자신을 숨기며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최고의 결과와 완벽하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그가 그로서 행동 한 것이 진심이었기에 그의 선택이었기에 괜찮았다고 좋았다고 채현이 말해 준 것이다.
처음으로 현우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을 현우는 처음 만났다.
현우의 감정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그리고 채현은 호라이즌을 클리어하고 나서를 약속해 주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현실에서 현우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생긴 것은....
현우를 현우로서 바라봐 주는 사람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겨내지 못했고 현우도 빠져들고 있던 호라이즌의 중독성을 현우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이라면 잠든 공주를 깨울 지도 모른다.
찔리면 중독되는 가시나무 숲으로 왕자들과 사람들을 유인하고 있는 잠든 공주를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고 채현에게 짧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아니에요, 그보다 저 이제 팀장 아니에요, 직위해제 된 게 언젠대,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권채현입니다. 김현우 씨”
채현이 마치 첫 인사를 하는 것처럼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민다.
“아, 네! 김현우입니다. 권채현 씨”
현우는 채현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개한다.
김현우라고...
-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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