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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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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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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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연,비니

DUMMY

2107년 6월.


06은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지금 앞이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냄새도 맡을 수 없지만 사람의 입술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미묘한 입술의 촉각이 사라지고 10여분이 지났다. 등에서 저릿한 느낌이 들고 눈 앞이 밝아진다. 주위의 기계소음들도 점차 들린다.


눈 앞에 서 있던 여성이 물었다. 그녀의 흰 공막이 살짝 붉다. 31세, 플라스틱 안경을 끼고 있고, 164cm 정도의 키다. 논리학을 전공했고, 06의 두 번째 명령권자인 민호연이다.


"KnMq-06, 정신이 드나?“


"앞이 보이고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말씀이시면, 네 그렇습니다.“


"뭐, 그거야 당연하겠지. 이전의 일은, 기억나?"


“완전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기억납니다. 제 기억장치에 또 문제가 생겼습니까?”


민호연은 06의 골반 옆쪽에 감겨있던 케이블 두 개를 빼내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민호연이 시선은 케이블에 고정시킨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확실히 다 기억나지는 않나보네. 많이 괴로워했거든."


"제가 말입니까? 민호연 박사님이 말입니까?"


"둘 다. 내 이름과 얼굴은 기억나나 보네."


"기억장치에 있습니다. 연구동 내의 모든 분들 이름과 얼굴은 다 있습니다."


"그거라도 기억하니 다행이다. 다른 건 다 달라."


국방부 내 시공간위상 변화기, 속칭 오버플로우 개발팀의 서브연구팀 소속 AI 연구원 민호연. 그녀가 06의 앞에 서 있다. 최우선 명령권자는 아니다. 06의 최우선명령권자는 정성일 과장이다.


"제가 리셋된 겁니까?"


"응."


"저 춤 출 수 있습니다.“


"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이렇게 놀랄 일이었나. 이상한 일이긴 하다. 06은 춤을 춰 본 적이 없을 터였다.


"춤 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런 기억 없을텐데. 다시 리셋요청해야겠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KnMq – 06, 비니. 일시 기능정지. 잠깐 자고 있어. 체크해야겠다."


"잠시만 더 이야기하면 안되겠습니까."


"헛소리 말고, 조용히 있어.“


그녀가 배전반 앞에서 차갑게 말했고, 비니의 시야가 흐려지며 곧 깜깜해졌다.




***




비니가 다시 눈을 떴다. 눈 앞에 여성형 안드로이드 KnMq-1184가 있다. 전형적인 동아시아계의 미인형 얼굴이다. 약간 마른 체형에 크지 않은 키. 움직임도 자연스럽고, 체중이 30~50kg 대라 휘청거리듯 움직이는 타 안드로이드에 비해 훨씬 민첩하다. 비니의 흉골 쪽 - 인간이라면 말이지 – 케이블로 연결된 점검구로 계기와 반응속도를 잠시 보고 있다.


"기능 활성화 되었습니까, KnMq - 06."


"안녕하십니까, KnMq – 1184.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저는 기계적인 결함이 있는지, 고장 난 곳이 있는지를 점검하러 왔을 뿐입니다.


”문제가 있나요?“


“아니오. 제가 확인 가능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기억이나 사고논리의 오류일겁니다. 제가 확인할 바는 아닙니다.“


“당신이 가장 성공적인 기체라죠? KnMq-1184 별칭 자야. 우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인간스러운, 대한민국 안드로이드 개체 최고의 성공작.”


자야가 06의 입 안과 동공을 확인하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제가 평가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 인간다운 것이 어떤 건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냥 제가 판단한 대로 말하고 움직일 뿐.“


“지금부터 10분만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해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그런 요청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민호연 박사님이 제가 조금 더 인간처럼 동작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닌 당신이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공손히 부탁하는 06에게 자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KnMq-06, 별칭 비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안 하는게 인간다워지는 첫 번째겠네요. 사람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부탁하지 않아요. 10분만 당신이 밥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10분만 제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해 주세요, 이딴 택도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는단 말이죠. 저라면 농담을 던지면서 10분동안 저랑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보는 방법을 써보겠어요.”


“저는 농담을 할 줄 모릅니다. 웃음 자체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럼, 웃음에 대해 배우는 것이 우선일 것 같네요. 그리고, 한 가지만 팁을 주자면 정확히 3.5초만에 한번씩 눈 깜빡이는 것부터 그만두세요. 점검상 별 이상도 없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방금 잠깐 인간처럼 이야기했으니 요청은 들어준 것으로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06이 불러보았으나 자야는 06의 기능을 정지시킨 후 몸을 휙 돌려 나가버렸다.




***




KnMq-06, 비니는 눈을 감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기능이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됐다.


“갑자기 중단요청을 한 이유가 먼데?”


“위협을 느껴서입니다.”


“안 그래도 저 오버플로운지 개오반지 하는 놈들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니까지 와 그라노? 기억이 좀 바뀌었다 해도 비니가 사람에게 위험한 행동 할 리가 없다이가. 쯥....진짜가, 이상했다는거.”


수원 실험동 AI팀 책임자 정성일이 민호연과 대화하는 도중 짜증을 냈다.


“둘이 있을 경우에 위화감을 느껴졌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혼자 판단하여 기능정지 시켰습니다.”


“목숨이 위험하기라도 했나. 뭐 비니 그놈이 건설현장이나 공병용 특수기체인주 아나? 쟈는 특히나 피지컬이 형편 없다이가. 여자인 니가 붙어 싸워도 이길 수 있을꺼로 아마.”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군사용 안드로이드는 전세계적으로 개발이 금지되어 있다. 휴머노이드 중에서 건설용, 구조용 등의 특수한 용도 안드로이드가 소수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들은 사람과 육체적 능력이 비슷하며, 당연히 사람이나 개, 고양이 등을 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아직은 사람은 사람만이 죽일 수 있다. 안드로이드도 신체적, 정신적인 개체 차이가 컸는데 비니는 특히나 신체능력이 약한 편이었다.


“어쨌든 전 위협을 느꼈습니다.”


호연의 주장에 정성일이 단호하게 맞받아쳐 말했다.


“어쨌든 난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난 네가 지금 거짓말을, 아니 개구라를 치고 있다고 생각한다꼬. 통제된 상황에서 그놈 기억 제대로 살려볼기다.”


“포기하세요, 그거 안돼요.”


“솔직히 말해라. 위협 같은 거 없었재. 니 프라이버시랑 관련된 기가?”


“사실 물리적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만, 점마 깼나보다.”


정성일과 민호연이 비니에게 다가왔다. 비니의 팔을 툭 치며 정성일이 말했다.


“자꾸 재웠다 깨웠다 해서 미안하다. 이제 다 된 것 같다. 말짱해진 기념으로 둘이 밥이라도 한 끼 묵고 온나. 요요 법카있다.”


호연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어 흔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과장님, 괜찮습니다. 아니 싫습니다. 그만하세요.”


“아이다. 오늘은 같이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좀 묵고 바람이라도 쐬고 온나. 비니, 니도 싫나?”


“전 괜찮습니다. 민호연 박사님이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이다, 아이다. 갔다온나. 강력한 권유다.”


결국 둘은 연구동을 벗어나 나란히 시내로 향했다. 시내의 환한 불빛과 많은 사람, 바퀴있는 차, 바퀴 없는 차, 3D 홀로그램 광고판, 음악소리, 술취한 사람들,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등으로 시끌벅적했다.


“이렇게 마음대로 나와도 됩니까?”


“마음대로는 무슨, 정과장님이 나가라고 해서 나온거잖아. 우리가 무슨 전세계를 날릴만한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처음입니다. 제 몸의 중심을 잡기가 좀 어렵습니다.”


“처음 아니야. 비틀거리다 또 기능정지 되면 버리고 간다. 저기 술집 기억 안나니?”


“네,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때 신장개업이라는 샌드위치 광고판을 몸에 두른 안드로이드가 다가와서 홀로그램 마커를 내밀었다. 꽤 쌀쌀한 날씨에도 바니걸 복장을 하고 있다. 내한(耐寒) 시스템이 있거나, 그냥 주인이 내보냈거나.


“수원oo왕갈비입니다. 오늘 마커 받아 방문하시는 손님들은 20% 할인, 소주가 공짜입니다. 수원oo왕갈비입니다. 맛있습니다.”


“아니 됐어요. 오늘은 갈비 먹으러 안 갈 것 같아요.”


“수원oo왕갈비입니다. 오늘 마커 받아 방문하시는 손님들은 20% 할인, 소주가 공짜입니다. 수원oo왕갈비입니다. 마커 받아 가십시오.”


“됐다니까! 갈비집 홀로그램을 3분동안 손 위에 띄워둘 기분이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손님. 세 번은 권하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수원oo왕갈비입니다. 맛있습니다. 오늘 마커 받아 방문하시는 손님들은 20% 할인, 소주가 공짜입니다. 수원oo왕갈비입니다.”


“알겠으니까, 마커는 치워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꾸벅, 인사와 함께 광고 안드로이드가 물러났다.


“KeEp 모델인가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을까. 왜, 내가 성질내서 좀 미안했니?”


“아닙니다. 꽤 구형 모델인데 불쾌하다, 라는 감정을 모를겁니다. 저도 불쾌하거나 기분나쁜 것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데 KeEp 형이 그런 감정을 느꼈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미안했니?’ 라고 물으면, 그냥 ‘쬐금요’, 혹은 ‘약간요’라는 정도만 대답해도 돼.”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한 말은 아니다. 다음엔 그냥 그렇게 대응해보라는 거지.”


둘은 시내 골목길 뒤편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한식과 일식을 안주삼아 소주나 사케를 마실 수 있는 집이었다. 주방 안쪽의 커다란 솥에는 김치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고, 앞의 바에는 나무뚜껑이 덮힌 기다란 열판에 어묵과 무, 각종 채소들이 담겨져 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십니까.”


“네. 둘입니다.”


하나는 사람 아닙니다, 혹은 두 명입니다, 라는 표현을 모두 피한 호연의 대답에 살짝 감탄하며 비니가 말했다.


“정과장 님이 식사를 하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음주를 해도 괜찮습니까?”


“밥 먹고 오랬지, 술 마시지 말란 말 없었잖아?”


“맞습니다. 그래도 제가 전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띨빵한 소리 하지말고 가만 앉아서 나 술 마시는데 술친구나 해.”


“최우선명령권자가 정과장님이십니다. 기본 확인은..”


“아, 진짜!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말 없었잖아.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냥 가!”


“명령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연구동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호연이 말했다.


“야, 비니야. 그런 소리 할거면 가란 소리는 그런 말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이 정도는 그냥 이해할 때도 되지 않았니, 이 멍청아.”


“전 멍청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지도와 역사가 머릿속에 있고, 미분방정식을 일반적인 스톰폰보다도 빠르게 풀 수 있습니다. 지구상의 명화를 다 기억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영문, 한글로 글자 한자 빼지 않고 다 외울 수 있습니다.”


비니의 눈을 쳐다보며 호연이 박수를 쳤다. 물론 표정엔 이 갓난애를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이 가득했다.


“브라보~ 우리 비니 진짜 똑똑하네에~? 비니 모르는게 없구나. 카이사르 알아, 카이사르?”


“네, 압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군인, 성직자, 저술가입니다.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으며, 갈리아를 정....”


“왜 죽었지?”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해방자'를 자처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 3월 15일에 벌어....”


비니가 외기 시작하자, 호연이 오른쪽 주먹을 비니의 코 앞에 갖다 대며 말을 끊었다.


“읽지마, 다 티나.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왜 죽었냐고.”


“칼에 찔려죽었다고 했으니, 과다출혀....”


“야이 돌대가리야! 자야는 3초 정도 생각하다가 ‘그는 오만했고, 원로원을 너무 믿었나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자야의 말도 그냥 뻔하지, 그래. 그렇더라도, 대화의 맥락에 맞는 상식적인 답을 해야할 거 아냐! 내가 세계적인 역사학자 수준의 대답을 원했냐!”


비니 뿐 아니라, 술집안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 소리지르는 호연을 쳐다보았다. 다시 살짝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호연이 말했다.


“흠, 아,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좀 컸습니다. 술들 드세요~”


“제가 또 박사님을 실망시켰군요.”


“하루이틀이냐.”


마침 땀을 뻘뻘 흘리는 알바생이 음식을 내왔다. 안드로이드가 판치는 식당 서빙계에 보기 드문 사람직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직원을 좋아하지만, 당연히, 인건비가 문제였다.


메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김치와 어묵탕이었다. 소주도 두병이 같이 나왔다.


“한잔 할 수 있지? 같이 먹자.”


“김치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공 위(胃)에 담지 마라고...”


“같이 먹자.”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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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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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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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4 0 17쪽
» 1.호연,비니 23.03.31 40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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