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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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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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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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돌이킬 수 없는

DUMMY

비가 그치려나 했는데, 저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렸다. 연못위의 소금쟁이들이 미끄러지는 수면위로 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 소나기가 쏟아지며 땅에서 물안개를 일으켰다.


“오와, 홀딱 다 젖겠네. 바람까지 분다야.”


“네. 이 정자 안에 있다고 비를 피할 수 있는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뭔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작은 나뭇조각, 이파리들, 흙들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둘은 실험실로 뛰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AI실험실로 들어갔다. 성일은 이틀째 외근 중이라 실험실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에취, 에취!”


“갓 블레스 유, 박사님.”


“오냐오냐. 훌쩍.”


“재체기는 어떤 느낌인가요? 알고 싶습니다.”


“코 안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내 콧속이랑 머리 안에 들어있는 걸 밖으로 뿜어내버리고 싶다는 느낌? 뭐 그런건데, 하고나면 시원해. 행복하다.”


“콧물이나 침을 흘리거나 뱉을 때도 행복한가요?”


“사람이 뭔가를 뱉거나 토해낸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란다, 얘야. 그런데 너 오늘따라 뭘 그리 궁금해하냐.”


“그냥, 좀 알고 싶었습니다. 피노키오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피노키오, 이해는 되었니?”


“이해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읽기는 했습니다.”


“옷부터 갈아입어. 뚝뚝 물 흘리지 말고. 레몬티 한잔 줄까?”


“저는 필요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고....”


“한잔 줄까?”


“.....네.”


둘다 옷을 갈아입은 후, 실험실 내 의자에 앉아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포트를 보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호연은 이것이 물멍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박사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제가 음료와 식료를 섭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왜 자꾸 권하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감 때문이겠지.”


“공감이요?”


“응. 타인과의 교류, 교감에서 공감은 중요한 요소거든. 취향이 같아서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비슷하다든가, 같은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거기에 대한 뒷담화를 한다든가 뭐 그런거. 가까워지는 데에는 같이 느끼는 게 중요해. 같이 밥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는 건 현재 둘이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거니까. 사회화에 있어서 먹고 마시는 건 필수지. 그래서 너도 먹고 마실 수 있는 거고. 이해가 되니?”


“약간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릴케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는 것도 비슷한 것입니까?”


“릴케의 시랑 밥 먹는 게 비슷한 거냐고? 무슨 소리야?”


“뭐라도 상대와 공통점을 갖고 싶은 거니까요. 음식에 관심이 없어도, 릴케에 관심이 없어도 상대가 그것을 행하고 즐긴다면 저도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 대충 그런거야. 릴케의 시는 나도 잘 이해하기 어렵다만.”


“배고프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눈물나는 건 어떤가요? 왜 사람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눈물을 흘립니까? 가슴이 찡하다는 건 아프다는 뜻입니까?”


열심히 질문을 하던 비니는 호연이 자신의 눈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그러십니까, 박사님.”


“너 무슨 일 있어? 오늘 왜 그러는거야. 평소에 안 하던 질문들을 해대면서.”


"박사님이 속해있는 세계나 사람들, 박사님의 생각, 그 모든 것이 제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집니다. 가끔 민 박사님은 저에게 있어 알아야 할 세계의 전부인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너 뭔 일 있냐고 내가 질문하잖아. 대답해, 빨리.”


“시공간 위상변화기, 속칭 오버플로우 실험팀에 지원했습니다. 제가 적합해 보였습니다. 저를 차출하고 나면, AI 실험실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민호연 박사님께 보탬이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야, 너 무슨 바보짓을.....이전 실험에도 둘이나 망가진 거 몰라? 너도 오버플로우 실험으로 문제 생긴 거였어. 알잖아. 그런데 왜.”


“저에게 여기서 남아 정 과장님, 민 박사님과 지내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오버플로우 실험팀으로 가거나 김채은 과장님에게 가는 것, 그게 제가 고를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 미친놈이, 왜 니 마음대로 그딴 짓을 하는 거야!”


“민호연 박사님, 실험중 이상이 없을 확률이 96%이상이라고 프리뷰 결과가 나왔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냐? 들리는 소문으론 문제가 생긴 경우가 안 생기는 경우보다 더 많다고 했어. 아무튼 안돼.”


“제가 자원했고, 센터차원에서 결정이 된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비니를 쏘아보던 민호연이 실험실을 뛰어나갔다.




***




“어떻게 우리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이럴수가 있습니까! 안 돼요!”


호연이 고함지르는 소리에 편두통이 재발한 부소장이 TV에서 건강프로그램에서 배운 태양혈 지압을 하며 말했다.


“이번 오버플로우 실험에 집어넣을 안드로이드를 구하기가 엄청 힘들었다. 실험만 하면 EMP 문제인지 뭔지 걔들이 다 작동불능이 되어서 나오니 감당이 안 되잖아. 그래서 자원하는 팀 있으면 예산도 좀 지원하고 인사고과에 반영이라도 좀 해야겠다 했더니,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비니가 지도 가능하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지.”


“안 됩니다, 부소장님. 걔 안 돼요. 아직 어리고 멍청해서 실험에 쓰시기도 힘들 겁니다.”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됐냐. 최소한 혼자 움직이고 판단할 정도로 키워놓은 녀석들을 써야 되는데 너무 잘 큰 자야같은 녀석들은 핵심이라 빼기 힘들고, 갓 태어난 놈들은 교육이랑 사회화가 기본적으로 필요해서 또 안 되지. 미안한데, 비니같이 어중간한 놈들이 딱이야. 거기다 이번 실험은 진짜 안전할거야. 99퍼, 아니 백퍼 보장할게. 문제없이 돌아올거라고.”


“안 됩니다, 부소장님 안 돼요. 다른 애들 교육시켜서 써 보세요. 이러면 걔한테는 두 번째라고요.”


“이미 결정됐어. 너희 실험실에 안드로이드 새로 하나, 아니 둘 넣어줄게. 예산도 좀 더 지원하고.”


“싫습니다! 예산 지원 안 해줘도 됩니다!”


소리 지르며 책상을 내리치는 호연을 부소장이 노려보며 말했다.


“소리 지르지마. 니가 싫어한다고 바뀔거 없어. 어차피 오버플로우 실험 자원한 거 아니었으면 양자역학 실험실로 갈 거였어. 김채은이 요청했던데, 걔 필요하다고. 비니는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럴거면 안드로이드랑 예산도 지원받고, 좋잖아?”


“싫다고, 싫다고, 싫다고! 이제 더는 싫다고!!! 야이 씨발놈들아! 야이 개새끼들아!! 왜! 나한테 다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냐, 엉?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왜!! 내가 뭘 더....뭘 더 어떻게....”


소리를 지르던 민호연이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부소장을 내버려두고 등을 돌려 비틀비틀 부소장실을 나왔다.




***




“어떻게 됐습니까?”


손에 커피를 들고 있던 형철이 성일에게 물었다.


“항명에, 부소장한테 욕하고 난리를 쳤으이, 잘 넘어갔겠나.”


“퇴소처리 됐습니까? 임시...겠지요?”


“응. 바로 임시퇴소 확정됐고, 무급휴직 3개월에 정신과 진료기록 첨부해서 다시 오라고. 어차피 술 계속 마신 것도 다 알고 있었고, 요즘 일도 좀 안했고.”


“그렇다고 즉각 퇴소라니요.”


“무슨 짓 할지 모르니 일단 쫓아내자 이거지 뭐. 호연이가 쫓겨나고 보니 차라리 잘 됐다.”


“뭐가요? 호연이 나간거?”


“아니, 비니 오버플로우 팀 실험에 지원한 거. 어차피 그거 아니면 김채은 그 소시오패스한테 갔을 건데. 그게 더 끔찍하지. 참, 우울하다. 내가 그거 하나 막을 힘이 없다. 그 천벌받을 년.”


“보통 자아가 좀 약한 애들을 쓸텐데, 김채은 그 인간 때문에....비니는 왠지 보면 볼수록 짠하거든요.”


“다른건 그렇다치고, 나나 비니 얼굴 한번 못 보고 바로 끌려나갔다. 내가 안에 있었으면 어떻게 좀 말려봤을텐데.”


“그럼, 김채은 과장님이 아니면 비니씨가 우리 팀 실험에 지원할 일이 없었을 거란 말입니까?”


갑자기 옆에서 툭 튀어나온 자야가 물었다. 화들짝 놀란 성일이 말했다.


“아오, 깜짝이야. 닌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온나.”


오른쪽 눈을 깜빡여 반복해서 윙크를 하며 자야가 다시 물었다.


“딸칵딸칵, 켰습니다. 김과장님 때문에 비니씨가 자원했나요?”


“그, 그래. 김채은 아니면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지. 우리가 실적이 좀 없었긴 해도.”


“그렇군요. 저도 갑자기 비니씨가 결정되서 좀 이상하긴 했거든요. 다른 후보들이 있긴 했는데 다들 좀 부족해서, 고민중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비니씨가 지원한다 해서 덜컥 결정됐죠. 가장 적합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아직 실험이 많이 불완전해서 기능이상이 올 확률이 높고, EMP 문제도 아직 꽤 있습니다. 다른 위험도 있고.”


“다른 위험이라니?”


“그건 기밀사항입니다. 죄송합니다.”


벽을 보고 있던 형철이 성일에게 물었다.


“우리가 돕거나 할 건 없나요?”


“김채은이 비니에게 더러운 짓거리를 했을 때, 시끄럽게 여론몰이를 했어야 하는 건데, 조용히 넘어가려 했던 게 잘못이었다. 인자는 좀 늦었지. 오버플로우 팀은 블랙홀 같은 거라 글로 빨려들어가믄 뭐든 빠져나올 수가 없네. 그거 정확히 뭐하는 거고? 대충이라도 이야기 해줄 수 없나?”


“저도 참여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특급기밀이라 말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당연히. 하~ 김채은 저거를 우째해야 속이 시원하겠노.”


그때, 무표정하게 앞을 보고 있던 자야가 형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너 또 뭔 생각하고 있냐?”


“제가 며칠안에 갑자기 뭔가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시고 좀 도와주세요.”


형철이 자야의 양 어깨를 붙잡고 사정하듯 말했다.


"무슨 미친 짓을 하려면 뭔가 말이라도 좀 하자, 응? 돌발행동이라니. 여기 터가 안 좋나, 사람이나 안드로이드나 제정신이 별로 없는 것 같네."




***




이틀후 오후. 수원 국가정보부-국방부 합동 실험센터 회의실


형철은 필사적으로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정보부 차장의 명령으로 오버플로우 실험팀장 중 하나가 된 그였지만, 전형적인 문돌이로서 역사강의나 하던 그는 실험의 세부적인 내용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쩐다 저쩐다 하는 소리는 다 공염불로 들렸다. 대충 회의가 마무리되는 분위기였고, 자야가 브리핑을 마치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양자역학 실험실의 연구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연구 결과도 확실히 증명하기 힘든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김채은 과장님 팀에 지원을 늘리는 것도, 김 과장님 팀을 오버플로우 연구에 참여시키는 것도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입니다.”


김채은이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됩니다! 제가 세 번, 네 번 검토했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오버플로우 책임자 최민호 대령이 뻐근해져 오는 목 뒤를 주무르며 말했다.


“검증팀이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김채은 과장팀의 참여는 백지화 하겠습니다.”


뿌드득, 김채은이 이를 악물고 자야를 노려보았다. 김채은의 눈에 자야가 싱긋 웃는 듯한 표정이 보였다. 잘못 본 건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무표정한 상태였다. 다들 일어서 회의실을 나왔고, 채은도 힘없이 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자야가 살짝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랐다.


“멍청하네, 멍청해. 좀 하는 줄 알았는데~”


채은의 뒤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자야였다.


“아~ 그대는 띨빡한 사람~, 아~ 그대는 우둔한 사람~”


“야, 너 뭐라했어.”


“네? 그냥 노래 부르는 겁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조심해. 죽는다, 너.”


“조심하겠습니다. 김채은 과장님. 그대는 오늘도~ 삽질, 삽질. 바보짓만 골라하네요~ 무식하면 착하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노래 부르는 건 괜찮죠?”


- 철썩!


분을 이기지 못한 채은이 자야의 뺨을 힘껏 때렸다. 체격도 작고 몸도 가벼운 자야가 오른쪽으로 휙 날듯이 복도 벽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뒤따르던 형철이 깜짝 놀라 자야에게 뛰어갔다.


“자야, 자야! 괜찮아? 아니 김 과장,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돌았어요? 왜 갑자기 자야를 때리는 겁니까? 자야, 어이구 얘 정신을 못 차리네!”


“그게, 이 년이, 아니 자야가 저를 약을 올려서 그게, 살짝 건드린 건데...”


형철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건드리긴요! 있는 힘을 다해 치는 걸 내가 봤는데! 소장님, 최대령님! 큰일났습니다. 자야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잠시만 와 보시죠!”


뒤에서 소장과 최대령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지금 자야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연구소 전체가 발칵 뒤집힐 판이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거야!”


“왜 넘어졌어, 문제라도 생긴거야?”


형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 김채은 과장이 자야에게 폭행을 가했습니다.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회의 때의 연구결과 문제로 앙심을 가진 거 아닌가 싶습니다.”


눈이 동그래진 채은이 열심히 변명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저 자야가, KnMq-1184가 저를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살짝 밀었을 뿐입니다. 정말 아닙니다!”


최민호 대령이 눈에 노기를 가득 담은채 소리질렀다.


“야이, 미친년아! 이게 오냐오냐 했더니. 야 이 썅,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이게 진짜 눈에 뵈는게 없나! 니가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20년 연구했고 80조가 들어갔어! 그 데이터 중 상당부분이 자야의 머리속에 있다고. 니깟게 뭔데 내 일을 망치려는 거야 엉? 평생 울릉도에라도 쳐박아줄까?”


너무 놀라 부들부들 떨면서 채은이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자야가 절 놀렸습니다. 제가 잠시 욱해가지고 그만..”


“말이 되는 소릴 해! 안드로이드가 놀렸다고? 자, 여기 안드로이드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 손들어봐!”


그 자리의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자야가 자신을 구박하던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형철은 손을 들까말까 고민했지만, 역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에, 최대령은 더 화가 나서 소리질렀다.


“봐! 봐! 어디서 헛소릴 하고 있어! 회의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자료를 준비해서 반박하든지 해야지, 주먹이나 휘둘러서 일을 그르치려 해? 이게 연구성과 좀 냈다고 기고만장해가지고 말야. 니가 그간 사고쳤던 것들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 귀에 들어왔어! 내가 몰라서 넘어간 줄 알아! 당분간 실험실에 쳐박혀서 나오지 말아. 사람이나, 개나, 안드로이드나 뭐라도 하나 털끝만큼이라도 더 상하게 하면 니 학자인생 내가 목숨걸고 끊어줄거야. 알겠어? 내가 꼼꼼히 니 가족들 앞길까지 다 막아줄거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근신하겠습니다.”


겁먹어 눈치만 살피던 김채은이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때, 쓰러져 있던 자야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저, 저, 저는 Kmmmmq 자, 자, 자야입니다. 수행결과는, 관측상, 논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저는 말, 말하고 움, 움, 움직이는 모든 것에, 저는 있습니다.”


최대령이 자야를 일으키며 물었다.


“이런, 자야 괜찮니?”


“최, 최민호 대, 대령님. 저는 밥을 먹다, 기능이 완전합니다. 커피를 드릴까요?”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던 형철이 최대령에게 말했다.


“제가 점검실로 데려가서 회로나 다른 곳에 심각한 이상이 있는지 기술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조심해서 데려가게.”


형철이 자야를 안고 가는 뒷모습을 보고있던 최대령이 으르렁거리며 돌아섰다.


“으으, 너, 김채은, 근신, 아니다, 아니다, 아니야. 당장 나가. 지금 당장. 너 우리 나라 학계에서는 어디서도 일 못하게 해 놓을테다. 딴 나라 가서 뭘 하든 내가 그것까지 어쩔수야 없겠지만, 한반도 안에서는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아! 당장 꺼져.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쏴 죽이기 전에.”



형철이 자야를 안아들고 건물 사이의 구름 다리를 건너 점검실 근처에 도착할 때 쯤이었다. 자야의 다리를 받쳐든 왼팔을 자야의 허벅지에서 휙 빼며 형철이 말했다.


“내려, 임마. 무겁다.”


“네, 알겠습니다. 다 알고 있었나요?”


“너도 생각보다 몸 못 쓰더라. 옆으로 펄쩍 뛰는게 다 보이는데, 그런 어설픈 자해공갈에 다들 넘어가는 게 더 신기하다. 아님 다들 김채은을 싫어해서 믿는 척 한 건가.”


“뭐가 됐든 상관없어요. 최민호 대령님만 그 이야기를 믿는다면.”


“암튼 잘했다. 캬, 역시 우리 자야씨는 사람 열받게 하는 건 최고라니까. 나 빡치게 했던 거 반만 해도 김채은 같은 얼뜨기 도라이 정도야 뭐.”


형철이 웃으며 자야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리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자 자야가 형철에게 몸을 살짝 기대며 형철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어, 너 진짜 약간 이상있냐? 괜찮아?”


“괜찮아요. 제가 오버했는지 몸이 살짝 왼쪽으로 기우나 보네요.”


“안아서 들고갈까?”


“아니오. 이대로 걸어가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상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해. 나 최대령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걱정마세요. 형철씨.”


“어허, 건방지게. 어린 놈이.”


둘은 점검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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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3 0 14쪽
»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6 0 14쪽
8 7. 악의(惡意) 23.04.10 13 0 14쪽
7 6. 최고의 생일 23.04.07 17 0 13쪽
6 5. 노랑할미새 23.04.05 14 0 13쪽
5 4. 비라도 오지 않을까 23.04.03 15 0 13쪽
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0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3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39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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