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중·단편

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278
추천수 :
0
글자수 :
65,903

작성
23.03.31 21:03
조회
24
추천
0
글자
17쪽

2.오르페우스

DUMMY

“그런데 정성일 과장님이 어제 저한테


[야 임마, 니는 피아노도 못치고, 글씨도 삐뚤빼뚤하고, 게임도 못하고, 손가락에 삐꾸났나. 뭐라도 좀 해바라 임마. 하~ 요거 깝깝하네. 요새 한가하면 뜨개질이라도 함 해바라. 손 감각이 좀 나아질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게임도 못해?”


“네, 실시간 전략게임 갤럭시크래프트로 정과장님이랑 대결해서 10전 전패 했습니다.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너무 오래 걸리나 봅니다. 직관적인 판단이란 것을 하는 것도 너무 힘듭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다루는 것도 서투르고 말입니다. 참고로 장기랑 체스는 열 번씩 해서 제가 다 이겼습니다.”


“정과장님한테 갤크를 진다..라고, 와 너 답도 없구만. 정과장님이 갤크를 누구한테 이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물어보지도 않은 장기랑 체스는 왜 이야기하는데.”


“제가 이길 수 있는 종목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바둑이랑 장기, 체스를 사람한테 지는 안드로이드가 도대체 있긴 하냐?”


작년 국내 갤럭시크래프트 이벤트 대회에서 인간형 안드로이드들의 출전을 한번 허용한 적이 있었다. 16강 중에 안드로이드가 둘이나 오르는 이변을 선보였지만 두 기체 모두 8강에는 오르지 못했다.

경우의 수가 중요하고 정지된 상태에서 경기가 이루어지는 바둑, 장기, 체스같은 종목들은 사람이 인공지능을 절대 이길 수가 없지만, 1초안에 수십개의 정보가 쏟아지고 0.1초 안에 직관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실시간 전략 게임들은 안드로이드가 아직 사람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물론 정성일은 예외였다. 민호연은 컵라면을 먹으며 정성일에 3전 전승을 거둔 바 있었다.


“어이구 이 둔탱아, 넌 진짜...”


“죄송합니다.”


비니는 또 뭔가 사죄를 해야할 것 같았다. 잘 못하는 젓가락질로 간간히 두부 정도나 집어서 씹는 흉내를 열심히 내는 비니 앞에서 민호연은 술을 쉴 새 없이 들이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조심히 술을 따르는 비니의 손이 부자연스러웠다. 술병과 잔이 팅팅팅 부딪혔다.


“야, 내가 너무 미인이라 떠는거야 뭐야. 왜 이래.”


“아까 말씀드렸듯 제 손의 미세조정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좀 고마해. 아, 너무 힘들다. 위에서 쪼으고 아래에선 치고 올라오고, 우리는 버벅거리는데 양 옆에서는 막 달리는 것 같고, 막 골통을 때리는 듯 한데, 넌 계속 죄송하고, 내 속은 계속 미식거리고 뭐 그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도 뭔소린지 모르겠는데 니가 어찌 알겠냐.”


“제가 박사님을 항상 실망시켜서 그런겁니까.”


“그뤠에, 그런거다. 그러니까 좀 잘하자.”


“취하신 것 같습니다. 체온도 높아보이고, 호흡수도 빠릅니다. 발음도...”


“야이~쉐키야. 같이 죽자든지, 이제 그만 마시자든지 이런 말을 해야지. 에이 쒸.”


“민호연 박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머시머시 먼데?”


“왜 제 최근 기억 1년간이 많이 비어 있습니까?”


“너한테 사소한 문제가 있었어.”


“어떤 문제였습니까?”


“논리 연산이 자꾸 삑사리가 났고, 말귀도 못아라쳐먹고. 나....도 못 알아보고...나 호연이다, 이쉐키야.”


“알고 있습니다, 민호연 박사님. 삑사리라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 은어군요.”


술에 취한 호연이 비니의 얼굴을 툭 치며 말했다.


“기억 안 나니? 우리 별 보러간 날, 여기 처음 와서 놀았던 날. 내가 너 이름 지어준 건 기억나니?”


상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아니, 아예 기억조차 없는 비니의 눈이 약간 커졌다. 호연이 비니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걸로만 생각했던 비니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표정관리가 안 된다. 어색하게 당겨올린 입꼬리가 살짝 기괴했다.


“박사님이 이름 지어주신 건 기억 납니다. 그냥 비니 씌워보시곤 어울린다고 하시며 지어주셨지요. 나머지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박사님과 제가 천문관측을 했다는 건가요?”


“아니, 그냥 별 보러 간거야. 내 부전공 천문학과 관계없이.”


깔끔하게 빗은 단정한 머리, 빚은 듯 오똑한 콧날, 살짝 닫혔다 열린 입술, 초롱초롱 빛나는 갈색 홍채의 눈동자,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의 요소를 죄다 넣은 잘생긴 비니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제가, 제가 말입니까? 자주 그랬습니까?”


“그뤠에, 임마. 자주는 아니고 가끔.”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항상 혼내시고 멍청하다 하셔서. 아까도 카이사르 대답을 잘못했다고 혼내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음. 그건 맞는데, 다 애정어린 질책이랄까.”


“애정이 있는데 왜 혼을 내는 것입니까? 애증(愛憎)의 감정 같은 것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애증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애증은 실제로 느끼기 힘든 감정이거든. 애 많이 먹이는 내 자식 정도라면 모를까, 그런데 너 애정이 어떤 건지는 알겠어? 그것조차 전혀 모르는 거 아니야?”


“애정, 애정이란 사랑하는 마음, 남녀 간에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입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또는 구슬픈 심정도 해당됩니다.”


비니의 말을 듣고 표정을 찡그리며 소리치려던 민호연이 귀에 손을 대고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국어사전 찾아본 게 아니잖니. 그리고 세 번째는 한자가 다르드아. 그냥 글을 읊지말고, 니가 생각하는 걸 말해봐.”


“좋아하는 건가요? 엄마가 자식에게 밥을 먹이는 것, 남녀가 길가에서 키스하는 것, 귀여운 강아지를 안는 것, 이런 것인가요?”


“너 이번에는 이미지 띄워서 보고 있지. 죽을래 진짜. 하, 분명히 같은데, 같긴 한데, 이건 뭐...”


호연이 마지막 말을 흐렸던지라, 비니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제가 이해하기는 힘든가 봅니다.”


애처롭게, 또는 안타깝게 비니를 쳐다보던 호연이 다시 귀에 손을 댔다.


“더 의미가 있을까요? 얘는 비니 아니라고요....”


호연이 혼자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의아해 하던 비니가 말했다.


“제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판단해서, 민호연 박사님이 기뻐하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애정의 감정 같은 것인가요?”


“..........”


호연이 비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빗은 단정한 머리, 빚은 듯 오똑한 콧날, 살짝 닫혔다 열린 입술, 초롱초롱 빛나는 갈색 홍채의 눈동자,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의 요소를 죄다 넣은 잘생긴 비니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왜....그렇게 쳐다보십니까?”


“그래도 뭔가 발전된 이야기가 나와서.”


“이게 정답인가요?”


“그럴 리가. 그래도 이건 네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좋네. 술도 알싸하게 올랐겠다. 춤추러 갈까?”



“전 춤 모릅니다.”


“너 아라아라, 너 춤 춰봤어.”


“네? 저는 춤추는 방법 모릅니다. KnMq 모델들은 연습을 많이 해야 춤출수 있습니다.”


“FY boyz처럼 잘 추라는 거 아냐. 기분대로 흔들면 되는거야. 잘 모르면 내가 가르쳐 줄게. 가자!”



클럽에선 최신 댄스곡 ‘I got Burning hill“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갖가지 색상과 디자인의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내일이 없는 듯 산나게 춤을 추고 있다.


비니는 슬림한 체형과 긴 손과 발을 가지고 의외로 꽤 볼만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호연은 비니에게 맞춰가며 비슷한 리듬으로 춤을 췄다. 생각보단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비니는 호연의 움직임을 따라오고 있었다.


“잘 추네, 생각보다.”


“이게 잘 추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면 됐어. 난 네가 삐거덕거리며 사람들 시선이나 안 끌까 걱정했는데. 어어 조심!”


술취한 아가씨가 양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들 근처로 다가왔다. 무아지경 상태였다. 호연이 주의를 주는 찰나, 아가씨의 오른팔이 비니의 머리를 때렸다.



***



“정신이 드냐. 이제 괜찮아?”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왜 여기 있는지는 알겠니?"


"잘 모르겠습니다."


"너 클럽에서 맥아리 없이 춤추다가 옆에서 날뛰는 아가씨 팔에 맞아 쓰러졌어. 아무리 몸이 약하다 해도 클럽에서 춤추는 아가씨 팔에 부딪혀서 쓰러지면 어떡하냐.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클럽에서 갑자기 기억이 없어졌습니다."


“왜 넌 처리하기 힘든 상황만 되면 정지냐. 오크처럼 눈물 흘리거나, 자야처럼 말을 더듬는 선에서 버벅거리는 정도로 안 되냐?”


“죄송합니다.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 제가 어떻게 온 겁니까?”


“어찌 오긴, 내가 업고왔다. 니네들 사람보다 훨씬 가볍잖아. 업을 만 하더라.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거기 사람만 입장 가능하거든. 들어갈 때 암말 안 했더니 그냥 넣어주던데. 병원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주위에서 난리 치길래, 너 빈혈있다고 뻥치고 업고 나왔어. 내가 키가 180인 널 훌쩍 업으니 다들 놀라기도 하고 해서 재밌더라.”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됐다. 그런데 여기 기억나?”


시립 천문대 옆 벤치였다. 천문대 근처답게 가로등도, 다른 조명도 전혀 없다. 하늘은 경기도 답지않게 별이 많이 보이는 상태다. 꽤 긴 벤치 몇 개가 있고, 다른 벤치엔 연인들이 앉아 있다. 비니는 민호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놀란 비니가 벌떡 일어났다.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눕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어, 어, 여, 여긴 네, 와 본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서 삭제된 지난 6개월 사이에 여기에 왔던 겁니까?”


“삭제된 거 아냐. 네 기억 자체에 오류가 자꾸 생겨서 너 스스로 지워버린 거지. 뭐가 그리 혼란스러웠길래.”


“논리적 오류, 아니면 장단기 기억저장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거였나요?”


“우리야 잘 모르지. 뭐가 기억나고 안 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별, 별자리 이야기 하셨던 건 기억납니다. 오르페우스 자리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래, 내용은 기억나니?”


“알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와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오르페우스는 부모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그만. 그거 말고 그때 내가 해준 이야기 기억나?”


“박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믿습니까? 신화야 상상한다고 해도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남기고 뒤를 돌아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니, 넌 기억과 함께 감정도 다 날려버렸니?”


비니의 손을 살며시 잡은 호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뭔가 또 잘못한 겁니까?”


“아냐, 다 내 잘못이다. 에이씨, 하지 말자니까.”


마지막 말은 고개를 돌린 채 손을 귀에 가져다 대며 작은 목소리로 호연이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 못들은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여기서 별 조금만 더 보다가 돌아갈까?”


“네, 좋습니다. 민호연 박사님.”




```




다음날 아침, 감정패킷 실험실 옆 휴게실에 비니가 서 있었다. 계산기로 비니를 써먹던 정성일이 ’걸리적거려, 잠시 사라져‘라고 외치며 그를 휴게실로 보냈다. 그의 눈앞에 KnMq-1084 자야와 해외교섭팀 이형철이 보였다. 형철이 비니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여, 민기 아냐,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갔었어?”


“아닙니다, 팀장님. 이쪽은 06, 비니입니다. 잘 모르시면 저한테 물어라도 보는게 예의죠.”


자야가 고개를 돌려 형철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앗, 미안. 비니랑 민기는 둘 다 너무 잘생겨서 헷갈렸다. 나머지는 평범하거나 좀 이상한데 말이야.”


“그런 말은 모두에게 실례입니다. 지금 그걸 비니....씨 칭찬이라고 하신겁니까?”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문 형철이 자야에게 당수를 날릴듯한 포즈를 하며 말했다.


“넌 왜 날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내가 너한테 뭐 그리 큰 잘못을 했길래, 잉?”


“팀장님이 실수를 너무 많이 하시는 거지, 내가 따라다니며 면박을 주는 게 아닙니다.”


“어우 이걸 기냥, 삶아먹을수도 없고.”


“삶아봐야 드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기능정지나 되겠죠.”


“말이나 못하면.”


아침부터 투닥거리는 둘을 보고 있던 비니가 풀려있던 초점을 맞추며 물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뎀프시 롤을 자야에게 시전할 준비를 하던 형철이 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밑도 끝도 없이? 오르페우스가 누구더라, 고대 그리스 인물 같기는 한데, 이름이 다 고만고만해서.”


“비니씨, 우리 팀장님에게 그런거 물어보시면 안됩니다. 역사강의를 하시는 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상식이 없으세요.”


“뭐 임마? 설명하면 알아. 누군데?”


“있잖아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가.”


“음, 모르겠는데.”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잃고 되찾으러 지옥에 들어가죠. 거기서 하데스의 허락을 받고 구해서 빠져나오다가 마지막 한 발자국 남기고 뒤돌아보는 바람에 아내를 잃는 뭐 그런 사람이죠.”


“아, 그래. 오르페우스 알지. 유명하잖아.”


“오르페우스가 뭐 연주하는지는 아세요?”


“리라인가, 하프인가 뭐 그런거 아냐?”


“오, 좀 놀랐습니다, 팀장님.”


“니가 진짜 오늘 죽고 싶은 게로구나. 오냐, 그 소원 들어주마.”


비니가 구사할 수 있는 15개 언어 중에는 분명히 한국어도 있다. 그런데도 비니는 둘의 대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앞뒤 맥락은 어떤건지, 안드로이드를 삶아먹는다는건 무슨 소리인지, 역사강의와 그리스 신화는 어떤 관계인지, 자야가 형철에게 리라인지 하프인지를 물어본 건 왜인지, 자야는 왜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인지까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서 민호연 박사님이 저를 싫어하시는가 봅니다.”


“네?”


“응? 뭔소리야?”


“저,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어떤 겁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교훈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자야가 말했다.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의심하지 말고,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지도 말고,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은 후에, 끝낸 후에야 뒤돌아보라, 뭐 이런 교훈이 있을 수 있겠죠.”


옆에서 입술이 귀에 걸릴만큼 과장되게 웃는 표정을 한 형철이 자야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방금 자야의 표정은 분명히 ’고민‘이 아니라 ’검색‘이었다.


“얘는 또 어디서 이상한 걸 찾아가지고 읽고 있냐. 교훈이 있는 이야기는 개뿔. 고귀하거나 재능있는 사람이 마지막 한 스텝을 남기고 실수해서 파멸하는 전형적인 고대 비극이지용. 그냥 그런 이야기를 ‘인간’들은 좋아한답니다. 우리 똑똑한 자야님은 참 검색쟁이셔.”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한 단계 더 이해하게 된 자야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그녀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보려 공격력이 0.01 정도 되는 헛된 타격을 날려보았다.


“현명하신 우리 팀장님은 오르페우스 아내 이름 정도는 아십니까?”


“그런 사소한 게 중요하냐. 본질이 중요하지. 왜 날 꼭 이겨먹으려 하냐, 너는?”


여기까지 들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비니가 말했다.


“저, 저는 두 분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두 분이 지금 어떤 기분으로 이야기하는지, 두 분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손상 이후에 전뇌(電腦)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말도 안됩니다. 이상합니다. 오류가 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나, 아닌가, 분명히 여기 있다. 생각을 해. 교훈은, 가르침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야 이녀석 일시정지 시켜. 문제 있나보다.”


살짝 심각함을 느낀 형철이 자야에게 말했다. 이 때, 양손을 가슴 앞으로 내밀며 비니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잠시 혼란이 온 것 뿐입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겠냐, 너?”


“최근에 두 번이나 점검했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형철 팀장님.”


비니는 이 말과 함께 뒤로 돌아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비니의 뒷모습을 보던 형철이 자야에게 말했다.


“저놈 최근에 두 번이나 리셋했다던데, 탈 난거 아닐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제가 점검했었는데 기계적인 문제나 전자회로의 문제 같은 건 없었습니다.”


“저러다 퍼지는 놈 많이 봤는데, 괜찮을라나. 민호연에게 말은 해둬야겠다. 호연이도 요즘 상태가 안 좋기는 한데.”


“민호연 박사님은 왜 안 좋으세요?”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7 0 14쪽
8 7. 악의(惡意) 23.04.10 14 0 14쪽
7 6. 최고의 생일 23.04.07 18 0 13쪽
6 5. 노랑할미새 23.04.05 16 0 13쪽
5 4. 비라도 오지 않을까 23.04.03 17 0 13쪽
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 2.오르페우스 23.03.31 25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41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