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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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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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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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라도 오지 않을까

DUMMY

이틀 후. AM 6:30


비가 아주 가볍게 내리고 있다. 이게 안개인지 비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살짝 내리고 있었다. 정원 전체가 습하고 뿌옇다. 비막이가 있는 공간 벤치 안에 비니가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옅은 노란색 조명이 번지듯 보이고, 비니의 검은색 머리카락 위로 새는 고였던 빗물이 한두 방울 씩 떨어진다. 차갑다. 그가 느끼는 차가움, 뜨거움, 통증이 호연이 느끼는 것과 같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감각은 어디까지나 개체적인 것, 인간이라 해도 서로가 느끼는 감각이 어떤 건지는 사실 전혀 알 수 없는 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빗물의 느낌과 호연이 느끼는 빗물의 느낌이 비슷했으면 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라도 더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웍!! 일찍도 나와 있다. 엥, 안 놀랐냐?”


“놀랐습니다. 정말로. 반응이 없을 뿐입니다.”


“정말 별로 안 놀란 것 같은데. 재미없게스리.”


“제가 감정에 대한 이해가 좋지 못해서 여러분이 실망하시지만, 놀라움과 공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니까요.”


“관둬라, 임마. 재미없는 놈.”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호연이 입을 삐죽댔다. 원래의 비니는 이런 장난을 치면 깜짝 놀라는 척은 해주었다.


“죄송합니다.”


“언제 나왔어?”


“두 시간 정도 됐습니다. 새벽에 비가 오는 듯 해서 박사님의 명령에 따라 나와있었습니다.”


“아침에 오라고 했지, 누가 해도 뜨기 전부터 나와 있으라 했냐. 나 안드로이드 고의파손이나 방치로 벌금 먹일려고 그러냐. 그거 심하면 형사처벌도 돼.”


“전 괜찮습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어차피 박사님이 이렇게 오시지 않습니까.”


“그래, 참 감동적이구나. 그래도 이젠 해라도 뜨면 나와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말씀드린 뜨개질 기억하십니까?”


“응, 손감각 익힌다고 정과장님이 해보랬다며.”


뭔가 뿌듯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가방에서 실뭉치랑 뜨개질용 바늘을 주섬주섬 꺼낸 비니가 말했다.


“네, 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 민호연 박사님 모자를 떠도 되겠습니까?”


“왜 갑자기? 네 이놈! 엉망진창 솜씨로 만든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 쪽을 주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만들겠습니다.”


짐짓 과장된 말투로 비니를 놀려보았는데, 비니는 어김없이 낚이고 말았다.


“농담이야, 농담. 이젠 좀 덜 속을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장마 지나가면 여름인데 뜨개질한 모자를 선물로 줘?”


“제가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괜찮아. 만들어 봐. 겨울 되면 그 때 쓰면 되지. 썩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만 만들어 주면 써 볼게. ”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박사님 머리와 목, 어깨 사이즈를 좀 재어봐도 되겠습니까?”


“목이랑 어깨도 재나?”


“제가 보는 뜨개질 첫걸음에는 그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 재어봐라.”


비니가 줄자를 들고 호연에게 다가갔다. 호연은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는 상태고, 비니가 허리를 약간 굽혀 호연의 머리 둘레를 쟀다. 이어, 목으로 내려가려다 엄지부위 손바닥으로 호연의 머리를 툭 쳤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신경쓰지마.”


줄자로 목둘레를 재다 보니 허리를 많이 비니는 허리를 많이 숙여야 했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됐다. 호연의 숨결이 비니의 얼굴에 가 닿는다.


“숨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숨을 얕게 쉬시는 이유가 뭡니까?”


“너처럼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면 내 숨결이랑 입냄새에 눈치를 아니 볼 수 없어서 그렇다, 임마.”


“괜찮습니다. 전 맛은 대략 알 수 있어도 냄새는 못 맡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여자에겐 조건반사 같은 거야. 그럼 후~후~ 불까?”


“아닙니다. 그런데, 민박사님 오른쪽 눈 아래 흉터가 있으시군요.”


“응. 어릴 때 내 동생년하고 싸우다가 생겼다. 손톱을 퓨마처럼 사용해서 날리는데 못 피하겠더라고. 흉 심하게 질까봐 걱정 많이했는데, 이젠 잘 보이지도 않아.”


어깨 사이즈를 재느라 호연의 목 아래쪽에 비니의 양 손이 맞닿게 됐고, 그 때 호연이 오른손으로 비니의 볼을 살짝 만졌고, 그 순간 호연의 표정은 미묘했으나 슬픔에 가까워 보였다. 비니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침묵하기로 했다. 팔을 벌려 어깨 사이즈까지 잰 후 비니가 말했다.


“다 됐습니다. 정과장님과 민박사님이 시키시는 일 없을 때마다 열심히 만들어보겠습니다.”


“기대할게. 그런데 내 머리, 목 사이즈는 옆이나 뒤에서 재어도 되는 거 아니었니?”


“사람 몸의 치수를 재어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 몸에 잘못 손을 대었다가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리셋, 심한 경우 파괴까지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기분 나빴다는 건 아냐, 편할 대로 해. 아,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또 2팀에서 날 얼매나 들들 볶을는지.”


“그래도, 민호연 박사님께 소리지르거나 하는 분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민 박사님이 맞지르는 소리의 데시벨이 훨씬...”


“시끄러. 일기예보 보니까 한 이틀 비가 안 올 것 같던데. 어떨랑가.


鳴る神の / 少し響みて / さし曇り / 雨も降らぬか / 君を留めむ......


간다 안녕~”


일본어 같기는 한데 비니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번역이 안 되어 대답을 할 수도 없자, 비니는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민호연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비오는 바닥위를 찰박찰박 걸으며 민호연이 조용히 읇조렸다.


“천둥소리가 / 희미하게 들려오고 / 먹구름이 일어서 / 비라도 오지 않을까 / 그러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텐데....”




***




- 지이잉, 삐빅, 철컥


문 앞에서 안면인식을 하고 문을 열었다. 조용하고 어두컴컴하다. 호연은 사흘만에 집에 왔다. 일이 그만큼 바빴던 것도 아니었는데, 집으로 오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했지만, 집안 청소가 안 되어있고, 뭔가 퀴퀴한 냄새가 나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스스로 납득해버리기로 했다. 맞아주는 사람이나 개나 AI나, 누구 하나 없는 쓸쓸한 집 안으로 들어서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최근 일도 잘 안하고 실험실 매트리스 한 구석에 누워 밤새 잠도 잘 잤는데도 피곤했다. 정성일은 요즘 수원에서 가장 팔자좋은 사람이 민호연일 것이라 단언할 정도였다.


침대위에 던져놓은 스톰폰이 울렸다. 집어들어 받기에 귀찮았던 호연은 손가락을 움직여 스피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호연이니? 오랜만이구나."


"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왠일이세요?"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한번 해봤다. 작년에 통화하고 처음이지?"


"네, 그런 것 같네요."


"잘 지내지? 아직 수원에서 일하니?"


"네. 안 짤리고 잘 다니고 있어요. 어머니도 건강하시죠?"


"그래. 나도 아픈 데 없이 잘 있다."


"............"


"............"


형식적인 인사들을 건네고 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아마도 그녀는 정말 호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게 다일 것이다. 세상을 떠난 아들의 정인(情人)과 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럼요, 어머니."


"그놈 용서해라 이제. 나쁜 놈인 건 알지만 용서해라, 용서해. 호연아."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처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네, 알아요 어머니. 다 용서했어요."


"아니야, 너 용서 안했어. 그놈 용서해줘라. 나도 용서해주고. 난, 난 그놈 죽어갈 때 네가 정말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내 새끼 죽는데 내 새끼가 사랑했던 여자가 위로해주고 안아줬으면 얼마나 위안이 됐겠니. 그 바보같은 놈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어후, 호연아 미안하다. 나도 참 어리석었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도 그런 생각은 다 털어버리세요."


"그래, 호연아. 한번씩 전화 해줄래? 얼굴보러 가끔 와주면 더 좋고. 난, 네가 내 딸이었으면 했다, 정말로. 정환이는 세상에 딸 같은 며느리란 건 있을 수 없다고 비웃었지만 말이다."


"전 사실 정환오빠보다 어머니가 더 좋았어요."


전화기 너머의 여인이 웃었다.


"그래, 나도 그 불효자놈보다 네가 더 좋았다. 네가 믿을진 모르겠지만."


"믿어요, 어머니. 가끔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난 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최근 몇 년간은 힘든 일 뿐이었다.


더없이 좋던 그 사람과의 만남, 갑작스러운 실연,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연에 이어진 방황, 비탄.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에 알게 된 진실. 십대 소년같은 멍청한 결정을 내린 그와 쓸데없이 비밀을 잘 지킨 그의 주변사람들.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그 때문에 호연은 그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기도 전에 애도를 해야 하는 이상한 감정변화를 맞아야만 했다.




***




“예산을 오버플로우 팀이 싹쓸어가면 우리는 뭐, 흙파먹고 삽니까!”


“34%요 34! 싹쓸어간다니오, 과장 좀 작작 하십시오!”


“여기에 프로젝트가 열 개가 넘는데, 거기서 삼분의 일 가지가면 그게 싹쓸이지 뭐가 싹쓸이요!”


회의실 안에서 고성이 터졌다. 회의실 밖 복도에 KnMq 02, 06, 1184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싸우는 건 인간들의 몫이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조용히 서 있던 비니가 자야에게 말했다.


“민호연 박사님이 자꾸 저에게 화를 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친절하시기도 하고, 제 얼굴을 만지시기도 했습니다. 기억에 대해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자야씨는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두 사람, 아니 두 당사자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야씨는 저보다 여기에 오래계셨고 연구소 내의 다른 분들과도 대화를 많이 하시니 혹시 이유를 알까 싶었습니다. 민호연 박사님이 제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셔서, 가끔은 제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06, 비니씨는 이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까?”


“아주 짧은 장면들은 가끔 떠오릅니다만, 거의 사진같은 정도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기밀도 아니니 말씀드리죠. 지금의 06은 06이 아니라 그럴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원래 비니씨는 작년 겨울 특정 실험도중 전뇌가 손상되어 복구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정보도 꽤 알고 있던 상태라 복구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현재의 비니씨는 다른 AI를 덮어씌우듯이 설치한 거죠. 겉모습은 같지만 다른 기체라 보면 되겠습니다. 전 이전의 비니씨를 잘 압니다. 지금과는 말투, 생각, 손짓까지 다 달라요.”


“정과장님과 민박사님은 제게 그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전 기억과 충돌을 일으켜 오류와 함께 기능정지가 세 번 됐습니다. 그래서 오버라이트(Overwrite)라는 말을 생략하고 기억을 되살렸다고 인식하도록 말을 바꿨을 겁니다. 실제로 당신은 그 이후로 오류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전과 같은 기체로 당신은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왜인지 문제가 안 생겼구요.”


“그럼 이전의 그는 인간다웠습니까? 민호연 박사님이 그를 좋아했었나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저처럼 답답하진 않았나요?”


“제가 다 답해드릴 수는 없겠네요. 네, 그는 뛰어나긴 했습니다. 재치도 있는 편이었고요, 우리에게 보통 가장 부족한 부분인 통찰력도 괜찮았습니다.”


“저기, 한가지만 더...”


덜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정성일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다 해드세요 네~. 우리는 장난감들이나 만들다가 퇴직하겠심더! 일 적게하고 좋지 뭐. 가자, 비니. 에이 씨바.”


잠시 자야를 쳐다보던 비니가 정성일을 따라갔다. 걸어가는 둘을 보고 있던 자야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닿을 수 없는 심정, 이룰 수 없는 조건, 엇갈리는 마음, 한 번도 안 써본 글이란 걸 써보고 싶네. 잘만 쓰면 떼돈 벌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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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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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9 8. 세상의 전부 23.04.12 17 0 14쪽
8 7. 악의(惡意) 23.04.10 14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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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 노랑할미새 23.04.05 16 0 13쪽
» 4. 비라도 오지 않을까 23.04.03 17 0 13쪽
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4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41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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