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정원(모티브:언어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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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3.03.31 20:22
최근연재일 :
2023.04.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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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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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랑할미새

DUMMY

- 후두둑, 투둑


비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루어진 물질이 규소화합물이 주 성분인 투명한 고체를 때리고 있다. 비니는 비가 오는 것이 반가웠다. 마음이 급해졌다. 비가 그치기 전에 나가야 한다. 주어진 계산식을 열심히 풀고, 회로도의 게이트 오류가 없는지 최선을 다해 검토했다.


“정성일 과장님, 다 끝났습니다. 더 시키실 일 없으면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시킬 일 있는데?”


“잠시 다녀와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니 임마 요새 비만 오면 오델 그리 싸돌아댕기노? 바람났나? 바람이라도 나등가.”


“아닙니다. 그럼 일 하겠습니다.”


“아이다, 호여이한테 가나?”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성일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비가 오면 지상 정원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글탄 말이재, 참 헛되고 헛되도다. 그래, 갔다온나. 가가 요새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 그라고 술 작작무라 해라. 소장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내까지 작살난데이.”


“감사합니다. 정성일 과장님.”


“감사하기는, 올 때 매점에서 컵라면이랑 볶음김치 두 개씩 사온나.”


두 개를 강조하듯 성일은 브이자를 해 보였다. 퇴근을 하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알겠습니다.”


비니가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비가 내리는 지상 정원에는 이미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 호연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가볍게 숙였다가 맥주캔 입구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얼굴이 시원한 청량감으로 가득 찼다. 이어 캔을 들어 크게 한 번 더 넘긴 뒤,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술을 전혀 모르는 비니가 봐도 시원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맥주에 초콜릿을 드시고 계시네요.”


“아우~ 우리 겸둥이 비니 왔엉? 이 누나 보고 싶어서 왔엉?”


비니가 벌개진 호연의 얼굴을 보고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숙였다. 빈 맥주캔 네 개가 보였다.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 정과장님이 걱정하셨습니다.”


“오, 웬일로 정성일이 내 몸 걱정을 다해준대?”


“소장님에게 걸리면 정과장님까지 작살난다고 걱정하셨습니다.”


“칫, 지 걱정이구만.”


눈을 찡그린 호연이 누구한테 내민건지 잘 구별이 안 가게 혀를 삐죽 내밀었다.


"모자는 다되어 가나?"


"아니오.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두번이나 다시 풀었습니다."


"천천히 해. 시간이 좀먹니? 이 장마철에 털모자 쓸 것도 아니고."


"저, 민호연 박사님. 저는 제가 아닙니까?“


"무슨 말이야, 너는 너지.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박사님은 저를 보면서 이야기하시는데 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다른 이를 보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KnMq-06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호연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슬슬 눈치를 보며 질문한 비니에게,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며 호연이 대답했다.


"누구한테 들었니, 그런 얘기."


"자야씨가 말해줬습니다. 제 기억이 소실된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라고."


"그랬구나, 걔도 참 쓸데없는 소릴."


"타 개체의 기억이 저한테 영향을 미치는 겁니까? 전 그보다 많이 부족합니까? 그럼 원래의 저는 누구입니까?“


"하나씩 물어 하나씩. 다른 기억이 당연히 너한테 영향을 끼치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반응하게 하기도 하고, 인격을 바꿀 수도 있지. 너도 어딘가 약간 비슷해져 가는 것 같기도 해. 그리고, 그 녀석도 부족한 점은 많았어. 넌 이전 비니보다 경험도 적고, 개체차이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오니 차이가 있는 거지. 부족하고 말고 그런 문제랑 좀 달라."


"온전히 저란 존재는 없는 겁니까?"


"너는 너지, 원래 완성되어 나온 AI 패킷, 그러니까 대체적인 성향, 나이, 성별 정도의 데이터 묶음 같은 것만 정해져 있는거야. 나머지는 경험하면서 바뀌어가. 그러니까 니들도 천차만별이지. 자야같은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병기실험팀의 브렛처럼 좀 많이 모자란 놈도 있고, 전산팀의 연희처럼 파리만 봐도 일시적으로 기능정지되는 세상 최고 겁쟁이도 있는 거야. 너도 네 고유의 성격패킷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이전 기억이 약간 덧붙여진 거야. 사람도 비슷해. 무인도에서 평생 혼자 사는 사람 말고 온전히 나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겠니?"


"이름은 왜 그대로 두셨습니까?"


"비니란 이름 싫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호연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싫다는 말이구나."



-또독, 또독


비가 그쳐간다. 삐비비삐빗~ 새소리가 근처에서 울렸다.


“비가 다 그치지도 않았는데 새가 우네. 저게 무슨 새지?”


“제가 새소리를 듣고 판별할 수는 없습니다. 녹음을 해 뒀다가 성문(聲紋)분석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관둬라 관둬. 내가 그걸 그렇게까지 알고싶어 할 거라 생각하니?”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냥 던지는 말이야. 물론 니가 듣고 바로 아, 저건 검은직박까치입니다. 뭐 이러면 좀 폼 나겠지만.”


“그런 새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 동생 컴퓨터의 폴더들 보고 생각난 거 아무거나 말한건데.”




***




실험센터 내 AI 상담실.


"그래, 뭐가 문제인데. 돌려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말해. 그래야 시간이 절약되니까. 이 공간에서 말한 건 다 비밀 보장되니까 아무거나 다 말해도 돼."


KnMq 감정상담자가 직함답지 않은 무감정한 얼굴로 물었다.


"제 명령권자이자 담당자인 민호연 박사님이 절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어떻게."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시고, 저를 만지기도 하십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과 안드로이드가 스킨십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잘 알잖아?"


"입을 맞춘 적도 있습니다.“


이전까지 무표정하던 상담자가 이 말에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응? 그 이상도?“


"아닙니다. 그게 다입니다.“


"심심해서 그랬나보지. 아님 요즘 외로워서 네 기능을 풀로 활용해보려는 거였나. 너 남자구실 할 수도 있잖아. 잘 생기기도 했고."


"그런거라면 명령을 하시면 제가 따랐을 겁니다.”


"그냥 해본 소리야. 누가 실험동 안에서 실험실 안드로이드랑 그 짓을 하겠냐, 굳이. 소문이 사실이었나."


상담자가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부인한 후, 다시 손을 턱에 가져가며 말했다.


"소문은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야. 나도 잘 몰라. 안다고 해도 너한테 말해줄 순 없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뭔데?”


"특정할 만한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말하기는 힘듭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하시거나, 별을 보러 가자고도 하셨고, 신의 울림이 조금 퍼져서 흐리다. 비가 오나? 그대를 잡으면 좋겠다 라고 일본어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정리를 해서 말해. 니가 아무 말이나 막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냐? 너 일어 잘하잖아. 그런데 민호연 박사가 일어로 그런 말을 했다고?"


"저는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시나 노래 같은 거였나 봅니다."


"지금 네 이야기만 듣고는 내가 특별히 뭐라 해줄 말이 없네. KnMq-06, 민호연 박사가 너를 괴롭히거나 공격했나?“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약간, 저는 괴롭습니다."


"뭐가 괴로운 거야?"


"민호연 박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 알아듣고 싶고, 시키시는 걸 잘 하고 싶고, 저를 보고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좀 더 친해져. 자주 보고 대화하면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 니가 병기실의 브렛처럼 똥멍청이만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질거야. 내가 민 박사랑 이야기해볼까?"


"아닙니다. 민호연 박사님은 모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상담관님, 제가 이상한 겁니까?"


"글쎄, 잘 모르겠다. 미친 녀석들은 두세마디만 해봐도 알거든. 넌 그리 특이한 건 아닌것 같다. 오늘 들은 이야기 정도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애착..이라 해야하나, 프렌드쉽이라 해야하나, 암튼 그런 관계 형성에서 흔히들 일어나는 일이라 별 특별한 건 아니야.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




“여기 도대체 왜 일본식 정자 같은 걸 둔 거지. 정원 디자인 한 인간이 일본건축 전공이었나. 아니면 그냥 악취미인가.”


“저는 이 정자가 일본식인지도 몰랐는데요.”


형철의 투덜거림에 호연이 답했다. 형철은 커피를, 호연은 맥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생라면은 곱게 부셔서 옆에 두고 있었다.


“너 그렇게 일과시간에 맥주 마셔도 되냐? 어이구 벌써 세 캔째네.”


“처음엔 숨어서 마셨는데 괜찮던데요? 압수하는 사람도 없고, 정 과장님도 포기했는지 별 말 안하고.”



삐비비빗, 삐삐삐비비.


새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 비가 계속 내리는 편이었다. 하루정도 비가 그쳤다 싶으면 이삼일 다시 내렸다. 그래도 오늘은 간만에 해가 쨍하니 좋았다. 경기도 하늘 답지 않게 미세먼지도 오존농도도 좋은 날이었다.


“저거 무슨 새 소린지 혹시 알아요?”


“내가 그런걸 어케 알아. 핵물리학 모른다고 구박받는것도 모자라, 새새끼 소리까지 알아맞춰야 하나.”


"까칠하기는. 근데 이 놈은 이거 비오는 날 오랬다고 진짜 맑은 날엔 안 오네.”


“뭐 언 놈? 호연이 너 나 말고 다른 놈 만나? 그럼 안돼~”


“개소리 할 거면 가세요 그만.”


“재미없어도 받아주는 척이라도 좀 해라.”


“어느 정도여야 말이죠.”


“비니...놈은 어때? 비슷하게 돌아오긴 했나?”


형철의 질문에 호연은 피식 웃었다.


“아뇨, 완전히 달라요. 원래 비니가 소년 같았다면, 얘는 그냥 아기같아요. 섬세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하고 그냥 칭얼대기만 한달까.”


“흠, 인격을 되살린다는 게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구나.”


“간단할 거라 생각한 적도 없어요.”


“오늘 저녁에 정과장님이 한잔 하자던데, 올거냐?”


심각한 표정과 끼고 있던 팔짱을 동시에 풀며 형철이 호연에게 말했다.


“갑자기 왜요?”


“오늘 우리팀 한도 생일이거든. 같은 곳에 친척이라고 하나 있으니 정과장님이 나라도 챙겨줘야지 하시던데. 너한테는 이야기 안했나 보네.”


“저야 뭐, 요새 술 마다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정대위님 잘 모르는데.”


“괜찮아. 세상 멍청이에다, 여자라면 다 좋아하니까. 몇 명 오지도 않을 자리니까 부담없이 한잔 하자.”


“어디서요?”


“우리팀 연구실에서. 다음주까지 일이 하나도 없거든.”


“그래요, 그럼. 이따 저녁에 봅시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을 등지고, 호연이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민호연 박사님, 슬퍼 보이는 거 맞습니까?”


“어우 깜짝이야, 넌 기척 좀 해라.”


옆에서 툭 튀어나온 자야의 한마디에 형철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왠지 슬퍼 보입니다.”


“슬퍼 보인다기보다 슬픈 게 맞아. 최근에 가까운 사람을 둘이나 잃었으니까.”


“가족을 잃었습니까?”


“아니, 첫 번째는 연인이고, 두 번째는 그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게 도움을 주었던 친구였지. 바로 비니야. 정확히는 이전 비니.”


“비니씨랑 연인 관계....같은 거였나요?”


“아주 친한 친구 관계에 가까웠지. 둘 사이에 어떤 미묘한 감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근데 호연이 스타일상 안드로이드랑 깊게 감정교류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팀장님은 잘 알고 계시네요, 민호연 박사님에 대해서.”


“호연이의 연인이 내 친구였거든. 지금은 죽었지만.”


“아.... 죄송합니다.”


“니가 죄송할 게 뭐가 있냐.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후 자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니, 그러니까 이전 비니씨와 민 박사님은 얼마나 친했을까요? 남녀간의 감정...같은 것이 있었을까요?”


“원래의 비니는 너도 알다시피 섬세했잖아, 문학도 좋아했고. 잘생긴 남자의 외형에다 취향도 호연이랑 잘 맞았으니 확실히 친하긴 해겠지. 그 이상은 글쎄...”


“사람이 안드로이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남녀간의 감정 말입니다.”


“안드로이드와의 관계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나, 헤어지는 커플들 꽤 있는 거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안드로이드와의 문제를 야동 보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런 문제 안 생기겠지. 사랑하는 상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는 하다는 거 아니겠냐? 그것보다 난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가 더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스럽다기 보단 말도 안 되거든. 우리도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걸 잘 모르는데. 안드로이드의 감정이라.. 그것도 에로스와 관련되었다? 그게 되겠냐, 다 유사감정이겠지. 가짜 감정 말이야.”


“아니요, 그렇게 단정짓지 마세요. 그걸 팀장님이 어떻게 확신하세요?”


“아니, 확신은 못하지. 야, 너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냐.”


있는 힘껏 형철을 째려본 자야는 경보를 하듯 빠른 걸음으로 실험동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아니 쟤는 내가 세상 만만한가."


정원에 혼자 남은 형철이 혼자 구시렁댔다. 이름 모를 새는 계속 나무 위에서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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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당신이 머물라 하신다면 (完) 23.04.17 15 0 14쪽
10 9. 돌이킬 수 없는 23.04.14 15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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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23.03.31 21 0 15쪽
3 2.오르페우스 23.03.31 24 0 17쪽
2 1.호연,비니 23.03.31 41 0 14쪽
1 0.천둥소리 23.03.31 80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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